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혈소군(1)
고려 제8대 황제, 현종(顯宗 : 재위 1009~1031). 불륜으로 태어나 황제가 되기
까지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본 단편 소설은 고려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대량원군 왕순(王詢)이 이모인 천추태후의 온갖 음해를 극복하고 황제가
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작품화했다. 조선 시대 왕들은 잘 알려졌지만, 고려
시대 황제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부디 재미있게 감상하시기
바란다.
- 여강 최재효
헌애왕후(좌)와 헌정왕후
신혈소군
1
낮부터 내린 눈으로 삼각산은 설산이 되었고 세상은 온통 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늘이 한나절 사이에 산하를 청정무구한 세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낮달이 구름 속을 수시로 드나들다가 이내 먹장구름 뒤로 들어가 버려 사방이 어스레했다.
산중의 겨울은 해가 짧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보라가 뽀얗게 일며 마치 안개가 산을 휘감듯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냈다. 눈이 가지에 쌓인 무게를 견디지 못한 노송(老松)들이 계곡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 가지를 잘라냈다.
암자 뒤편에서 부엉이가 각혈하듯 울어대는 사품에 진관(津寬)은 설잠을 자야 했다. 그의 곁에는 사미승 경보(敬甫)가 코를 골고 있었다. 진관은 수마가 찾아오지 않자 밖으로 나가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한 시진 동안 땀을 흘리며 힘을 쓴 덕분에 신혈암 마당은 말끔해졌다. 달은 이미 서산으로 기울었지만, 장명등이 희미하게 주위를 비추면서 희끄무레하게 사물들이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냈다.
신혈암은 서너 해 전에 진관이 주지로 오면서부터 개경 사람들에게 영험한 도량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혈암은 삼각산 서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데 신라 중기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진관이 주지로 있으면서 차츰 암자다운 형태를 갖추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과 그 옆에 지어진 요사(寮舍) 한 채가 신혈암 불사의 전부였다. 요사채에는 진관과 사미승 경보가 기거하고 있었다.
삼경(三更)이 끝나갈 때쯤이었다. 진관은 새벽 예불을 준비하기 위해 평소보다 반 시진 일찍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관이 곯아떨어진 경보를 흔들어 깨웠으나 잠꼬대만 할 뿐이었다. 그때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감각 예민한 진관에게 감지되었다.
진관은 감각도 뛰어났으며 검술에도 달통한 스님이었다. 늘 산에서 거주하다 보니 바람 소리,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 짐승 우는 소리, 새소리, 나무 흔들리는 소리 등 자연의 평범한 음향에도 민감했다. 진관은 인기척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는 문에 구멍을 내고 밖을 살폈다.
‘앗, 웬 사람들이 이 시각에…….’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 씨에게 실권을 빼앗긴 황제 왕송(王誦)은 합문사인 유행간(庾行簡)을 끌어안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간밤에 늦도록 황제는 유행간과 술을 마셨다. 유행간은 고려 최고의 미남자로 소문난 간신으로 황제와 *용양지총의 관계였다.
황제에게는 선정왕후 유씨(劉氏)와 요석택 궁인 김씨(金氏) 등 두 명의 여인이 있었지만, 황제는 그들을 거의 찾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황제와 두 후비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황제는 경종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선대왕 성종(成宗)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자 그의 뒤를 이어 고려 제7대 황제에 등극했다.
* 헌애왕후 - 獻哀王后. 왕건의 손녀이며, 왕욱(王旭)의 딸. 고려 제5대 황제인 경종(景宗)의 비, 고려 제7대 황제
목종의 어머니로 일명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리기도 한다.
* 용양지총 - 龍陽之寵. 전국시대 위왕(魏王)과 용양군(龍陽君)의 관계. 남색(=동성애)을 즐기는 사이를 말한다.
심상이 나약하고 겁이 많은 황제 왕송은 18세에 황제가 되었음에도 생모인 헌애왕후가 섭정하고 있었다. 황제의 생부인 고려 5대 황제 경종(景宗)에게는 네 명의 왕비와 한 명의 후궁이 있었다. 세 번째 왕비 헌애왕후와 네 번째 왕비 헌정왕후(獻貞王后)는 친자매 사이였다.
경종과 두 왕비는 사촌지간으로 모두 태조 왕건의 손자녀였다. 경종이 스물여섯에 요절하자 두 살밖에 안 된 태자 왕송 대신에 황제의 사촌 형제인 개령군 왕치(王治)가 황제에 오르니 곧 고려 6대 황제 성종(成宗)이었다. 성종의 친누이가 바로 헌애왕후이고, 아래 친여동생이 헌정왕후였다. 스물 중반의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미색이 뛰어났다.
태조 왕건은 호족세력의 연합을 위해 왕비 여섯 명, 후궁 스물세 명과 정략결혼을 했다. 왕건은 왕자 스물다섯, 왕녀 아홉 명을 두었다. 왕건의 여섯 번째 아들은 왕욱(王旭) 이고, 여덟 번째 아들은 왕욱(王郁)인데 각자 어머니는 달랐다. 왕욱(王旭)의 둘째 아들이 성종이고, 둘째 딸이 헌애왕후이며, 셋째 딸이 헌정왕후였다.
헌애왕후는 경종과의 슬하에 왕자 왕송을 낳아 궁궐에 기거했으나, 자식 없는 헌정왕후는 사가에 나가 살아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헌정왕후 사가 인근에 숙부인 왕욱(王郁)이 살고 있었다. 쉰 살이 넘도록 미장가로 혼자 살고 있던 왕욱은 이복형의 딸이며, 선대 황제 경종의 네 번째 왕후인 헌정왕후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왕욱이 사냥하러 가거나 낚시를 갈 때면 그의 곁에 늘 헌정왕후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야 말았다. 헌정왕후가 그만 숙부의 씨앗을 잉태하고 만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이 왕후의 오라버니인 성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성종은 선황제의 부인을 건드린 죄로 숙부인 왕욱을 경상도 *사수로 귀양 보냈다. 왕욱이 귀양 가는 날 헌정왕후는 사람들의 눈이 있어 차마 동구 밖까지 나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정인(情人)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헌정왕후는 뒷산에 올라 떠나가는 왕욱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뿌리며 통곡했다. 왕후는 그렇게 한나절 울다가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통을 느꼈다. 왕후는 집 근처 느티나무 아래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난산(難産)이라, 출산 과정에서 너무 많은 하혈로 인하여 헌정왕후는 이틀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사통으로 인하여 태어난 아기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성종은 아기를 불쌍히 여겨 순(詢)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보모(保姆)를 붙여 궁궐에서 보살피게 했다.
* 사수 - 泗水. 현, 경상남도 사천시
“백가야, 저기가 불당이고, 그 옆이 요사채가 맞지?”
“맞을 거야. 천가야, 오늘도 실패하면 안 돼. 실패하면 우리는 우복야님에게 죽는다고. 오늘은 반드시 *신혈소군을 죽여야 해.”
“그런데 소군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죽일 거 아닌가?”
백가와 천가는 김치양이 고용한 그악스러운 자객이었다. 그들은 나흘 전 새벽에도 신혈암에 접근하여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진관의 기침 소리를 듣고 사라진 적이 있었다. 두 자객은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법당으로 접근했다. 캄캄한 밤이기는 했지만 어스름한 별빛과 법당 앞에 있는 장명등의 희미한 불빛으로 그들의 윤곽을 대충은 파악할 수 있었다.
* 신혈소군 – 神穴小君. 소군은 왕자의 신분으로 출가한 경우 부르는 호칭이다. 따라서 신혈소군은 신혈암에
거주하고 있는 대량원군 왕순을 가리킨다.
‘저놈들은 자객이 틀림없다. 며칠 전에도 법당과 요사채 주변을 살펴보다가 돌아갔는데 오늘 또 왔구나. 그러나 네놈들은 절대로 대량원군을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을 당겨서 예불을 올려야겠다.’
“경보야, 일어나거라.”
진관은 요사채에 촛불을 밝히고 경보를 흔들어 깨웠다. 경보는 좀 덩둘해 보이기는 하지만 심성이 착한 사미승이었다.
“스님, 너무 이르잖아요?”
“쉿-! 오늘은 다른 날보다 일찍 예불을 올려야겠다. 밖에 밤손님들이 왔다. 너는 모르는 척하고 늘 하던 대로 행동해야 한다. 절대로 대량원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경보는 잠이 덜 깬 상태로 갈지자걸음을 걸으며 진관의 뒤를 따라 법당으로 들었다. 경보는 밤손님이 왔다는 말에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연신 하품을 해댔다. 진관과 경보가 요사를 나오자 백가와 천가는 법당 뒤로 몸을 숨기고 두 사람의 움직임을 살폈다.
“천가야, 저 늙은 중이 우리가 온 것을 눈치 챈 거 아닐까?”
“흐리마리한 늙은이가 어떻게 우리가 왔는지 알겠는가? 일단 숨어서 지켜보자고. 지켜보면 신혈소군이 나타날 수도 있을 거야.”
헌애왕후는 외가 쪽 사람으로 엉터리 속승(俗僧) 노릇을 하던 김치양(金致陽)과 간통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사통은 선대 황제인 성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누이의 사통을 눈치 챈 성종은 김치양을 죽이려 했으나 헌애왕후의 사정으로 태장(笞杖)에 처한 뒤에 원지에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김치양은 *동주 사람으로 헌애왕후 황보 씨의 외척(外戚)이었다. 그는 성격이 간교하고 양물이 거대하다고 소문난 인물이었다. 거짓으로 중 행세를 하며 헌애왕후의 처소인 천추궁에 출입하기 시작하면서 온갖 추문(醜聞)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런데 잔병치레가 심했던 성종이 서른여덟 살로 공주만 둘을 남기고 승하하니 헌애왕후의 친생자인 왕송이 성장하여 다음 보위를 이었다. 헌애왕후는 자신을 천추태후라 부르게 하고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오빠 성종에게 밉보여 귀양 갔던 김치양을 불러들여 통사사인(通事舍人)이란 벼슬을 주었고 공공연히 궁궐에서 부부처럼 살았다. 얼마 후에 헌애왕후는 김치양의 아들을 낳았다.
* 동주 - 洞州. 지금의 황해도 서흥(瑞興)
어머니의 심한 간섭으로 정치에 흥미를 잃어버린 황제는 밤마다 미남자 유행간과 동성애에 빠져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다. 천추태후는 황제에게 후사가 없자 자신과 김치양과 사이에 낳은 불륜의 씨앗인 김은(金銀)을 황제에 앉히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김치양에게 통사사인에 이어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事)라는 막강한 자리를 주었다. 김치양은 유행간, 이주정, 문인위 등 자신의 심복들을 요직에 앉히고 뇌물을 받아 챙기는 등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듣고 있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김은을 황제에 앉히려는데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천추태후의 친여동생인 헌정왕후 소생 왕순(王詢)이었다. 왕순은 두 살 때 아버지 왕욱의 귀양지인 사수로 보내져 배방사란 사찰에서 돌보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 왕욱이 병사하면서 왕순은 그곳에서 지내다 개경 궁궐로 올라와 생활하게 되었다. 황제는 왕순을 대량원군에 봉하고 극진히 보살폈다.
황제에게 후사가 없으니 이대로 간다면 사생아이긴 하지만 왕건의 손자인 대량원군이 다음번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정 안팎에서는 황제의 건강이 날로 악화하자 대량원군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중신들과 백성들의 관심이 대량원군에게 집중될수록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 우복야 겸 삼사사 - 우복야는 정2품으로 국방, 외교, 입법, 호구 등 모든 부서(상서성)의 장관 중 하나고,
삼사사는 정3품으로 국가 재정 담당 부서(삼사)의 차관이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궁궐에 둘 수 없었다. 그녀는 대량원군으로 인해 황제의 권위가 떨어진다며 그를 개경의 숭교사(崇敎寺)로 강제로 출가시켰다. 그러나 조정 중신들과 개경의 민심이 출가한 대량원군에게 집중되자 이에 부담을 느낀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양주의 삼각산 자락에 있는 신혈암으로 보내고 신혈소군이라 부르게 했다.
개경에서 양주 신혈암까지는 이백여 리(里) 떨어진 거리였다. 대량원군을 개경에 머물게 하면 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형성될 것을 우려한 천추태후의 간악한 조치였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왕순을 강제로 승적(僧籍)에 올려 신혈사로 보내놓고도 안심할 수 없었다. 조정의 신료들이 모두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군부의 인사들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난잡한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백가야, 늙은 중놈과 행자승 목소리만 들리는 걸 보니 불당 안에 신혈소군이 없는 게 분명해.”
“천가야, 요사채를 뒤져보자고. 불당 안으로 들어간 늙은 중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를 않으니, 여기서 날을 샐 수는 없지 않은가?”
두 자객은 요사채로 접근하여 주위를 살펴보았다. 요사채 밖에서는 대량원군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천가가 밖에서 망을 보고 백가가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촛불이 켜져 있는 요사채 안에는 스님들이 사용하는 옷가지와 이불 그리고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전부였다. 진관은 요사채를 나오면서 일부러 불을 켜두었다.
“요사채 안에는 아무도 없네.”
“그렇다면 신혈암에 소군이 없단 말인가? 불당과 요사채 안에 없다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오늘도 실패하면 우린 죽음 목숨이다.”
두 자객은 염불 소리가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법당과 요사채 주변을 살펴보다가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자객들이 법당 문틈으로 안을 살펴보아도 진관과 사미승의 모습만 흔들리는 촛불에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반시진이 더 흐르고 새벽 예불이 끝났다.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물들고 있었다. 두 자객은 떡심이 풀린 채 별 소득 없이 물러가야 했다.
“백가야, 불당 안으로 난입하여 저 늙은 중을 닦달해볼까?”
“저 노승은 검술의 달인이라고 알려졌네. 우리는 상대가 안 돼. 자칫 저 늙은 중을 건드렸다가 우리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그럼, 어찌한단 말인가? 몸이 얼어 더는 밖에 있기 힘든데…….”
“할 수 없네. 우복야님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수밖에……. 일단 철수하자고. 여기 있다가 얼어 죽겠어.”
동이 터오고 있었다. 진관은 암자 주변을 살펴보았다. 법당과 요사채 앞마당에 사내들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찍혀있었다. 자객들이 물러간 것을 확인한 진관은 수미단(須彌壇) 뒤로 돌아가 수미단 아래로 통하는 비밀 문을 열었다. 수미단 아래는 좋이 서너 평 크기의 암굴이 있는데, 그 암굴의 소재는 진관과 경보 그리고 대량원군만 알고 있는 비밀 장소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