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나부인(5)
본 소설은 고구려 제12대 중천태왕의 후궁 관나부인(貫那夫人)의 억울한 죽음을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창작되었습니다. 9부 정도 까지 계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감상 바랍니다.
여강 최재효 拜
관나부인
- 여강 최재효
5
5부 연맹체제로 나라가 운영되고 있는 고구려는 초기 보다는 왕권이 많이
강화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노부(奴部)를 이끄는 장자들이 많은 권한을 가지
고 있었다. 이미 신하들에 의해 두 명의 태왕이 죽임을 당하거나 교체되는 경
우가 생기다 보니 태왕들은 늘 5부 연맹의 수장들 눈치를 살펴야 했다.
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태왕이 된 연불 역시 5부연맹 장자들 눈치를
보고 있었다. 태왕은 5부 중에서 연나부의 장자들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국상
명림어수는 차대태왕(次大太王)을 살해하고 권력을 잡은 명림답부의 후손이
기에 태왕은 더더욱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연나부 사람들이 작성한 벽서의 내용이 기어이 태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
었다. 태왕은 벽서를 보고 눈앞이 캄캄했다. 자신이 관희에게 빠져 국사를 소
홀히 한다는 내용을 접했을 때 태왕은 심장을 비수에 찔린 듯한 격심한 통증까
지 느껴야 했다. 태왕도 그 벽서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대충 감을 잡고 있었지
만 증좌가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벽서로 인하여 고구려 조정뿐만 아니라 왕실도 충격에 빠졌다. 마치 폭풍전
야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궁성 안팎에 안개처럼 깔리면서 조정 중신들과 궁인
들은 입조심을 하였고 얼굴이 마주쳐도 모르는체 할 정도였다. 자칫 말 한마
디라도 잘못했다가는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벽서 사건 이후로 태왕은 잠시 관희의 처소로 들지 않고 대전에서 홀로 밤을
새우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태왕은 홀로 술잔을 기
울이며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짐이 그동안 관희만 총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태왕비가 감히 짐에
게 비수를 들이댈 수가 있단 말인가? 하기사, 짐이 태왕비 처소를 찾은 지가 언
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짐이 너무 하기는 했지. 짐만 바라보고 시집 온
여인을 독수공방으로 지내게 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섭섭하
더라도 벽서까지 써서 붙여야 한단 말인가?
그 벽서가 태왕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국상의 의도일 수도 있겠어.
앞으로 어찌해야 이 사태를 조용히 넘길 수 있단 말인가? 벽서 내용대로 관희
를 위나라로 보낸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어. 짐은 이제 관희 없으면 세상 사는 맛을 잃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넘쳐나는 몸피로 투실해 보이는 태왕비는 절대로 관희의 능수능란하고 환상적인 비술(祕術)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야.
벽서 내용대로라면 관희가 요즘 들어 방사에서 기가 막힌 묘법을 선보이는
것이 모두 왕태후에게 전수받은 방술(房術)이었단 말이지. 짐이 이제 겨우 여
인에 대하여 진정한 맛을 느끼게 되었는데 벽서가 날아들다니, 하지만 일이
잠잠해지면 관희와 못다 한 사랑놀이를 이어가야겠어. 짐은 이제 육림(肉林)의
향연을 만끽하게 되었는데 중도에 그만둘 수 없어.’
초저녁부터 대전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태왕은 이러저러한 잡념으로
머리가 아팠다. 곁에 앉아 시중은 드는 젊은 궁인은 숨을 죽이며 태왕의 빈
술잔에 술만 따를 뿐이었다. 술 한 병이 모두 비울 무렵이었다. 태왕의 부름
이 아니면 대전을 거의 찾지 않던 태왕비 연씨(椽氏)가 나인들과 대전을 찾
았다.
“폐하, 대전에서 홀로 약주를 드신다기에 소첩이 안주를 만들어 왔습니다.”
태왕비는 마치 첫날밤 새색시처럼 칠보단장을 하고 만면에 미소를 함빡 머금
고 태왕에게 다가왔다. 같은 궁궐에 있으면서 지아비의 용안을 실로 얼마 만에
보는지 태왕비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뜻밖의 태왕비 출현에 태왕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구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태왕은 옆에 앉아 있던 궁인을 내보내고 태왕비와 마주 앉았다. 부부가 참으
로 오랜만에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소첩은 폐하의 염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우울하
시면 소첩의 처소로 오시지 않고요? 폐하께서 대전에서 홀로 술잔을 비우시고
있다는 소식에 소첩이 폐하가 좋아하시는 약과와 고기 안주 좀 만들어 왔습
니다.”
태왕은 태왕비의 말에 미안함과 양심의 가책에 어찌할 줄 모르고 연신 헛기침
만 해댔다. 태왕에게 태왕비는 반갑기는 커녕 불청객같았다. 두 사람이 정식 부부라고하지만 무늬만 부부인 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아닙니다. 짐이 조용히 생각할 것이 있어 대전에 있던 참이었습니다. 태왕
비께서 괜한 수고를 하셨어요. 아뭏든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으니 수작이나 하십시다.”
태왕은 태왕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태왕은 태왕비가 대전을 찾
아온 까닭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태왕비도 밤마다
관희의 처소에 들던 태왕이 홀로 대전에 앉아 처량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심사를 감지하고 있었지만 모르는체 했다.
“폐하, 오늘 밤은 소첩이 술 동무가 되어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그럼요. 좋지요. 그리하세요.”
태왕비를 배출한 연씨 가문은 연나부 소속이기는 하지만 명림씨만큼 고구려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의 세력은 아니었다. 그녀가 태왕의 비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연씨와 명림씨의 오랜 결속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대태왕(新大太王)때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군대를 이끌고 와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이때 국상 명림답부가 이끄는 고구려군은 청야전술을 구사하며 좌원(坐原)
에서 경림의 군대를 철저히 격파하여 살아서 돌아간 현도 군사가 거의 없었다.
이때 연씨 가문 사람들이 명림답부를 도와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었고 그 군공
(軍功)으로 명림답부는 명실상부한 고구려 최고의 실력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폐하, 용안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그동안 관희의 처소에서 머물더니 건강이
악화한 듯 합니다. 폐하는 고구려의 중심입니다. 고구려 만백성은 오로지 폐하
한 분만을 우러러보며 살고 있나이다. 그런데 폐하의 건강이 안 좋으시면 백성
들이 불안해합니다.”
“태왕비, 고맙습니다.”
태왕은 금잔에 술을 가득 따라 태왕비에게 건넸다. 태왕의 잔을 받아든 태왕
비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술에 취한 태왕의 눈에 태왕
비의 붉은 입술이 너무나 탐스러워 보였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언뜻언뜻 비
치는 하얀 치아와 움푹 들어가 보조개가 태왕의 음욕(淫慾)을 사정없이 자극
하였다.
‘음-, 태왕비가 말을 빙빙 돌리는구나. 할 말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하지
않고 나의 의중을 뜨개질 하는 게 틀림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태왕비의 입
술이 무척 탐스럽구나. 마치 잘 익은 앵두나 복숭아 같도다. 그동안 짐이 태왕
비를 너무 과소 평가했단 말인가? 입술만큼은 관희 보다 도톰하고 매혹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불 속의 기교는 관희가 탁월하다.’
태왕은 태왕비의 말을 크게 개의치 않는 듯 술잔을 비웠다. 태왕비는 가슴에
맺힌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억지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가며 자제하였
다. 태왕비가 분기(憤氣)를 통제하지 못하고 속에 담고 있는 말을 모두 쏟아낸
다면 분위기는 험악해질 게 뻔했다.
“폐하, 곧 위나라에서 사신이 다녀갈 예정이라 합니다만…….”
태왕은 태왕비가 위나라 사신을 들먹이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다음에
이어질 태왕비의 언사가 어찌 전개될지도 예측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짐은 위나라를 겁내지 않습니다. 사신이 오거나 말거나 신경 쓰고 싶지 않
습니다.”
태왕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씩 웃으며 잔을 들었다. 태왕의 무반응에
태왕비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폐하, 설마 선대 태왕 때의 참담했던 일을 잊으신 것은 아니신지요? 소첩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고 치가 떨립니다.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
면 안 될 것입니다.”
태왕은 태왕비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지면서 선대 태왕 때의 국난(國難)을 기
억해 냈다. 태왕 역시 그때 일을 떠올리기 싫었다. 태왕은 불쾌한 심사를 감추고잔을 단숨에 비웠다. 태왕비는 위나라의 침입 때 지아비 연불이 부왕을 따라 옥저까지 피난갔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위왕(曹王)은 유주자사(幽州刺使)로 있던 관구검을 시켜 두 번이나 고구려를
침입하게 했다. 그의 침입으로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고 동천태왕은 옥저까
지 피난 가는 등 고구려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겼다.
지금도 고구려 중신들과 백성들은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나
될 수 있으면 입에 올리지 않으려 했다. 고구려 사람들의 상처를 태왕비가 다
시 꺼내 태왕을 압박하고 있었다. 만약 또다시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범한다면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한 고구려는 대혼란에 빠질 수 있었다.
태왕이 말로는 위나라를 겁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전쟁이 일어나면 전권을 쥐고 위나라와 맞설 사람은 국상 명림어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잘 훈련된 군대가 있고 장수들이 있습니다.”
태왕이 별로 할 말이 없자 억지로 한 마디 하였다.
“폐하, 고구려의 장수 중에 국상 명림어수의 기량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
“그, 그거야 그렇지요.”
태왕비는 잔을 비우고 태왕의 난감해하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순
간 순간 변화하는 태왕의 안색을 그녀는 즐기는 듯 보였다. 태왕비가 웃는 듯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위왕 조방(曺芳)은 스물 초반의 한창 나이랍니다. 소첩의 추측이긴 합니다만,
이번에 위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분명 우리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할 겁니다. 위나라 사람들은 장발의 여인을 무척 선호한다 들었습니다. 폐하,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위하여 관희를 위왕에게 시집보내는 게 어떠신지요?”
“뭐라고요? 관희를 위왕에게 시집보내라고요?”
“뭘 그리 놀라세요? 위왕을 달래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수만 명의 백성이 죽어 나가는 일도 없을 텐데요?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고구려에서 가장 머리가 길고 아름답다고 소문난 관희가 아닙니까?”
“그만하시오. 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이다.”
태왕의 용안이 사색이 되자 태왕비는 깔깔거렸다.
태옹비의 언동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불경스러운 태도가 분명했다. 태왕은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참느라 연신 술잔을 비웠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태왕비
도 말 없이 연거푸 술잔을 비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왕비가 대전에서 나
간 뒤에도 태왕은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관희를 위
왕에게 시집보내라고 하는 말은 태왕비가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안이었다.
‘계루부가 나약하기 때문에 내가 태왕비에게 능멸을 당하고 있다. 가슴 속에
비수를 품고 있으면서도 말로 에둘러치는 태왕비의 저의가 무엇인지 분명하다.
태왕비를 딱하게 생각했던 짐이 바보스럽구나. 무서운 여인이로다. 관희를 위왕에게 시집 보내라는 말은 벽서에 쓰인 내용이 아닌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관희를 그 누구에게도 보낼 수 없어. 짐에게 첫 왕자
공(貢)을 안겨준 여인이 관희다. 짐이 태자 시절부터 동고동락한 여인이 바로 관희였다. 그런 관희를 만약에 짐이 위왕에게 시집을 보낸다면 고구려 백성들이 짐을 어찌 생각할 것인가?’
태왕은 분기(憤氣)를 가라앉히느라 한참 동안 가슴을 쳐대며 씩씩거렸다. 냉수를 마시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을 향해 내뻗기도 했지만 분노의 기운을 완전히 삭힐 수 없었다.
“여봐라, 관희의 처소로 갈 것이다. 채비하여라.”
태왕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태왕의 분노한 표정에 궁인들은 바싹 긴
장하여 태왕의 눈치를 살피며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러웠다. 태왕의 걸음이
불안했다. 휘청거리는 모습을 본 내관들은 좌우에서 태왕의 팔을 잡고 부축했
다. 궁인이 관희의 처소로 바람처럼 달려가 태왕의 오고 있다고 알렸다.
“뭐라고? 태왕께서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신다고? 그리고 태왕비가 태왕에게
나를 위왕에게 시집보내라 했다고? 그게 틀림없으렷다.”
“왕후님, 이년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여아의 말에 관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벽서의 내용을 태왕비가 태왕에게 요구했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태왕비가
요구했다면 조만간 연나부 소속 중신들이 태왕을 찾아가 주청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관희는 여아에게 서둘러 주안상을 준비하라고 해놓고 태왕을 마중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태왕이 호위 무사들과 내관들에게 둘러싸여 관희의 처소로 오고 있었다.
“소첩, 폐하를 뵙습니다.”
“오호, 관희야. 짐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느니라.”
태왕은 곁에 신하들이 있는 것을 잊었는지 관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태왕에
게서 역한 술 냄새가 풍겼다. 관희는 전장에 나갔다 돌아오는 지아비를 맞이하
듯 태왕의 품에 파묻혀 눈물까지 보이며 훌쩍거렸다. 평양성과 저잣거리에 자신과 소비 그리고 태왕을 비난하는 벽서가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관희는 이제는 영영 태왕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폐하, 잘 오시었습니다. 소첩은 폐하를 못 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목이
십 리나 나오고 눈이 백 리나 움푹 들어갔습니다. 지난 사나흘이 마치 천년이
흐른 듯 하옵니다.”
“오오, 그랬구나. 짐도 네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관희는 배시시 웃으며 태왕의 곁에 바싹 다가가 앉았다.
도저하고 거만해 보이는 태왕비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태왕은
그런 관희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날로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는 경지에 오른 관희의 합기(合氣)의 묘술에 태왕은 도취되어 있는 상태였다.
“폐하, 며칠 사이에 용안이 핼쑥해졌나이다.”
관희는 눈물까지 찍어내면서 태왕의 고민을 함께하려는 듯 했다.
금잔에 미주(美酒)가 찰랑거렸다. 태왕은 잔을 비우고 관희의 입술을 안주로 대신했다. 궁인이 안주를 들여오다 말고 얼른 문밖으로 나갔다. 이미 전주(前酒)로 어량해진 태왕은 주변에 궁인들이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희의 옷을 벗기고 풍만한 육덕과 수림(樹林)을 탐했다. 태왕의 행동은 마치 오랜 갈증에 옹달샘을 만난 사람 같았다.
“짐은, 짐은 결코 너를 어디든 보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짐의 동혈지우(同穴之
友)이며,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짐과 극락과 지옥을 함께 해야 한다.”
“폐하, 소첩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소첩은 폐하의 것입니다. 훗날 소
첩이 저승에 들더라도 폐하를 모실 것입니다.”
“그래야지. 짐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관희밖에 없다.”
태왕은 어느새 관희와 자주 즐기던 자세로 바뀌어 있었다.
“폐하-.”
화등잔이 내실을 대낮같이 밝히는 가운데 태왕은 수밀도(水蜜桃)를 깨물었고
무성한 수풀을 찾아 갈증을 달랬다.
관희는 아홉 자나 되는 검푸른 머리를 풀어 태왕의 육신을 감쌌다. 화등잔의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하얀 내실 벽과 붉은 비단 장막에 두 나신이 펼치는 율동
이 그려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사랑의 행위를 펼칠 때면 내실에 환하게 불을 밝히고 하던 습성이 있어 밤에 수직을 서던 궁인들은 두 사람의 은밀한 행동을 훔쳐보았다. 관희 처소의 궁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처소의 궁인들까지 소문을 듣고 달려와 두 사람의 은밀한 행위를 훔쳐보곤 했다.
“어머나, 요즘 들어 관희 왕후님의 행위가 대담해지셨어.”
내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훔쳐보기 위하여 수직이 아닌 궁인들까지 모여들었다. 태왕과 후비들이 벌이는 은밀한 행위를 몰래 들여다보는 일은 대역죄에 해당하였으나 궁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여아야, 저것 좀 봐봐. 저 자세는 원숭이가 나무가지를 어깨에 멘것 같은 자세로‘원박’이라는 거 아니니? 폐하께서 무척 즐기시는 자세 같네.”
다른 처소 궁인이 여아에게 소곤거렸다. 궁인은 생전 처음 보는 장면에 몸이 달아오르는 지 자신의 하체를 비틀면서 손으로 비벼댔다.
“잠시 후면 저 자세에서 곧 ‘토연호’로 바뀔 것이야. 그 다음에는 ‘호보’로 자세가 변환되지. 두 분이 요즘 무척 즐기는 체위란다.”
여아는 자주 봐온 터라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녀도 처음 두 사람의 운우를 훔쳐볼 때는 무척 신기해했었다.
“어머, 어머. 그 호보라는 자세는 우리 그이가 무척 좋아하는 자세야. 마치 호랑이가 걷는 자세인데 나도 우리 그이가 호보를 행할 때 정신이 아득하고 속이 울렁거리며, 옆에 애들이 자는 것도 잊고 비명을 질러대곤 하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벌이는 호보의 행위를 훔쳐보니 너무 야릇하고 황홀하다.”
두 궁인뿐만 아니라 옆 문틈으로도 서너명의 궁인들이 내실이어서 진행되고 있는 황홀경을 들여다보면서 침을 삼키고 있었다. 대개 밤새워 수직을 서는 궁인들은 이삼십대 젊은 여인들이었다. 그녀들 중 상당수는 혼인한 상태라 타인이 그려대는 요지경에 더욱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폐하, 소첩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짐도 마찬가지란다. 너는 영원히 짐의 여자야 한다.”
“폐, 폐하, 소첩 숨이 넘어갈 것 같습니다.”
한 식경이 흐른 뒤에 태왕의 괴성이 내실에 서너 차례 울려 퍼지면서 파정(破
精)하자, 절정에 달한 관희도 울부짖듯 비명을 질러댔다. 밖에서 내실을 들여다
보던 궁인들도 동시에 지극한 열락을 맛 본듯 낮은 신음을 내며 어찌할 줄 몰
랐다.
화등잔은 동이 터올 때까지 꺼지지 않고 불꽃이 이따금 춤을 출 때마다 궁인들
은 다시 문틈으로 몰려들었다. 서너 번의 파정과 관희의 묘음이 터져 나와야 하룻밤이 겨우 지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