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마지막)
해후(마지막회)
- 여강 최재효
주말이면 세경은 수혜와 서울근교 딸기밭이나 과수원을 찾아 데이트를 즐겼다.
세경의 누님도 수혜를 올케로 알고 대해주었으며 수혜 또한 자주 세경의 누님댁을
방문하여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8월 중순 주말, 포도 익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시키는 오후였다. 노량진에서 수혜를
만나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세경과 수혜는 음악다방에서 DJ에게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신청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혜가 신청한 일본가수 이츠와마유미의 "Kohibitoyo"에 이어 세경의 신청곡
Elvis Plesley의 "I can't stop loving you"가 흘러 나오자 세경이 수혜의 등을 살며
시 감싸 안으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세경씨!"
"응?"
"나 심심해"
"우리 그럼 뽀뽀할까?"
"어휴, 누가 늑대 아니랄 까봐"
"그게 아니구 우리 어디 교외로 나가는게 어떻겠느냐 이거에요."
수혜가 약간 입을 삐죽하자 세경은 모른채 한다.
"우리 귀여운 공주님을 모시고 어디로 행차를 할까나? 인천 앞바다를 갈까, 아니면
명동으로 갈까, 아니면 도봉산에를 갈까?"
"세경씨, 우리 부천에 가면 포도밭 있는데 포도 먹으러 가요."
"포도라...... 좋지. 가자구 포도 먹으러"
전철을 타고 40분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 송내역에 내렸다.
부천시 송내동(松內洞)은 인천행 전철역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
이었는데 전철역이 들어서면서부터 갑자기 개발붐이 불어 금싸라기 땅이 된 곳이다.
그곳에 아직도 포도밭이 많이 남아 있는데, 서울과 인천에 사는 사람들이 포도가
한창 익는 8월이면 포도를 맛보러 찾아오는 마을이다.
"수혜야!"
"네에?"
"우리 저기로 가자"
세경이 가리키는 곳은 포도밭 입구에 '칼국수, 동동주, 도토리묵, 파전, 닭도리탕,
기타 등등'이라고 씌인 입간판이 있는 임시 간이식당이었다.
"자기, 술 생각 나서 그러지?"
"응"
"어휴, 자긴 나하고 있어도 술 밖에 몰라"
"아냐, 내 옆에 자기가 있으니까 술생각이 나는거야."
"나 말고 다른 여자하고 있어도 술 생각나지?"
수혜는 세경이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늘 못 마땅했다. 전에 영등포에서 데이트
할때 세경이 권해준 보드카선라이즈 두잔에 정신을 못차린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
기 때문이다.
"오늘은 조금만 마실께"
"자기 취하면 나 누가 업어간단 말이야"
수혜가 약간 삐친 얼굴이다.
"어서 오세요."
사십대 초반의 주인 아주머니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간지럽다.
"포도드시게요? 아니면 식사?"
"아주머니, 닭도리탕 2인분, 동동주 한동이 그리고 싱싱한걸로 포도한소쿠리 주
세요"
"자기야 그걸 누가 다 먹는다고?"
수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경의 얼굴을 쳐다본다.
"걱정마 남으면 싸 줄테니 장모님 갖다드려"
"치이~ 웃겨. 누구맘대로 장모야......"
닭도리탕이과 동동주가 나오니 세경이 졸리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히야- 냄새 쥑인다 증마알 ......"
세경이 정말 감격해 하는 눈빛이다.
세경과 수혜가 앉은 좌석 옆으로 다섯쌍의 남녀들이 밀애를 즐기고 있었다.
두쌍은 청춘남여가 분명한데 세쌍은 40대 초중반의 남녀로 부부로 보이지 않았다.
"자자. 부인, 한잔 받으시구려"
"어머! 점점 내가 왜 자기 부인이야? 공주님이지?"
"차암 그렇지. 아이구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공주마마"
동동주가 세동이 파전 한접시가 추가 되었을 때 이미 세경이 혀가 반쯤 풀리고 눈이
게슴츠레해 졌다. 수혜도 세경이 억지로 권하는 술을 마다하다가 어쩔 수 없이 동동주
세잔을 마셨는데 수혜도 약간 술이 오르던니 정신이 없는 듯 한 표정이다.
"수혜야!"
"응"
"너 나한테 시집 올꺼지?"
"자기가 데려가면 내일이라도 간다구요......"
수혜의 어눌한 발음이 길어졌다.
"나는 너 절대로 포기안해. 나 지금까지 이십 여명 정도 아가씨와 연애해 봤지만
너처럼 예쁘고, 깜찍하고, 똑똑하고, 귀여운 여자는 처음이야"
"그럼 나보다 더 예쁘고, 깜찍하고, 똑똑하고, 귀여운 여자 나타나면 날 버리겠다아
이런 말씀?"
"어이쿠 공주님 그런게 아니구요....... 이 대한민국에서는 공주님 보다 더한 사람
없시요오. 그러니 걱정 마시라니깐요"
세경이 코메디언 이주일의 흉내를 내자 수혜가 깔깔대며 웃는다.
8월의 태양이 작열하는 포도밭에 포도익는 냄새, 동동주 익어가는 냄새, 젊은 남녀
들의 끈끈한 사랑이 무르 익는 냄새로 진동했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지자. 포
도밭위로 어지럽게 설치된 꼬마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세경이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수혜 옆에 앉는다.
남자의 완력을 당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다. 힘없이 세경품으로 기울었다. 굶주린 늑대처럼 세경이 왼손으로 수혜의 탐스런 젖 가슴을 자극했다. 수혜가 깜작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다시 한참동안 조용하더니 여자는 아예 남자 무릅을 베고 누웠다.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신경을 썼다. 주변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중고 스피커에서는 남진의 '님과 함께'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결국 세경의 혀가 수혜의 입술을 열고 입안 깊이 침범했다. 방어와 공격이 수십번 반복되면서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없어졌고 열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 비가 날고 새가 날라와 노래를 하고 주변이 향긋한 향내음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여러번의 세경의 공격에 익숙해진 수혜의 입술은 전율했다. 세경은 무릅에 수혜를 비슷듬하게 눕히고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다른 커플들도 한 몸이 되어 사랑의 행위에 천둥 번개가 쳐도 모를 무아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사랑해" 시키고 있었다. 오히려 세경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수혜가 세경의 유혹에 은근히 싫지않은 거부의사를 말로 표현했지만, 마음은 그 렇지 않았다. 어야 겠어" 세경이 옷 매무새가 흐트러진 수혜를 일으켜 앉혔다. 송내역 근처로 나왔지만 마 땅히 갈 곳이 없었다. 세경이 부천역 까지 가는 전철티켓을 샀다. 부천역에 전철이 정차하자 얼른 수혜의 손을 잡아 함께내렸다. 무조건 따라갔다. 역전 부근은 최근에 지어진 모텔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모텔앞에서 세경이 걸음을 멈추었다. 올려면 들어오고 , 싫으면 너 먼저 서울로 올라가." 세경이 정색을 하며 말을 했다. 그럼 혼자 쉬다가 와." 수혜가 오던 길로 돌아서 가려고 하자 세경이 잽싸게 수혜 팔을 잡았다. 정도 누웠다 가면 머리가 괜찮아 질꺼야. 약도 샀잖아" 할 꺼야" 수혜가 머리를 푹 숙이고 세경의 등뒤로 바싹 붙어 도살장 끌려 가는 소처럼 마지 못해 모텔로 함께 들어갔다.
"어머나! 자기 옆에 앉으면 어떻게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보잖아"
"뭐 어때. 즈 덜두 지남철처럼 찰싹 붙어 앉아있는데"
세경이 수혜옆에 바짝 다가앉더니 수혜 손을 잡는다. 수혜가 놀라 뿌리치려 하자
"수혜야 사랑해! 이 말하고 싶어 네 옆으로 앉은거야"
"......"
세경이 왼팔을 뻗어 수혜의 어깨에 올려놓고 은근히 힘을 주어 당기자. 수혜가
"어머! 자기야 여긴 포도밭이야 이러면 싫어."
"수혜야, 옆 사람들 신경 쓰지마, 쟤네들도 지금 한창 작업하고 있단말야."
뒤편에 남녀 두쌍은 좀전부터 조용하던니 간간히 여자 신음소리만 들려왔다.
세경이 수혜의 머리칼을 잡고 입술을 찾았다. 당황한 수혜가 자꾸 주변 경계에
"자기야아, 사-랑-해"
수혜는 세경의 열렬한 키스 세례를 막지 못했다.
"난 이제 너 없이는 이 세상 사는 의미가 없어, 영원히 너를 사랑할 꺼야. 수혜야
"허억 - ,자기야 나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애. 나 좀 어떻게 해줘봐"
조금전 까지만 해도 방어의 입장을 보였던 수혜는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세를 역전
"수혜야 우리 어디 조용한데 갈래?"
"싫어 그냥 이렇게 있어"
"우리 나가자, 머리도 아프고, 머리가 띵해서 약국에 가서 아스피린이라도 사먹
"수혜야 우리 여기서 내려서 쉬었다가 가자."
"세경이 몸이 의지와는 상관 없는 곳으로 가기 시작하고, 영문을 모르는 수혜는
"수혜야 나 머리가 아파 죽겠어. 나 여기서 잠간 쉬었다 가려고 해. 나 따라서 들어
"어머, 자긴 함께 들어가자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을 하네. 나 혼자 서울 갈테니
"수혜야. 정말 이럴꺼야. 우리 이런데 처음이 아니잖아. 아무일 없을 꺼야. 두시간
"자기 오늘은 정말 아무일 없어야 한다. 알았지? 안그러면 자기하고 영원히 이별
"알았어, 아무일 없을 테니. 걱정마세요. 공주니임"
"나, 창피하니까. 자기가 앞장서."
"만원입니다. 쉬었다 가실꺼지요?"
조바 아주머니가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키를 내준다.
"수혜야 미안해. 이런데를 들어오게 해서. 머리가 좀 아픈건 사실이야."
세경이 살며시 수혜의 등뒤로 살며시 껴안아 주자 수혜역시 이미 몇 번 세경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 터라 가만히 있었다.
"수혜야, 정말로 난 너를 영원히 내 가슴속에 담아 두고 싶어. 정말이야. 널 절대로
어디에도 보낼 수 없어. 난 너 없으면 하루도 못 살 것 같애" 세경이 침대위로 수혜를
쓰러뜨리자 수혜가 반항을 한다.
"자기야, 그냥 잠시 쉬고 가기로 했잖아, 응? "
"사랑해 수혜야."
동문서답이었다. 세경이 포도밭에서의 키스 여운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서서히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자 잠만 자고 가겠다던 언약은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두 마리 사슴이 되어 서서히 열락의 기차를 타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이던 늦 여름 어느날 이른 아침부터 세경의 책상위
전화기가 울려댔다. 아침 긴급회의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였다.
"감사합니다. 장세경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세경씨!......"
더 이상 수화기에서는 말이 없다.
"수혜! 수혜씨 왜그래요? 울고 있어요? 수혜씨?"
"세경씨! 지금 시간 낼수 있어요?"
흐느끼는 수혜의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혜, 어디야 지금? 내가 그곳으로 갈께. 어디냐고 거기가?"
"저 집에 있어요. 오늘 몸이 아파서 회사에 출근 못했어요"
"알았어. 수혜네 집으로 지금 당장 갈게."
세경이 수화기를 내리자 마자 회의도 참석하지 못 하고 수혜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아침부터 무슨일일까? 혹시 수혜에게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일어난 것 일까?"
세경은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왔는지 모르게 차가 수혜네 집앞에
멈췄다. 초인종을 누르자. 수혜 어머니는 핏기없는 얼굴로 세경을 맞는다. 이전에
수혜집을 방문 했을 때의 반색하는 기색이라곤 찾아 볼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수혜 만나러 왔어요. 어머니 그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수혜 어머니는 대꾸도 없이 수혜방으로 갔다. 한참만에 나온 수혜 어머니는 세경
을 보고 수혜방에 들어가 보라고 한다.
"수혜야! 왜 그래? 갑자기 그렇게도 튼튼한 수혜가 왜 이렇게 된거야? 응?"
수혜는 아무말 없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흐느끼며 아무말이 없다.
"수혜야! 왜 그래 말 좀해봐, 응? 내가 너에게 뭘 잘못했니? 수혜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세경이 수혜를 흔들어 봐도 수혜는 흐느끼기만 할 뿐 아무말 없다. 답답한 세경이
거실로 나와 수혜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님 수혜가 왜 그래요? 답답합니다.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장서방 잘듣게."
수혜의 어머니가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저애를 포기하시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수혜 아버지께서 요즘 자네와 수혜가 좋아지내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몇 칠전
수혜에게 그러더군. '이미 전부터 사돈을 맺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으니 딴 생각하지
말고 선을 보라'고 말야."
세경은 뒤퉁수를 야구방망이로 얻어 맞은듯 잠시 정신이 혼미함을 느꼈다.
"어머님 안됩니다! 저와 수혜는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절대 헤어질 수 없습니다.
절대로요"
"수혜아빠는 고집이 세고 한번 이야기 하면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야. 나도
자네와 수혜가 더 이상 만나는 것을 원치 않네. 그러니 그리 아시게. 수혜는 오늘부로
회사를 그만 두었네."
수혜 어머니입에서 점점더 심한 이야기가 나왔다.
"안됩니다. 어머님! 전 수혜를 사랑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전 수혜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아버님 한테 잘 말씀드려 주세요. 어머님! 이렇게 빕니다."
세경의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떨어졌다. 세경이 다시 수혜의 방으로 달려갔다. 머리를 산발하고 초췌한 얼굴을 한 수혜가 일어나 앉아 세경을 맞는다.
"자기야! 나 어떻게 해? 이제 나 어떻게 해야되지?"
수혜가 눈물을 흘리며 세경을 끌어 안으며 절규한다.
"나 절대로 자기랑 헤어질 수 없어. 세경씨 없이는 나 이 세상 살기 싫어. 죽을 꺼야"
"수혜야 걱정하지마. 나 절대로 너를 포기 할수 없어. 절대로."
"그렇지? 세경씨, 나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꺼지?"
"그럼 . 바보야 울지마 난 죽어도 너 포기못해."
세경과 수혜는 한동안 부둥켜 안은채로 떨어질 줄 몰랐다.
"이제 그만 가보시게. 수혜 아버지께서 들어 오실지 몰라. 그리고 우리 수혜 포기
하시게 수혜 아버지께서 선보이려는 분은 경동물산회장님 둘째 자제분이라네"
"경동물산?"
세경이 혼자말로 되뇌였다. 경동물산이라면 서울서 제일 잘 나가는 회사였다.
세경의 처지로서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명문가이고 재벌가 였다.
"그렇다면 수혜가 재벌가의 며느리가 된단 말인가?"
세경은 미친 사람 처럼 혼자 중얼 거렸다. 자신 보다 별 볼일 없거나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신랑감이라면 절대로 수혜를 포기할 수 없지만 재벌가의 며느리가 된다는 수혜 어머니의 말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니 현재의 자신의 처지가 더 초라해 보였다. 수혜네 집을 뛰쳐나온 세경은 회사로
가지 않고 술집을 찾았으나 아침부터 문을 연 주점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평소 자주 가던 백제관광호텔로 차를 몰았다. 레스토랑으로 달려 들어가 술을 주문
했다. 양주 두병을 미친듯 마시고 나니 세상이 빙빙 돌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한편 수혜 아버지는 세경이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고 일주일후 수혜를 오빠를 동행
시켜 강제로 미국 씨애틀에 있는 누이에게 보냈다. 잠시 돌봐 달라고 부탁을 하고
수시로 감시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한국으로 전화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가급적 집에 있도록 하라고 했다. 수혜가 미국
으로 간 것을 모르는 세경은 회사도 몇칠째 나가지도 못하고 수혜네 집 대문앞에서
밤낮으로 앉아서 수혜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였으나 허사였다.
"아버님, 어머님 수혜를 만나게 해주세요. 전 수혜 없으면 못 살아요. 네에?"
"제발 제발 부탁 드립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수혜 좀 만나게 해주세요. 네"
대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새벽이 되도록 문앞에서 울고불고 애원해도 수혜 아버
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수혜 아버지가 남 부끄럽다며 파출소 경찰관이 출동시켜 강제로 연행하여 귀가 조치
시켜도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한달을 밤낮으로 수혜네 집 대문 밖에서 수혜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여도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세경이 거의 탈진상태가 되어 친구들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간후 10일이 지나서 친구
들이 수집한 정보를 듣고 수혜가 미국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래. 나같은 놈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없어. 일찍 죽어야 해. 나같은 병신은....."
세경은 보호자가 없는 사이 미리 준비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 하였으나 다행히 간호원에게 발견되 위세척을 받았다.
"누가 나를 살려 놓았어? 응 누가? 난, 난 죽고싶단 말야 나 같은 놈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없는 패배자란 말이야."
위 세척후 오랜 잠에서 깨어난 세경이 병문안을 왔던 친구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
어오자 다시 오열하기 시작했다.
"경복아!"
"경진아!"
"우리 수혜 좀 찾아다 줄래. 응? 너희들은 내 부탁을 들어 줄수 있지? 그치?"
"세경아, 정신 차려! 수혜는 한국에 없어. 이젠 잊는게 좋아."
경복이 착잡한 얼굴로 세경을 달래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세경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그리도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
지만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믿을 수
가 없었다.
비오는 날이면 세경은 회사 퇴근후 혼자서 '실락원'을 찾는다. 멍하니 수혜와 함께
했던 자리에 앉아 천장을 응시하며 꿈 같았던 지난날의 가슴 아픈 추억을 반추해 보고, 울다가 웃다가 독한 양주 2병을 마시고 나서야 종업원들의 부축을 받아 집에 겨
우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괴로움과 허탈함속에서 일년을 보내고 세경의 어머니는 점점 폐인이 되가는
아들의 상태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나이도 먹어 가기에 고향의 참한 처자와 결혼을
시켰다. 온 가족이 하루라도 빨리 수혜를 잊기 위하여 서둘러 결혼을 시킨 것이다.
결혼한 이후로도 오랫동안 세경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걷 돌았다. 결코 수혜를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세월이 흘러 수혜의 모습이 세경의 뇌리에서 잊혀
져 갈 즈음 15년만에 수혜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장 차장님! 전화왔습니다."
윤 대리의 말에 세경은 깊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응? 전화! 고마워"
"여보세요? 장세경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세경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목이 메어왔다. 그 입구에 있을게요" 세경의 말에 수혜의 눈에 눈물이 뎅그렁 맺혔다. 실락원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주인과 종업원 그리고 실내 분위기만 바뀌었 을 뿐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있었다. 세경이 시간보다 10여분 일찍 도착하였다. 종 업원이 다가와 말을 건다. 가슴이 시리도록 보고 싶었던 여인이 15년만에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세경이 다가가 자 수혜가 살며시 일어났다. 더 이상 세경이 말을 잇지 못했다. 수혜도 눈물을 글썽였다. 15년이나 지금이나 수혜는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수혜 의 볼 위로 아이라인이 녹아 내렸다. 만나면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수혜였지만 막상 눈앞에 선 수혜를 보자 그간의 미움이 연민으로 변했다. 15년의 세월이 온데 간데 없어졌다. 그 자리에는 다시 수혜가 있었다. 미움으로 얼룩져서 지새웠지만 그럴수록 내 자신이 더 초라해 지고 더 왜소하게 느 껴졌어요. 결혼 생활은 ?" 이 못다한 공부를 한다며 미국에 머물러 있는 바람에 지금까지 있었어요. 세경씨에 게 죽을 죄를 지었어요. 그때 집이라도 뛰쳐나가지 못한 제 자신이 죽도록 미웠어요." 수혜가 어깨를 들석이며 흐느꼈다. 세경이 위로하듯 수혜를 다독였다. 세경이 물었다. 다. 둘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응시했다. 세경이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수혜 남편은?" 보고 싶다고 하니까 일부러 나를 데리고 왔어요." 15년전 세경이 직접 끼워준 커플링이었다. 다시한번 세경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 졌다. 세경이 손수건을 꺼내 수혜의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살며 시 안아주었다. 안정을 되 찾을 수 있어. 나 이제 모든걸 용서하고 너를 영원히 가슴속에 묻을께. 너 도 언제 까지 나를 가슴에 품고 살 수 없잖아." 세경이 수혜의 손가락에서 커플링을 뺐다. 당신의 환영에 사로 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이제 알았어요. '사랑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해야 그 진가를 알수 있는거라고'. 난 앞으로도 아니 죽을 때 까지 진정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나와 가까워 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 이라도 가능 하 다면 당신과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서 살고 싶어요." 수혜가 단호한 의지로 말을 잇자 세경이 약간 은 당황 스러웠다. 마음속으로 깊이 용서를 빌고 받아 들여야 되. 그렇지 않다면 너와 나는 큰 죄를 짓는 거야. 그리고 영원히 탈출 할 수 없는 굴레속에서 사랑에 목마른 노예로 살아가야되. 이제는 나와의 모든 추억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아저씨를 나 하고 연애할 때 보다 더 위해주고 사랑해줘야 해." 수혜는 세경이 이야기 하는 동안 계속 울먹였다. 수혜가 핸드백에서 약 봉투를 꺼내더니 입에 터어넣고 물 한모금마셨다. 헬스기구 사다 놓고 하던지." 자세히 보니 수혜의 얼굴이 백지장 처럼 하얗다는걸 알 수 있었다. 치유해 주었지만, 늘 가슴 한구석에는 네가 자리잡고 있었어. 아마 오늘 너를 만나고 헤어 지더라도 죽을 때 까지 너는 내 가슴속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꺼야.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 하지만 그게 가능하겠니?" 해보았지만 그때 마다 당신의 환영이 나타나 나를 구해줬어요.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남편 몰래 한국으로 도망치려고도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모르게 피해를 본거야." 로 가서 독주를 마셨다. 수혜가 미국으로 돌아간 한달 후 세경의 회사로 편지가 한 통 배달되었다. 아닐거에요. 당신과 영등포에서 15년 만에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어요. 나는 당신과 헤어진 후로 폐병을 얻어 고생을 하다가 완전히 회복을 하였는데, 작년초부터 재발하더니 말기에 접어들어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한국에 갔을 때 당신과 하룻밤이라도 함께 있고 싶었어요. 그러나 차마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내 그리운 님 이셨던 당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우리가 다시 만날 그날 까지 안녕히 계세요.
"......"
"여보세요? 장세경입니다. 말씀 하세요"
"저어-, 저는 수혜라고 해요"
"수-혜-씨?"
"세경씨, 시간낼 수 있어요?"
"네, 3시까지 영등포에 있는 '실락원'으로 나갈께요. 수혜씨 찾아오실 수 있죠?"
"실락원이 아직도 있을까요?"
"수혜씨와 헤어진 후 10년 동안 혼자 찾아 갔었습니다. 만약 실락원이 없어졌다면
"알았어요. 나갈께요."
"저쪽 테이블에서 여자 손님께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수혜가 15년전 앉았던 창가의 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세경이 천천히 다가갔다.
"수-혜!"
"세경씨이-"
"수혜!"
"세경씨, 저 미웠죠?"
"아니요. 어쩌면 더 잘된 일이라고 생각도 했었어요. 수백의 밤을 그렇게 증오와
"전 미국으로 간후 다음해 현재의 남편과 결혼을 했어요. 미국에서요. 그리고 남편
"이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무엇하겠어요? 다 부질없는 짓인것 을......"
"세경씨! 미안해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는 무슨 용서. 그래 아이들은 몇이나 두었어요?"
"저 아직 아이 없어요"
"네에? 어째서?"
"세경씨 한테 속죄 하는 마음으로 결혼후 임신한 두 번이나 아이를 유산 시켰어요"
"네에?"
세경은 눈물이 왈칵 쏟아 질 뻔한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다시 담배를 빼 물었
"바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것이 나 자신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길이었어요."
홀에는 엘비스플레슬리의 "Love me tender'가 꿈결처럼 흐르고 있다.
"우리 남편은 착해서 나를 공주 받들듯 잘 대해줘요. 이번에도 내가 서울의 하늘을
그리고 한참을 흐느끼던 수혜가 손을 들어 보였다.
"이거 세경씨가 끼워준 거에요. 15년 동안 한번도 빼놓은 적이 없어요."
"바보! 지금까지 그것을 끼고 있었다니......"
"수혜야! 이제 그 반지 벗어서 나줘. 이제는 나의 기억을 없애. 그래야만 나도 너도
"세경씨!"
"응"
"나, 그동안 결혼생활이 이중생활이었어요. 정신병원에 2년 동안 있었어요. 매사
"수혜야, 이제 우리는 오랜 속박에서 벗어나야해. 그리고 너는 현재의 남편에게
"수혜야 어디 아퍼?"
"으응 - 요즘들어 어지럽고 해서 빈혈 치료제야"
'저런 벌써 빈혈이 오면 어떻게해. 시간 날때마다 운동을 해. 시간 없으면 집에서
"네가 미국으로 떠나고 난 삶에 아무 의미가 없었어. 이렇게 15년의 세월이 마음을
"세경씨, 나도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미국으로 보내진 이후로 몇 번의 자살을 시도도
"바보, 도망은 ......."
"이제는 나를 네 마음 한 곳에 묻고 남편에게 잘 해줘. 너와 나 때문에 남편도 알게
홀안에 세경의 부탁으로 린다 론스태드의 "Long long time"이 잔잔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다음에 한국에 나올 때는 네 곁에 남편 닮은 꼬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
세경과 수혜는 길고 깊은 키스를 나누고 헤어졌다. 세경은 평소 자주 찾는 주점으
[세경씨 보세요]
아마도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 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이승에서 못한 당신과의 사랑을 저세상에 가서 다시 하고싶어요. 제가
2002. 8.8일 시애틀에서
당신의 영원한 여인 - 김수혜 올림
- 창작일 : 2003.9. 5
세경은 아려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아! 하나님도 무심하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