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공간/Essay 모음 1
시간은 사람을 속이고, 나는 시간을 속이고
여강 최재효
2022. 5. 28. 00:50
시간은 사람을 속이고, 나는 시간을 속이고
- 여강 최재효
오랜만에 죽마(竹馬)를 타고 놀던 벗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옛 모습이 아닌, 마치 생전 처음 보는 화성인이나 혹은 가끔 꿈속에서 보였던 정체불명의 회색 인간들처럼 보였다. 우리는 고향에서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이유로 사십여 년의 시공(時空)을 무시할 수 있었다. 술잔을 부딪치며 낯선 얼굴로 변한 벗들을 쳐다보고 시간의 무정함에 한탄하였다. 그들 중 몇몇은 세월의 흐름을 비껴갔는지 얼굴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풍족한 티를 내고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친구들과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었다. 한 친구는 ‘내가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사용하면서 지나간 어느 한 시점에서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대하여 후회하였다. 나는 그의 말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정말로 미련이 남아있으면 당장 해보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과거에 못다 한 일을 용기를 가지고 다시 추진하면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패할 확률은 예전에 비해 높아졌지만…….
나는 주변의 만물과 시간과의 상관관계를 고민해 보았다. 세상에는 나 혼자만이 아니다. 나의 변신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우주를 포함한 다중우주(Multiverse)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즉 나라는 존재는 수억 또는 수천억 명이 된다는 뜻이다. 현재 나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우리 우주보다 느린 어느 다른 우주의 한 행성에서 이미 수천 년 전에 죽었거나, 우리 우주보다 시공의 흐름이 빠른 또 다른 어느 우주의 행성에서 수천 년 앞선 미래를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애당초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해와 지구 그리고 달의 공전과 자전이 만들어 낸 시간이라는 수치에 갇혀 숫자놀음에 홀려 살아가고 있다. 시간이란 지구인들이 별들의 흐름을 존재의 개념으로 정의하여 전-중-후로 갈라놓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은 인지능력이 어느 정도 발달한 이후에 시간이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만든 시간의 틀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런 방식이 정의이고 자연스러운 인생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종적인 개념의 시간에 공간을 첨가하여 복합적인 영역의 시공 관념을 만들었다. 그는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종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해온 시간의 방향에 제동을 걸었다. 그의 시간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흘러가는 해와 달처럼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방향이 없다. 방향이 없다 보니 방향이 있다고 믿고 해와 달 또는 지구의 자전 및 공전의 흐름을 파악하여 시간의 방향을 정하려고 시도하던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져 있다.
십의 5백 승(升) Km나 십의 백 승 광년(光年) 거리 안에 포함된 다른 우주의 행성에 또 다른 내가 있다. 내가 현재 서 있는 지구의 체감 시간이나 그곳의 체감 시간은 같다. 그러나 그 행성의 움직임에 따라 그곳에 있는 또 다른 나는 과거세에 존재했던 사람일 수도 있고 혹은 나의 먼 미래를 사는 사람일 수도 있다.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거리가 있을 뿐이다. 다중우주에 존재하는 수억 명의 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과거세, 현세, 미래세가 혼재(混在)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 은하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인 지구에 사는 나의 염력(念力)은 우리 우주뿐만 아니라 수천억 혹은 그 수를 알 수 없는 다중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의 무수한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기가 맑은 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무수히 명멸하는 별들을 볼 수 있다. 물론 나의 가시권(可視圈)에 들어온 별들은 우리 은하의 오리온 팔 또는 궁수자리 팔(Sagittarius arm)과 페르세우스 팔(Perseus arm) 사이에 있는 성운(星雲)들이 대부분이다. 그곳에 또 다른 나의 분신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디에 있을지 모를 나를 향한 그리움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 나의 언행이 또 다른 우주의 어느 행성에 있는 과거세와 미래세의 수많은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누구의 물건을 훔치거나 남에게 아픔을 주었다면 먼 곳의 또 다른 나의 존재들은 크게 상처를 입는다. 또는 이 순간 지구의 내가 전쟁에서 수많은 적군을 죽여 전쟁 영웅이 되었다면, 어느 우주의 나는 수많은 선량한 생명을 살해한 악인(惡人)이 될 수도 있다. 나를 보는 타인들의 눈이 없더라도 행동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시인 윤동주는 서시(序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며 별을 노래하였다. 또한 고금(古今)의 선현들이나 대덕(大德)들은 윤동주 시인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왜 하늘을 두려워하였을까. 그들은 만경창파 같은 하늘에 동일 형질의 수많은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떤 절대자가 하늘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개를 숙였을까.
우리 우주와 다중우주에 사는 또 다른 나의 존재들은 그곳의 주변 분위기나 중력의 강약 또는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유전자 배열에 따라 지금 지구에 있는 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지구보다 중력이 수백 배 무거운 행성이라면 그곳의 또 다른 나는 중력에 눌려 형체가 납작한 딱정벌레나 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섭고 끔찍한 모습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환영(幻影)에 불과하다. 일정한 세월이 소멸하면 나는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약간의 흔적만을 남겨 놓고 아침 이슬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가족들이나 지인들이 슬퍼하는 것도 나에게는 무관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사라지고 나면 또 다른 우주의 내가 투영된 모습으로 지구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때의 내 모습은 현재의 내가 아닌 전혀 뜻밖의 모습일 수도 있다. 단세포에서부터 곤충, 물고기, 짐승, 파충류, 양서류 심지어는 대양(大洋)의 심해(深海)에 사는 엄청난 무게의 수염고래까지 그 모양은 참으로 다양해서 이전의 나와는 철저히 단절된 채 삶을 영위하게 된다. 나는 육도윤회를 믿는 독실한 우바새(優婆塞)가 아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나의 아내, 나의 아들과 딸, 부모형제, 친구들은 어쩌면 어느 우주에 사는 또 다른 나의 투사된 염사(念寫)일 수도 있다. 즉, 또 다른 내가 나와 한집에서 부부가 되거나 부모 자식의 관계 혹은 지역사회에서 친구 간이나 지인의 관계로 살아가고 모습이다. 이 모든 현상이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수많은 다중우주에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미 전 세계 많은 물리학자가 다중우주에 대하여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천 년 전 세계인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같은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오류이며 종교 또는 철학의 허구였던가.
내분비와 소화기(消化器)를 육체에 담아 태어나는 우리는 기껏해야 백 년 정도를 산다. 그것도 신체가 건강한 경우다.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천년쯤 살려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가진 자들이다. 돌덩이, 흙덩이, 쇳덩이를 가득 모아 그것으로 적수(赤手)의 빈한한 이웃들을 억압하려 든다. 지구상의 인구는 2022년 6월 현재 대략 77억쯤 된다. 우리 우주를 비롯하여 다중우주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또 그들 중 상당수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주변에 내가 염사(念寫)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겸손해야 한다. 이미 살 만큼 산 인총은 조용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원천(源泉)으로 돌아가는 게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
수천억 조각으로 잘게 잘려져 우리가 미처 볼 수 없는 시공에 이전의 무수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마치 도서관의 책처럼 보관되어 있다. 그것들에게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통하지 않는다. 또한, 이미 존재하는 미래의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역시 수천억 혹은 무량수(無量數)로 잘게 잘려 우리 우주 혹은 다른 우주의 시공간에 걸려 있다. 지구적 시간 개념에 근거한 멀티우주에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예정된 일들이 잠시 나타났다가 우리가 모르는 차원으로 사라지거나 일부가 보관될 뿐이다.
해주를 본관으로 하는 나는 족보에 올라있는 선조들을 일별해 보고 무척 두려워하고 있다. 천 년 전에 살던 선조들의 유전인자가 나에게 이어지고 있다. 천년쯤 후에 또 다른 나의 유전인자들이 천 년 전 나의 기록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역적질을 한 인물이라면 우리 우주를 포함한 다중우주 속에 지구적 개념에서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무수한 나에게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다. 오래전 특별한 이유도 없이 헤어진 첫사랑 S를 보고 싶다면 S를 사랑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으면 된다. 또 다른 곳에 있는 내가 이미 그녀와 부부로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해로 인하여 중간에 마음이 변했다면 그 부부는 이별이 예정되어 있어 조만간 눈물의 강을 건너야 할 운명이거나 이미 황천(黃泉)으로 떠났을 수도 있다.
지천명을 넘기니 시간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일정한 방향도 없이 흐르는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어느새 희끗희끗한 자분치가 가득한 모습에서 나는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11차원의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내가 지구 행성의 나를 보고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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