가 족
가 족
- 여강 최재효
시간이 잠든 사각의 검은 돌에
두 세상으로 갈린
사람들 명패가 당당히 걸려 있다
심장이 뛸 때만 가족인 줄 알았다
차가운 돌 위에 새겨진
생사(生死)의 족보를 보고
숨이 멎은 뒤에도
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세상을 반쯤 걸어 온 요즘의 일이다
맨 위에서 오줌을 지리거나
아래에서 받침돌을 잘못 빼면
족속(族屬)은
태양 아래 눈사람이 되기도 하고
밥 한 숟가락이
순식간에 한 사발이 되기도 하는 것이
피를 나눈 인연 덕분 아니겠는가
문명 덕분에 반문명이 되가는
문패 잃은 가족이 늘어만 가고
사철, 낙엽은 아무 곳에서나 뒹군다
나 자신이 비 개인 뒤
종아리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갈잎이라는 생각이 들거나
존재의 이유가 불분명 해질 때면
두 세상이 정겨워 보이는
이곳 만수산(萬壽山) 자락을 찾아
정화수(井華水)를 마신다
좌우 전후
그리고 대각 열로 단정하게 서있는
가문들이 햇살 아래
긴 오수(午睡)에 빠져 적막하다
이름 모를 산새 한 쌍
호수 아래에서 어깨동무가 무척 정겹다
2006. 4. 16. 13:00
[주] 만수산 - 인천시 부평구 부평동에 있는
산으로 10만기 이상의 英靈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