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20. 7. 31. 19:44

 

 

 

 

 

 

 

                                                내례부인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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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동남쪽에 있는 계림국은 건국 초기부터 박, 석, 김씨가 주축이 되어 운영되고 있는 나라로 진한 열두 개 나라 중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혁거세거서간의 아들 남해차차웅과 손자 유리이사금이 대를 이어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며, 이방인 출신인 탈해이사금이 네 번째 군주가 되면서 석씨들이 계림국 정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탈해이사금에게는 구추(仇鄒)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했다.

 

이방인 출신인 탈해이사금은 23년을 군주로 재위하였지만 계림국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탈해이사금이 붕어하자 귀족 회의에서 그의 태자인 구추대신 유리이사금의 차남인 박파사(朴婆娑)를 차기 군주로 추대하였다. 박파사의 부인은 허루갈문왕의 딸로 김씨였다. 즉, 김알지의 손녀였다. 구추는 군주를 물려받을 자격이 충분하였고 서열 순위 제1번이었지만 박씨와 김씨 연합 세력에게 밀린 것이다.

 

파사이사금이 붕어하자 그의 아들 지마가 보위를 이어받아 계림국 여섯 번째 군주가 되었다. 지마이사금도 무난하게 나라를 통치하고 붕어하였지만, 당장 보위를 물려받을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그에게는 어린 딸 내례만 있었다.

 

계림국 조정에서는 왜국에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계림국 세 번째 군주 유리이사금의 장자 박일성을 데려와 군주로 추대하였다. 그는 망명 40년 만에 여든 살 나이에 보위에 오른 것이다.

 

그는 유리이사금의 태자였지만 영악한 이복동생 박파사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왜국으로 쫓기듯 망명을 떠난 몸이었다. 일성이사금의 치세 기간도 내외 우환으로 점철되었다. 그가 붕어하자 군주 후계자 서열 1위의 자리에 있던 내례는 남편 아달라를 계림국의 군주로 세웠다.

 

*그미는 박씨 문중을 대표하고 있던 권력자였다. 아달라이사금은 그녀의 보좌를 받으며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집권 초기는 대체로 순조로웠지만 계속되는 가뭄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메뚜기 떼가 들판을 뒤덮어 갈수록 민심은 흉흉해졌다.

 

* 그미 - 문학 작품에서, ‘그녀’를 가리키는 말.

 

아달라이사금은 후궁들과 황음(荒淫)과 방탕에 빠져 국정을 외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미가 아무리 정신을 차리라고 주의를 시켜도 아달라이사금은 그때뿐이었다. 부부 사이는 거의 남남처럼 변해버리고 말았다. 아달라이사금은 지어미의 처소를 찾지 않았다.

 

이에 그미는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점쟁이들을 찾아다니며, 지아비 아달라이사금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미는 탈해이사금의 손자인 석벌휴(昔伐休)가 점성술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궁으로 초대했다. 벌휴공에게는 골정(骨正)과 이매(伊買) 두 아들이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 이매랑(伊買郞)은 아버지와 뜻이 맞아 낮에는 천문(天文)에 관련한 서적을 탐독하고 밤에는 별을 관찰하였다. 큰아들 골정이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반면에 이매랑은 언변이 좋고 외향적인 성격을 지닌 호남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미 서라벌 최고의 미남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터였다.

 

큰 키에 반듯한 이목구비, 하얀 피부, 청산유수 같은 말재주, 기녀 뺨치는 가무(歌舞)는 그가 계림국 최고의 호걸이 되기에 충분했다. 벌휴공은 출타할 때마다 이매랑을 대동했다.

 

“소신 석벌휴, 부인의 부름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벌휴공,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미는 지아비 아달라이사금의 일로 고민하던 끝에 벌휴공을 초대한 것이었다. 석씨 가문이 지금은 거의 쇠락한 지경에 있지만, 한때는 탈해이사금을 배출한 씨족이었다. 벌휴공의 어머니는 김알지의 가문 사람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었다. 벌휴공은 계림국 군주의 부인이며 박씨 가문을 사실상 이끄는 권력자인 내례부인에게 절을 하였다.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렸지만, 아달라이사금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여걸이었다. 그미와 벌휴공은 아달라이사금이 궁중에서 귀족들을 초대하여 큰 행사를 개최할 때 여러 차례 본적이 있었다.

 

“이 아이는 소신의 둘째 아들 이매라고 합니다.”

“오, 그대에게 이리 훌륭한 아들이 있었군요. 마치 한 마리 고고한 청학(靑鶴) 같습니다. 아니지, 봉황(鳳凰), 그래요. 봉황이 맞습니다. 세상에나, 석씨 가문에 이런 인재가 숨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미는 자신이 군주의 배우자라는 사실도 잊고 마치 먼데 갔다 돌아온 낭군을 보듯 입이 벌어져 다물 줄 몰랐다. 그미도 언젠가 석씨 가문에 서라벌 최고의 미남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 소문의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소신, 석이매가 부인을 뵙습니다.”

 

이매랑이 그미에게 공손히 절을 하였다. 이매랑은 벌휴공과 궁궐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매랑은 먼발치에서 그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가 찾던 여인상이 바로 내례부인이었다. 이매랑의 마음속에서 그미를 사모하는 연정(戀情)이 싹튼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이매랑은 감히 이사금의 배우자인 그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미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적당한 명분이 없었다. 쓸데없이 궁궐 담장을 넘거나 그미와 관련한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니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이매랑은 우연히 한번 본 그미를 사모하는 정이 깊어져 밤마다 전전반측해야 했다. 벌휴공이 혼기가 꽉 찬 이매랑에게 괜찮은 가문의 규수를 소개해도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싫다 좋다 응답이 없었다

 

“이매랑, 이리 가까이 오세요. 신선이 따로 없습니다. 그대가 바로 계림국의 빼어난 신선입니다. 앞으로 자주 오셔서 나의 말벗도 되어주세요. 요즘들어 나는 세상 살아가는 흥미를 잃고 하루하루 무료하게 세월을 까먹고 있답니다. 이렇게 살다가 내가 무슨 병이라도 걸려 죽을 것 같아요.

탈해이사금님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지 범인(凡人)과는 전혀 다릅니다. 내가 이매랑을 처음 보나요? 혹시, 궁궐 행사 때 우연히라도 본적이 있지 않은가, 해서 묻습니다.”

 

그미가 자신의 속내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이매랑은 얼굴을 붉히고 수줍어하며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이매랑는 아직 미장가이며 그미와 나이도 비슷했다. 이매랑이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맞습니다. 소신이 궁궐 행사에서 부인을 처음 뵙고 난 뒤로 짝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모합니다. 매일 밤 부인을 그리워하며 발버둥 치고 있답니다.’

 

이매랑은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발설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당당하던 사내의 기백은 어디 가고 사춘기를 맞은 계집애처럼 덩둘한 표정을 짓자 벌휴공은 답답해했다. 그는 아들이 그미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군주 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반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신이 근자에 이르러 한 몽중인(夢中人)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매랑은 그미의 눈치를 살피며 꿈 이야기를 꺼냈다.

 

“오호, 그래요? 그 몽중인은 당연히 여인이겠지요? 이매랑, 그 이야기 좀 해보셔요. 무척 궁금합니다.”

그미의 샛별 같은 두 눈이 반짝거렸다. 빨리 꿈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잠시 뜸을 들이다 이매랑이 입을 열었다.

 

“어느 날 소신이 달구경을 하려고 노복(奴僕)들과 남산에 올랐다가 누대(樓臺)에서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 한 미인이 나타나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소신은 그 미인이 어디서 본 듯도 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늘씬한 체구에 달덩이같이 하얀 얼굴, 붉은 입술, 하얀 치아, 십 리만큼 패인 보조개, 겨울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영롱하고 맑은 눈, 오똑한 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실버들처럼 야들야들한 허리, 풍만한 가슴, 하늘의 달도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을 만큼 아리따운 미소, 소신이 여태껏 본 여인 중에서 최고의 절세가인이었습니다.

 

그 가인과 일을 치를 때 소신은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새벽닭이 울자 그 가인은 눈물을 흘리며 가봐야 한다면서 일어났습니다. 소신이 너무 아쉬워 그녀의 소매를 잡고 어디 사는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남산에 살고 있는데 낮에는 남산 봉우리에 구름으로 걸려 있다가 밤이면 비가 되어 내린다고 했습니다.

 

한기(寒氣)에 잠에서 깨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소신은 그 미인이 보고 싶을 때면 남산에 있는 그 누대를 찾습니다. 어제도 소신이 남산에 올랐다가 그 몽중 가인을 만나고 새벽에 내려왔습니다.”

 

이매랑은 손짓까지 해가며 꿈이야기를 하는데 그미는 이매랑의 환상적인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정신까지 혼미해 보였다.

 

“이매랑은 무산지몽(巫山之夢)을 꾸셨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나 역시 얼마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가 밤마다 나타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지금도 진행 중이랍니다.

 

꿈을 꾸고 나면 온몸이 봄비를 맞은 듯 흠뻑 젖는답니다. 그런데 신기하면서도 아쉬운 것은 그 사내가 절대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꿈속의 사내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매랑하고 비슷합니다.”

이심전심이며, 염화미소였다.

 

‘흠-, 이쯤에서 한마디 해야겠어. 아들이 제법 여자의 마음을 훔칠 줄 아는구나. 잘하면 우리 석씨 가문에 서광(曙光)이 비칠 징조로다. 내례부인이 나를 부른 까닭은 지아비와 갈등을 빚자 어떻게 해야 현재의 고통 속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묻고 싶은 것이리라.’

벌휴공은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셈을 하고 있었다.

 

“소신이 요즘 매일 밤 서라벌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뻣뻣하게 굳을 지경입니다. 이상하리만치 유성우가 지난해보다 많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 유성우 속에 살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살별이 보통 사람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소신의 날카로운 시선은 피하지 못합니다. 이는 곧 서라벌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조짐이 틀림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북두칠성의 세 번째 별을 녹존성(祿存星) 또는 천기성(天機星)이라 하는데, 어젯밤에 보니 희뿌연 암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별은 재난과 관련 있으며, 여타 별들의 운행을 순조롭게 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천기성에 이상이 생기면 인간 세상에는 큰 재난이나 재앙이 닥치게 됩니다.”

 

벌휴공의 말에 그미는 덜컥 겁이 났다. 벌휴공은 계림국 뿐만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알아주는 예언가이며 점성술사였다.

 

“벌휴공, 장차 나와 지아비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아달라이사금은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인 탐랑성(貪狼星)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셨습니다. 이 별은 일명 천추성(天樞星)이라고도 하는데, 액(厄)을 풀어주는 신(神)이기도 하고 물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물이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고 하여 이 별을 생기성(生氣星)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물은 줏대 없이 아무 곳으로나 흐르는 성질이 있으므로 바람기가 발동하면 도화살(桃花殺)을 맞습니다. 호색다음(好色多淫)하여 작첩(作妾)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 반면에 부인께서는 북두칠성의 다섯 번째 별인 옥형성(玉衡星)의 기운을 타고나셨습니다.

 

이 별은 오귀염정(惡鬼廉貞)이라 하는데 북두칠성의 중심을 잡아주고, 세상의 군주가 권력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이 별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면 나라에 근심이 없지만, 흔들리면 폭군이 발호(跋扈)하게 됩니다.”

 

‘과연, 과연 벌휴공은 귀신의 반열에 오른 자로다. 어쩌면 나의 운명을 정확히 맞춘단 말인가? 진즉에 불러서 나의 앞날을 점쳐볼 걸 그랬구나.’

그미는 벌휴공이 아달라이사금과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다.

 

“벌휴공, 앞으로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 벌휴공도 소문을 들어 대충은 눈치를 채고 있겠습니다만, 우리 부부는 이미 남남이 된 지 오래입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참고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나의 갈 길을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벌휴공께서 나에 관한 것들을 하나도 숨김없이 말씀해 주세요. 요즘 같아서는 하루하루가 지겹고 새장에 갇힌 느낌이 들어 죽겠습니다.”

 

벌휴공은 자신과 아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왔음을 감지하였다. 그의 말 한마디에 부자의 운명이 크게 변할 수도 있는 찰나이기도 했다. 벌휴공은 잠시 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다음 벽을 향해 삼매경에 들었다. 그미와 이매랑에게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즉문즉답은 오히려 말하는 사람의 신뢰를 갉아먹거나 가볍게 할 수 있다. 내실에는 세 사람이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그미와 이매랑이 가끔 헛기침하는 소리만 들릴 뿐 마치 무덤 속 같았다. 그렇게 *이각(二刻)쯤 지나서 벌휴공이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떴다.

 

“무산지몽은 염제(炎帝)의 딸 요희(瑤姬)와 초나라 초회왕(楚懷王)의 전설 같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일면식도 없는 남녀가 한마음이 되거나 일체(一體)가 된다고 함은 전생에 칠천 겁(劫)의 인연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옥형성과 천권성(天權星)이 조응하면 나라가 안정되고, 만백성이 함포고복하며 강구연월의 시대를 맞을 것입니다. 천권성은 하늘에서 저울의 역할을 합니다.

 

저울은 사물을 균등하게 측정하기 위한 기구입니다. 또한, 천권성을 육살문곡(六殺文曲)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하늘의 살성(殺星)과 흉성(凶星)의 암기를 인간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보내기도 합니다. 천권성이 자신감을 잃거나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요절하기도 합니다. 제 아들 이매가 바로 천권성의 운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벌휴공이 땀을 흘려가며 아들과 그미의 숙연을 설명했다. 그미는 벌휴공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이매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내실에 파란 불꽃이 튀었다.

 

* 일각(一刻) - 한 시간의 1/4. 15분에 해당.

 

“아, 그래요? 듣고 보니 벌휴공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내가 이매랑을 만나려고 예지몽을 꾼 게 틀림없습니다. 갈증에 풀이 죽은 잉어가 호수를 만난 기분입니다. 벌휴공의 점성술은 가히 경지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는 두 분만 바라 보아도 배가 부릅니다. 내가 찾지 않더라도 사나흘에 한 번씩 방문해주세요. 영명궁(永明宮)에는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지천으로 쌓여있답니다.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벌휴공과 이매랑이 물러가고 그미의 가슴 속에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환희와 감격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그미는 이매랑의 곱고 단아한 모습을 동공(瞳孔)에 담고 밤낮으로 그려보았다. 동시에 천년 고목(枯木)에 새로이 꽃이 피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벌휴공은 그미의 속마음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서너 해 전부터 그미와 아달라이사금의 사주팔자를 입수해 남몰래 연구해 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