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20. 7. 11. 19:38

 

 

 

 

                                본 역사 단편소설은 고려 인종(仁宗) 때 척신 이자겸의 난(亂)을 다루고 있습니다.

                          인주(지금의 인천) 이씨 가문의 이자겸이 어떻게 출세하여 왕씨의 나라 고려를 이씨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지 감상해 보세요.

                                                                                                     - 여강 최재효

 

 

 

 

                                               굴비

 

                                                                                                                                     - 여강 최재효

                                                    1

 

미물은 분수를 알고 살아가는 데 반해서 사람은 숨을 쉬고 있는 동안 늘 갈등의 원인을 만들어 내고 주변 사람을 끌어들여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다. 사람의 근본은 어떤 이의 말처럼 성악(性惡)이 맞는지도 모를 일이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사람들은 자신들 본질은 성선(性善)이 지당하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겠다.

 

왕후장상이라도 사흘을 굶으면 뱃속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절대 무시하지 못하고 본능을 따른다. 원초적 본능에 군자와 소인배는 같은 행동 양식을 따르게 마련이다. 사람은 말로만 영장류이나 생물적 본능 앞에서는 미물과 전혀 다를 게 없다. 도덕성이 강한 자라도 내면의 욕구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려가 건국되고 이백 년이 조금 지난 즈음에 나라의 기둥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그 기둥을 흔드는 자는 다름 아닌 왕실의 외척으로 *인주(仁州)에 뿌리를 둔 이자겸(李資謙)이었다. 그는 현재의 임금인 인종(仁宗)의 외조부이면서 동시에 장인이기도 했다.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딸 세 명을 모두 왕실에 시집보냈다.

 

그에게 딸들은 권력을 붙잡고 유지하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했다. 그는 도참설에 현혹되어 오래전부터 왕(王)씨의 나라를 이(李)씨의 나라로 바꾸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대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인주 – 지금의 인천

 

그가 고려를 자신의 나라로 만들려는 이유는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이란 허무맹랑한 도참설 때문이었다. 즉,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이 도참설을 그는 마치 하늘의 계시인 양 믿고 있었다. 그가 고려 조정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 시기는 그의 할아버지 이허겸(李許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주 이씨는 본래 김해 허(許)씨였다. 이허겸의 6대조인 허기(許奇)가 당나라에 신라 사신으로 갔다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당 현종(玄宗)을 호위한 공적으로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허기와 그의 후손들은 허자 앞에 이자를 붙여서 사용했는데, 이허겸 대(代)에서 부터 허자를 빼고 이씨로만 쓰게 되었다.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자 현종(顯宗)은 공주로 피난 갔는데 이때 공주절도사가 김은부였다. 그에게는 자색이 고운 딸 세 명이 있었는데, 그는 세 딸을 모두 현종에게 출가시켰다. 임금은 세 자매를 모두 왕후에 봉했다. 김은부의 아내는 이허겸의 딸이었다. 외손녀 세 명이 졸지에 왕후가 되자 이허겸은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셈이었다.

 

이때 왕후들의 외사촌이면서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李子淵)이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는데 능력이 꽤 출중하였다. 그는 가문의 후광으로 빠르게 승차하게 되었고 현종이 승하하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이자연 역시 세 딸을 임금에게 출가시켰다. 첫째 딸 인예왕후가 순종(順宗), 선종(宣宗), 숙종(肅宗)과 대각국사 의천(義天)을 출산하면서 인주 이씨의 권세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 강조의 정변 – 고려 중추사 우상시 겸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가 목종(穆宗)을 폐위하고 현종(顯宗)을 옹립한 사건.

 

세월이 흘러 선종이 승하하고 어린 헌종(獻宗)이 즉위하자 숙부인 계림공과 이자연의 손자 이자의(李資儀)가 권력 다툼을 벌였다. 권력 암투에서 이자의가 패하여 조정에서 축출되면서 인주 이씨들은 권력에서 밀려났다. 헌종에게 양위를 받아 임금이 된 계림공 숙종이 승하하고 그의 뒤를 이은 임금이 아들 예종(睿宗)이었다.

 

예종이 이자겸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면서 인주 이씨 가문은 재기하는 기회를 맞았다. 이자겸의 딸이 원자(元子)를 출산하면서 그는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예종이 승하하자 그의 뒤를 이은 임금이 바로 지금의 인종이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에게 출가시켰다. 그는 임금의 외할아버지이면서 *국구(國舅)가 되었다.

 

 

“나는 임금의 외조부이면서 국구의 몸이다. 드디어 고려의 천하는 나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내 눈 밖에 나는 인사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임금을 제외하고 모두가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고려 건국 초창기부터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성행했다. 강요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인종이 두 이모와 혼인하는 일은 꽤 무리한 일이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자겸은 도덕과 예법을 무시해 버렸으며, 일가붙이들을 조정의 요직에 앉히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는 자신의 사람을 조정에 많이 심어 스스로 국공이 되고 예우를 태자와 같게 해 달라고 외손자이자 사위인 인종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이자겸은 자신의 생일을 임금이나 태자의 경우처럼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그의 글도 전(箋)이라 칭하게 했다.

 

 

* 국구 – 왕비의 아버지, 즉 왕의 장인

 

그는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들이 지은 *제택(第宅)이 개경 저잣거리에 잇닿았다. 이자겸의 권세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곳간에 수뢰한 물품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썩어나가는 고기가 수만 근이나 되었다. 또한, 남의 땅을 강탈하고 하인들을 풀어 타인의 차마(車馬)를 노략질하여 물건을 옮기니 백성들이 수레를 부수고 마소를 팔아 치워 개경의 저자가 한동안 무척 소란스러웠다.

 

 

척준경(拓俊京)은 윤관 장군을 도와 동계(東界) 지역에 침입한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구성을 쌓는데 이바지한 인물이었다. 그는 곡산(谷山) 척씨의 시조로 서해도 곡주에서 태어났다. 척준경은 계림공의 수하로 들어갔는데, 계림공이 훗날 숙종 임금이 되자 추밀원의 별가(別駕)란 벼슬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는 뛰어난 무예를 바탕으로 수차례 외적 정벌에 군공을 세웠고 *합문지후가 된 뒤로도 공을 세워 승승장구했다. 고려 조정에서 금나라와 외교 문제로 시끄러울 때 이자겸은 현실론을 주장하며 고려와 금나라가 군신 관계를 맺는 데 앞장섰다. 척준경은 이때 이자겸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이자겸의 여섯째 아들 이지원(李之元)이 척준경의 사위였다. 이후 이자겸과 척준경이 의기투합하면서 함께 고려의 조정을 장악했다.

 

 

* 제택 - 살림집과 정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

* 합문지후(閤門祗候) - 고려 시대에, 합문에 속하여 나라의 의식을 맡아보던 정7품의 벼슬.

 

 

중서시랑평장사 한안인(韓安仁)이 이자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자 이자겸은 한안인이 예종의 동생 대방공(帶方公)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했다고 모함했다. 대방공은 경산부로 추방되고 한안인은 귀양길에 암살되었다. 아울러 최홍재 등 한안인과 관련한 인사 오십여 명을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권력 기반을 구축한 이자겸은 자신의 집에 숭덕부를 설치하고 소속 관료를 두었으며, 그 처소를 의친궁이라 하였다.

 

또한 조선국공(朝鮮國公)이라는 직책을 책봉해 달라고 임금에게 강요하였고 자신을 스스로 국사를 처리하는 직책인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임금은 조선국공은 승인했지만, 지군국사는 거절했다. 그의 계속되는 패역에 외손자이자 사위인 임금은 이자겸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되었다.

 

“폐하, 신(臣), 지녹연(智祿延) 지엄한 어명을 받들어 군사들을 동원하여 모월 모일에 역적 이자겸과 척준경을 주살하고자 합니다.”

 

열흘 전 임금은 근신 중 한 사람인 동지추밀원사 지녹연을 은밀히 불러 이자겸과 척준경을 주살할 것을 지시하였다. 궁궐 곳곳에 이자겸이 심어놓은 사람들의 눈이 번뜩이는 상태에서 임금의 밀명은 천지개벽할 일이기도 했다. 지녹연은 대장군 권수와 상장군 최탁 등을 거사에 끌어들였다.

 

“그 두 사람은 고려 조정과 왕실의 기틀을 흔들고 있습니다. 짐은 경들만 믿습니다. 속히 거사를 성공시켜 그들을 저잣거리에 효수하세요.”

 

임금의 어명에 뜻을 함께한 자들은 대부분 이자겸과 척준경에게 불이익을 당한 자들이었다. 척준경이 동생 척준신과 권세를 부렸는데 최탁 등은 척준신이 하급 관리에서 상서(尙書)로 발탁되어 상관이 된 것을 평소에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소신들은 목숨을 걸고 폐하의 명을 받잡겠습니다.”

지녹연 등은 땅거미가 내리자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인 척순을 주살했다. 또한, 이자겸의 사람으로 알려진 관리들을 죽인 후 그들의 시신을 궁성 밖으로 던져버렸다.

 

 

“지녹연과 상장군 최탁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그게 사실이렷다?”

 

‘임금이 외조부이면서 장인인 나를 죽이려 들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일이 이렇게 된다면 할 수 없다. 내가 왕을 폐위시키는 수밖에…….’

 

이자겸의 하수인이 궁성을 빠져나와 보고하니 그는 우두망찰 무엇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이어 또 다른 이자겸의 심복이 궁성을 탈출하여 궁성 내의 상황을 상세히 알렸다. 이자겸은 즉시 척준경과 자신을 따르는 중신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으나 뾰족한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지금 한가하게 모여 농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궁성으로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나를 따를 사람들은 나오세요.”

 

다혈질의 척준경이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며 군사 오십여 명을 이끌고 궁성으로 향했다. 그들은 주작문까지 갔으나 궁궐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척준경은 병사들에게 성벽을 넘어가 성문을 열게 한 뒤에 군사들과 성안으로 들어가 신복문까지 접근하여 고함을 질러댔다.

 

 

척준경이 성안으로 들어온 것을 감지한 지녹연은 척준경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고 여기고 성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동시에 이자겸은 아들들에게 최탁 등 임금의 측근 중신들 집에 불을 지르게 하고 그들의 처자들을 잡아 가뒀다. 날이 밝으면서 척준경이 아우와 아들의 처참한 시신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아, 나는 이번 거사의 핵심 인물이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나도 살길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물러나면 우리 가문은 멸족을 면치 못할 것이다.’

 

“궁성을 접수해야 한다.”

 

척준경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진출하여 승평문을 포위했다. 불문에 귀의한 이자겸의 막내아들 의장(義莊)이 현화사 승려 삼백여 명을 거느리고 척준경을 지원하였다. 지녹연과 최탁 등은 척준경 무리의 기세에 눌려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궁성을 수비할 뿐이었다. 양측은 대치만 할 뿐 사태의 진전이 없었다. 이때 임금이 대담하게도 시종들과 신봉문으로 행차하였다. 척준경의 군사들은 왕에게 일제히 절을 하며 환호하였다.

 

“너희들은 어째서 병장기를 들고 궁성에 난입했느냐?”

임금은 짐짓 아무것도 모른 체하며 병사들에게 물었다.

 

 

“저희는 궁성 안에서 역적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폐하와 왕실을 지키려고 진입했습니다.”

 

“궁성에 역적 따위는 없다. 짐은 무사하다. 너희들의 충정은 가상하다만, 이제 병장기를 버리고 해산하도록 하라. 짐이 너희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상금을 하사할 것이다.”

 

임금은 병사들에게 상금을 내리고 무장을 해제하게 했다. 이를 본 척준경이 크게 노하여 병사들에게 다시 병장기를 들고 궁성을 향해 고성을 지르며 공격하게 했다. 병사들이 척준경의 지시를 받고 궁성 안으로 화살을 날렸다. 병사들이 쏜 화살이 임금이 있는 곳까지 날아들기도 했다. 궁성 안은 다시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궁성 문을 부숴라.”

 

이자겸의 아들 의장이 승려들에게 소리쳤다. 승려들이 도끼로 신봉문을 부수려 들자 문루를 지키는 군사들이 화살을 쏘아 승려들을 저지하였다. 궁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저항이 거세어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왕궁 진출이 지지부진해지자 이자겸도 궁성 앞으로 출전하여 임금에게 심복을 보내 난을 일으킨 자들만 내보내 달라고 했다. 만약 거절한다면 궁중에 불상사가 벌어질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자겸의 요구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하루가 어느새 저물어가고 있었다.

 

 

“국공, 밤이 되면 역적들이 몰래 궁성을 빠져나갈까 염려됩니다. 그들이 궁성을 빠져나가 다른 세력과 규합한다면 우리의 거사는 물거품이 됩니다. 궁궐의 문을 불태우고 강제로 진입하여 그들을 체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척준경이 이자겸에게 물었지만, 그는 얼른 답변하지 못했다. 궁궐을 불태운다는 것은 반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절대로 궁궐에 방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조바심치던 척준경은 답변이 있기도 전에 동화문 낭하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마침 바람이 불어 불길이 임금의 침전까지 미치자 궁인들이 놀라 대피했다.

 

 

밤이 되자 척준경과 이자겸의 넷째 아들 이지보가 군사를 이끌고 춘덕문을 통해 궁안으로 난입했다. 궁성을 지키던 최탁과 대장군 윤성 등이 죽었고, 임금을 호위하던 군사들도 부지기수로 죽임을 당했다. 또한, 임금이 남궁(南宮)으로 피신하는데 호종하던 군신들도 이지보가 이끄는 병사들에게 모두 살해당했다.

 

 

“짐은 조선국공에게 양위하겠다.”

 

인종 임금은 궁성 안에서 자신을 지키다 많은 인명이 살상당하자 이자겸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신하가 임금의 명을 받아 양위조서를 작성하여 이자겸에게 보냈다.

 

 

이자겸은 쾌재를 불렀으나 중신들의 비판이 두려워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는 당장 임금을 폐위하고 자신이 고려의 지존이 되겠다는 뜻은 없었다. 단지 십팔자득국설을 가슴에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 기회가 득달같이 찾아왔으나 이자겸은 임금의 양위조서를 받고 고민했다.

 

 

“폐하께서 조서를 내렸지만 이공이 어찌 그 같은 일을 하겠습니까?”

 

이자겸의 재종형제인 평장사 이수(李壽)가 강력하게 반발하자 이자겸은 자신의 심복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라의 주인을 바꾸는 일은 한두 사람이 마음을 먹는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역성(易姓)하려면 수많은 죽음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공, 아직은 때가 아닌 듯 합니다. 자칫 나라에 큰 혼란이 오고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으니 숙고하십시오. 국공을 바라보는 눈들이 너무 많습니다.”

“맞습니다. 조금 더 두고 보시지요?”

 

 

이자겸은 측근들의 만류에 할 수 없이 양위조서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조서를 선뜻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척준경의 속내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조정 내 문관들 상당수를 지지세력으로 두고 있지만, 척준경을 위시한 무관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얻지 못한 상태였다.

 

무관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양위는 무의미한 짓이었다. 이자겸과 척준경 일당의 준동으로 궁궐이 대부분 불타버리고 상춘정과 상화정 등 정자와 궁궐 내의 사찰인 내제석원(內帝釋院)의 회랑만 겨우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자겸이 사람을 보내 임금을 자신의 저택인 중흥댁의 서원(西院)으로 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중흥댁(重興宅)은 이자겸의 선조가 살던 개명댁을 임금의 명령에 따라 대저택으로 꾸며 중흥댁이라고 고쳐 부르고 이자겸이 살도록 했다. 사람들은 이자겸의 중흥댁을 작은 궁궐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임금이 홀로 샛길을 이용해 이자겸의 집으로 향했다.

 

임금이 이자겸의 집에 도착하자 이자겸과 그의 처 최씨가 맨발로 달려 나와 맞이했다. 최씨는 문하시중을 지낸 해주가 본관인 최사추(崔思諏)의 딸이었다. 임금은 그녀의 둘째 딸 소생이니 외손자가 되었다. 또한, 이자겸 부부는 외손자인 임금에게 셋째, 넷째 딸도 시집을 보내 왕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폐하, 왕후께서 입궐하여 폐하를 낳으시자 저희 두 사람은 일구월심으로 폐하께서 오래 사실 것을 온갖 정성을 다해 천지신명에게 빌고 또 빌었습니다. 선황제께서 위독해지자 소신이 앞장서서 당시 열네 살의 어린 왕자였던 폐하를 지존에 올려놓았습니다. 자칫하면 숙부들에게 권좌를 빼앗길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천지와 신령들도 우리 부부의 지극한 정성을 아는데, 도리어 폐하께서는 역적들의 말을 믿고 골육지친을 해치려 하시니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임금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자겸은 은근히 자신의 공을 드러내며 임금의 배은(背恩)을 탓하고 있었다. 이미 헌종 대에 숙종이 금상을 찬탈한 일도 있었던 고려 왕실이었던 만큼 중신들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어린 인종 보다 예종의 동생 중 한 명이 지존의 자리에 앉기를 바랐다.

 

 

이자겸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인종 임금은 지존의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이자겸과 최씨는 옆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땅을 치며 대성통곡했다. 임금은 어릴 때부터 궁궐보다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의 집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폐하께서 역적들과 어울려 소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줄 알았사오나 소문일 것이라고 치부하였습니다. 다만, 폐하의 성총을 흐리게 하는 대역무도한 자들을 소신이 먼저 처단하였습니다. 부디 혜량하소서.”

 

이자겸은 그럴듯한 말로 임금의 심기를 달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마음씨 착한 임금은 외조부, 외조모의 감언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임금이 이자겸의 집으로 행차함에 따라 이후부터 임금은 이자겸의 집에 머물며 국사를 봐야 했다.

 

 

사실상 이자겸과 척준경의 권력에 임금이 백기를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임금이 이자겸의 집에 머물며 정사를 보자 조정의 중신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자겸의 횡포를 규탄하였다.

 

그러나 그를 어찌할 방법이 없어 중신들은 벙어리냉가슴 앓듯 지금의 사태를 보고만 있어야 했다. 임금이 서원에 거처하면서 이자겸과 척준경의 일당들에게 둘러싸여 제대로 나랏일을 볼 수 없었다.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이 즉시 이자겸과 척준경에게 보고되었고, 서원을 드나드는 백관(百官)들도 일일이 두 사람에게 통보되었다. 정국(政局)이 이리 돌아가자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강성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