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에 ........ 회사 앞에서 - 아호, 여강(驪江) , 여천(驪川), 여정(驪庭) - 본관 해주(海州) 좌랑공파(佐郞公派) 32대손 / 시조 崔瑥 -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여주읍 점봉리 86번지 출생 [父 - 崔明燮, 母 - 鄭玉女 , 3남4녀중 3남(6번째)]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점봉초등학교 졸업(30회) - 경기도 여주(驪州) 중학교 졸업(26회) - 경기도 여주(驪州) 고등학교 [구, 여흥(驪興)고등학교] 졸업(3회) , 현 여주대학교 부설 - 서울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학교(崇實大學校) 문리과대학 영어영문과 졸업(60회) - 한국문인협회원 - 소설과 현대시로 등단 - 2002 [밝은소리에 장편소설[黃鶴山]연재 완료 - 2002 [文鶴山]에 소설 - '邂逅' 발표 - 2003 [南洞文學]에 중편소설 '6月에 내린 눈' 발표 - 2004 [갯벌문학]에 중편소설 - '黃海의 달빛' 발표 - 2004 [文鶴山]에 중편소설 - '싱가폴슬링(Singapore Sling)' 발표 - 2004. 08 보건복지부 한국한센씨복지회 [복지]호에 창작시 "한여름밤의 꿈" 발표 - 2005. 01 동인지 "나무가 사랑을 두려워 할 때" 발간 - 2005. 02월호 [문예사조] 단편소설 '씨앗' 발표, 3월호에 서평 등재 - 순천신문에 장편소설 "6월에 내린 눈" 연재 완료 - 여주신문에 장편소설 "황해의 달빛" 연재 완료 - 2005. 03 인천/중부/경인/남동/순천일보에 창작詩 "독도 1,2,3"발표 - 중국 "길림민속신문"에 창작시 '고려청자등' 발표 - 중국 흑룡강성 "연해주"신문에 창작시 '혜초의 눈물등' 발표 - 2005. 06 시집 "사랑할 때 사랑해야" 순수출판사, 185쪽, 가격: 7000원 - 2005. 08 중국 조선족 순수문학지 '도라지'에 수필 "달" 발표 - 2005. 10 인천지역 중견문예지 '그대라는 이름'에 중편소설 [아! 천성도] 발표 - 2005. 12 푸른시 동인 시집 "꽃 피는 날" 발간 - 2006. 01 소리동인 시집 "동백, 스스로 꺾다" 발간 - 2007. 05. 25 제4회 한국농촌문학상 소설부문 최우수상 수상 - (한국영농신문 주최) - 2007. 06. 1 창작 소설집 [6월에 내린 눈] 출간 400쪽 도서출판 진원 가격 11,500원 - 2007. 06.15 제2시집 [흔들리는 것은 사랑을 한다] 출간 가격 8,000원 - 2007. 12. "남동문예" 단편소설 '두번 우는 새' 발표 - 2007. 12. "문학산"에 단편소설 '불망녀(不忘女) 발표 - 2007. 12. "소래나루 제3집"에 단편소설 '반도(半島)의 꽃' 발표 - 2008. 03. 인천문단에 단편 "날개" 발표 - 2008. 03. 21 호주일보에 창작시 "어머니와 아들" 게재 - 2008. 06. 학산문학 여름호에 단편 "손톱" 게재 - 2008. 08. 인천 갯벌문학에 단편소설 "e 커플" 게재 - 2008. 11. 인천 文鶴山에 단편소설 "홀로 아리랑" 게재 - 2008. 11. 인천 부평문학에 단편소설 "사모곡" 등재 - 2008. 12 장편소설 "엑스X" 脫稿 - 2008. 12 인천 소래나루 제4집에 단편소설 "편지" 등재 - 2008. 12 푸른시 동인 제12시집 "봉숭아 사랑"에 [死月]외 9편 등재 - 2009. 01. 16일부터 호주일보에 중편소설 "홀로 아리랑" 연재시작 - 2009. 02. 23 [여주시민신문]에 "홀로 아리랑" 연재 시작 - 2009. 03 季刊 [인천문단]에 단편 '제2전선' 게재 - 2009. 03 季刊 [만다라文學] 봄호에 "월하정인" 발표 - 2009. 03 ~ 2011.05 대하소설 "새야 새야 60부작" 인터넷에 연재 중 - 2009. 05. ~ 2010.02 [여주시민신문]에 장편소설 "月下情人" 연재중 - 2009. 05 ~ 2010.05 충북 제천신문에 장편소설 "불망녀不亡女" 연재중 - 2009. 06 季刊 [만다라文學] 여름호에 "달빛 소나타" 발표 - 2009. 08 소설집 "두번 우는 새", 소설집 "달빛 소나타" 동시발간 예정 脫稿 중 - 2009. 08 문학산 제28호에 단편소설 "쩐" 등재 - 2009. 09 .19 [2009년 갯벌작가상] 수상 - 2009. 10. 남동문학에 단편소설 "황새울" 게재 예정 - 2009. 11 소래나루 제5집에 단편소설 "이성지합" 게재 - 2009. 12 제3시집 " 달하 노피곰 도드샤 " 발행 - 2009. 12 제4시집 " 꽃 피고 지는 사연 " 발행 - 2010. 10 남동문학 제6집 "낯익은 풍경으로"에 단편소설 "동행" 게재 - 2010. 12 문학산 제29호에 단편 "가을 영가(靈歌)" 게재 - 2010. 12 소래나루 제6집에 단편소설 "아파트여자" 게재 - 2010. 12 텃밭문학에 시 "석인(石人)외 6편" 게재 - 2010. 12 남동문예에 수필 "이충무공 정경부인에게" 게재 - 2010. 12 인천서구 문예지 청라도에 서정시 "몽리인 외 5편" 게재 - 2010. 12 인천시 남동문화원 발간 문예지에 "반도의 꽃" 특별기고 - 2011. 03 인천시남동구문예진흥기금수혜 - 2011. 10 남동문학 제7집 단편소설 "가리봉동' 게재 - 2011. 11 문학산에 단편소설 "울지않는 새" 게재 - 2011. 12 제5시집 "그대 하늘가" 발간 - 2012. 10 남동문학에 단편소설 "유산" 게재 - 2012. 11 문학산에 단편소설 "페타꽁쁠리" 게재 - 2012. 11 갯벌문학에 창작시 "無情"외 2편 등재 - 2012. 11 鶴山文學 겨울호에 중편소설 "方氏婦人傳" 특별기고 - 2013. 01 호주일보에 중편 "방씨부인전" 연재 - 2015, 05 수필집 " 뒤돌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 "지옥이 있어야 천국이 있다" 발간 - 2016. 11, 남동문예에 중편소설 "남족나라 바다가에" 게재 - 2017. 12 남동문예에 중편소설 "요석궁에 내린 비" 게재 - 2019. 5. 23 : 소설잡 "요석궁에 내린 비" 출간 - 2019. 5. 23 : 소설집 "꽃들의 암투" 출간 - 2021. 9 역사 장편소설 " "설죽화" 출간 - 2022. 9. 역사 장편소설 "강릉대첩" 3권 출간 - 2024.11. 역사 장편소설 "금진"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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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가 망울지고 불놀이의 연기가 잠든 산촌의 마을을 휘어 감는다. 세월은 흘러도 옛 삶의
서정과 그 여울은 변하지 않고 흘러 오늘의 번영 속에 그 옛것을 그립게 한다. 고려의
<가시리>의 별리의 정한은 천년을 흘러 소월의 <진달래꽃>에 서려 있고, 백제의 가요
<서동요>는 다시 드라마 <서동요>로 디지털 첨단 속에 살아가는 우리 가슴에 큰 감명을 주고
있다.
이런 신춘에 최재효 작가의 소설집 <6월에 내린 눈>이 상재되어 잉태와 태동의 봄철에
내일의 희망에 불타면서도 오늘의 현실의 진통 속에 혼미한 대중에게 그 오붓한 공감 속에
잠시 안식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이 소설집은, 자동공정(自動工程)의 한 자리에서 하루에
또 같은 만 2천의 부품을 부치거나 4백 미터가 넘는 고층 빌딩의 철탑에 올라 작업을 하는
근로자나 초를 다투는 경쟁의 전선을 누비는 수출 역군들이 잠시의 휴식에 푹 빠져 볼 수
있는 허구적 서사의 이야기들이 우리를 동케 하고 또 사랑을 기저(基底)로 한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자성의 거울을 바라보게 한다.
그 제재(題材)가 신라에서 백제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그 근저에는 사랑의
절규와 그 한, 그리고 권력의 욕망과 재물에 의한 삶의 음영(陰影)을 그리어 인간의 존재를
해명하고 삶의 지향의 음영을 서사화하여 감동을 준다. 그 치밀한 고증(考證)을 기저로 하여
격동의 역사의 삶의 명암, 한민족의 삶의 서정과 상흔(傷痕)을 흥미롭게 서사화하여 독자를
놀라게 하고 있다. 막힘없고 서사의 시험적 일탈이나 인위적 작용을 하지 않고 흐르는 유수와
같이 진행하는 서사 속에 한 번 손에 들면 놓을 수 없게 흐르는 스토리의 흥미로움에 담뿍
취하게 된다. 이 한 권의 소설집이 비인간화의 산업사회에 던지는 회오(悔悟)와 자아 성찰에
의한 정체성을 정립하는 징표가 되고 오늘 자아를 잃고 기술과 자본의 노예가 되어 가는 현실에
던지는 청량제와 같이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값진 계기를 던져 주고 있다.
사실 현대사회는 산업사회요, 산업사회는 그 자본의 축적과 존재적 삶의 상승을 가져오면서도
여러 가지 병폐를 수반하고 있다. 이미 선진의 성숙사회에서는 극복되어지고 있는 산업사회의
병폐가 한국에서는 극복해야 할 최대의 과제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도시화 현상과 뷰로크리시
현상, 기대 수준의 향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울산광역시로 표상되듯이 대단위 산업시설의
확장으로 도시로 모여들어 이농(離農)에 의한 농촌의 공동화현상이 극심해지고 도시의 범죄
노사분규 등 사회문제가 복잡해지며, 모든 것이 규격화, 표준화, 조직화, 자동화, 정치적 폭력 등
메카니즘에 인간이 소외되며 정보화되는 뷰로크라시 현상이 극에 달하며, 교육과 레저 등에
대한 기대 수준의 향상으로 상대적 빈곤에 의한 갈등과 불안 쟁투 그리고 배금주의 노예 현상이
보기 흉하게 전개되고 있다. GDP가 세계 11번째의 경제국이면서도 메카니즘과 물신주의의
노예가 되어 옛것을 잊고 이기주의와 정치적 권위에 빠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조화로운
선진 된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의 위기는 1차대전이 현대 초에 그 징후가 진단된 뒤에 물신주의가 팽배하여
인류 문화의 위기를 가져오고, 비인간화 현상이 심화되어 있다. 그것은 과학의 발달과 자동화에
의한 인간 소외와 정보와 산업의 발달로 인간이 분편화(分片化)되는 데서 비롯된다. 일찍이
쉬펜글라가 ?서양의 몰락?에서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앨빈 토플러의 「제3물결」,「부의 미래」, 라셀 자코비의
「유토피아 종말」들이 예언하고 진단한 대로 서구문화는 물질문화의 발달로 그 지평선을
잃고 있다.
오르테 가제트가 예술의 비인간화를 예언하고, 경재학자 칼 부레이트가 현대사회를
불확실한 시대라고 말하며, 프롬은 소유냐 삶이냐를 설파하고, 다니엘 벨이 미국의 물질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도 바로 현대의 위기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연구들이다.
그리하여 롤라 메이는 그의 ?인간의 자아의 탐구?에서 현대인의 불안은 가치관의 상실,
자아의 상실, 대화 언어의 상실, 고향의 상실, 비극의 의미의 상실, 피라미드적인 욕구에서
온다고 말하고 막스 위버가 지식사회의 형성을 주장하고 짐멜이나 우나무노가 새로운
역동의 삶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현대사회의 위기를 예견하여 그 구제를
예언한 말로 21세기를 맞는 오늘에도 새로운 시사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한민족의 삶의 여울 속에 산재하는 그 상흔(傷痕)을 조명하고 사랑과
죽음을 바탕으로 그 치유를 모색하여 한민족의 서정을 바탕으로 인간성을 회복하고 그
새로운 삶의 지평을 흥미롭고 유연하게 서사화하고 있는데 최재효 소설집 <6월에 내린 눈>이
주목되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실 흥미 있고 독자들에 회자되는 소설은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비롯하여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김홍신의 <인간시장>, 핵전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인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대중 소설과 복제 기술의 혁명을 그린 오인문의
<알골>, 정보사회의 횡포를 그린 김동민의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줄기세포의 유정공학에
의한 새로운 치열한 쟁투와 사랑의 성취를 다룬 손정모의 <황색 갈매기 날다>, 귀여니의
<늑대의 유혹> 등 독서계를 풍미한 작품은 적지 않다.
생테쥬베리의 <어린왕자>, 조지 오웰의 <1894년>,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와 상파울로를
중심으로 가난한 현실 속에 꿈을 키우는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등
독자에게 회자(膾炙)되는 소설도 그 흥미와 상상적 체험에서 오는 문학의 치유적 전파에
의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나간 민족의 삶의 서정과 그 상흔을 리얼하게 서사화하여 흑백영화를
보듯이 정겹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절실한 때 최재효 소설집 <6월에 내린 눈>은 우리에게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에의 발전?변이로 경제발전의 기적을 이루어 물질만능의 늪에 서
있는 우리의 일어버린 옛을 되돌아보고 그 상흔을 어루만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며,
회고에 의해 정체성을 재음미하여 오늘의 우리를 성찰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의 진가(眞價)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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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필력이 뛰어나 주목되고 있는 최재효 작가는 <판도라>(文藝思潮2004)로 등단 후에
시 분야(純粹文學 2004)로 등단하여 소설 <해후>, <황해의 달빛>, <바로도>를 계속 발표
하고 <씨앗>(文藝思潮 2005)을 발표하여 그 역동적인 창작을 해 온 작가이다. 그 뒤 시집
<사랑할 때 사랑해야>를 상재하고, 인천의 중견 문예지에 <아! 천성도>, <천년 비>,
<불꽃> 등을 발표하여 그 문재(文才)를 발휘해 오다가 이번에 소설집 <6월에 내린 눈>을
상재하여 작단(作壇)의 한 횃불을 들고 독자에게 새로운 감동의 장을 열고 있다.
이 소설집 <6월에 내린 눈>은 사랑과 배신 권력과 재력의 뒤엉킴 속에 전개되는 <천년 비>,
<아, 천성도>, <달하 노피곰 도드샤>, <6월에 내린 눈> 등 신라, 백제, 고구려, 조선 등
옛 선대의 삶과 그 욕망, 그리고 <씨>와 <목련꽃 필 때면>, <뽕>, <불꽃>, <씨앗> 등 현대의
치열한 삶 속의 사랑과 한(恨) 그리고 갈등을 서사화한 중.단편 9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그 제재의 고금을 통하여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하여 이 작품들은 사랑과 한
갈등과 성취의 처절한 삶의 현장을 허구적 서사로 현재화 시켜 박진감을 주고 있다.
그것은 그 주제의 보편성과 서사구조의 다양성, 그리고 현장의 사실성이 리얼리티를
획득한 개성적인 표현에서 오는 문학성이 주는 공감대이다. 먼저 맞불 구조에 의한
사랑과 한(恨)의 갈등과 화해를 유려하게 묘파(描破)하고 있는데 끌리게 된다.
인생은 누구나 갈등의 연속 속에 살게 마련이다. 겉으로는 평온하고 정숙하게 보여도
실은 동경과 현실의 틈 사이에서 갈등과 절망 한 그리고 화해 속에서 살아간다. 괴테의
말대로 인생은 행복의 추구자(追求者)인데 그 행복이 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갑의 행복이 반듯이 을의 행복이 아니고 을의 행복이 반듯이 병의 행복이 아닌데 문제가
더 심각하게 된다. 스탕달은 ‘사랑은 4 가지 다른 형태가 있다. 정열연애, 취미 연애,
육체 연애, 허영연애가 있다’고 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연애는 여자의 전 생애를
포옹한다. 그것은 여자의 감옥이며 또 천국이기도하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랑과 미움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갈등 속에서 요동친다.
임신을 갈망하면서 이루지 못하여 방황하면서 애견(愛犬)의 씨 뿌리는 사랑놀이에
놀라는 불임여성의 갈망을 그린 <씨>를 비롯하여, 외도하는 남편에 남편의 친구와의
외도로 맞불 쳐서 남편의 동료와 정염의 불꽃을 태우는 <불꽃>, 해주에 대한 흠모와
짝사랑이 살 나누기로 얽혀 갈등과 비극에 이르는 <뽕>, 누이의 비극적 삶에 투영된
한을 그린 <목련꽃 필 때면>, 씨앗이 다른 이복형제의 갈등과 그 절규를 그린 <씨앗>이
사랑과 욕망의 갈등 속에 벌어지는 인간의 비극적 현실을 절묘하게 교치(巧緻)하는 서사
구조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 역행과 복합적 서사 구조로 소설을 읽는 긴장과 초조의
스토리 라인을 전개하여 우리를 압도한다. 사랑의 욕구와 불임, 사랑의 유희적 갈망과
불륜, 씨앗으로 번지는 파국적 현실, 불행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이 언제나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본질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남자들의 본연의 임무는 씨를 잘 뿌리고 잘 가꾸는 일이 아닌가? 나는 상상 임신이 아닌 진짜 임신을
해 보고 싶었다. 물론 다른 씨앗이 뿌려져 잉태가 되었다면, 나는 다른 여 염집 아낙네처럼 얼마든지
수태가 가능한 것을 증명한 셈이고, 즉시 내 주요 부분에 마취와 동시에 날카로운 메스에 의해 억울한
생명이 태어나 보지도 못하는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그 흔한 씨들을 함부로 나에게 뿌려서는 안 된다고
늘 자신을 경계해 오던 나는 오늘도 잠시의 방황 속에서 남자들의 원초적 본성을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남편과의 취미 활동으로 불임으로 초탈하려고 노력하면서 옛 애인 H의 아쉬움과 채팅에서
만난 흑기사와의 몰래 데이트를 하는 <씨>나, 남편 윤경찬의 외도를 맞서 치과의사 박영식과의
욕정을 불태우고 또 한 쪽에서는 그 남편인 윤경찬과 사랑의 불꽃을 태우는 <불꽃>의 김혜영과
정수희, 그 가정과 인품에 끌려 기정을 유혹하여 살을 나누고, 자기를 흠모하는 진호에 유린된
해주를 둘러싼 <뽕>의 인간의 고뇌, 이복형제의 갈등 속에 피붙이 의미를 도출한 <씨앗>의
나희옥의 비극이 우리에게 새로운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불임(不姙)을 극복하려고 애쓰면서도
채팅으로 만난 남자와 간접 성적 쾌감에 취하는 것이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정을 나누는 장면을
목도하고도, 남편이 다른 여자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도 안으로 삼키고 그 자리에서 육욕을
나누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것은‘아직도 애인이 없니’라고 하는 그런 현실의 수용인가. 그저 흘러가는 인생에 대한 흠모
해온 여자에 대한 사랑의 상처로 입산하고 살상(殺傷)으로 피해 다니다가 고향에 돌아와 그
상처를 물리려는 비극의 치유를 어떻게 가늠해야 하는가. 이복(異腹)과 피붙이의 가부장에서 빚는
비극을 어떻게 수용하고 그 지평은 어디에 있는가. 작가는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유려하게
형상화해 보이면서 우리에게 치열한 삶의 현장을 감동적으로 부각하여 감상의 묘미를 주면서
겨자씨 같은 존재의 본질적 테마를 같이 풀어야 할 문학적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다음은 민족의 뿌리인 옛 선인의 삶의 통해 역사적 공간 속의 삶의 애환을 현시(顯示)하여
항구적인 삶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다.
세월은 흐르고 문화도 변하지만 인간의 삶의 본질인 큰 덕목은 그대로 이어 내려온다. 뼈대
지붕의 한옥이 시멘트를 비벼 만든 양옥이나 아파트로 변하고, 간편한 가구로 생활이 편리
해졌다고 해서 사랑이나 죽음, 권력이나 물욕, 질투와 권모술수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사모
관대를 하고 원삼에 족두리를 쓰고 신부 집에서 채알을 치고 마을 사람들과 인근 친척들의
축하를 받으며 하는 혼인이나 그 비싼 드레스를 입고 하얀 연미복을 입고 잘 꾸며지고 꽃으로
장식하고 영상으로 방영까지 하는 식장에서 하는 결혼을 봐도 사랑의 가정을 꾸미고 부모를
모시고 아들 딸과 같이 행복하게 살려는 사랑의 소망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옛을 보면 오늘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하지 않는가.
백제와의 욕망을 사랑의 정절로 승화하는 도미와 비랑의 <아, 천성도>와 각간 김위홍과
조카딸인 만과의 사랑을 축으로 하여 향가 <삼대목>을 편찬한 위홍 등 궁중 비화(秘話)를
그린 <천년 비>, 그리고 조선조(朝鮮朝) 포악한 정갑영의 횡포를 기생으로 위장하여 복수
하는 <6월에 내린 눈>, 고구려로 돌아 간 태자에 대한 백제의 여인상을 그린
<달하 노피곰 도드샤> 등이 옛을 돌이켜 사랑과 한(恨 )그리고 그 절규를 그리고 있다.
왕의 욕심을 피해 정조를 지키며 왕에게 눈알을 빼앗겨 앞 못 보는 남편을 쫓아 복락(福樂)을
누린다는 도미설화를 서사화한 <아, 천성도>의 왕의 욕망과 비랑의 순애적 정열이나, 향가
<삼대목>을 대구화상과 같이 편찬한 각간 김위홍(金魏弘)과 조카딸 김만(金曼)의 비련의
사랑을 그 아들 양패(良貝), 임종으로 혈육의 진골을 그린 <천년 비>의 궁중의 모사, 배반,
갈등을 점철하면서 권력과 사랑의 화신인 된 위홍과 김만의 비화와, 병자호란의 강산을 유린
하는 비극 속에 적장 이춘년에 끌려 가 모진 고초를 당하고 하인 덕칠의 도움으로 만고풍산
(萬古風霜)을 겪으면서 남편 정진경을 찾아왔으나 시어머니 김씨의 가문을 위해 잡혀가 몸을
버린 년을 받아드릴 수 없다는 관습에 벽에 걸려 추랑(秋浪)이란 기생으로 변신하여 그 혹한
시아버지를 청산(靑酸) 가루 탄 술로 독살하여 복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끓는 박씨녀, 그
리고 적국인 고구려 태자 흥안(興安)을 숨겨주고 태수의 수청을 거절고, 왕위에 오른 흥안의
광대로 위장한 밀사에 의해 태수의 목이 날아가고, 재회하는 한주의 정절(貞節)이 선인들의
격동의 삶에서 전개되는 옛에서 추출한 인생의 파노라마이다.
비랑이나 김만, 박씨녀, 한주로 서사화된 여인상은 지아비를 섬겨 사랑과 후사(後嗣)를
도모하고 정절을 생명으로 하는 전통적인 여인상이다. 또한 백제의 절세미인인 비랑을 탐하는
백제의 왕이나 각간 김위홍, 그리고 이춘년이나 정대감, 백제의 태수는 권력을 빙자하여 성욕을
희롱하는 고관대작이나 사대부 등의 횡포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정말 인간은 영웅호걸은
주색을 좋아하여 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의 횡포와 미색을 취하고 여인들은 정절을 생명으로
지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본질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끝으로 복합 구조와 실사적인 검증으로
긴장과 흥미를 더하고, 종말 강조로 화해와 성취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소설은 허구적이 서사물이요, 사실적인 설화는 아니다. 상상에 의한 화소(話素)의 삽입이나
새로운 정보의 교치(巧緻)에 의한 리얼리티(Reality)로 형성된 삶의 장을 창조한다. 이 리얼
리티는 어디까지나 사실의 검증을 바탕으로 형성되며 소설이 허구적이면서 사실적이란 의미가
여기에 있다. <아, 천성도>, <달하 노피곰 도드샤>, <천년 비>, <6월에 내린 눈>은 사실적
(史實的) 제재이면서 당시 사회현상이나 관직 풍속 등을 검증하여 현실감을 더하게 하고,
그 인물에 맞는 인명(人名)으로 사실감을 더하게 한다. 또한 <씨>나 <목련꽃 필 때면>
<아, 천성도> <6월에 내린 눈> 과 같이 극적 종말 강조로 테마를 부각하고, <불꽃>과 같이
화해적 결말로 안이한 진행을 보여준다. <뽕>의 해주, 기정, 진호 사내의 인물의 전형을
숨기고 암시해 주는 돋보이는 서사 구조에 살아 있는 현실 속으로 몰입하게 된다.
3
소설가는 몰리악의 말대로 제2창조자다. 삼라만상과 인간을 창조한 신의 다음 열(列)에
서는 것이 소설가다. 사실(史實)이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이 소설
이요, 소설가는 그 새 우주를 창조하는 자이다. 사랑과 갈등 그 유희나 흥미로 기우는 것은
소설이 상업화의 물건이 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이 운동이나 게임과 같이 오락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일회용 컵과 같은 정보사회의 뒷전으로 밀리는 때 본격적인 인생의 존재의 해명과
그날의 지평을 가로막는 부조리를 고발하고 치유하는 지표와 수평선을 가시화하는 창작이
절실해지고 있다. 사랑과 죽음의 인생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한 시대의 증인이 되고 내일의
지표가 되는 창조의 결실을 가져 올 때이다.
최재효의 소설집 <6월에 내린 눈>은 이런 소설의 한 결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예와 이제의
삶을 성찰하여 복합적이고 결말 강조의 서사 기법으로 사랑과 질투, 권력의 횡포와 인고와
정절의 한을 형상화하고, <黃鳥歌>나 <井邑詞>, 황진이의 한시(漢詩)들을 삽입하여 소설
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채팅과 사랑, 불임과 이복의 갈등, 권력과 사랑, 변란의 희생과
그 생존의 의미, 그 속에서의 한 여인의 가부장(家父長) 제도에 대한 희생과 복수, 유희적
성(性) 등 고금의 제재를 화해와 성취의 결말 구조로 서사화하고 있다. 작가적 시야를 넓고
깊게 하여 리얼(Real)을 획득한 서사 구조로 새로운 전형이 되는 대작(大作)을 발표하여 작단의
또 하나의 독창적인 소설 공간을 형성하기를 기대한다.
아래는 2007. 6. 8일 동국대학교 윤재웅 교수로 부터 받은
제 시집 [ 흔들리는 것은 사랑을 한다 - 2007.6.20일 경 간행]의
서평입니다.
변전(變轉)의 시학
윤재웅 [ 문학평론가. 동국대학교 교수]
1. 조감, 시인의 영원한 꿈
허균은 최초의 한글소설로 평가되는 『홍길동전』의 저자이다. 그는 정치적 격변기의 희생자였지만
문학사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소설가인 동시에 시인이었고 문장가였다. 하지만 그가 조선왕조
최고의 시비평가였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허균의 시비평서인 「학산초담」은 비록
우리의 고전 시비평서지만, 현대의 시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부분들이 꽤 많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조감(藻鑑)의 경우다. 이와 관련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연산군 재위 시에 어떤 선비가 꿈속에서 뛰어난 시구를 보게 된다. 물론 신인(神人)이 나타나 보여준 것이다.
신인이 그에게 이르기를, 이 시구가 과거 시험 문제에 나올 것이며 그대는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대로 되었는데 문제는 응시자의 시를 읽는 대독관(對讀官)에 있었다. 두 대독관 중의 한 사람은
이 시가 필시 사람이 표현하기 힘든 귀신이 쓴 시라고 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내기를 하고 작자를 불러 물어본즉 과연 귀신이 불러준 시구임을 알게 되었다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귀신의 시구를 알아맞힌 그 사람을 주위에서 칭송해서 이르기를 ‘조감’이라 했다.
참고삼아 말하면 급제자는 보락(保樂) 김안로(金安老)였고, 조감이라 불린 사람은 당시의 예조좌랑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다. 그는 대제학이자 같은 대독관이었던 문경공(文敬公) 김감(金堪)보다 시를 더 잘 알아보았던
것이다.
조감은 이처럼 시를 잘 알아보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조감은 지위와 신분과 나이와 관계가 없다. 오늘에 적용
해서 말하면 예술원회원도, 문학교수도, 비평가도 시인들 자신도 반드시 조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감은 뜻밖에
시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 직업이 아닌 마음으로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올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조감이야말로 시인의 영원한 꿈이 아닐까? 시인은 꿈속에 본 빛나는 구절, 혼몽한 가운데 어쩌다가 찾아오는
주술 같은 구절이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의 경험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단 한 줄을 위해서라면 귀신에겐들 영혼을 팔지 못할까? 시의 귀신이 들린 경험을 해보거나 이해하는
자야말로 일급 비평가가 아니라 그 자신 일급시인인 것이다.
허균의 같은 책에 시의 귀신 들린 이야기가 몇 군데 더 있다. 일러 시마(詩魔)라 하는데, 너무 뛰어난 시를 쓰다가
시마가 떠나고 나면 추매(椎埋. 완전히 없어져 버림)가 되는 사례가 보인다. 최고의 시인이 일자무식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마는 영감의 급진적인 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마가 어찌 옛날에만 있겠는가. 릴케,
서정주, 조지훈, 안타깝게 타계한 박정만도 시마를 경험하거나 시마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최재효의
시를 읽다가 어떤 행에서 문득 시마를 보게 되니 눈길이 자꾸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중년이 넘도록 서로가 밤마다 방황하는 것과
내일 죽어도 술을 끊지 못하는 것과
알면서 도둑에게 곡간 문을 열어주는 것과
밤늦도록 시마(詩魔)에 시달려야 하는 것과
귀가 엷어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것과
벽창우(碧昌牛)같아 공짜 술도 못 얻어먹는 것과
모기 한 마리 때문에 잠을 잃어야 하는 것과
한번 스친 연(緣)으로 평생 눈이 짓물러야 하는 것과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과
더 살고 싶어도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가을이 되어도 빈손이 되어야 하는 것과
내가 나를 부인하고 싶어도
차마 그럴 수 없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영(靈)이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며
갈 때 까지도
하늘의 뜻을 정녕 모를 수도 있기 때문 일 것이며 -「하늘의 진의(眞意)」 부분
열거법의 지루한 진행 가운데 유독 돋보이는 게 시마(詩魔)다. 예술가의 운명을 암시하는 일종의 상징인데
‘벽창우(碧昌牛)’와 호응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벽창우 같은 중년의 화자의 내면 투쟁기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주요한 핵심 이미지 - 시마, 벽창우 - 들이 다른 이미지들과 조화하지 못하고 유독 두드러져 보이는 게
아쉽다. 오케스트라에서 제1바이올린이나 제2바이올린이 너무 강하게 튀는 것과 같다. 주요 이미지들을 중심
으로 간결하게 압축해서 군더더기를 제거할 수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이런 진단은 사실 이번 시집 전반에 걸쳐서 제기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포한을 풀어내거나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발상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게 심미적 완성도보다 우선하는 건 아니다. 시는 절제를 통해 자기 현시 욕구와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언어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경지와 ‘드러냄의 무의식’을 혼동하지
않는 게 좋다. 모름지기 시 쓰는 마음은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워야 된다는 뜻이다.
이런 마음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가장 고전적인 답안의 사례는 한유(韓愈 : 768~824. 중국 당나라의 시인.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의 「맹동야를 보내며(送孟東野序)」가 적격이다. “음악은 속에 쌓였다가 밖으로 새어나온
것이다(樂也者, 鬱乎中)”라든가, 같은 글 속의 “부득이한 일이 있은 연후에 말로 표현한다(有不得已而後言)”는
표현 행위의 전제 조건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온축하라는 뜻이다. 안으로 쌓고 쌓아 곱씹어서 재워두었다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때, 울혈이 터지는 것처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음악이고 시라는 뜻이다.
이를 두고 간절함이라 말할 수 있겠다. 즉, 시는 간절함을 전하는 것이라는 창작이론이 자연스럽게 탄생하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시마는 이런 경지에 이르고 난 뒤에야 제대로 찾아오는 것이다. 간절한 경험의 쌓임이
시마를 부르는 것이요, 시마를 가지고 놀아본 시인만이 비로소 조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꿈에서 서정으로
밤늦도록 시마에 시달리는 시인의 자기고백 양식이 잘 다듬어지는 경우는 ‘세계를 자아화’하는 정통 서정 양식
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적 구조의 전통적 관습에 익숙해지고자 하는 노력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모범적이다.
그러나 양식상의 모범과 창의적 세계인식의 모범성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언어를 유려하게 다듬는 데 주력하는
다음 시편들을 보자.
이른 봄, 꿈결에
누이 같은 목련 향기가 종종
별빛에 실려 들어와
휑한 가슴에 그리움 한 움큼 묻고 가거나
오뉴월 새벽달 졸음에 겨워할 때
소쩍새 울음소리 타고
잠결에 임이 다녀 갈 때 말고는
문이 닫힌 적이 없습니다 -「발자국 소리」 부분
목련은 밤새 울더니
이른 아침 베옷으로 갈아입고
하늘간 누이 곁에 소복이 쌓였네
산마다 타오르는
붉은 그리움은
눈물을 닦지 못하는 사람들
하얗게 타버린 서러움을 아는지
침묵의 아우성이네 -「할미꽃」 부분
부재, 소멸, 그리움 등과 같은 전통 서정시의 전형적인 주제를 정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흔하고 보편적이어서
독창성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이다. ‘휑한 가슴에 그리움 한 움큼’, ‘붉은 그리움’, ‘하얗게 타버린 서러움’ 등과
같은 서정시의 끌리세(cliche)에 대한 반성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듯하다. 리듬을 고려하고, 행간을 가르며,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는 솜씨는 장인이 도자기를 빚어내는 것처럼 매끄럽다. 같은 서정시라 할지라도, 개인적
상징으로 승화하고 있는 ‘달’ 연작 시편들에서 오히려 시인 특유의 목소리가 드러난다.
늦가을 가슴 지닌 사람이거나
이별의 강을 자주 건너 본 사람이거나
홀로 별과 벗해
밤 지새우는 사람이거나
소쩍새를 친구로 둔 사람이거나
장미보다 진달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미소가 풍족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늘 산 너머 그대를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백발(白髮)에도 순애보를 지닌 사람이거나
죽은 후에도 마음변치 않을 사람이거나
다시 태어나도 그를 찾을 사람이거나
첫 언약을 반드시 지킬 줄 아는 사람이거나
떠난 임을 끝까지 원망하지 않을 사람에게
살며시 다가와 눈 맞추고
같이 울어주는 동반자, 저 슬픈 시(詩) -「초승달(2)」 전문
하늘의 초승달은 지상세계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에 동화되는 객관적 상관물로 자리 잡는다. 초승달의 성격을
결정하는 다양한 의미론적 자질들의 미적 효율성과 상호 유기적 연관성이 여전히 문제이긴 하지만, 정감적
이고 정의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시인의 감정이 잘 이입되어 있다. 이런 존재론적 각성이 보다 구체적인 경험의
양식으로 발전하고 있는 경우는 다음의 시이다.
삼백예순 하늘만 바라보다
열두 달 먼 산만 바라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눈이 멀었고
아무것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화향기 가득한 뜰에
한 사내가 낮부터 취해
허공을 향해 거칠게 항의하면서
웃기도 하고
눈물을 훔치며 때 늦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산 너머로 시집간 큰누이처럼
하얗게 단장한 낮달이 조용히 내려와
신발이 반쯤 헤진 사내를 다독입니다 -「낮달에 묻다」 부분
‘아름다운 사내’, ‘눈 먼 사내’, ‘못 듣는 사내’, ‘낮부터 취한 사내’, ‘때 늦은 노래를 부르는 사내’로 표상되는
묘사의 대상은 실존주의적 맥락에서 보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조리한 운명 속에 던져진 존재’의
극적인 상징으로서 손색이 없다. 어쩌면 한국적 페시미즘의 한 모습을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것은 ‘무모한 결단’과 ‘때늦은 후회’를 반복해야만 하는 저 인간 본연의 오만에 대한 계고일 터이다.
그 계고의 가장 따뜻한 포오즈는 바로 낮달의 촉감이다. 시집간 큰누이의 이미지를 가진 낮달은 종교적 신성의
의장을 차려입고 방황하는 인간의 본성을 어루만지고 감싸서 달래는 역할을 한다. “하얗게 단장한 낮달이
조용히 내려와 / 신발이 반쯤 헤진 사내를 다독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낮달은 구원의 표상이다. 미적 긴장이
풀어져서 자기 넋두리로 떨어지는 후반부의 대목은 아쉽다.
3. 서정에서 풍자로
최재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으로서의 꿈과 서정시의 양식적 특성을 잘 보여줌과 동시에 역사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정신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선보이고 있다. 이는 관심사의 지리멸렬한 미학적
분열이라기보다 세상을 향해 역동적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시인의 태도로 보는 게 좋을 듯하다. 그 공격적 비판
정신의 한 정점에는 풍자의 꽃이 서늘하고 통렬하게 피어 있다.
오늘 내 몸에 맞는 투피스 한 벌을 사고
아내에게 조상(弔喪)에 어울릴
검정색 양복을 선물했다
여성의류 판매점에는 어찌 된 일인지
온통 무채색의 옷이나
군복뿐이다
아내와 딸아이들은 한술 더 떠
칼과 방패를 준비했고
천리마(天里馬)까지 요구하며
나는 12개월 할부로 카드를 긁어야 했다
아, 신라가 그립다
뼈가 뼈를 이끌고 다스리던 그때
감히 직유가 발붙이지 못했던 그 시절
당당했던 천년 금관이 보고 싶다 ―「은유법(隱喩法)」 부분
전도된 젠더(gender)의 가치에 대한 비판인데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같은 역사적
상상력을 다룬다 해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민족적 분노가 표출되는 「눈물의 시」에 비해 오히려 문학적
형상력이 돋보이고 있다. 남녀의 입지와 권위가 뒤바뀐 현대사회를 풍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돌발적 상상력
으로 인해서 한층 긴장과 탄력이 붙는다. 직유와 은유의 대조, 현대와 신라의 시공간 대비가 그것이다.
직유와 은유는 이 맥락에서 무얼 상징하는가. 급격하게 성장하여 노골적으로 권한을 요구하는 여성성은 직유
이며, 왜소하고 쇠락하여 제 구실을 못하며 당당했던 신라시대로 회귀하고픈 남성성은 은유의 표상인 듯하다.
직유가 존재 그 자체 혹은 냉정한 현실의 세계라면, 은유는 사물과 사물을 변화시키는 힘이며, 그런 점에서 상상력
이며, 시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은근한 느낌이나 기미(機微)인 것이다. 시인은 현대사회에 이런 것이 결핍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상가 분양 현장에서 ‘진흙 밭의 개싸움’을 보는 시선(「니전 泥田」), 이웃과 가족들에 대한 종말론적 착시(「인형」)
, 화폐사회에 대한 비관적 조롱(「만 원」) 등도 예사롭지 않지만 매미를 통해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가장
통렬한 경우이다.
개 한 마리, 고기 한 덩이
개 두 마리, 고기 한 덩이
개떼, 고기 한 덩이
금수(錦繡)강산은 금수(禽獸)강산
욕망으로 흐르는 기이한 엑소더스(Exodus)
네가 죽어도 나만 살겠고
네가 살아도 나만 살겠고
누가 죽던 나만 살겠고……
동물농장이 되어 버린 예토(穢土) -「 니전(泥田)」 부분
친구들은 서둘러 혈관을 제거하여
전선(電線)을 깔면서 사이보그가 되었고
눈치 빠른 이웃들은
벌써 성(姓)을 바꾸었고
그들이 버린 족보를 오랫동안 함께해 온
애완용 동물들이 어렵게 이어가고 있다
오늘 아침 우연히
거울을 보고 있는 아내의 옆구리에서
밤새도록 컴퓨터와 씨름한 딸 아이 등에서
은하계 어느 혹성에서 수입 된
강력한 건전지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인형」 부분
백분이면 군자(君子)가 되고
만분이면 성인(聖人)의 반열에 들고
백만 분이면 도적(盜賊)이 되기도 하고
억만 분이면 공적(公敵)이 되기도 하며
한 분도 안계시면 거지도 되고
신흥교주(敎主)도 되는 -「만 원」 부분
쓰발 쓰발 쓰발
시팔 시팔 시팔
賣淫 賣淫 賣淫 賣淫 賣淫 賣愛 ~~
낮보다 긴 밤이 올 때 까지
노류장화가 되어 웃음도 팔고
노래도 팔고
가지고 있는 거 다 팔아버려야지
많이많이 팔아서
저승 노잣돈으로 써야지
맴-맴-맴-맴-매앰 ~~
태산처럼 적선(積善)해서
다음 세(世)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야지
맴맴 맴맴 맴맴 맴맴 매애 ~~~ -「임을 위한 진혼곡」 부분
매미 울음소리를 가지고 유희하는 말놀이가 특이하다. 그러나 야유와 조롱과 풍자의 칼날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펀(pun) 이 아니다. 노류장화(路柳墻花. 아무나 쉽게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이나 울타리에
핀 꽃) 같은 창녀들의 삶에 대한 비판적 증언이다. 이들 저주받은 행위의 본질은 자본주의의 근간 가운데
하나인 매매행위다.
매미 목소리를 가진 화자는 ‘웃음’, ‘노래’, ‘가지고 있는 거 다’, ‘많이많이’ 팔아서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모습
으로, 인간다운 모습으로 태어나고자 한다. 이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장엄미사와
같은 비장미가 길게 여운을 남기고 있다. 하여, 우리는 본다. 이 시대의 시인은 무엇을 하는가. 꿈꾸고,
아름다움과 안타까움을 읊는 것만은 아니라, 이렇게 두 눈 부릅뜨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서늘하게 볼 줄 안다.
4. 풍자에서 변전(變轉)으로
풍자의 정신은 보다 큰 인식의 차원으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이 이 시집의 빛나는 미덕이다. 보다 큰
인식의 차원이란 우리가 ‘변전의 시학’이라 부르고자 하는 세계관이다. 최재효 시인은 절대주의, 존재론, 직선적
시간관 등을 거부하고 상대주의, 과정론, 순환적 시간관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다. 그 핵심에 불교의 인연설과
윤회론이 자리하고 있으며 수사학적으로는 은유법이 선호되고 있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모습이란 없다는 뜻에서 불가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가르친다.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연기에 의해서 상호 의존 형태로 변화하면서 존재하고, 또한 윤회하기 때문에 개별 실체에 대한 현세적
의미의 분별은 큰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일찍이 서정주의 시구에서 본 것처럼, “내가 돌이 되면 / 돌은
연꽃이 되고 / 연꽃은 호수가 되고” 하는 경지가 그것이다. ‘나는 곧 돌’이라는 인식은 서로 다른 두 사물 사이에
연관성을 만들어주는 과정이다. ‘다른 것이 같다’는 형식논리상의 모순이 시에서는 허용된다. 이것이 곧 메타포이다.
은유야말로 함축과 함께 시의 주요한 본질을 이루는 특성이다.
시적 은유는 그 영향력이 매우 커서 윤회전생, 무애자재, 시방삼세, 시시처처 등의 담론들을 다 거느릴 수 있다.
나는 너이고, 나는 너이기 때문에 모든 곳에 존재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므로 인과와 분별이 의미 없게도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적 인식이 가능해진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낳고
아들은 어머니를 낳고
딸은 아버지를 낳고 -「빵」 부분
그대는 나의 어머니였고
조물주였고
눈앞에 선 또 다른 나 자신이며
짐승이며
귀신이며
가능하다면 천사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대가 이미 그대 아니 듯
나 역시도 그러하지요
해는 나를 낳고
달은 그대를 먹이고
자주는 아니지만 허공에 함께 하고…… -「You & I」 부분
시적 상상이나 인식이 여기에 이르면, 플라톤이 필시 시인을 일러 공화국에서 추방해야 할 사람이라고 목청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죄목을 상세하게 열거할 터이다. 시인은 황당한 거짓으로 진리를 왜곡하며 혹세무민한다는
명목이 개중에 제일 중대할 것이다. 그렇다. 시인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그렇지 않은가. 마치
정신병자나 광인이 아닌가. 다음을 보라.
어제 나를 만든 달
오늘 나를 웃기는 달
내일 나를 죽일 달
언젠가 또 나를 吐할 달
그리고 먼 먼 훗날 나를 내칠 달
나는, 뱀이고
독수리이고
사람이고
심해의 물고기이고
천인사(天人師)이고
내가 아니고
천년 후에도 저 달은 싱싱할 테고
업(業)을 태산처럼 엮은 나는 달이 만삭일 때
금강산 비로봉에 똬리를 틀고 앉아
세 가닥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달을 깨다」 부분
호방하고 쾌활한 기상(奇想 conceit)의 나팔소리가 지상의 계곡에 울려 퍼질 때, “제비는 아내가 되고 /
기러기는 남편이 되”(「인연(5)」)는 환상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러니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망상가나
마법사, 아니면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연인에게 홀린 사람일 터이다. 왜 있지 않은가. 셰익스피어도
그의 유쾌한 희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는가.
광인과 연인과 시인은 머릿속이 상상에 가득 차 있소.
광대한 지옥도 좁을 만큼 악마를 보는 자가 있는데,
이것이 곧 광인이오.
역시 광기에 걸려 있는 연인에게는
깜둥이 계집년의 얼굴이 절세미인같이 보이게 마련이오.
시인의 눈 또한 영감에 번뜩이고
일견하여 천상에서 대지를 내려다보며
지상에서 천상을 쳐다보오.
이렇게 해서 시인의 상상력이 미지의 사물에 일정한 형태를 주자
그의 펜은 그걸 구체화시키며
공허한 환상에다 장소와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오.
강력한 상상력에는 그러한 마력이 있는 법이라
무슨 기쁨을 느꼈다 하면
상상력은 그 기쁨을 구체화시킬 실체를 생각해 내오.
실재하지 않는 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시인의 임무를 부여하는 셰익스피어가 강조하는 것은 결국 꿈과
상상의 힘이다. 세계는 시인들의 꿈과 상상에 의해서 더 많이 태어나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그는 믿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태어나는가.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진술처럼, 시인은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을 향해
감각과 인지의 촉수를 뻗어 어루만지는 사람이다.
우스갯소리로,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은 해삼을 처음 먹어본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무엇이던지
처음 하는 어려움을 칭송하자는 말일 것이다. 좋은 시인이 꼭 그렇다. 새로운 메타포를 통하여 처음 생각
하고, 처음 말하고, 처음 쓰는 사람이라면 그는 단연 최고의 시인이 될 자질을 가졌다. 인간의 언어는 필연코
새로운 사람에 의해서 깨지게 되어 있다. 누가 새로운 사람인가?
최재효 시인을 비롯한 우리 시인들이 아니겠는가. 보통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는, 미지(未知)에 의미를
부여하는, 직유보다는 은유를 좋아하며 늘 몽상하고 꿈꾸는, 오오! 그러다가 시마에게 시달리기도 하는…….
제3시집
- 跋文 -
달을 사랑하는 사람
김윤식 / 시인․인천광역시문인협회장
여강 최재효 시인의 원고(原稿)를 받고는 놀랐다. 우선 그가 소설(小說)을 쓰는 작가로 알고
있었는데 소설집이 아닌 시집(詩集)을 낸다는 사실과, 또 그 시집에 실릴 시들이 온통 달을
찬미(讚美)하고 달을 노래한 것들 뿐인 까닭이었다. 달 투성이!
물론 소설가라고 해서 시를 못 쓸 이유가 없을 터이고, 전편(全篇)이 오로지 달을 주제로,
소재로, 제목들마다 달이라 이름 붙였다고 해서 이상해 할 하등의 까닭이 없으니, 기실 나의
놀람은 지나치게 상식(常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았다는 자성(自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요즘에 누가 이렇게 자상하게, 애타게, 순진하게, 너그럽게, 다정하게, 사랑
스럽게 달을 쳐다본단 말인가. 누가 달을 껴안고, 달에 기대고, 달을 베고, 달을 업고, 누가
달에게 이토록 곡진(曲盡)한 마음을 준단 말인가.
달이 임이라니? 이 21세기에, 달에 로켓이나 쏘아 올려 물을 찾네, 무얼 찾네, 하는 마당에,
이다지도 지극하게, 가슴 아프게, 뼈마디에 사무치도록 달을 임으로 알아 몸살 앓는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또 한 명 이백(李白)이 세상에
났다고 해야 할까.
이백이 정신의 자유를 찾아 세속을 넘어 꿈과 정열로 주유(周遊)했다면,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면, 그리고 마침내 술에 취해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면, 여강 최재효 시인의 가슴에 품은 저 달에 대한 로맨티시즘은 그 정체가 어떤
것일까.
그는 비교적 큰 체수에 평소 말수가 적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얼핏 알 수 없는 한없이
과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옛날 김영태(金榮泰) 시인이 시에 쓴 그 ‘무광택(無光澤)’에 진배
없는 그가 오늘 한꺼번에 저 밝은 달에, 초승달에, 그믐달에 풍덩 빠져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 땅에서 384,000km 거리에 있는 임, 나는 부모를 정점(頂點)으로 돌고, 임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며, 지구는 해를 공전하고, 태양은 은하의 블랙홀을 중심으로 돌고 돈다. 그야
말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다. 태양의 강렬한 빛 때문에, 혹은 지구의
그림자에 묻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로 우리는 곁에 있는 임을 소홀히 하고 있다.
달은 사바(裟婆)의 이 어리석은 밥 벌레에게 희망이며, 청운의 꿈이며, 찬가이며, 미래이며,
삶의 존재 이유이며, 행복이다. 동시에 임은 또한 슬픔이며, 연가(戀歌)이며, 비가(悲歌)이며,
이별이며, 독주(毒酒)이며, 영결(永訣)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가 자서(自序)에 적어 놓은 달에 빠져든 이유이다. 그렇다면 달에서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깨달을 수 있고, 또 거기서 희망과 꿈과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그의 공력(功力)
이 부럽다.
“눈물이며, 비가이며, 독주이며, 영결”이라는 그의 관조가 놀랍다. 그저 평범하게 달을 사랑
하면 이룰 수 있는, 그러나 무릇 범인(凡人)에게는 이루어지지 않는 그만의 터득(攄得)이
여기서 한없이 빛난다. 그래서 그의 달에는 감월(感月), 우월(雨月), 정월(情月), 탄월(呑月),
영월(詠月), 환월(換月), 흡월(吸月)이 있는가 하면, 가월(嘉月), 소월(蕭月), 설월(雪月), 수월
(水月)에다가 독월(毒月) 난월(亂月)까지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월(影月), 심월(尋月)의 풍류, 아취(雅趣)를 빼놓을 수 없다. 더불어
여월(侶月), 시월(詩月), 백월(白月)을 읊은 지경에 이르러서는 그의 달사랑, 달 흠모가 실로
깊어 읽는 자의 마음에 달을 전염시킨다.
그리고도 모자라 추월(秋月), 취월(醉月), 운월(雲月)을 읊고, 원월(怨月), 사월(死月), 허월
(虛月), 누월(淚月)의 허망함에 눈물 젖는다. 풍월(風月), 몽월(夢月), 불월(佛月)을 노래하면서
한편, 사월(斜月), 파월(破月), 망월(忘月), 과월(過月)을 통해 일상의 부침을 토로한다. 그러나
끝내는 효월(曉月), 주월(酒月), 만월(万月), 선월(仙月)의 높은 정서로 끝맺으니 그는 진실로
달로써 삶을 살고 생을 좇는 시인이 아니랴. 진정 달을 사랑하는 사람, 여강 최재효 시인!
“더 늦기 전에 임을 청하여 수작(酬酌)도 좋고 대작(對酌)도 좋으니 그럴듯한 구실을 핑계로
자주 독대(獨對)를 하려한다. 혹시 천국행 차표를 줄지도 모르니까.”
분명 이백(李白)이 다시 살아와도 그와는 같지 않을진저! 그를 일러 월선(月仙)이라 해야 옳을까.
무릇 인류(人類)는 그의 시들을 낡은 정조(情操)로 치부하여 진부하다고 할지 모른다. 필경
그런 험은 지니고 있으되, 그의 시들은 이미 우리가 구식으로 생각하고, 낡은 것으로 계산해
버리는 것들을 다시 진정한 가슴으로 껴안으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의 과묵(寡黙)이 이런 시를
낳으니 누가 그것을 막으랴. 무엇을 더 덧붙이랴.
작가에서 시인으로, 결코 허튼 방향 전환이 아니되게 오로지 더욱 정진, 정진이 있을 뿐이다.
그러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이 저녁 그의 달을 마음껏 더듬었으니 나는 달나라에도 다녀온 듯
하다.
[ 詩集 평설 ]
예토穢土를 보듬는 월광곡月光曲, 그 돈오頓悟의 미학美學
- 여강 최재효 3시집 상재를 맞이하며 -
漢比 한기홍 (갯벌문학 주간)
1. 프롤로그 - 달에 다가가기
신종플루라고 명명된 이종독감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혹자는 말세의 도래로 이야기
하면서 종말론적인 비관으로 인류에게 닥친 대재앙의 서막으로 설파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연의 순기가 빚어내는 섭리로서 한 시대를 휘도는 기상현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아직도 끽연가로서 기관지가 약해 환절기만 되면 통과의례처럼 한바탕 감기를 겪어야
하는 필자로서는 연일 방송에서 떠드는 신종플루의 확산을 가볍게 흘려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필자의 직장과 거주지 동네에서도 환자가 발생되고 있어 위기감이랄
까, 막연한 불안감이 심중에 자라나고 있다. 한 모금 담배연기가 허공에 흩어져 늦가을
깊은 하늘에 찍혀있는 낮달로 향하고 있다. 이 땅 모든 생령들과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오묘하고 거룩한 순환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2009년도 10월 말의 변화 속에서 여강 최재효 시인(작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지난 반년 동안 병중病中이었다. 위장수술로 장기간 병치레 하던 그를 최근에 본 것은
지난 9월에 있었던 갯벌문학 창간20돌 기념식장에서였다. 동문학회의 주간으로 있는 필자
의 추천과 심사위원회의 인준을 거쳐 여강 최재효 시인(작가)는 ‘2009년도 갯벌작가’로
선정되어 행사장의 연단에서 작가패를 수여받게 되었기 때문에 병중인 몸으로 참석
했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준수했던 그의 육신은 흡사 젓가락과 같이 메말라 있었고, 오랜 병상
생활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는데 형형한 눈빛만이 여강 시인(작가)임을 증명해 주었다. 그때
그의 눈빛을 보고 같은 길을 걷는 문학인으로서 안심할 수 있었는데, 그의 지독하고 치열한
창작정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통화에서 작가는 “곧 셋째 딸을 출가
시키려는데, 필자의 주례사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시 99편을 보냈으니 평설評說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셋째 딸의 출가는 세 번째 시집출간을 뜻함이었다. 그가 여타 평론가들을 거론하지 않고
필자에게 청탁하는 내심을 익히 알면서도, 필자의 최근 여러 가지 정황상 사양하였으나 재차
부탁하는 터라 할 수없이 수긍하고 말았다. 여강 시인(작가)와 필자의 문학 인연상 한마디로
사양할 계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2. 달이 되고자 날고 있는 21세기 *이카루스 여강
99편의 시들은 모두가 달을 주제로 쓴 두 음절 제목의 작품들이다. 해박한 한학漢學실력과
풍부한 전고典故의 활용은 이미 문단에서 정평이 나있는 여강 시인(작가)이다. 보내온 시집
원고 ‘달하 노피곰 도드샤’를 우선 일별하려고 주욱 시편들을 넘기다가 지난 4월에 병실에서 쓴
그의 비교적 최근 작 ‘병월病月’에 눈이 멎었다.
病月
누가 임에게 달이라는
단순하고 외로운 것을 명명命名했을까요
아메리카 인디언?
그리스인 조르바?
크로마뇽인?
제3의 인물?
용서하소서
자주 임의 존호尊號를 남발하였습니다
겨우 산마루를 넘어 내달리던 중에
돌부리에 걸렸습니다
소년의 괘씸한 언동言動에 그만
마음이 많이 상하셨던 게지요
속죄하는 심정으로
합장合掌한 채 여명黎明에 젖습니다
다시주신 기회에
생명을 담보로 하겠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지금처럼 천둥을 치시고
섬광을 보이시어
찰나刹那가 영원같게 해주신다면
지상의 어떤 생령은
고루 선하게 될 것으로 믿사옵니다
- 창작일 : 2009.4.29. 03:30
인천 길병원 7015호실 병상에서
- 시 ‘병월’ 전문
*이카루스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 크레타섬의 미궁迷宮을 설계한 다이달로스의 아들로서, 커다란
날개를 달고서 태양을 향해 비행했다가 날개가 태양에 녹아 추락하여 죽음. 언제나 인간욕망의 대명사로서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진취적 기상의 전범典範. 혹자들은 몽상가라고도 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병마와 싸우면서, 자의든 타의든 달을 척박한 예토穢土에 있게 만든
자신의 심상에 대한 처절한 절규로 받아들여져 시 ‘병월’을 여러 번 읽어 내렸다. 소설가로서
시인으로서 그간 폭넓은 문학세계를 선보여 오던 여강 시인(작가)가 이렇게 달에 천착하고
문학적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는데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용서하소서/ 자주 임의 존호尊號를 남발하였습니다/ 겨우 산마루를 넘어 내달리던
중에/돌부리에 걸렸습니다/ 는~ 그동안 솟아오르는 필력으로 본인의 내면에 녹아있는 달에
대한 환몽과 탄생의 모티브에 도취되었던 본인에 대한 성찰이다. 밤에 현신하지만 음양이원
陰陽二元의 으뜸으로서 만물을 전제하여 이면裏面의 신화와 전설과 상징의 창조로 모든
역사의 씨앗을 잉태하는 달. 그러나 역설적으로는 달밤이기에 은일隱逸함이 넘쳐 도피와
은둔, 속리俗離의 애상을 품을 수밖에 없는 달.
이 거룩한 달님을 그동안 거침없는 표현과 인식으로 일필휘지해온 여강 시인(작가)으로
서는 자신에게 닥친 병고病苦야말로 달님의 준엄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며, 그간 방만
하고 거침없었던 바에 대한 자각과 부끄러움의 함축이랄 수 있다. 즉 위절제 수술이라는
생애 최대의 병고에 시달리면서 자신이 그려온 표상인 달에 대한 경외 속에서, 혹여 달에
대한 ‘남발창작’이 미완의 지식으로 표출되어 기고만장으로 점철되지는 않았을까 깊게 회의
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달, 병고를 내려 주의를 환기 시켜주는 달, 보이지 않는
주재자의 거대한 힘으로 섭리를 이끌어 가는 달~ 여강 시인(작가)는 신병을 얻어 고생하면서
그동안 내면으로만 삼켜왔던 송구함을 비로소 토로하면서 달에게 고해성사를 바치고
있는 것이다.
2연 4~5행의 ‘소년의 괘씸한 언동言動에 그만/ 마음이 많이 상하셨던 게지요’ 는 이를 잘
토로하고 있는 부분이다. 시인(작가)의 이런 내밀한 심적 성찰과 ‘뒤 돌아보기’는 영원히
만월을 향해 날기를 염원하는 21세기 이카루스로서의 가녀린 희원이랄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치열한 성찰의 귀감이요, 문사로서의 양심적 책무의 이행이라 할만하다.
달에서 태어나 달에서 한 세상 살다가 달에 뼈를 묻어달라고 유언장을 지니고 다니는
나에게 知人들은 失笑를 금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달을 어미로 두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이 아직도 달이라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生靈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허파와 심장 그리고 뇌수에 임의 발자국이 나이테로 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임을 한낱
閑談의 소재로 삼고 있는 무례한 妄靈 또한 얼마나 많은가.
- 시집 서문 중에서
여강 시인(작가)에게 달의 존재의미는 무엇일까? 위 서문에 술회한 그의 달에 대한 소회를
보면, 그 숭배의 정도를 잘 알 수 있다. 그에게 달은 그의 고고성과 삶의 부침을 있게 한 유일
신인 것이다. 그의 심금에 단단히 매어져 있는 생명의 밧줄은 둥그런 월령月靈에 동여져
있다. 그의 달은 근원적으로 동양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달은 길을 가다가 단애를
잘못 디뎌서 추락하다가 붙잡은 나뭇가지 너머 얼핏 보인 동혈洞穴 가에서, 빙긋 웃는 한 떨기
무명화無名花의 웃음을 보고 ‘제법무상諸法無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탄식하는 불가적佛家的
윤회의 달이요, 월광곡이 뿜어 나오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려지는 두레박줄에 흐르는 삼강
오륜三綱五倫의 예지가 배어있는 유가儒家의 달이기도 하다.
또한 한줄기 연기처럼 홀연히 피어올랐다 사라진 영화榮華나, 슬픔에 차 꺼이꺼이 울다가
돌 틈에서 맛본 감로수에 화색이 돌 듯 변화무쌍한 풍진을 휘적휘적 장삼자락에 날리며 걸어
가는 도가道家의 달이기도 하다. 중세 구라파 어스름한 달밤, 어느 강가의 고성 일곽에서 퍼져
오는 드라큐라 백작의 발걸음 소리도 아니요, 구름 낀 달밤 도나우 강변 어느 갈대숲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프랑켄슈타인의 눈알에 투영된 달도 아니다. 그의 달은 우주를 비추면서도
동방 시방정토十方淨土 위에서 교교히 빛나는 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과 서를 아우르는 한님뿐인 달. 그 달 속에 깃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이성
이나 괴테의 꿈들 또한 원융무애圓融無碍로서 시인의 정수리에 서방정토의 달빛으로 녹아
들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천국과 누항을 모두 품고 있는 만화경萬華鏡 사바세계의 징소리로서
존재하고 있는 시인의 달. 생멸의 부질없음을 설파하면서도 존재의 이유에 치열해지는 모순의
달덩이야말로 우리 즘생들의 게시판이요, 희망의 징표로서 천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시 ‘월월月月’에서 토로하고 있는 시사점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月月
불혹을 넘어서
내가 달이었음을 깨달았지
많은 벗들은
아직도 자신을 별(星)로 알고 있지만
오늘처럼 국향菊香에
눈이 시린 날
자네와 은밀히 시선을 맞추고
화주火酒로 이 밤을 불사르고 싶다네
지상의 닭들은 이제
새벽이 되어도 울지 않고
배부른 이웃들은
천국행 차표를 얻으려 혈안이며
공맹孔孟의 제자들마저
푼돈과 절개節槪를 맞바꿨다네
더 말하면 무엇하겠나
우리 술이나 치세
연꽃 띄워, 저승에 들어야 만날
그 애를 그리며 나 한잔
황국黃菊을 띄워 자네 한잔
요즘 이승에서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귀신이 분명 할 걸세
- 시 ‘월월’ 전문
3. 시적역설詩的逆說이 흐르는 여주강驪州江 소나타
시인(작가)의 아호인 여강驪江은 그의 고향인 경기도 여주를 흐르는 여주강에서 따왔다고
한다. 평원과 산록이 어우러진 여주 땅을 굽이굽이 흐르는 여주강 이야말로 그에게는 당나라
이백李白이 뛰어 든 채석강이요, 싯다르타가 설법했던 항하恒河(갠지스강)로 각인되어 있다.
유년시절 여주강에서 멱을 감으며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준 달떡(月餠)을 먹으며 호연지기를
키운 여강 시인(작가)에게 여주강은 그 무엇보다도 지고한 이상향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중년기 삶의 이정표로서 그의 그리움 향로에 연기를 피워 올리는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여강 시인(작가)의 심연에 깊게 찍힌 화인火印이기도 하다.
아래 시 ‘죽월’은 천만 개의 얼굴을 가진 달의 변용을 치열하게 천착하여 변용變容의 미학이
깃든 중층 열거법으로 창작하고 있는 수작이다.
竹月
울산 반구대 고래가 삼켰던 임
여강驪江 잉어가 뛰어올라 환호하던 임
잉카 제사장이 소녀의 가슴 절개하고
심장 꺼내들 던 밤, 가슴 치던 임
대취한 이태백 유혹하던 임
임진년, 동래성이 함락될 때 모르쇠 했던 임
어머니 자궁에 나를 심어놓았던 임
하늘과 지옥에도 동시에 현신하는 임
내 몸이 산화散華하는 날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잔잔하실 임
그런 임이 허공에서
초저녁부터 불콰한 얼굴로 나타나시어
파안대소하시는 것이다
어제의 일도 까맣게 잊은 자손들은
내일도 변함없이 임께서 인자할 거라고 믿으며
순진한 위안을 구걸하고 있다
귀신이 필요한 데 귀신으로
천사가 요구되는 곳에 천사로
창녀를 찾는 곳에 창녀로
죽음을 동경하는 곳에는 차사差使로
임께서는 그렇게 달빛 그림자로
자손들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나투시는 것이다
해서, 당신께서는
얼굴이 가장 큰 날 변함없는 뚝심을 보이려
천년을 갈구하는 똑똑한 자손들 등뼈에
갑골문자를 새겨 넣기 위해
분노를 억누르며 염불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창작일 : 2008. 02. 21.
戊子年 대보름 인천 소래에서
- 시 ‘죽월’ 전문
*시적역설詩的逆說(*Poetic Paradox)~ 구조적 의미가 반영된 역설. 시인은 표면적 의미와 정반대되는
의미를 작품에 내면화 시키고, 이 모순관계에서 야기되는 의미론적 긴장 속에서 詩的 가치를 창조한다. 대표
적인 시로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들 수 있는데, ‘님을 고이 보내드리지만’ 사실은 원망과 슬픔 속에서
다시 돌아오기를 갈구하는 내면의 희원을 그린 시로 분석한다.
여강 시인(작가)에게 달님은 초월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지척에서 비통과 연민을 하소연하는
푸념상대로서의 친근한 동무이기도 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을 연상케 하는 시
‘우월雨月’은 시인의 달님에 대한 존숭과 응석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독자의
눈에 시인의 시적역설을 통해 바라 본 달님을 상징적으로 구현 시키고 있는 울림이 큰 작품
이다. 시적역설詩的逆說(PoeticParadox) 은 구조적 의미가 반영된 역설로서, 시인은 표면적 의미
와 정반대되는 의미를 작품에 내면화 시키고, 이 모순관계에서 야기되는 의미론적 긴장 속에서
시적詩的 가치를 창조하는 기법이다. 이번에 여강 시인(작가)이 상재하는 달님 시리즈 연작시
들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그의 독특한 창조력이다.
雨月
하늘의 통곡
그임 이별의 고통
어떤 사내, 임 그리워 사무친 눈물
낮부터 휑하게 뚫린 잿빛 입에서
쉴 새 없이 슬픈 곡조가 들리고
맑은 시어詩語가 떨어지고
감로수 흘러내리고
천지간에 임 잃은 한 사내
취선醉仙되어 무정세월 낚고
바람 불면 풍월風月 되시는 임
구름 가득하면 운월雲月되시는 임
천해天海에 슬픔일면 우월雨月되시는 내임
언제 임이 떠나신 적 있었던 지요
아, 임께선
언제 어디서나 임이셨고
어린 영혼은 눈이 멀었던 게 분명했습니다
고통은 오히려 환희로 다가옵니다
- 시 ‘우월’ 전문
3연을 보면 ‘바람 불면 풍월風月 되시는 임/ 구름 가득하면 운월雲月되시는 임/ 천해天海에
슬픔일면 우월雨月되시는 내임/ 언제 임이 떠나신 적 있었던 지요’ 라고 피력하고 있다. 만해
선생 역시 불가의 승려로서 몰락한 조국에 대한 애모를 토로하면서도 시편에 적시하는 절대
자로서의 ‘님’의 후광後光이야말로 몽매에도 못 잊는 피안의 세계, 정토淨土를 갈망하는 화엄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지향이었다고 필자는 분석해 보는 것이다.
4연의 ‘아, 임께선/ 언제 어디서나 임이셨고/ 어린 영혼은 눈이 멀었던 게 분명했습니다/
고통은 오히려 환희로 다가옵니다’ 의 귀결은 그래서 만해 선생과 여강 시인(작가)의 심중
지향점이 일치하는 대목이랄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만해 선생의 조국애에 대한 만고명편
萬古名篇이 어찌 여강 시인(작가)의 개인사적 대망待望과 일치할 수 있겠냐는 비평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가 감득感得하는 두 사람의 님을 그리는 고통과 일념의 순도는 동일시된다고 진단
하는 것이다.
21세기 첨단문명의 전개 하에서 고풍古風의 발현은 진부하고 식상할 수밖에 없다고 치부
하는 작금의 세태다. 그러나 어찌 그러한가? 언제나 진보를 꽃피우고 살찌웠던 하드웨어는 훈고
訓詁의 바탕 속에서 비롯되었다. 여강 시인(작가)은 ‘달하 노피곰 도다샤’에서 치열한 훈고의 강물
위에 따듯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을 띄워놓았다. 그가 해체하려는 것은 달빛은 단지
밤에만 비춘다고 투덜대는 항간의 오해와 편견, 무지들에 대한 통렬한 펀치가격의 작업이다.
여강 시인(작가)의 달빛은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선발대가 아니라, 태양 옆 대낮 정오의 찬란함
속에서도, 폭풍우 치는 장마전선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의 정수리에 교교히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달님을 사랑하고 책망하며, 끌어안는 의미는 무얼까. 아마도 그는 이미 달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토의 황금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요’의 토로가 그러하다. 이처럼 물아일체
物我一體의 세계관에서 배출하는 그의 정신세계는 깊고 맑기만 하다.
蕭月
억 만년을 살아오신 임이나
겨우 반백년도 못 넘긴 중생이나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 일엽편주라는 사실이
참으로 원통하면서도 또한 다행입니다
예토穢土의 황금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요
어떤 중생에게는 오로지
두 임만 곁에 계시면 그 뿐이랍니다
- 시 ‘소월’ 중 4~5연
4. 에필로그 - 달빛 푸르러 오늘인 것을
여강 최재효 시인(작가). 그의 문명文名은 이미 문단의 주목을 넉넉히 받을 만큼 낮 설지 않다.
강직함 속에 유연함을 감추고 있고, 뼈를 깎는 창작혼을 가지고 있기에 현금 문단의 흔치않은
재목이라고 감히 피력한다. 이번에 상재하는 ‘달하 노피곰 도드샤’는 여강 시인(작가)으로 하여금
‘달님시인’이라는 별호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느 누가 이처럼 달에 대하여 깊이 천착
하고 망배望拜 하였던가.
미사여구가 아닌, 심원한 그리움의 표상으로서의 달을 심안에서 사출射出해낸 작가의
비범한 창작혼과 열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후생을 점쳐 본다면 이백李白처럼
달을 쫒다가 강에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경기도 여주의 여강驪江에서
승천하는 한 마리의 용이 달빛 속으로 비상하여 달과 함께 한 몸이 될 때, 마침내 그의 수행기
修行記는 완성 될 듯 하다. 그의 달 노래는 교교한 달빛아래 펼쳐지는 삼라만상의 데쟈뷰
(Deja-vu) 파노라마다. 고해 속의 열락은 억만년 반복되는 영상映像이기 때문이다.
여강 시인(작가)의 깊고 푸른 창작혼이 더욱 절차탁마되어 천강千江의 달빛처럼 밝게 빛나
기를 염원한다. 그에게서는 지난 고래古來역사의 향기로운 기운이 면면히 이어지고, 고락에
젖은 돈오頓悟의 냄새가 얼핏얼핏 맡아지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열반의 세계에 필자 또한
‘특별승차권’을 배당 받았으면 좋겠다. 마무리하면서 필자로서 격려를 위한 소회를 보인다면,
여강 시인(작가)의 달빛이 승乘하기만하여 99개의 달이 99칸의 고대광실에 갇히는 우를
범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 보는 푸르른 달빛은 만 년 전과 같은 섭리의 빛인
것이다.
아직도 여강 시인(작가)에게는 니르바나(Nirvana)에 이르는 준령이 남아 있다. 현미경에
망원경을 장착하여 우주적 세계관을 볼 수 있는 춘추필법이야말로 피안의 보리수요, 천강
千江을 휘돌게 하는 여울목의 감람나무인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장차 여강 시인(작가)의
성취가 각고刻苦의 점수漸修에서 발원한 돈오頓悟의 미학으로서 부지불식간에 다가오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2009 . 12 . 桃源齋에서 한비]
제4시집 - "꽃 피고 지는 사연"
[ 작가의 변辯 ]
시(詩)는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란, 시적재능(詩的才能)이
있거나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곤 합니다. 보통의 관점에서
보면 시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나타낸 글 가운데 산문(散文-줄글)이 아닌 운문(韻文-마디
글)의 형태로 된 글이면 모두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식의 글을 쓰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졸시(拙作)를 쓰느냐 아니면 명작(名作)
을 쓰느냐의 차이는 있겠지요. 저 또한 졸시(拙詩)를 생산하는 입장에서 드릴 말씀은 못되
지만 말입니다.
시작(詩作)을 한다는 것은 보다 명확히 말한다면 ‘무엇에 관해 시작을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시라는
형태로 글을 쓴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때 시라는 형태로 글을 쓴다는 것은 소설, 희곡, 수필
등 다른 언어예술의 장르와 다른 시적언술(詩的言術)을 선택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시적언술의 특성을 살리는 창조적 표현에 임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언술형식으로 시는 창작되어
집니다. 그래서 시를 창작하는 사람을 저는 창조자(創造者 )라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우주
삼라만상의 움직임과 모습을 범인(凡人)이 아닌 시인(詩人)의 냉철한 시선으로 포착하여,
그것들의 성질을 그려낼 수 있는, 즉 천기(天機)를 누설할 수 있는 시각과 혜안을 지닌 자를
시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남들이 찾아냈거나 혹은 남들이 먹다 버린 사과 조각을
발견하고 희희낙락한다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는 것도 역시 시를 쓰는 사람들의
몫이 될 수 있겠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창조적 행위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자기가 본 것, 생각한 것들을
언어로 현실화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즉시 언어로 표현해 작품화 시켜놓지 않으면
곧 소멸하고 말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영감(靈感)을 방치하지 않고 언어화 한다는 것은
일정한 대상이나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나 태도를 나름으로 표명하는 행위이며, 우리는
그와 같은 언어행위를 창작이라고 합니다.
결국 시란 궁극적으로 어떤 세계에 관한 시인의 의사표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즉 한 사람이 연출해낸 시적화자(詩的話者)나 시적청자(詩的聽者)의
Feel을 지면(紙面)이나 화면(畵面)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
습니다. 시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는 분명 다릅니다. 시 속의 나는 어디까지나 창조적 공간
속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시속의 나는 객관화 된 나이며, 어떤 국면속의 형식화 된 인간으로서의 나입니다.
프리드먼(M, Friedman)의 ‘서정시(敍情詩)의 나는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
에서 지향적 운동을 하는 나이다’라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시속의 나는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는 일상적 자아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정서를 드러내는
유형적.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잘 알면서 아직도 시속에 일상적 자아,
유형화되지 않은 나를 끌어 들이고 있는 점이 자탄(自嘆)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한 언어의 화자(話者)가 어떤 특별한 의미나 효과를 얻기 위하여 일상적인 또는 보편적인
그 언어의 의미와 그 단어의 연결체로부터 벗어나는 표현 형태를 비유(比喩) Figure라고 에이
브럼즈(M.H Abrams)는 말했습니다. 이렇듯 시는 특수한 시적 언어를 사용하여 다양한 비유의
기법(技法)으로 일상적인 언술을 시적언술로 만드는 고난도의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를 창작하는 시인들 뿐만 아니라 시를 사랑하는 독자 역시 다반사(茶飯事)의 밋밋한 맛
보다 은밀하며 가슴 뛰는 함축적인 시어(詩語)에 더 몰입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면 하는 마음
입니다.
개인적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죠. 즉, 연시(戀詩)를 쓴 사람에 의해 사랑의 부재가 어떤 새로운 의미 또는 어떤 깨달음을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시에 드러나 있지 않다면 그것은 상식이거나 개인적 감정이겠지요.
저도 수많은 연시를 쓰고 있습니다만, 행여 상식 수준의 하찮은 그것을 짓고 있을지 모를 일
입니다. 그래서 늘 가슴이 답답하고 체증(滯症)에 시달리고 있나 봅니다. 물론 시인이 쓴 글이
모두 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일정 반열(班列)에 올랐던 시인도 노안(老眼)이 되거나 혜안
(慧眼)에 성에가 끼면 폐풍월(吠風月)을 서슴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그의 저서 ‘현대시학 입문’에서 시를 음악시(Melopoia). 회화
시(Phanopoia). 의미시(Logopoia)로 나누었습니다. 시가 언어의 음악적 성질, 회화적 이미지
(Image), 의미(意味)로 되어 있지 않는 만큼, 이는 어떤 시가 어떤 것을 중요시 하고 있느냐에
따른 구분이죠. 왜냐하면 이에 따라 시의 구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음악성을 강조하던
우리의 전통시나 회화적 이미지를 강조하던 시들은 요즘 찾아보기 힘듭니다.
정형시(定型詩)의 리듬은 압운(押韻)과 율격(律格)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
시피 압운은 한시(漢詩)나 영시(英詩)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시행(詩行)의 시작. 끝. 중간에
유사한 소리를 내는 음절을 반복시키는 기교입니다. 그 반복은 단순한 소리의 반복이 아니라
엄격한 체계를 가진 소리의 반복이라는 점입니다. 그 체계는 음절단위(音節單位)를 기초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첨가어(添加語)인 우리말은 언어의 음절의식이 약해 소리의 반복이 음수
또는 음보 단위로 형성됩니다. 그래서 우리 정형시는 압운형태(押韻形態)의 구조를 주장하기
힘들지요.
자유시는 정형시와 달리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정한 틀이 없기 때문에
시의 행(行)과 연(聯)이 상당히 자유롭습니다. 즉 시의 리듬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창작자
에게 달려있습니다. 모르스 부호나 화성인(火星人)의 언어쯤으로 치부되기 쉬운 요즘 산문시
(散文詩), 자유시(自由詩)는 상당히 전통의 파괴를 느끼게 하지요. 중년 이후의 세대들 중 상
당수는 최근에 발표되는 시를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미당(未堂)이나 소월(素月)의
정서가 그들의 혈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며, 연륜이 쌓이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 또는
두려움의 유발(誘發)에 기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회 모든 분야가 변모하는 만큼 시 역시 정체의 늪에서 향수(鄕愁)만 고집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하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자세로 우리는 모르스 부호를 해득(解得)해야 하고, 뽕짝
이나 트로트와 병행하여 비보이(B-boy)들이 웅얼거리듯 거칠게 토해내는 랩송(Rap song)도
들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를 어떤 정형화 된 틀에 가두어 두고 그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단(異端) 쯤으로
몰아 부치는 유취(乳臭)는 이제 사라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무형(無形)
의 형(形)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삼라(森羅)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지 않던가요.
저는 대학에서 영미시(英美詩)를 공부하였습니다. 한때 청춘남녀의 심금(心琴)을 울리거나,
밤잠을 잊도록 한 셱스피어, 워즈워드, 바이런, 프로스트 등 수많은 시편들 속에서 허우적
대던 적도 있었고, 나름 시를 쓴답시고 유행가 가사 같은 잡문(雜文)을 남발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잡문을 여전히 생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가슴을 치기도 한답니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시라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절필(絶筆)한 뒤에 심한 몸살을
앓기도 하고, 남들의 작품을 보고 위안을 삼기도 하였으며, 천부(天賦)를 지니지 못한 탓을
조상님들에게 돌리기도 했습니다. 큰마음 먹고 용(龍)을 그리겠다고 다짐하였는데 또 이무
기를 그렸다는 자괴(自愧)에 그만 밤새 눈물을 흘리며 애꿎은 술과 담배를 낭비하기도 했
습니다. 새해에 각종 매스컴에서 대서특필되는 신춘문예(新春文藝)에서 화려하게 각광
받은 신인들의 작품과 시평(詩評)을 수십 번씩 읽어보며 냉가슴 앓기도 하였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속내를 타인들에게 모두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를 쓴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며, 자칫 자신이 쓴 글로 인하여 천형(天刑)
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천기(天機)를 함부로 누설하면 하늘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 벌은 시인이 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대신 내릴
수도 있지요.
그래서 시인은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음)이 가능
하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못하다면 언행에 조신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 외국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에는 시인이 하늘에 별만큼 많은 이유를 모르겠다고요’ 그의 말대로라면
한국은 바야흐로 르네상스시대라야 합니다. 그러나 대형서점 서가(書架)에 자랑스럽게 한 자리
를 차지하고 꽂혀있던 시집(詩集)들이 차차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현상에 일조(一助)했음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화려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나열함으로서 감수성 예민한 계집애들 눈물샘이나 자극하는 부류의 빈껍데기 만들라면 저는
박주산채(薄酒山菜) 벗 삼아 낮잠이나 자겠습니다. 작가가 한편의 시를 완성하는 과정은
치열합니다. 물론 개인의 기질에 따라 다르고, 경험과 지식의 정도에 따라 다르며, 주변 환경
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러나 초고(草稿)에서부터 얼마간의 퇴고(推敲)를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퇴고를 거치면서 본의 아니게 변질되어 용을 그리려다 뱀을 그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이 가장 두려우면서도 틀에 박힌 뇌리(腦裏)의 돌연변이를 기대합
니다. 그러나 흘린 땀에 비례(比例)하지 못해 늘 가슴앓이를 한답니다.
나름 시(詩)라고 글을 지어놓고도 선뜻 내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과연 내가 쓴 것이 시가 맞는가. 타인으로부터 정을 맞거나 비판을 받으면 어찌하나. 온갖
잡념들의 협박에서 수많은 고뇌를 거친 후 돈키호테가 되겠다고 다짐하면 마음이 편합
니다.
고사(故事)에 완벽(完璧)이란 말이 있습니다. ‘완벽’이란 말은 본래 중국의 고대 전국(戰國)
시대에 ‘화씨(和氏)의 구슬‘이란 기가 막힌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로 ‘완전한 구슬’이
아니라, ‘구슬을 다치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완(完)이 벽(璧)을
꾸미는 형용사가 아니라 벽(璧)을 목적어로 갖는 동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완벽의 본래 뜻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흠을 내지 않고 손을 대지 않는다”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그 말을 ‘본래 티가 하나도 없는’, 또 만일 ‘티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런
것이 없도록 손을 쓰고 가공하는’이란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있는 그대로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티가 하나도 없도록 ‘손을 적극적으로 대서 가공하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완벽이란 말을 본래의 뜻으로 쓰고 있지 않습니다.
죽은 의미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과연 완벽한 시가 존재할까요. 완벽한 시를 창작하겠다고 수주대토(守株待兎)하는 사람
보다 시행착오(施行錯誤)가 다소 있더라도 자주 업그레이드하기 위하여 이정표(里程標)를
만들고자 이번에도 모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화씨의 구슬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스스로의 나태(懶怠)를 꾸짖으며 오늘도 하늘을 우러릅니다. 본 작품집에 전문 비평가(批評
家)의 서평(書評)을 싣지 않는 까닭은 불경(不敬)하게도 이 작품과 인연이 닿은 여러분에게
평가(評價)를 맡기고 싶은 저의 욕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 2009.12. . 인천 소래신도시 뜨란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