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20. 8. 1. 17:54

 

 

 

 

 

 

                                            내례부인

 

                                                                                                                                   - 여강 최재효

 

                                                 終

 

이매랑이 아달라이사금에게 타살당하자 서라벌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맑았던 하늘이 찌뿌둥한 날씨로 변했고,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면서 흰 까마귀 떼가 서라벌 하늘을 날아다녔다. 이매랑이 매를 맞아 죽은 소식은 계림국 전역으로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국론은 그미와 이매랑의 죽음을 애도하는 편과 아달라이사금을 지지하는 편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서라벌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서라벌 백성들은 나라에 큰 변란이 닥칠 것이라며 웅성거렸다.

 

나라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자 아달라이사금은 비상령을 내려 해가 지면 통금을 실시하여 백성들이 모여 집회를 열거나 열 명 이상 모이지 못하게 했다. 그미는 건강한 아들을 출산하자 산후조리를 이유로 친정 남동생인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미의 어머니는 마제갈문왕(摩帝葛文王)의 딸로 김알지의 후손이었다. 그미가 아도갈문왕의 저택으로 피신하자 그녀를 중심으로 박, 석, 김씨들이 세를 규합하였다.

 

“그놈은 나의 지아비가 아닙니다. 이제는 내 인생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정인(情人)을 때려죽인 그놈을 반드시 처단할 것입니다. 그놈뿐만 아니라 그놈의 자식들까지도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인생은 이제부터 석씨가문의 핏줄인 내해와 함께할 것입니다.

나는 그놈과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음을 다잡고 나를 지원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 편이 그놈에게 패하는 날이면 모두 죽습니다. 여러분 개개인과 가문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명심, 또 명심해야 합니다.”

 

그미는 내해를 안고 젖을 먹이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미가 비록 왕궁을 떠나 친정에 나와 있었지만 박씨, 석씨, 김씨 세력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벌휴공은 손자에게 내해(奈解)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내해는 서라벌 정가를 쥐고 흔드는 세 가문을 한데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미는 지아비 아달라이사금을 ‘그놈’이라 칭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지어미가 외간 남자와 통정을 하여 아이까지 출산하였지만, 아달라이사금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계림국의 군주로서 그미에게 불륜의 책임을 물어 벌을 내릴 수 없었다. 이제는 애정은 고사하고 증오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미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미 뒤에 버티고 있는 세 성씨의 세력을 아달라이사금은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특히, 김씨 문중의 사람으로 파진찬 벼슬을 하는 김구도(金仇道)는 김알지의 직계로 서라벌 김씨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무장으로 국경을 침범한 백제군을 여러 차례 격퇴한 공적으로 조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부상하였다. 벌휴공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김구도와 상의하였고 그의 조언을 따랐다.

 

김구도는 김씨 가문이 역대 계림국 군주의 배우자를 양산하는 데에 그치고 있는 점이 늘 불만이었다. 그는 언젠가는 김씨 문중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와 계림국의 지존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세력이 막강한 박씨와 석씨의 견제로 속내를 표출할 수 없는 처지였다.

 

김구도는 큰아들 미추와 딸 옥모에게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 김미추는 헌거롭고 온화한 성품으로 조정 내 인사나 서라벌에서 제법 힘 좀 쓰는 사람들과 폭넓은 교제를 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그놈의 자식들을 살려두면 안 됩니다. 오늘 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야 합니다. 후환이 될만한 싹은 빨리 없애는 게 좋아요.”

 

그미는 석씨 가문의 사람을 자객으로 고용해 월성(月城) 담장을 넘게 했다. 아달라이사금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 살아 있으면 장차 내해에게 득이 될 게 없었다. 그미의 명을 받은 자객들은 궁궐 담장을 넘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아달라이사금의 두 아들의 명줄을 끊어 놓았다. 아달라이사금은 두 아들이 자객의 습격을 받고 죽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누가 보낸 자객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년이 나의 자식들을 죽인 게 틀림없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의 목숨까지 노리고 자객을 보낼 년이로다.’

 

“*이찬(伊湌), 오늘부터 궁성의 경계를 강화하고, 나의 경호 인력을 지금의 두 배로 늘리시오. 또한, 병부에 명해 서라벌에서 반역의 기미가 있는지 철저히 감시하게 하고, 혹여 그런 자가 있다면 즉시 잡아들여 물고를 내도록 하시오.”

“명을 받잡겠습니다.”

 

이찬 흥선(興宣)은 아달라이사금의 심복으로 있으면서 이사금의 지령을 받아 조정의 많은 일을 처리해왔다. 그는 김구도와 척을 지고 있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협력도 하는 유연함을 보이기도 했다. 두 아들이 피살당하자 아달라이사금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감을 잡고는 있었지만, 물증이 없어 속을 끓였다.

 

불안해진 아달라이사금은 밤마다 후궁이나 궁녀들과 어울려 술을 마셔댔고 음행도 서슴지 않았다. 후궁들도 궁중에서 일어난 피살 사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오리무중에 있는 서라벌 정치 격변을 예의 주시하였다.

 

“골정공은 내 아들의 백부(伯父)입니다. 이 아이가 잘돼야 석씨 가문이 번창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부탁하는 것이니, 한 치의 어긋남도 있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이행돼야 합니다. 박씨와 석씨 가문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그미는 붉은 봉투와 금궤를 내밀었다. 그 봉투 안에는 그미와 척을 지고 있는 정계 인사들 명단이 적혀 있었다. 살생부(殺生簿)였다. 그미는 수십만 금의 재산을 소유한 거부이기도 했다. 그미의 재산은 아달라이사금과 그의 추종자들이 지닌 재산보다 많았다.

 

* 이찬 – 계림국 17 관등 중 두 번째.

 

“부인, 이 분도 포함되는 겁니까?”

그미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무서운 여인이로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인데 사람의 목숨을 거래한단 말인가?’

 

골정은 그미의 지령을 받고 서라벌에서 백여리 떨어진 은밀한 곳에 산채(山砦)를 짓고 검술에 능한 자와 장사들을 모았다. 한 달 만에 전국 각지에서 백여 명의 장사들과 검술에 능한 달인 한 사람이 산채에 발을 들였다. 검술의 달인은 왜의 야마타이국(邪馬壹國) 출신으로 일당백 하는 자였다.

 

장사들은 그의 지도하에 검술과 살인기술을 익혔다. 골정은 수시로 그미의 지령을 받고 사병을 양성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사병들은 매달 일정한 돈을 받으며 무예 연마에 정진했다.

 

“벌휴공, 언제 거병해야 좋겠습니까?”

“소신이 그렇지 않아도 요즘 천문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벌휴공은 이매랑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미와 통정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제 손자 내해까지 얻은 상태에서 그의 야망은 그미를 능가하고 있었다. 당장 아달라이사금이 붕어한다면 그미가 차기 군주 후계 순위 1위가 되지만, 아직 계림국에서 여인이 지존이 된 적이 없으므로 큰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벌휴공은 그미와 통 큰 거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벌휴공도 잘 아시다시피 골정공이 지금 모처에서 사병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탐랑성(貪狼星)의 기운이 쇠하고, 옥형성(玉衡星)의 기운이 창성(昌盛)하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에 나라에 흉사와 동시에 경사가 있을 조짐입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탐랑성은 아달라이사금을 뜻하고 옥형성은 그미를 의미했다. 그러나 벌휴공은 자신의 별자리를 발설하지 않았다. 그미도 벌휴공이 어떤 별의 정기를 타고났는지 묻지도 않았다.

 

‘나는 북두칠성의 여섯 번째 별인 개양성(開陽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그 별은 일명 무곡성(武曲星)이라고도 하며 *자미궁(紫微宮)의 경호를 맡고 있으므로 북두칠성 일곱 개 별 중에서 가장 힘이 세다. *육정육갑금쇄경(六丁六甲金鎖經)에서 말하기를 ‘무곡성은 하늘의 모든 별을 통솔하며, 흉성(凶星)과 악살(惡殺)을 물리친다.

 

금빛 갑옷을 입고 왼손에 붉은 독수리를 오른손에 *천부인(天符印)을 가지고 있다. 내가 주문을 외우면 *부타부(斧打符)가 뇌성으로 화하여 하늘에서 응한다. 내례부인이 내해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다. 서라벌에서 가장 큰 존재는 바로 나라는 것을 모르는구나. 이제부터 나의 존재감을 과시해야겠다.’

벌휴공은 그미의 머리 위에 있었다. 다만, 그미가 눈치를 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길일을 잡으면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미와 헤어진 벌휴공은 김구도의 집을 찾았다.

 

 

* 자미궁 - 하늘 임금과 왕비, 태자와 후궁 등의 가족과 신하와 장군들이 거처하는 궁궐

* 육정육갑금쇄경 – 도술로 조화를 부리고, 만 가지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비급이 기록된 도교 서적

* 천부인 – 천자의 표지, 곧 임금의 상징

* 부타부 – 도끼의 위력을 나타내는 부적

 

 

“파진찬, 술 한잔 얻어 마시려고 왔습니다.”

“사돈,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않아도 술 생각이 나던 참이었습니다.”

 

벌휴공은 김구도에게 자신의 대의(大義)를 알렸다. 김구도는 자신의 딸이 벌휴공의 큰아들과 부부의 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벌휴공의 뜻을 존중하며,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사 날짜까지 잡아 놓고 있었다.

 

“나는 사돈어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습니다.”

 

“김씨 가문은 예전부터 우리 석씨들과 피를 나눈 사이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한번 개벽시킬 때가 되었습니다. 나를 믿고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이심전심이었다. 벌휴공은 다음날 새벽이 될 때까지 김구도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들 곁에는 김구도의 딸이며, 벌휴공의 큰며느리인 옥모가 앉아 밤새 술 시중을 들었다. 또한, 김구도의 큰아들 미추도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두 사람의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군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김구도는 이사금은 물론이고 최고위 조정 중신도 함부로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는 큰 인물이었다. 큰 뜻을 품고 있는 자라면 반드시 김구도의 지원이 있어야 했다. 서라벌의 시간은 마치 기둥에 붙잡아 맨 것처럼 더디 흐르고 있었다.

 

“계림국의 군주는 주지육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변혁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라는 한 사람이 통치하는 게 아닙니다. 백성들의 민의를 받들어야 하늘이 돕습니다. 민심은 곧 천심입니다.”

 

벌휴공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공공연히 아달라이사금의 무능을 비난했다. 신고를 받고 군사들이 달려와도 그를 잡아가지 못했다. 그의 주위에는 무장한 수십 명의 갑사가 벌휴공을 경호하고 있었다.

 

“옳소. 벌휴공이 다음번 군주가 돼야 한다.”

“지금의 아달라이사금은 틀렸다.”

 

“해마다 가뭄이 들고 역병이 창궐하여 백성들이 먹고살기 어렵다. 이게 다 군주가 무능한 탓이다. 아달라이사금을 끌어내리고 새 군주를 추대해야 한다.”

“맞습니다. 멍청한 군주는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날이 갈수록 벌휴공의 연설은 백성들에게 먹혀들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단비와도 같았다. 이제 벌휴공은 예언가일 뿐만 아니라 장차 나라를 책임질 수 있는 큰 인물로 서라벌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직접 백성들 앞에 나선 이유는 그미를 의식해서였다. 그미도 벌휴공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서라벌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는 것을 여러 사람 입을 통해 듣고 있었다.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것일까? 내 아들 내해는 너무 어리다. 이매랑이 살아 있다면 좋으련만, 그놈이 죽으면 누구를 차기 군주로 올려야 하나? 내해를 군주로 올리고 내가 수렴청정을 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 하겠지. 그렇다면 누구를 차기 군주로 올려야 한단 말인가? 골정? 아니면 벌휴공?’

 

그미는 밤마다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과 내해의 장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날은 남동생 아도갈문왕과 수작(酬酌)을 할 때도 있었다. 그미가 동생에게 아달라이사금 사후 차기 군주 감에 관하여 물어도 그는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한해가 지나고 새봄이 되면서 서라벌 처녀, 총각들은 기대와 설렘을 안고 밤마다 꽃구경에 빠져 있었다. 특히 월성 근처는 수십 가지 봄꽃이 만발하여 상춘객들로 붐볐다. 귀족들과 고관대작들도 마음 맞는 사람들을 초대해 화전(花煎)을 부치고 술을 마시며, 봄날의 흥취를 만끽했다. 서라벌 사람들이 꽃구경에 정신을 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반달이 서산으로 넘어가자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했다. 옆에 사람이 서 있어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달라이사금은 새벽 늦게까지 후궁 두 명과 주연을 즐기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인시(寅時) 중반쯤 되었을 때였다. 검은 옷차림의 괴한들 두 무리가 월성 동쪽 담장을 넘었다.

 

“아달라는 지금 저 영명궁에서 후궁들하고 잠들어 있다. 영명궁은 지금 약 오십여 명의 궁병(宮兵)이 번을 서고 있다. 살며시 접근하여 화살이나 칼로 모두 죽여라. 절대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

 

제일조는 나를 따르고, 제이조는 검신(劍神)을 따라가라. 목적을 달성하면 흔적을 남기지 말고 철수해야 한다. 만약 궁병에게 체포되면 혀를 깨물고 자결하거나, 극약을 먹고 자살하라. 자, 가자.”

 

두 패로 나뉜 괴한들은 영명궁을 향해 접근했다. 야심한 시각이라 궁궐 수비 군사들도 졸고 있거나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고 있었다.

 

* 인시 – 새벽 3~5시 사이.

 

“거기 누구냐?”

궁병이 소리치자 다른 곳에 있던 궁병들까지 모여들었다.

“쏴라.”

 

괴한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영명궁 전후좌우에 불이 켜져 있어 어둠 속에서도 궁병들의 실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괴한들이 숨어 있는 쪽으로 달려오던 궁병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자객이다. 자객이 들었다.”

궁병 두 명이 달아나며 소리쳤다.

 

“저놈을 쏴라.”

 

삽시간에 영명궁을 지키던 궁병들이 모두 화살이나 칼을 맞고 절명하였다. 괴한들은 아달라이사금과 후궁이 잠들어 있는 지밀전으로 난입하였다. 시녀들이 괴한들을 보고 소리쳤지만 모두 칼을 맞고 쓰러졌다.

 

“아달라를 죽여라.”

 

괴한 한 명이 명령을 내렸다. 후궁 두 명을 끼고 잠을 자고 있던 아달라이사금은 괴한이 침입한 사실도 모르고 코를 골고 있었다. 지밀전은 은은한 황촛불이 켜져 있어 내실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두 명의 후궁들이 전라(全裸) 상태로 잠을 자다가 인기척에 놀라 소리쳤다.

 

“누구냐? 누군데 감히 이사금께서 주무시는 침전에 들었느냐?”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두 후궁이 괴한들에게 호통을 치는 동시에 칼들이 번쩍거리며 춤을 추었다. 두 여인의 머리통이 피를 뿜어대며 지밀전을 굴러다녔다. 괴한들의 대장인 듯한 자가 곤히 잠들어 있는 한 사내를 향해 날카로운 검광(劍光)을 뿜어냈다. 지밀전은 순식간에 선혈로 뒤덮였다.

 

괴한들이 빠져나가고 동이 틀 때까지 궁인들과 궁병들은 아달라이사금이 시해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서 영명궁은 충격에 빠졌다. 반쯤 정신이 나간 조정대신 몇몇이 허둥대며 변고를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들은 나라가 건국되고 처음 있는 일이라 어떻게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사고 현장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붕어한 이사금을 잘 염하라. 그리고 죽은 군사들과 나인들 시신은 비밀리에 궁성 밖에 묻어버려라. 간밤에 있었던 일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이찬 흥선은 신속하게 사태를 수습했다. 아달라이사금이 변고로 붕어하자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들은 그미와 그미의 주변 사람들이었다. 그미는 즉시 자신의 추종 세력들을 아도갈문왕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그미의 부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김씨 세력과 혁거세의 후손들은 대충 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이 곧 계림국의 귀족대표들이었다. 계림국의 군주가 급변사태로 붕어하면 귀족 회의에서 협의하여 차기 군주를 선정하였다.

 

“방금 궁성에서 전달받은 소식에 의하면 지난밤에 아달라이사금께서 주무시다 심장마비로 붕어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이사금의 배우자로서 사태를 수습하고, 차기 군주를 선정하기 위해 여러분을 오시라 했습니다. 나라의 군주 자리는 잠시도 비워두면 안 됩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이 곧 계림국 귀족 회의 주요 위원님들입니다.

 

귀족 회의에 올라온 안건은 전체 위원의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통과될 수 있습니다. 이사금의 장례는 국가에서 정한 규정에 따라 성대하게 국장(國葬)으로 치를 것입니다. 또한, 나는 차기 계림국 군주로 석벌휴공을 추천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추천하고자 하는 인물이 있으면 추천하시어 충분한 논의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미의 발언은 파천황(破天荒)이었다. 아도갈문왕 집에 모인 사람들은 아달라이사금이 붕어한 것보다 더 큰 충격에 빠져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감히 그미의 말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나절의 의논 끝에 아도갈문왕 저택에 모인 박, 석, 김씨 문중 대표들과 기타 귀족들은 그미의 제안대로 늙은 벌휴공을 차기 계림국 군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그미에 의해 추대된 벌휴공이 차기 군주로 선정되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서라벌 전체에 퍼져 나갔다. 아달라이사금을 추종하던 자들도 이미 대세가 굳혀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마음을 비웠다.

 

아달라이사금은 재위 31년 만에 붕어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벌휴공이 예정대로 차기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탈해이사금의 손자이며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지진내례(只珍內禮) 부인 김씨였다. 탈해이사금 사후 파사이사금부터 아달라이사금까지 이어지던 박씨 왕조가 끊기고 석씨에게 왕위가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이제 피안으로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의 아들 내해가 너무 지루해합니다.”

 

벌휴공이 계림국 아홉 번째 군주가 되고 13년이 되는 어느 봄날. 그미는 아들 내해와 함께 저승 문턱에 서 있는 벌휴이사금을 찾아왔다. 어느덧 그미의 머리카락과 자분치가 희끗희끗하게 물들어 있었다. 조쌀한 모습과 도저한 인상이 그미의 원숙미를 한껏 돋보이게 했다.

 

벌휴이사금이 붕어하고 그미의 아들 석내해가 귀족 회의에서 계림국의 열 번째 군주로 추대되었다. 모자(母子)는 석이매가 묻혀있는 묘소를 참배하고 술을 따랐다. 이른 봄인데도 불구하고 만산에 불이 난 듯 온갖 기화요초들이 산을 붉게 물들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