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풍(최종)
- 본 작품은 고구려 제6대왕인 태조왕의 어머니 부여태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부여 출신 여인으로 고구려 왕자 재사(再思)와 혼인하여 아들 궁(宮)을
낳습니다. 그녀는 7살의 궁을 고구려 태왕의 지위에 앉히는 여장부 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주변의 약소국을 정벌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여걸이기도 합니다. 그럼, 천천히 감상하세요. ....... 여강 최재효 -
여풍
- 여강 최재효
終
고구려 하늘을 뒤덮고 있던 차갑고 음침한 먹장구름이 훈풍에 의해 서서히 걷히
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변화의 서기(瑞氣)는 고구려 지방에서부터 일기 시작
하여 국내성으로 스며들었다. 두로의 비리연루 사건이 엉뚱하게 소노부의 사자(使
者) 한 명이 희생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조정 중신들은 거대한 규모로 밀려드는 개전(改悛)의 요구를 남의 일 인양 머리
를 땅속에 처박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해우 태왕은 갈수록 정사에 흥미를 잃고 말
초신경으로부터 전해지는 희열(喜悅)의 파도에 몸을 맡기다 시피했다.
태왕의 비위를 상하게 하거나 약간의 불편함을 줄 경우 궁인(宮人)이나 관리들의
목이 잘려나갔다. 그의 괴팍스러운 행태는 도를 넘어 이제는 광기(狂氣)로 변질되
어 양심 있는 자들이 태왕의 주변에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태왕은 자신이 소노부와 고가세족(故家世族)들 심지어 왕실 인사들로부터 철저
히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그들과 관
계를 호전시킬만한 계기를 찾기 어려웠다. 태왕이 좋은 뜻으로 관계회복을 위한
행사를 열어도 주변 인사들은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참가하려 들지 않았다.
활리(猾吏)와 착살맞은 짓만 골라하는 패역한 신하들만 태왕 앞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태왕 주변에 교언영색을 남발하는 자들만 모여들자 뜻있고 신실한 중
신들의 심정은 아뜩하기만 했다. 한번 태왕의 눈에서 벗어났던 두로는 조정에 출
사는 하고 있었지만, 태왕의 곁으로 다가 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본연의 임무는 태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태왕의 잡다한 지시를 수행하는 거
였다. 두로는 계루부 소속 좌보와 우태대인을 자신을 도와주는 우군(友軍)이라고
생각하였는지 그들과 은밀히 만남을 가지며, 태왕에 대한 모든 것들을 전해주었
다.
그미는 조정 중신들과 5부 연맹이 태왕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사실과 태왕을
향한 백성들의 원성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자 거사를 일으킬 시기가 멀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미는 재사와 아들 어수와 함께 비류수에서 고구
려 조정으로 부터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는 서부여(西扶餘)를 방문하였다. 그미와
재사는 대월단을 비롯하여 이백 여명 가까운 호위인력을 대동하였다.
서부여는 대무신 태왕에게 죽임을 당한 부여 대소왕의 종제(從弟) 낙왕(絡王)이
통치하는 소국이었다. 30여 년 전, 일만 명의 부여인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소국
이지만, 이제는 말갈인, 예맥인, 한인(漢人), 옥저인 등 이방인들도 상당수가 서부
여에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서부여는 강력한 군대도 가지고 있으면서 꽤 잘 사는
소국이었다.
“낙왕 전하를 배견(拜見)하옵니다.”
재사와 그미가 낙왕에게 공손하게 반절로 예의를 갖추자, 낙왕이 손사래를 치며,
인사는 무슨 인사냐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낙왕은 소국을 통치하는 군주이며, 재
사는 비록 고구려의 왕자이지만 등급이 달랐다.
“잘 오시었습니다. 풍문으로 두 분의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30여년의 세월이 그미와 낙왕 사이를 서먹하게 했다. 헌헌장부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낙왕은 무척 쇠모(衰耗)한 모습이었다.
“낙왕 전하, 오랫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안부를 여쭙는 소선만 보내고 찾아뵙지
못해 늘 송구했습니다. 무심한 조카를 꾸짖어주소서.”
“그 무슨 소리. 이렇게 봤으면 되었지.”
그미가 부여에 있을 때 낙왕과 서로 마음을 나누며 은애하는 사이였지만, 이제는
서로가 살아가는 방식과 지역이 달랐다. 낙왕은 고구려 계루부의 주인이 된 조카,
부여부인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견스러 워 했다. 그미가 곁에 서있던 아
들에게 눈짓을 하였다.
“낙왕 전하를 알현하옵니다. 소인, 어수라 합니다.”
“오오, 어수공자. 많이 보고 싶었어요. 요즘 서부여국에도 어수 공자에 대한 칭
찬이 자자하답니다. 직접 보니 과연 영웅호걸의 면모가 보입니다. 장차 고구려 만
백성의 지존이 될 동량지재가 틀림없습니다.”
낙왕은 어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마치 친 자식처럼 대하는 낙왕의 모습에 재
사와 그미는 기분이 무척 흔연하였다. 세 사람은 낙왕이 베푸는 환영연에 참석하
여 밤새 마시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무려 사흘 밤낮으로 고구려의 실력자 부부
를 위한 잔치가 이어졌다.
어수는 낙왕에게 기초검술을 선보이기도 하고, 제왕의 덕목을 이야기 하는 등 장
차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마음껏 뽐냈다. 서부여는 자치권을 부여 받은 고구려 내
의 유일한 소국이었다. 낙왕은 휘하에 강력한 기마병 삼천 명과 정예 궁사(弓士)
이천여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조카가 필요하다면 내 기꺼이 군사를 내어주마. 언제든지 연락을 다오. 국내성
까지 말을 달리면 하루 반나절 안으로 도착할 수 있다. 부디, 조카가 뜻하는 바가
이루어졌으면 좋겠구나. 군사가 더 필요하면 갈사국에 도움을 요청하마.
조카가 잘 알다시피 갈사국왕은 나와 고종 사촌지간이니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즉시 도와 줄 것이야. 갈사국에는 오천명의 기마대와 일만 명의 보병이 항시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단다.”
“낙왕 전하,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결초보은하겠습니다.”
그미와 재사는 낙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미와 지아비 재사가 서부여국을 방문하여 순식간에 병력 이만 명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그미가 국내성으로 떠나는 날 서부여국 낙왕과 그의 신하들은
십리까지 나와 그미와 재사 그리고 어수를 전송하였다. 낙왕은 옛 정인(情人)이었
던 그미를 전송하면서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짧은 만남을 무척 아쉬워하며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고구려로 돌아온 그미는 좌보대인과 우태대인을 호출하였다. 좌보대인은 그동안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의 실력자들과 수시로 만나 관계를 돈독히 하였으며, 조정
과 지방장관들과도 소통하며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해 놓았다. 특히, 우태대인은
두로와 의형제까지 맺었고 수시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끈끈한 우애(友愛)를 과
시하였다.
“형님, 지난번 계루부에서 이 아우에게 시집보낸 울향(蔚香)이 저와 속궁합이 아
주 잘 맞습니다. 정말로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올립니다.”
“아우, 울향이는 부여부인이 친동생처럼 아끼던 아이였다. 울향이와 싸우지 말
고 잘 살아야 한다. 부여부인께서 아우를 얼마나 총애하는지 잘 알 것이야.”
“아이고 형님, 저는 태왕보다 부여대부인님의 명을 더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대
부인께서 내리는 명령은 무엇이든 받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두로는 품속에 있는 보검을 툭툭 치며 히죽거렸다.
‘때가 왔음이야. 두로가 우리 계루부를 위해 헌신할 때가 되었어.’
우태대인은 정색을 하고 앉아서 두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두로, 잘 들어라. 우리 계루부에서는 아우를 충신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기대하
는 바가 아주 크다. 그 보검은 대부인께서 장난감으로 하사한 게 아니다. 우리 고
구려에 지금 악의 세력이 점점 퍼져가고 있다. 앞으로 사흘 후 정오가 되면 최악
의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그때, 아우가 그 보검을 사용하여 그 악의 핵심을 단칼
에 처단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악의 핵심이 누구인지는 잘 알 것이야.”
“형님, 지고한 뜻을 반드시 받들겠습니다.”
우태대인은 천문지리에 능통한 스승으로 부터 사흘 후 정오에 고구려 하늘에
일식(日蝕)이 일어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고구려 백성들은 이삼십년 만에 한 번씩 일어나는 한낮의 개기일식 현상을 불길
한 징조로 여겼다. 일식은 악의 세력이 성인(聖人)을 해치기 전에 일어나는 조짐
으로 보며, 대낮에 일식이 일어나면 백성들은 모두 집안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빨리 악의 세력이 물러가기를 바랐다. 두로는 이미 좌보대인에게 진왕을 척
살하려다 실패한 영웅 형가(荊軻)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악의 핵심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부인 사흘 후면 고구려의 태양이 바뀔 것입니다.”
두로와 헤어진 우태대인과 좌보대인은 즉시 그미를 찾았다.
“좌보대인은 대월단원 중 두 명을 선발하여 서부여 낙왕에게 이것을 전하라 하
세요. 말을 타고 달리면 내일 아침 쯤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태대인은 계루
부 소속 모든 병사들을 완전무장 상태로 출동 대기 시켜 놓으세요. 동시에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에 사람을 보내 각 노부 소속 전사들을 출동 대기 시키라 하세요.
지금 즉시 움직여야 합니다. 내가 내리는 명령은 소노부나 조정에서 알면 안 됩
니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합니다.”
소노부 고추가는 계루부 인사들의 움직임에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소노부의
고추가 뿐만 아니라 장자들이 태왕의 실정과 실덕(失德)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
다. 태왕이 소노부 출신이 아니라면 그를 끌어내리려 혈안이 되어 있을 터 였다.
그러나 소노부 출신의 태왕을 자신들의 손으로 끌어내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소노부 고추가는 장자들을 불러 조촐한 술자리를 열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나자
장자들은 왁자하게 떠들며 정치와 옛 무용담을 꺼내어 이야기 꽃을 피웠다. 장자
들의 눈치를 보고 있던 고추가가 헛기침을 서너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소노부가 언제까지 수수방관하고 있을 것이오?”
소노부의 고추가가 장자들에게 속내를 밝혔다. 그러나 모두가 변화를 기대하면
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고 우두망찰 가리산지리산하였다.
“고추가 대인, 그럼 태왕을 끌어내리자는 말씀인가요?”
“요즘, 계루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우리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허를
찔릴 수 있습니다.”
고추가는 심각한 표정으로 장자들을 한사람씩 훑어보았다. 장자들은 벌레를 씹
은 표정이었다.
“고추가 대인, 우리 소노부에 살고 있는 인사 중에 태왕을 대신할 만한 인물이 있
나요? 지금의 태왕을 어떻게 끌어내릴 것인지요?”
장자 중에 제법 정치에 관심이 많은 자가 물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소노부에 태왕과 친인척이 되는 해씨(解氏)들
이 상당수 있습니다. 장자님들 중에도 해씨 성을 가진 분이 계시고요. 국내성의 기
류가 차츰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듯 합니다. 번개처럼 변혁의 바람이 불 수도 있습
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걸출한 인물을 한 사람 생각해 놓으세요.
지금의 해우 태왕을 강제로 퇴위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태왕이 병이들거나 스스
로 물러나지 않는 한 개과천선 하기만 바라야 하는 실정입니다. 해서, 내일 우리
소노부 장자들이 해우 태왕을 만나서 우리의 의견을 전달코자 합니다. 그래도 진
전이 없을 경우에는 달리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소노부 장자들은 태왕에게 선정(善政)을 권고하는 선에서 끝나고 말았다. 소노
부에서 군사를 움직여 태왕을 강제로 끌어내리고자 한다면 나머지 노부(奴部)의
수장들과 사전에 긴밀한 협의가 있어야 했다.
소노부는 이만 여명의 상비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개가 보병이었고 기병은 겨
우 삼천 명 밖에 안 되었다. 소노부의 상비군은 평시에 농사를 짓거나 화전을 일구
고 살아가는 하호((下戶)들로 전투력은 신통치 않았다.
그에 비하여 계루부 소속 일만 오천 명의 군대는 보병과 기병의 혼합 형태로 고
추가 재사가 수시로 훈련을 시키며 전투력을 끌어 올렸다. 또한, 관노부는 일만 여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오천여명은 용감한 기마병이었다.
고구려 태왕은 약소국이나 한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때 5부 연맹 소속 군
대를 편제하여 이끌고 나갔다. 그중 관노부의 기병들은 기병전에 있어서 노련하
고 용맹하기로 이미 정평이 나있었다.
“폐하, 소신 두로는 먼 훗날 폐하의 저승길을 함께 할 충견(忠犬)입니다. 소신은
그동안 회개하며 지난날의 허물을 만회하고자 노력하였나이다. 소신이 예전처럼
폐하의 지근에서 견마지로를 다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태왕이 한가한 틈을 노려 두로가 대전에 들어 태왕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간의 일
들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다. 가뜩이나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떠나가는 마당에 두
로가 제 발로 들어와 잘못을 고하자 태왕은 측은한 시선으로 두로를 내려다 보았
다. 한때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신하를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다.
두로는 오랫동안 태왕의 곁을 지키며 태왕의 지저분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한 숨
은 공로도 만만치 않았다. 만약 두로가 잠적하여 태왕의 부도덕한 일들을 발설하
는 날이면 태왕은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다.
“진정으로 네가 잘못을 뉘우치고 예전처럼 짐의 충견이 될 것이냐?”
“폐하, 충견의 목숨은 주인의 것이옵니다. 지금 당장 목숨을 달라하시면 드리겠
습니다.”
“앗, 두로야, 안 된다.”
두로가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자신의 목을 찌르려고 하자, 태왕이 소리쳤다. 그
바람에 좌우에 있던 호위무사들이 두로에게 달려들어 비수를 빼앗았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두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태왕에게 수도 없이 절을 하였다.
“이놈아, 목숨을 함부로 버리면 못쓴다. 사내는 진정으로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
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야 하느니라.”
두로가 태왕의 신임을 다시 회복하였다. 두로는 예전보다 더 활개치고 다니며 태
왕을 보좌하였다. 태왕의 신임을 회복한 첫날밤에도 태왕의 명령을 받아 궁인 두
명을 처형하였다.
그녀들은 알몸으로 태왕의 베개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그만 방귀를 참
지 못하고 냄새를 풍기자 태왕은 화를 벌컥 내며, 즉시 밖으로 끌고나가 죽이라고
했다.
“태왕이 점점 더 미쳐가는 구나.”
“태왕은 사람이 아니다. 피를 부르는 악귀다.”
“우리도 언제 목이 잘릴지 모른다. 빨리 궁에서 도망치고 싶다.”
“저승사자 두로가 다시 태왕 곁으로 돌아온 이상 우린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다.”
궁인들은 두 궁인의 비참한 죽음을 두고 수군거렸다. 두로는 태왕의 명을 받아
궁인을 죽이면서 가슴이 아팠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태왕의 심기를 건드렸다하
여 목이 잘리는 걸 보면서 두로는 속으로 외쳤다.
‘좌보대인과 우태 형님의 말이 맞다. 태왕은 악의 화신이다. 나도 언제 태왕의
명령에 목이 떨어질지 모른다. 나는 살아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다. 나는 태왕이 죽
으면 순장(殉葬)되야 할 처지다. 내가 사는 방법은 태왕을 죽이는 수 밖에 없다.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다. 천수를 누리고 싶단 말이다. 천수를…….’
두로는 간밤에 울향이 한 말을 기억해 냈다. 육덕이 실팍한 그녀를 생각할 때마
다 두로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울향이 온갖 기교를 부려 가면서 *감탕질을 해대
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사내 다루는데 경지에 올라 있었다. 황소처
럼 우직한 사내 한 명쯤은 하룻밤에 열두 번도 더 극락과 지옥을 오가게 할 능력
을 가진 요부(妖婦)였다.
* 감탕질 - 관계할 때 여인이 소리를 내며 몸을 음탕하게 놀리는 짓.
“나는 이제 당신 없으면 못 살아요. 그런데, 당신이 태왕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할 팔자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고구려를 도망쳐 한나라나 백제
아니면 갈사부여국으로 가서 살아요. 나는 당신이 태왕을 따라 죽는 걸 볼 수 없
어요. 장차 태어날 우리 아기는 누굴 믿고 세상을 살아간다 말입니까?”
울향이 서럽게 흐느끼자 두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어째서 피 한 방을
섞이지 않은 태왕을 따라 죽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울향아, 울지 마라. 무슨 방법이 있겠지.”
두로가 통곡하는 울향을 다독거렸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더욱 큰소리로 울었다.
울향이 한참 울고나서 두로에게 말했다.
“차라리, 차라리 태왕을 죽여 버려요. 태왕이 죽으면 당신은 천지신명이 부여한
삶을 끝까지 살 수 있잖아요. 만일, 당신이 태왕을 죽이면 고구려 만백성과 계루부
에서 당신을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당신 신변을 보호해 줄 겁니다.
나는 부여대부인과 자매처럼 지내는 사이랍니다. 부여대부인께서는 당신을 고
구려의 충신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제, 진정한 충신이 되어 보셔요. 나는 당신
과 아이 낳고 한오백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두로는 태왕의 침소에 다른 궁인을 들여보내고 밖으로 나왔다. 반달이 구름 속을
들락거렸다. 별들이 모두 얼어 국내성 안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눈보라가 휘몰
아 쳐도 두로는 추운 줄 모르고 침전 앞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복잡한 심사를 되
새겨 보았다.
‘내일 정오면 악의 세력이 해를 잡아먹는다고 했다. 울향이 말대로 내가 사는 길
은 태왕을 죽이는 방법 밖에 없다. 매일 불안에 떨며 사느니, 차라리 큰일 한번 하
고 고구려 만백성을 편하게 하자. 내가 태왕을 죽이고 단 하루라도 자유롭게 살았
으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계루부에서 나를 보호해 줄 것이야. 울향이 부여대부인
과 자매처럼 지낸다니 나를 절대로 잘 못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야. 내일이다.
내일 정오면 고구려의 하늘과 태양이 바뀔 것이다. 내일이면…….’
두로가 침전 앞마당을 이리저리 바장이고 있을 때였다. 북쪽 하늘에서 커다란 별
하나가 불꽃을 일으키더니 이내 별똥별이 되어 길게 꼬리를 매달고 땅으로 곤두박
질 쳤다. 밤하늘을 올려다 보던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
시각에 그미는 지아비 재사와 별채에 들어 거사에 대하여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부부가 밀담을 나누고 있을 때 저택 밖에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병사 백여 명이
칼과 창, 활 등으로 중무장 한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 였다.
초저녁부터 두 사람이 정담을 나누며 식사를 곁들여 반주를 마셨다. 반주가 발전
하여 두 사람만의 조촐한 술자리로 이어졌다. 평소에 재사는 별로 말이 없었다. 계
루부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지어미가 알아서 매끄럽게 처리하는 바람에 그
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내일입니다. 내일 정오에 태왕의 목숨이 다할 것입니다. 고추가께서 마음의 준
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인, 우리가 괜한 일을 벌이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재사는 지어미를 믿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조카를 죽여야 한다는 현실이 퍽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숙부가 왕위가 탐이 나서 조카를 죽였다는 말이 날까 두려
웠다.
“왜 그렇게 나약한 말씀을 하셔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입니다. 한 순간입
니다. 내일만 지나면 고구려의 하늘과 태양이 바뀝니다.”
“부인,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나는 두 번이나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또한 나이도 있고요.”
재사가 그미의 눈치를 살폈다. 나이 마흔이 조금 넘은 상태였지만, 그는 자신이
없어보였다. 지아비의 말에 그미는 두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치 면벽
삼매에 든 고승(高僧) 같았다. 재사는 숨을 죽이며 그미가 어떤 말이라도 한마디
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고추가가 자신 없어 하니 어찌해야 하나? 꼭 결정적인 순간에 겁을 집어 먹고
몸을 사리는 지아비를 한 번 더 믿어보려 했는데, 다 된 밥에 코를 풀려하다니.
어수는 너무 어리다. 어린 아이를 내세우면 성인(成人)이나 다름없는 해익과 비
교가 될 것이야. 해익이 비록 비난을 받고 있지만, 만약 소노부에서 결사적으로
해익을 등에 업고 나올 경우 일이 얼크러지기 쉽다.
좋다. 어수에게 희망을 걸어보자. 그동안 사람을 풀어 고구려 전역에 어수를 많
이 띄워 놨으니, 크게 반발하는 세력은 없을 것이야. 내가 뒤에서 돌봐주면 된다.’
“고추가께서는 어수를 미세요.”
“그 아이는 너무 어리지 않소?”
“저와 고추가가 뒤에서 후광이 되어주면 됩니다.”
“나와 부인이 어수의 후광이 된다? 부인이 섭정을 한다는 말이오?”
두 사람은 내일 벌어질 일에 대한 대책을 마무리 짓고 오랜만에 도타운 운우의
정을 나눴다. 비단 금침 아래에서는 늘 그미가 선두에 있었다. 재사는 한 평생 죽
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궁궐에서 생활한 덕에 매사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용
호상박의 기 싸움이 지속되고 있었다.
간간이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여인의 교성(嬌聲)과 사내의 용쓰는 소리가 번을
서는 병사들의 오감을 자극할 뿐이었다. 두 사람이 도타운 정을 나눌 때 어수가 잡
을 자고 있는 안채 지붕에는 찬란한 오색 빛이 쏟아졌다. 한밤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오오, 어수 공자님이 주무시는 곳에 오색무지개가 떴다.”
“이런 현상은 성인의 출현을 알리는 상서로운 징조다.”
“조금 전에 궁궐이 있는 북쪽 하늘에서 왕별이 떨어지더니, 이번에는 계루부에
무지개가 떴구나. 이것은 하늘의 계시가 틀림없다.”
병사들은 안채 지붕 위에 걸려 있는 오색 무지개를 바라보며, 감격하였다. 밤에
무지개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금방 계루부 장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장자들은 소문
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간할 수 없었다.
길고 지루한 밤이 꼬리를 감추고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미의 지시를 받은 절
노부, 관노부, 순노부 고추가 및 장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소속된 군사들을 소집해
놓고 점검을 하였고, 특히 관노부는 기마대를 한곳에 모아 두고 말들과 기마병의
무장 상태 등을 점검하였다.
“이런 고얀 년들이 있나. 짐이 꿈을 꾸었는데, 황룡이 아니라 흑룡이 나타나 짐
을 잡아먹으려 하였다. 이는 필시 이년들의 육덕이 어둔하고 찰지지 못한 까닭이
다. 두로는 이년들을 당장 끌고나가 목을 쳐라.”
“태왕 폐하, 살려주세요.”
“태왕 폐하, 저희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살려주셔요.”
밤새 태왕의 욕정(欲情)을 해소시켜준 두 궁녀가 살려달라며 빌었지만, 태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말갈족 출신의 두 궁녀가 또 목이 잘렸다. 태왕이 보위에
있는 6년 가까이 죽어나간 궁녀만 백여명이 넘었다. 두로는 아리따운 여인들의
목을 칠때마다 마치 자신이 저승 사자나 범죄를 저지른 자를 참수하는 망나니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 이 짓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나는 저승사자도 아니고 망나니도 아니다. 나는
고구려의 숫백성으로 살아가고 싶다.’
두로는 두 여인을 참수하고 나서 흐느꼈다. 두로는 피 묻은 손을 씻을 생각도 않
고 집으로 퇴청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그를 보고 울향이 두로를 위로하였다. 그녀
는 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하였다. 두로는 집에 와서도 얼굴을 감싸
고 괴로워했다.
“당신은 소돼지를 잡는 백정도 아니고, 죄인의 목을 치는 망나니도 아닙니다. 난
당신의 순수하고 고결한 마음씨를 잘 알아요. 이제는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는 일
을 끝내야 해요. 나는 당신이 더 이상 살인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울향이 반쯤 넋이 나가있는 두로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한참 동안 목놓아 울었다. 이웃 사람들이 두로의 집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듣고 담장 밖에서 집안을 기웃거렸다.
“부인, 울향이, 오늘 나는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이오.”
“당신께서 결단을 내리셨군요. 장하세요. 당신은 고구려 만백성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겁니다. 당신은 역시 충신입니다. 아침상 올리겠습니다.”
밤새 태왕의 침전 주변을 돌며 수직을 섰던 두로는 집에 돌아와 깨끗하게 몸을
씻고 등청하였다. 그의 품에는 그미가 내린 보검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 보검을
뽑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태왕은 아침부터 또 술타령이었다. 요즘들어서는 아예 정사(政事)를 내팽개치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중신들은 그런 태왕을 경계하며 궁궐을 베돌다 퇴청하였다.
정오 가까이 되자 맑은 하늘에 구름이 끼더니 날씨가 끄느름했다. 두로는 대전에
들어 태왕에게 입궁했음을 알리고 여느때처럼 태왕 곁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태왕
을 호위하였다. 태왕은 이미 대취하여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그때였다.
“해가 사라지고 있다.”
“태양이 검게 변하고 있다. 무슨 불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이다.”
대전 주변을 지키고 있던 궁인들과 무관들이 소리쳤다. 궁인들이 촛불을 켜 대전
을 밝혔다. 두로는 술에 취해 나인을 끌어안고 해롱거리는 태왕에게 다가갔다.
“두로야, 너도 한잔 하려무나.”
“폐하, 소신이 나라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부디, 소신을 용서하소서.”
두로가 보검을 빼들고 태왕을 노려보았다.
“두, 두로야, 그 카, 칼을 어디에 쓰려고 그러느냐?”
두로는 주저하지 않고 보검으로 해우 태왕의 목을 찔렀다.
“네가, 네가 감히 짐을…….”
태왕은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버둥거리다가 곧 절명하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옆에 있던 궁인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대전 밖으로
도망쳤다. 비명 소리를 듣고 대전 주변을 지키고 있던 무관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태왕을 보고 충격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로만 쳐다보
고 있었다. 차마 두로가 태왕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너희들은 나를 감옥에 가둬라. 내가 태왕을 시해하였다.”
태왕이 두로의 칼에 죽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5부의 고추가와 장자들에게 전해
졌다. 그들은 반신반의하며 소문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루부에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즉시 국내성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걸어 닫고 소노부를 제외한 사부(四部)
의 고추가와 장자 그리고 중신들을 소집하라. 중대 사변이 발발하였다. 또한, 계루
부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 군대들은 지금 즉시, 소노부의 고추가와 모든 장자를
잡아 옥에 가두고, 소노부 소속 군대를 포위하여 무장을 해제 시켜라. 빨리 움직
여라. 그리고 태자와 왕비를 냉궁에 구금하라.”
재사는 나라의 최고 원로로서, 왕실의 최고 어른의 자격으로 명령을 내렸다. 국내
성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난리법석이었다. 백성들은 태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세를 불렀고, 왕실 사람들은 죽은 듯 집안에 박혀 나오지 않았으며, 중, 하
급관리들은 일을 내팽개 치고 주점으로 몰려들었다.
시장은 철시(撤市)하였고 기루와 유곽에서는 술값을 깎아주었다. 그미와 재사는
대전에 들어 계루부 중신들과 대월단원들로부터 속속 들어오는 소식을 듣고 지시
를 내리고 있었다. 국내성 밖에는 4부 소속의 군대와 밤을 새워 달려온 서부여 그
리고 갈사국 군대도 진영을 펼치고 그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미의 명령 한
마디면 소노부는 역사에서 사라질 운명을 맞고 있었다.
“태왕이 충신 두로에 의해 승하(昇遐)하였습니다. 나라의 주인 자리는 잠시도 비
어 있으면 안 됩니다. 행여, 한나라나 백제 또는 외방의 나라에서 태왕이 승하한 사
실을 알면 즉시 쳐들어 올 것입니다.”
재사가 소노부를 제외한 조정의 중신들과 계루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 장자들
을 모아 놓고 비상대책회의를 주재하였다.
“왕자님, 그럼, 차기 태왕의 위를 누구에게 잇게 할 계획입니까?”
“당연히, 해익 태자가 승계해야지요.”
눈치 없는 신하가 입을 열었다. 순간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4부
의 장자들과 눈치 빠른 중신들은 재사의 눈치를 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절
노부의 고추가가 나섰다.
“태자 해익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 태왕의 재목이 안 됩니다. 벌써부터 술과 계
집에 빠져 사는 태자에게 고구려를 맡길 수 없습니다. 고구려를 건국하신 주몽 태
왕의 손자이시며, 유리 태왕의 아드님이신 계루부의 고추가 재사 왕자님이 대통을
이어야 합니다. 재사 왕자님은 품행이 방정하시고 백성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시는 인자(仁者)입니다.”
이어서 관노부의 수장이 나섰다.
“지금까지 고구려의 태왕은 모두 소노부 출신이었습니다. 절대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입니다. 소노부 출신 인사가 태왕이 되어 나라를 반석 위애 올려놓은 것은 사
실입니다. 그러나 능력 안 되는 자가 태왕이 되어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듣기도 했
습니다. 이제는 다른 노부에서 태왕을 모셔야 합니다.”
절노부와 관노부를 대표하는 두 수장들의 제안에 다른 중신들과 장자들은 유구
무언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재사는 퍽 반가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나는 나이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이제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국정 운영
에 젊은 피가 수혈 되어야 나라가 발전 할 수 있습니다.”
재사가 태왕의 자리를 고사하자, 회의는 잠시 공전하는 듯 했다. 휴정이 되자 조
정 중신들과 4부 고추가와 수장들은 별도로 모여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 자리에는
부여부인이 참석하여 회의를 진행하였다. 구수회의(鳩首會議)는 금방 끝나고 말
았다. 그미의 요청에 의해 소노부의 고추가가 궁궐에 들어왔다.
그미는 소노부 고추가를 독대하면서 몇 가지 특혜를 제안하였다. 국내성 밖에는
그미의 명을 받고 달려온 계루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 소속 군대가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었고, 곧이어 서부여와 갈사부여국 군대도 도착하여 진을 쳤다. 6만
명이 넘는 대군이 그미의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든 출동이 가능한 상태였다.
성밖에 대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이 비상회의에 참석한 5부의 고추가와 수
장들 그리고 조정 중신들 귀에 들어갔다. 회의장은 갑자기 긴장감이 흐르면서 모
든 인사들이 계루부 수장인 그미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 시진이 지나
다시 회의가 속개되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소노부의 고추가가 의견을 개진
하였다.
“다음 태왕은 재사 왕자님의 아드님이신 어수, 아니 궁(宮) 공자님이 최적격입니
다. 궁 공자는 이미 고구려 전역에 영민하고 심성이 웅숭깊으며, 불쌍한 백성을 생
각하는 바가 너그럽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의 해익 태자하고는 비교가 안 됩
니다. 또한, 궁 공자님 뒤에는 재사 왕자님과 영명하신 부여부인께서 계십니다. 얼
마든지 섭정이 가능합니다.
재사 왕자님은 유리 태왕의 아드님이시며, 도저하고 속이 매우 깊으 신분입니다.
또한, 부여부인께서는 계루부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탁월한 영도력과 판단력으로
십여 년 넘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두 분이 궁 공자님을 보좌하신다면 고구려가 대
제국으로 발전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소노부의 고추가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부 연맹의 고추가와
장자 그리고 조정 중신들은 당연히 될 사람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
세가 궁 공자 쪽으로 기울자 그미는 즉시 사람을 보내 궁을 대전으로 들게 했다.
비상회의를 마친 모든 중신들과 5부의 고추가 및 장자들은 대전으로 향했다.
그들이 대전에 좌우로 도열하여 있을 때 궁 공자가 아버지 재사와 어머니 부여부
인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궁 공자는 황룡이 수놓인 용포(龍袍)를 입고 머리에 금
관을 썼다. 일곱 살 어린 아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듬직한 모습에 제
신(諸臣)들은 무릎을 꿇었다. 좌보대인이 일어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새로운 태
왕의 등극을 알렸다.
“이제 어둠의 시대가 가고 찬란한 황금의 시대가 왔습니다. 계루부 출신이며, 유
리 태왕의 손자이신 고궁(高宮) 공자를 오부 연맹과 조정의 모든 중신들의 합의로
고구려 제6대 태왕으로 옹립코자 합니다. 부디, 태왕의 위에 오르시어 고구려를
만세반석에 올려 천년 제국으로 만들어 주소서.”
궁 공자가 5부 연맹 수장들과 중신들을 한번 일별하였다. 태왕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재사와 그미는 행여 아들이 엉뚱한 말을 할까 봐 손에 땀을 쥐
었다. 궁 공자가 얼른 답을 내리지 않자 그미는 속이 탔다. 궁 공자가 이윽고 비답
을 내렸다.
“제신들의 뜻을 받아들여 고구려 태왕의 위를 수락합니다.”
궁 태왕의 수락이 있자 제신들은 모두 일어나 만세삼창을 하였다.
“궁 태왕, 만세, 만세, 만세.”
새로운 시대가 였렸다. 궁 태왕은 어머니 부여부인을 태후로 봉하고 전국에 사면
령을 내려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 모두 방면하였으며, 세금징수를
6개월 유예하고 국고를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호하였다.
또한, 대월단원들을 모두 관리로 편입한 뒤에 전국에 파견하여 지역 토호나 오
리(汚吏)에게 억울하게 토지와 재물을 빼앗긴 사례를 조사토록 했다. 조사에서 조
그만 비리라도 발견될 경우 매우 엄격한 처벌로 단죄하였고, 선행이 있는 자는
포상하였다.
“우리는 어수가 누구인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해익(解翊) 태자만 있을 뿐
이다. 계루부에서 해우 태왕을 죽이고 억지로 계루부 출신을 태왕에 앉혔다. 우리
는 승복할 수 없다.”
계루부의 연합군 6만여 명에게 포위된 소노부는 새로운 태왕의 등극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였다. 소노부의 고추가가 반발하는 소노부 군장(軍將)들을 설득하려 들
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루하게 흘러갔다. 소노부의 군장들
은 여전히 농성을 풀지 않고 곧 군사행동에 돌입할 태세였다.
2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린 소노부 군대가 계루부 연합군 6만여 명을 상대하는
것은 곧 자멸(自滅)을 의미했다. 궁 태왕은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소노부 군대의
농성사태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지만 5부 연맹의 수장들과 중신들은 이렇다 할 대
책을 내놓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재사는 소노부 고추가를 불러 소노부 군사들에게 투항을 종용하라는 지시를 내
렸지만 성난 병사들에게 먹혀 들지 않았다. 그미는 고심 끝에 5부의 수장과 갈사
부여, 서부여 장수를 불렀다.
“고구려의 태후로서 명령을 내립니다. 육만여 연합군은 지금 즉시 소노부로 진
입하여 농성하고 있는 군대를 진압하고 농성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장졸들을 모두
참수하여 국법의 지엄함을 보이세요.”
그미의 명령에 6만여 계루부 연합군은 소노부에 진입하여 농성하고 있던 소노부
군대를 진압하였다. 진압과정에서 수천 명의 병사가 죽거나 크게 상처를 입었다.
소노부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신임 태왕을 반대하고 농성을 주도했던
군장과 병사들 2천여 명이 체포되었다.
“태후의 명령이다. 체포된 군관(軍官)들은 거열형에 처하고, 부화뇌동한 군사들
은 즉시 참수하라.”
좌보대인이 계루부 연합군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투항한 소노부의 나머지
군사들은 곤장을 맞고 방면되었고, 소노부 소속 백성들은 숨을 죽였다. 그미의 단
호하고 결단력 있는 조치로 국내성은 금방 평화를 되찾았다.
두로는 석방되자마자 부여태후의 뜻에 따라 울향과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떠
났다. 또한, 왕비와 해익 태자도 역시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보내졌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해우 태왕을 모본(慕本) 지역에 장사지내고, 모본왕이란 시호를 내렸
다.
-끝-
_()_ 그동안 긴 글을 감상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다른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만사형통 하소서.
여강 최재효 三拜
[고구려 제6대 태조왕 연표]
- 재위 기간 : 53년 ∼ 146년
- 53년 : 즉위. 당시 7세에 불과해 어머니 부여 태후(扶餘太后)가 섭정
- 55년 : 요서지역에 10성을 쌓게 하여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고구려가 서쪽
대륙을 공략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마련함
- 56년 : 동옥저(東沃沮)를 정복해 성읍(城邑)으로 삼음으로써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
- 68년 : 부여의 망명세력인 갈사국(曷思國)을 병합
- 72년 :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공격하여 그
왕을 사로잡음
- 74년 :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로 하여금 주나(朱那)를 공격하게 하여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는 등, 주변 소국(小國)으로 세력을 확대함
- 98년 : 책성(柵城 - 두만강 주변) 지역을 순수함
- 102년 : 책성지역을 안무(安撫)함
- 105년 : 후한의 요동군(遼東郡) 공격
- 114년 : 남해지방 순행 등을 통해 확보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 강화
- 121년 : 요동, 현토 공격
- 146년 : 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양위
- 165년 : 119세로 사망. 나라에서 태조왕이란 시호를 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