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 글. 최재효
봄의 불청객은 제 발로 또 찾아왔다.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갑다. 오히려
객이 오지 않는다면 궁금해서 견디지 못 할 듯하다.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는가, 인간사 좋은 일에는 꼭 마(魔)가 끼나 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항상 좋은 일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 경우 인간사회가 무미건조하고 살아가는 의미가 없으리라.
아침 출근길에
차창에 뽀얗게 내려앉은 녀석들에게 화를 내본다. 그러나 아무리 큰소리로 탓해봐야 결국은 내 입만 아프다. 혼자 투덜거리며 먼지 털이개로
털어보지만 깨끗하게 닦이지 않는다. 그냥 운전대를 잡고 언짢은 기분으로 회사로 향한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출근길의 이웃들의 얼굴 역시 밝지
못하다.
차들이 밤새 황톳길을 달린 듯 온통 누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래도 간밤에 비가 오지 않길 다행이다. 비라도
내렸다면 차들의 외관은 볼썽 사납게 되고 세차장은 재미를 톡톡히 보리라.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앉은 미세한 모래가루를 만져본다. 오랑캐의 역한
냄새와 어딘가 모를 거짓과 위선의 기류가 감지된다.
몽고의 타클라마칸사막과 고비사막 그리고 황하(黃河)의 상류 어디쯤에서
부터 날아왔을 누런 흙먼지. 중국이란 나라가 해마다 봄이면 몹쓸 먼지를 팔기위해 혈안이 된 듯 하다. 거대한 중국이 서서히 모래구덩이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본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봄이 찾아와도 누런 황사먼지를 구경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봄의 최대
불청객은 꽃샘추위였다. 개구리가 봄이 온 줄로 알고 성급히 땅위로 기어 올라왔다가 기습적인 꽃샘할미의 심술에 놀라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움츠러들거나,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녀석들은 동사(凍死)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꽃샘할미의 심술은 귀엽게 봐주고 넘어갈 수 있다.
황사라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출현하기시작 하면서부터 인심마저 흉흉해졌다. 사람들은 거리를 다니려하지 않고 실내를
고집한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외출하는 경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하여 투박하고 우스꽝스런 패션을 연출하기도 한다. 마치
영화에서 본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난 듯 하다. 길을 가다가도 그러한 패션을 한 여인들을 보면 섬뜩하다.
황사는 스스로
날아오지 않는다. 황사는 내가 부르고, 네가 부르고, 우리 모두 불러들였다. 황사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괴물이다.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공격을 받지않는한 절대로 먼저 공격하는 법이 없다. 적당한 먹을거리와 적당한 쉼터만 있으면 그만인 것을, 더 많이 얻으려다 스스로 가지고 있던
몫까지 빼앗기게 된다.
이솝우화에 보면 개가 고깃덩이를 물고 개울을 건너다 개울 속에 비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른 개로
착각하여 물속의 고깃덩이마저 욕심을 내어 짖다가 그만 입에문 고깃덩이를 놓치고 만다. '적당한' 이라는 수식어를 잘 사용하여 살아간다면,
찾아오던 황사도 다시 물러가리라 본다. 과욕이 부른 재앙이 황사가 아닌가. 무분별한 자연파과, 점점 증가하는 인간의 욕구, 이에 반격을 가하는
자연. 중국은 세계인구의 상당수를 먹여 살려야 하는 땅 덩어리다.
오랜세월 우리는 인간을 낳고 길러준 자연이라는 신(神)을
은근히 거역해왔다. 그 신이 이제 자식들의 반역행위에 서서히 제동을 걸고 있다. 황사는 어미가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다.
최근에는 이전에는 발견된 적이 없는 질병바이러스균이 출현해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그 누구를 탓하겠는가.
우리는 봄마다
찾아오는 황사를 보면서 중국을 탓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을 탓 할 일만도 아니다. 인건비가 저렴하다고 하여 서방선진국과 우리기업들이 중국 전역에
굴뚝을 만들고, 각종 경,중공업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제품을 만들기 위하여 중국의 땅속을 파헤쳐 광물을 캐내고 그 광물로 상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내다판다.
그 상품을 판돈은 다시 현지에 재투자되어 확대재생산을 꾀한다. 오염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의 진로 한가운데 있는 우리는 서방자본과 현지인들 그리고 동포들이 뿜어낸 오염물질이 섞인 황사를 뒤집어 써야 하는 불운을
맞고 있다. 차 유리창에 뽀얗게 내려앉은 황사는 우리에게 독약이 아닌가. 앞으로도 끝임 없이 기류(氣流)를 타고 올 불청객, 그 불청객에 의해
인류가 대재앙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인류의 문명이 좀 더디면 어떤가. 중국은 등소평의 개방정책 20년 만에 5000년
동안 이루지 못한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며 자화자찬을 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 이 5000년을 더 살 수명을 20년으로 단축시킨 것 같은
느낌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부르짖던 노장(老壯)의 나라에서 전혀 반대의 결과물들을 쏟아내고 있다.
두 위대한 사상가의
말씀은 발전이라는 이름아래 땅속에 묻혀 있다. 그 후손들 스스로가 호구지책과 국부의 축적을 위해 사상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가운데 알 수 없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부조리가 발생하고 있다.
그 땅의 종자(種子)들은 누천년을 두고 우리를 괴롭혀 왔다. 한무제, 관구검,
수양제, 당태종, 살리타이,소손녕, 소배압, 청태종 심심풀리처럼 우리를 짓밟았던 대표적인 중국인들이다. 한국전쟁 때 그들은 인해전술로 이 땅을
괴롭혔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황사를 보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해마다 이른 봄에 찾아오는 황사를 보면 구약성서의 내용이
생각난다. 기록은 익히 인간의 욕망이 결국 어떤 형벌을 받는지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 제19장에 나오는 악(惡)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과 불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인간의 본분을 망각하고 신을 노하게 한 대가다. 우리의 손에 의해 무분별한 자연의 훼손은 결국 제2의 ‘불의
심판’ 혹은 ‘물의 심판’을 불러 올 수도 있다고 본다.
그 옛날 동양의 비단과 도자기를 흠모해 찾아오던 아라비아의
대상(隊商)들이 밟고 다녔을 비단길의 모래들이 이제는 두려운 존재가 되어 찾아오고 있다. 차라리 흉노의 왕에게 시집간 왕소군의 한(恨) 서린
눈물이 묻어있는 모래바람이라면 얼마든지 반가이 맞겠는데......
2005. 3. 23.
[주] 왕소군(王昭君) - 중국 한나라 때 원제의 후궁이었으, BC33년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흉노의 왕,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을 간다. 이후 중국의
시인묵객들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비련의 주인공이된다. 소위 초선,
양귀비,
서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4대 미인중 한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