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20. 7. 23. 22:11

 

                               본 역사소설은 신라 초창기에 박,석,김씨들이 왕위를 놓고 치열하게 정쟁을 벌일 때

                              박,석씨들을 물리치고 본격적으로 김씨 왕조 700년 역사를 연 여걸 김옥모(金玉帽)

                              태후에 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많은 감상 부탁드립니다.

 

 

 

 

 

                                              김옥모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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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분이사금에게는 후궁의 소생인 아들 걸숙(乞淑)과 유례(儒禮)가 있었고, 왕비 사이에는 명원공주와 광명공주만 있었다. 첨해이사금 재위 기간에는 조분이사금의 가족들은 숨을 죽이고 살아가야 했다.

 

첨해이사금에게 최대의 정적은 내해이사금 아들 각간 석우로(昔于老)였다. 그는 조분이사금 때 대장군으로 승차하여 *감문국을 정벌했고, 계림국을 침범한 왜군을 격퇴하였다. 곧이어 각간이 되어 계림국의 병권(兵權)을 장악했다. 조분이사금 말년에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도 했고, 백제와 가까이 지내고 있던 *사량벌국을 정벌했다.

 

* 감문국 – 감문국(甘文國)은 경상도 김천 지역에 있던 소국(小國).

* 사량벌국 – 사량벌국(沙梁伐國)은 경상도 상주 지역에 있던 소국.

 

박혁거세 이후 아우가 군주의 직분을 이은 경우는 첨해이사금이 처음이었다. 계림국에서는 군주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있으면 사위가 다음 군주를 잇는 것이 전통이었다. 조분이사금의 장녀인 명원공주의 배우자가 석우로이니 마땅히 그가 군주의 자리에 앉아야 했다.

 

 

석우로는 군주 자리를 찬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군주가 되지 못한 원인을 그미의 간섭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로는 감히 그미를 탓하거나 비방할 수 없었다.

 

조정 내에 특별한 지지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군주가 된 첨해이사금은 늘 좌불안석이었다. 조정 신료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조차 첨해이사금보다 석우로를 더 존경하고 따르는 분위기였다. 첨해이사금은 밤잠까지 설칠 정도로 석우로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극에 달했다. 계림국은 늘 왜 열도에 있는 야마타이국(邪馬台国) 침범에 시달려왔다. 요즘 들어 다행히 왜와 계림국 사이가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데서 외교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왜국에서 계림국에 사신이 왔는데 석우로가 사신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술김에 ‘너희 왜국의 왕을 잡아다 소금 굽는 노비로 삼고, 왕비는 밥 짓는 노비로 삼겠다.’라는 말을 하였다.

 

왜국 사신이 돌아가 왜왕에게 고하자 왜왕은 대노하여 장수 우도주군(于道朱君)과 군사를 보내 계림국을 침범하게 했다. 이에 놀란 첨해이사금은 *우유촌(于柚村)으로 급히 몸을 피했다.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내가 왜장을 만나 해결하겠다.’

 

일이 커지자 석우로는 단신으로 왜군의 진영으로 찾아갔으나 곧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왜장을 만나 오해를 풀려고 했지만, 우도주군은 석우로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버렸다. 계림국의 왕족이면서 병권을 쥐고 있던 장군이 농담 한마디 했다가 왜군에게 화형(火刑)을 당하고 만 것이다.

 

“왜놈들이 쳐들어와 석우로를 불태워 죽였는데도, 첨해는 도망 다니기 급급했다. 그놈들은 자기네 왕을 욕했다고 군사를 몰고 쳐들어와 석장군을 죽였는데도 첨해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무슨 흑막이 있다.”

 

* 우유촌 – 우유촌(于柚村)은 경상도 울진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음.

 

석씨 가문과 백성들은 첨해이사금이 왜군을 끌어들여 우로를 고의로 죽게 했다며 맹비난하였다. 첨해이사금이 우로에게 적대감이 없었다면 군대를 동원하여 왜국을 정벌하거나 보복전을 전개해야 마땅했다. 첨해이사금은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었고, 여기에 조분이사금의 둘째 사위인 김미추(金味鄒)도 가세하였다.

 

이 사건으로 계림국의 귀족들은 석우로의 죽음을 두둔하는 파와 첨해의 입장을 지지하는 파로 갈리게 되었다. 문제는 서라벌의 최대 족벌 세력으로 성장한 김씨들 마음의 향배에 따라 권력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왕비, 이 아이 좀 보시구려. 근골(筋骨)이 단단하고 신체도 다른 왕자들 어릴 때보다 훨씬 크며, 완력도 무척 강한 것 같습니다. 장차 고구려에서 크게 쓰일 인물이 될 게 분명합니다.”

 

“폐하의 정기가 모두 달가(達賈) 왕자에게 이어진 듯 합니다. 소첩이 폐하를 만난 지가 벌써 십 년이 되었습니다. 강산이 한번 바뀌는 동안 소첩은 폐하에게 받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늘 송구한 마음이랍니다.”

 

“아닙니다. 받은 쪽은 왕비가 아니라 짐이지요. 지난 십 년을 가만히 회억해보면 꿈만 같습니다. 왕비는 짐이 알고 있는 여인 중 최고입니다. 마음씨뿐만 아니라 궁합도 왕비가 제일 잘 맞습니다. 또한, 왕비로부터 딸 석정 공주를 받았고, 공주가 짐의 후비가 되어 봉(鳳) 왕자를 안겨주었습니다. 왕비께서는 이 아이뿐만 아니라 운(雲) 공주도 선물하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면 짐에게는 과분한 정성입니다.”

 

그미는 태왕과 국내성에서 삼백여 리 떨어진 졸본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태왕이 사냥을 좋아하는지라 휴식이 필요하면 태왕은 늘 그미를 대동하였다. 졸본은 주몽 추모왕과 소서노(召西弩) 왕비가 합심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신성한 장소였다.

 

그곳에는 추모왕의 사당을 비롯하여 초기 고구려의 도읍지의 흔적이 산재해 있었다. 고구려의 왕도(王都)가 국내성이지만 역대 태왕들은 권좌에 오르거나 국태민안을 비는 행사 때면 반드시 졸본을 방문했다.

 

그미가 10년 전 딸 석정을 태왕에게 시집보내기 위하여 함께 국내성에 왔다가 석정 공주뿐만 아니라 그미 역시 태왕의 정인(情人)이 되었다. 태왕에게는 이미 연나부 출신의 정비인 연(椽)씨가 있었으나, 추가로 그미까지 정비로 맞이하는 등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태왕의 생모이자 후비가 된 전태후를 비롯한 연왕비, 잠후(蚕后), 주후(周后) 등은 태왕의 처분에 할 말을 잃고 원통한 심정을 술로 달래거나 잡기에 몰두하며 하릴없이 무료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태왕이 그녀들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잊은 것은 아니었다.

 

태왕은 그미가 석정 공주와 고구려에 왔을 때 첫눈에 반했다. 그미는 고구려에 달포쯤 머물다가 계림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첫눈이 내릴 때쯤 첨해이사금과 함께 고구려에 입조(入朝)하였다. 그때 태왕은 그미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고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그미와 부부의 연을 맺은 태왕은 곧이어 석정 공주와도 혼례를 치렀다. 계림국의 처지에서 보면 보통 경사가 아니었다. 계림국의 옥모태후가 고구려 태왕의 왕비가 되고, 석정 공주는 태왕의 후궁이 되니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 있을까? 그미는 이제 계림국의 태후이면서 동시에 대제국 고구려의 정식 왕비였다. 그미는 고구려와 계림국을 드나들며 두 나라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계림국에 흉년이 들면 태왕은 수백 척의 배에 곡식을 가득 실어 보내 계림국 백성을 구호하였다. 또한, 백제나 말갈(靺鞨) 혹은 왜국이 계림국을 침입하면 즉시 막강한 고구려 군대를 파병하여 계림국을 보호하였다.

 

그미와 딸 석정 공주가 고구려에서 계림국의 안녕을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정작 계림국 군주 첨해이사금은 서라벌의 귀족들 사이에서 점점 정치적으로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그미가 계림국에 돌아와 운 공주를 출산했을 때 태왕은 마차 수백 대 분의 선물을 서라벌로 보냈다. 또한, 목수와 인부들을 서라벌로 보내 그미가 거처할 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거나 새로 지어주기도 했다. 그미는 태왕 덕분에 자신이 거처할 궁이 완성되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태왕을 초빙하였다.

 

태왕의 비빈들은 그미가 국내성을 비운 틈을 타 태왕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수작을 부렸으나, 태왕은 그미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터였다. 그미가 보낸 초대장을 받아 든 태왕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미로부터 초대장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비빈들은 태왕이 계림국으로 행차하면 그미의 치마폭에 싸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였다.

 

“폐하는 대제국 고구려의 지존이십니다. 잠시도 권좌를 비우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서라벌에 가시려면 소첩도 함께 데려가소서.”

 

“폐하, 소첩은 일구월신 폐하 한 분만 바라보고 살고 있는데, 갑자기 계림국에 가시겠다니, 기가 막히고 가슴이 울렁거려 금방 죽을 것만 같습니다.”

 

“폐하는 소첩의 지아비입니다. 서라벌에는 옥모 왕비 한 명뿐이지만, 국내성에는 여러 명의 비빈이 있습니다. 절대 서라벌에 가시면 안 됩니다.”

 

연왕비와 주후, 잠후 등 비빈들은 대전으로 몰려들어 행여나 태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계림국으로 갈까 봐 울면서 하소연했다. 지난 10년 동안 비빈들은 그미의 미모와 태왕을 사로잡는 규방 비술에 기가 질려 함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눌려 지내야 했다.

 

게다가 태왕이 계림으로 떠난다면 태왕의 총애를 회복할 기회를 영영 상실하는 게 아닌가 우려하였다. 그미가 국내성에 없는 지금이 비빈들에게는 태왕을 유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짐이 서라벌에 가는 것은 옥모 왕비를 보러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계림국은 고구려의 신하국으로 짐이 친히 순방하여 그곳 백성들이 어찌 살아가는지 살피고자 합니다. 신하국이 잘 살아야 짐의 마음도 편안합니다. 비빈들은 제발 짐이 하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빈들이 태왕의 완고한 고집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전태후가 태왕에게 울면서 읍소(泣訴)했다.

 

“폐하, 소첩은 폐하를 낳은 생모이며, 동시에 폐하의 자식을 낳은 지어미입니다. 계림국으로 떠나시려거든 소첩을 죽이고 떠나세요. 옥모가 지난 십여 년 동안 폐하의 총기(聰氣)와 정기(精氣)를 모두 흡수하여 폐하의 옥체가 많이 망가졌습니다. 고구려는 폐하 혼자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조정의 수많은 신하와 지방장관들은 폐하의 윤허가 있어야 국정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잠시도 도성을 비워서는 안 됩니다. 국정이 혼란스러우면 동천 태왕 때처럼 위나라 관구검(毌丘儉)이나 위지해(尉遲楷)같은 자들이 고구려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꼭 가시겠다면 소첩을 죽이고 가세요. 이 지어미를 땅속에 묻고 가세요. 그렇지 않으면 소첩은 높은 누대에 올라가 투신할 것입니다.”

 

전태후는 이내 대전에 벌렁 누워서 대성통곡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빈들은 돌아서서 키득거리며 태왕의 반응을 살폈다. 처지가 난처해진 태왕은 헛기침만 하며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던 차에 국상 음우(陰友)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전태후와 비빈들의 말씀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옵니다. 계림국은 변방 소국이옵고 고구려는 대륙 한가운데 있는 대국입니다. 대국의 군주가 소국을 순방하는 일은 신하들에게 위임하시옵고 부디 자중하셔야 하옵니다. 소신이 보기에도 폐하께서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몰라보게 옥체가 부실해진 듯 합니다. 잠시 운우지락을 통한 음양의 조화를 멀리하시고 옥체를 튼튼히 하소서.”

 

국상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태왕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국상이지만 비빈들이 보는 앞에서 태왕을 민망하게 하는 언사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음우는 비빈들의 편에 서서 죽음을 각오하고 태왕에게 주청했다.

 

‘이 늙은이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감히 짐을 훈계하려 드는구나. 모후의 간청만 없었더라면 당장 참수형에 처하련만. 좋다. 이번에는 짐이 한 발짝 물러서겠다.’

 

태왕은 기분이 상했지만 계속해서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고, 전태후와 국상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태왕은 입을 꾹 다물고 비빈들과 중신들을 바라보며 ‘킁킁’거리다 비답을 내렸다.

 

“아, 알겠습니다. 태후와 국상께서 그렇게까지 나라를 위하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짐이 서신을 써서 옥모 왕후의 초청을 반려하지요.”

“폐하, 성은이 하해와 같습니다.”

 

그미를 만난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태왕은 지밀전에 들어 두문불출하며 술로 사나흘 보내다가 그미에게 보내는 답신을 적었다.

 

 

옥모 왕비, 보세요.

짐의 나라가 지난 폭우로 40여 곳의 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또한,

며칠 전에는 천문관(天文觀)이 살별이 동쪽으로 길게 꼬리를 뻗쳐서

짐의 나라에 재앙이 있을 수 있음을 고했습니다.

짐이 그대를 사모하는 그리움이 쌓여 태산보다 높아 하늘에 닿을 듯

합니다. 그대가 강을 건너시겠다면 오작교를 놓아드릴 것이니, 원하건

대 어서 오시어 *무산(巫山)에 들어가 못다 한 운우를 함께합시다.

 

 

그미는 출산한 몸을 추스르고 운(雲) 공주와 함께 고구려로 갈 예정이었다. 계림국을 떠나 고구려로 향할 생각을 하니, 계림국의 정정(政情)이 걱정되었다.

 

반년 전 그미가 해산을 위해 서라벌을 찾았을 때 첨해이사금이 거의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거의 매일 요분질에 이골이 난 궁녀들 치마폭에 싸여 술로 밤낮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미가 첨해이사금을 찾아가 아무리 어르고 타일러도 그는 ‘알았다’고 만 할 뿐 아무 소용없었다.

 

그미가 어의(御醫)를 불러 알아본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첨해이사금은 후궁들과의 과도한 방사(房事)와 폭음으로 기(氣)를 모두 소진하여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 무산 – 무산(巫山)은 초나라 회왕(懷王)이 꿈속에서 염제의 딸 요희와 사랑을 나눈 산을 말한다, 요희는

           낮에는 구름으로 있다가 밤이면 비가 되어 내리는데, 이를 운우라 한다.

 

그미는 자신이 고구려의 왕후가 되어 옥의옥식하는 동안에 계림국의 정치판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미 첨해이사금의 입지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미는 운 공주를 출산하고도 계림국에 서너 달 더 남아있으려고 했지만, 자신이 고구려 왕비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그미가 태왕 곁에 없는 동안 다른 비빈들이 태왕에게 자신에 관하여 어떤 험담(險談)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미는 서라벌을 떠나기 전에 친정 남동생과 큰딸 수로부인을 불렀다.

 

“계림국의 태후이시며, 고구려의 왕비이신 어머님을 뵙습니다.”

 

그미의 큰딸 수로부인(水老夫人)은 그미에게 절을 하였다. 수로부인은 붕어한 내해이사금의 비(妃)였으며, 슬하에 석우로, 석이음 형제와 아이혜(阿爾兮) 공주를 두었다. 그미는 오랜만에 만난 딸이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 미안하기도 했다.

 

그미도 수로부인의 큰아들 우로가 첨해이사금의 음모에 의해 왜국 장수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믿고 있었다. 아들 우로가 비참하게 죽고 난 뒤로 수로부인은 친정과 교류를 끊고 지내다시피 했다.

 

“수로야, 어미가 미안하구나. 내가 계림국에 상주했더라면 그러한 불상사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어머니, 이미 지난 일인걸요.”

“대고구려 왕비이시며, 계림국 태후이신 옥모 누님을 뵙습니다.”

 

그미의 바로 아래 남동생 미추가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남매지간이지만 그미는 태후이며, 왕비의 신분이었다.

 

“태후님이시며, 왕비님이신 누님을 뵙습니다.”

“대고구려의 왕비님을 뵙습니다.”

 

그미의 둘째 남동생 말구(末仇)와 막내 남동생 대서지(大西知)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미를 보고 웃었다. 미추는 서라벌에서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말구와 대서지도 서라벌과 지방 여러 곳을 오가며 김씨 지지층을 모으느라 정성을 쏟는 중이었다.

 

미추는 조분이사금의 딸 광명부인을 배우자로 두고 있었다. 특히, 미추는 왕비족이라는 가문의 배경을 십분 활용하여 서라벌 백성들의 각종 억울한 일들을 앞장서서 해결해주면서 큰 인물로 성장하였다. 김씨 문중에서도 그의 위치는 확고부동하여 누구도 감히 그에게 시비를 걸거나 헛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가 큰 인물로 주목받은 데에는 그미의 위상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첨해는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지만 나는 그 애를 포기했다. 애초 내가 그 애를 군주의 자리에 세우는 게 아니었다. 외손자인 우로를 계림국 군주로 옹립했으면 나라가 이 지경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첨해의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다. 해서, 첨해가 갑자기 변고를 당했을 때를 대비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현재 붕어한 조분이사금의 아들 유례(儒禮)가 가장 유력한 차기 군주 후보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아이는 나의 손자이며 조분이사금의 서자이지만 성격도 괴팍스러워 꺼림칙하다. 나는 여러 날 생각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첨해가 변고를 당하면 미추가 차기 군주의 자리를 잇도록 해라.”

 

“어머니, 어떻게 저희와 한마디 상의도 안 하시고?”

 

수로부인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그렇지만 권력자로 변신한 생모의 말에 달리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계림국에서 그미의 말이 곧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누님, 저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

 

미추가 그미와 수로부인의 눈치를 보았다. 말구와 대서지도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미와 수로부인의 반응을 살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다섯 사람의 어깨를 짓눌렀다. 내실에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딸과 동생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그미는 정색하고 딸과 동생들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계림국의 태후이며, 고구려 왕비로서 너희들에게 명한다. 너희들이 합심하여 미추를 군주로 세워라. 차기 계림국 군주는 반드시 김씨 집안에서 나와야 한다. 나는 태왕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지지해 달라고 할 것이다.

태왕은 나의 청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첨해는 얼마 살지 못한다. 그 아이가 죽으면 곧바로 고구려의 수만 군사들이 국경에 대기하고 있을 것이며, 일부 장군들과 군관들이 정예병을 이끌고 서라벌로 들어올 것이다.”

 

그미의 명령에 수로부인과 그미의 동생들은 한마디도 할 수도 없었다. 그미는 이미 계림국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자였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휘광(輝光)은 밤하늘에 높이 떠 있는 보름달보다 더 찬란했으며, 아름다운 외모에서 발산하는 위엄은 계림국 군주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자신의 의중을 분명히 전달한 그미는 오랜만에 만난 큰딸과 남동생들을 위하여 주안상을 준비했다. 그미의 형제들은 십여 년 전 아버지 구도(仇道)가 유명을 달리할 때 그미가 했던 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나이에 비해 조쌀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미욱해 보이는 수로부인만 아직도 그미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해 잡념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