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21. 5. 24. 22:17

 

 

 

 

                            고려 제8대 황제, 현종(顯宗 : 재위 1009~1031). 불륜으로 태어나 황제가 되기

                            까지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본 단편 소설은 고려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대량원군 왕순(王詢)이 이모인 천추태후의 온갖 음해를 극복하고 황제가

                            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작품화했다. 조선 시대 왕들은 잘 알려졌지만, 고려

                            시대 황제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부디 재미있게 감상하시기

                           바란다.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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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에게 모든 실권을 넘긴 채 남색(男色)과 폭음에 빠져 하릴없이 세월을 묵새기고 있던 황제는 점점 몸이 허약해지면서 자주 병석에 누웠다. 천추태후(天秋太后)는 황제의 환우가 점점 깊어가자 노골적으로 정권 탈취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치양은 인사권을 장악하여 고려 조정의 만조백관을 좌지우지했다.

 

전국에서 벼슬을 원하는 자들이 뇌물을 바리바리 싣고 김치양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김치양은 거둬들인 뇌물로 삼백여 칸이나 되는 저택을 짓고 정원에 아름다운 정자와 환상적인 연못을 꾸며 밤낮으로 천추태후와 놀아났다. 그는 자신의 사당을 짓기 위해 개경 백성들을 강제로 부역에 동원하여 원성을 사기도 했다.

 

김치양의 전횡으로 지존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조정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황제는 김치양을 축출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천추태후의 교묘한 방해로 번번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권한과 권위를 완전히 상실한 황제는 정사를 소홀히 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그것은 바로 남색이었고 한번 빠져든 황제는 헤어날 줄 몰랐다.

 

남색의 대상인 유행간(庾行簡)은 김치양 일파로 용모가 여인들도 시기할 만큼 무척 아름다웠다.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유행간은 국사(國事)를 농단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모든 정사의 처리에 관하여 유행간에게 자문한 뒤에 처리할 정도였다. 유행간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의 행동은 김치양과 마찬가지로 오만하고 방자했다. 유행간은 중신들에게도 턱과 눈빛으로 황제의 명을 지시했다. 황제의 측근과 조정의 관리들은 유행간을 황제처럼 받들었다.

 

유행간은 발해 출신 유충정(劉忠正)을 황제에게 소개했다. 유충정 역시 외모가 수려하고 아름다웠으며, 언변이 뛰어나 금방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결국, 고려 조정은 유행간과 유충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처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두 사람은 황제의 명령을 핑계로 조정 관리들의 인사를 마음대로 농단했으며, 자신들이 황제인 것처럼 궁인들을 대동하고 다녔다.

 

“이런 멍청한 놈들! 신혈암에 소군이 보이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그놈이 어디로 갔다는 것이냐? 네놈들이 뭘 잘못 본 게 아니냐? 벌써 두 번이나 실수했다. 소군이 만약에 신혈암에 없다면 이는 곧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현지를 이탈한 것이다. 내일 새벽에 다시 가서 반드시 그놈을 죽여라. 또 실수하면 네놈들 멱을 따버릴 것이야.”

 

김치양이 천가와 백가에게 고성을 질러가며 노발대발했다. 김치양의 심복들이 물러가고 천추태후가 김치양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그녀의 얼굴은 간밤에 마신 술과 환락의 여운에 취해 도화(桃花)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김치양의 집무실은 천추전에 가까이 있었다.

 

“우복야, 간밤에 봉상과 함께 구사하신 육봉 회전의 묘기는 너무나 황홀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정신이 반쯤은 나간 상태랍니다. 오늘 밤에도 다시 시동을 걸어주세요. 예전에 내가 늘 즐기던 방술보다 강도가 엄청 세었습니다. 내가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하던 기교였습니다. 날로 정치해지는 우복야의 현묘한 기교에 나는 진실로 탄복하고 있답니다.”

 

천추태후는 독수공방하는 과부로 있기에는 너무나 혈기가 많았다. 경종에게는 다섯 명의 왕후가 있었다. 그중 오로지 천추태후가 된 헌애왕후만이 아들을 낳아 궁궐에 기거하게 되었다. 나머지 왕비들은 모두 사가(私家)로 나가서 살아야 했다. 경종에 이어 황제가 된 성종은 천추태후의 친 남동생이었다.

 

“태후는 은이를 출산한 뒤로 더욱 물이 올랐습니다. 궁궐에는 태후의 원숙한 미모를 따를 여인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합기의 묘술(妙術)도 갈수록 세련되어 내속을 뒤집어 놓는 기술은 가히 고려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김치양이 눈을 흘기며 천추태후를 추어주었다.

 

“어머나! 우복야, 정말이지요?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지요?”

“정말입니다. 태후와 운우지락을 나눌 때마다 나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소녀(素女)를 만난 착각에 빠질 정도랍니다.”

김치양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천추태후를 달콤한 말로 달뜨게 했다.

 

“우복야, 천추전으로 옮기시지요. 조촐한 주연을 준비했습니다. 신혈소군은 오늘 중으로 숨통이 끊어질 것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아, 태후께서 무슨 방책이 있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에 신혈암에 보냈던 놈들이 실패하여 오늘 밤에 다시 보내려 했습니다. 과연 태후십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놈 인생도 오늘로 끝장입니다.”

 

김치양은 그럴듯한 말로 사십 중반의 여인을 희롱하고 있었다. 몸피가 임신한 여인처럼 퉁퉁한 천추태후는 간부(姦夫)의 칭찬에 그만 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아비 경종이 스물일곱에 승하했을 때 천추태후는 열일곱이었다. 그녀는 정치적 야망이 크고 정열적인 여인이기도 했다. 그녀의 허허로운 가슴을 눈치 빠른 김치양이 재빨리 파고든 것이었다.

 

천추태후의 아들이 황제가 되면서 고려는 그녀의 천하가 되었다. 천추태후는 김치양이 보낸 자객들이 대량원군 암살에 실패했다고 하자, 피식 한번 웃고 나더니 김치양에게 귓속말로 속살거렸다. 그녀의 말에 김치양은 무릎을 치며 파안대소했다. 두 사람은 대낮부터 주지육림에 빠져 독주를 마시며 서로의 육신을 주물러댔다.

 

천추궁에는 고려의 각지에서 진상한 진기한 물건들과 산해진미가 곳간에 차고 넘쳤다. 송나라와 바다 건너 왜국에서 수입된 명주(名酒)가 내실로 들어오고 옥반가효를 든 궁비(宮婢)들이 연신 천추전 내밀한 곳을 들락거렸다. 천추전에는 대낮에도 향이 피워져 있어 진한 향 내음이 물씬 풍겼고 밖에는 병사들이 물샐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자비로운 천추태후께서 대량원군에게 다과를 보내셨다.”

“원군은 어디 계시느냐?”

 

중화 시간이 약간 지나서 한 떼거리의 사람들이 신혈암에 도착했다. 나인 두 명과 호위 무사 열 명이 말을 타고 나타난 것이었다. 차림새로 보아 궁에서 나온 사람들이 분명했다. 진관은 암자 입구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리자 대량원군을 수미단 아래로 몸을 숨기도록 했다. 암자 마당으로 들어선 호위 무사가 진관을 째려보며 소리쳤다.

 

“아미타불. 원군께서는 출타하셨습니다.”

“나는 천추태후 님의 지시를 받고 다과를 가져온 김상궁이라 합니다. 신혈소군께서 언제쯤 오십니까? 소군께서 태후님이 보낸 다과를 감사한 마음으로 젓수시는 것을 보고 돌아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중년 여인이 진관에게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조쌀해 보이는 김상궁은 보통내기가 아닌 듯 했다. 눈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보통 사람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쳐도 압도당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세사(世事)에 도통한 진관에게 그녀의 살기 띤 눈빛은 통하지 않았다.

 

“대량원군께서는 산에 오르면 밤늦게나 돌아오십니다. 어떤 날은 인근의 암자에서 주무시고 다음 날 새벽녘에 오실 때도 있습니다.”

김상궁은 기가 막혔다.

 

‘소군을 오늘 중으로 죽여야 한다. 어서 가서 그 다과를 먹이고 그놈이 피를 토하고 자빠지는 꼴을 보고 오너라.’

김상궁의 뇌리에 노여움 가득한 천추태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김무관님, 군사들을 풀어서 삼각산 일대를 뒤져 소군을 찾아보시지요. 오늘 중으로 일을 매듭짓고 결과를 태후님께 고해야 합니다.”

김상궁이 김무관이라는 자에게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알겠습니다.”

무사들은 말을 암자에 매어두고 모두 산으로 흩어져 대량원군을 찾아 나섰다. 그제 내린 눈이 산과 계곡에 쌓여 삼각산은 아아한 설산으로 우뚝 서 있었다. 군사들이 산속으로 흩어지고 두 나인은 요사채에 들어 수다를 떨었다.

 

 

[폐하, 대령원군 왕순이 아뢰옵니다. 어제 새벽에도 소신을 죽이려는 자객이 신혈암에 난입하였습니다. 다행히 주지승의 기지(奇智)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달 들어 벌써 네 번씩이나 소신을 죽이려는 자들이 찾아오니, 두렵고 황망하옵니다. 속히 소신을 구명해주소서.]

 

 

황제는 대량원군의 서신을 받고 가슴을 쳤다. 사실 대량원군이 황제에게 서신을 보낸 것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서신이 황제의 손에 닿기도 전에 유행간이 먼저 보고 없애버리는 바람에 황제는 대량원군의 현재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행히 유충정에게 대량원군의 서신이 들어가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대량원군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구나. 그 애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낸 사람은 분명 김치양이 아니면 어머니일 것이다. 나의 건강이 날로 악화하고 있다. 내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 대량원군이 보위(寶位)를 이어받아야 한다. 어머니와 김치양 사이에 태어난 김은이 보위에 앉는다면 왕건 할아버님께서 세운 고려는 그날로 끝장나게 될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황위(皇位)가 김씨에게 넘어가는 일은 막아야 한다.’

 

무자식인 황제는 몸이 점차 쇠약해지자, 자신의 후계를 당숙(堂叔) 뻘이며 동시에 이종사촌 동생인 대량원군 왕순(王詢)에게 양위하려고 했다. 황제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미리 손을 쓰기 전에 대량원군에게 양위할 것을 결심하고 신임하는 중신들을 불렀다.

 

“*합문사인과 *좌사낭중은 대량원군을 어찌 생각하오?”

황제는 최측근인 유행간과 유충정을 불렀다.

 

 

황제가 유행간과 유충정이 김치양과 가깝게 지내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황제의 모든 전교나 어지(御旨)가 두 사람의 손을 거쳐 시달되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대량원군은 불륜의 씨앗입니다. 그자를 가까이 두시면 안 됩니다. 현재는 출가하여 신혈암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자보다는 차라리 천추태후 님의 아들인 김은을 태자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 합당하옵니다. 김은은 우복야와 천추태후 님의 소생이니 태조 황제의 피도 흐르고 있사옵니다. 왕순은 이미 부처의 제자가 되었으니 속히 김은을 태자로 책봉하소서.”

유행간은 노골적으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복심을 전하고 있었다.

 

“김은 또한 불륜의 씨앗이 아니오?”

황제의 용안에 노기(怒氣)가 서렸다.

 

* 합문사인 - 閤門舍人. 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던 정4품 관리.

* 좌사낭중 - 左司郎中. 5품 관리.

 

“폐하, 대량원군은 태조 황제의 유일한 손자입니다. 즉 양친이 모두 태조 황제의 피를 이었다는 증좌입니다. 김은은 천추태후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반쪽은 우복야 김치양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원군은 타의(他意)에 의해 할 수 없이 입산하셨습니다만, 폐하의 명이 있으면 언제든 환속하실 수도 있사옵니다.”

 

유충정은 은연중 유행간의 주장에 각을 세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

 

‘음-, 유행간은 김치양의 사람이다. 그러니 김치양의 자식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 출신인 유충정은 겉으로는 유행간과 같은 부류로 보이기는 하지만 김치양에 대한 반감이 있구나. 앞으로는 유충정을 믿어야겠구나. 얼마 전에도 자신이 김치양으로부터 내응(內應)을 부탁받았지만 거절했다고 짐에게 고한 바 있다. 진정으로 유충정이 충신이로다. 유행간을 왕륜사(王輪寺)에 심부름을 보내야겠다.’

 

황제는 유행간에게 왕륜사에 가서 선대왕 성종의 명복을 비는 재(齋)를 올리도록 했다. 유행간은 영문도 모르고 황제의 명을 수행해야 했다. 유행간이 없는 틈을 타서 황제는 유충정을 은밀히 불러 밀지를 건넸다.

 

“좌사낭중은 이 밀지를 지금 즉시 중추원부사 채충순에게 전해주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유충정은 시간이 없다는 황제의 말뜻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유충정은 대전을 비울 수 없어 감찰어사 고영기(高英起) 편에 황제의 밀지를 채충순에게 전달하게 했다. 고영기는 즉시 채충순을 찾아갔다.

 

 

[짐의 병이 점차 위독해져서 곧 죽게 될 것만 같습니다. 태조(太祖)의 정통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 왕순만 남았습니다. 경은 중추원사 최항(崔沆)과 더불어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대량원군을 보필하여 고려의 사직(社稷)이 다른 성씨에게 돌아가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폐하,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채충순은 고영기가 전달한 황제의 밀지를 읽고 대성통곡하였다. 고영기가 대궐을 나가고 한 시진이 지나서 도성의 서쪽 신의문이 열리고 곧 내성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중광전으로 두 신하가 들었다. 삼경이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폐하, 중추원부사 채충순 입시하였습니다.”

“폐하, 중추원사 최항입니다.”

 

두 신하가 황제 앞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두 사람은 황제의 밀지를 받고 즉시 대궐로 달려온 것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나라에 변고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황제는 신하들을 만나지 않았다. 채충순과 최항은 황제가 가장 의지가지하는 신하였다. 대궐 곳곳에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심어 놓은 심복들이 있어 황제는 낮에는 중신을 별도로 부르지 않았다.

 

* 중광전 - 重光殿. 고려 개경 궁성의 전각으로 황제가 주로 기거하는 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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