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풍(7)
- 본 작품은 고구려 제6대왕인 태조왕의 어머니 부여태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부여 출신 여인으로 고구려 왕자 재사(再思)와 혼인하여 아들 궁(宮)을
낳습니다. 그녀는 7살의 궁을 고구려 태왕의 지위에 앉히는 여장부 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주변의 약소국을 정벌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여걸이기도 합니다. 그럼, 천천히 감상하세요. ....... 여강 최재효 -
여풍
- 여강 최재효
7
부정부패를 일삼던 소노부, 계루부, 절노부 소속 장자들이 대월단에 의해 참수
당하자, 고구려 조정과 국내성은 침묵에 휩싸였다. 참수는 면하였으나 벽서에 이
름이 오른 비리혐의 자들은 두문불출하고 죽은 듯 거동을 하지 않았다. 두 차례나
벽서에 자신의 이름이 오른 장자들은 사병(私兵)을 집 안팎에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도 했다.
일반 백성들은 대월단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고구려에 정의를 추구
하고 비리를 척결하는 무명의 단체가 있다는 사실에 크게 용기를 얻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실체가 없는 대월단을 두고 의적(義賊)이니, 천군(天軍)이니 하는 호
칭을 붙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벽서에 두로의 이름이 적시되면서 그는 태왕의 명령으로 옥에 갇히고
두로를 두둔하던 소노부 소속 우보와 사자(使者) 대인도 옥에 갇히고 말았다.
해우 태왕은 흐트러진 관리들의 기강을 잡기 위하여 세 사람을 처형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조정의 분위기는 초상집 같았고 일부 중신들은 칭병하며 조정에 출
사 하지 않거나 사직(辭職)을 청하기도 했다. 태왕은 두로에 관하여 조사를 더 해
본 뒤에 결과를 보고 처벌 수위를 결정할 예정이었다. 태왕은 두로가 우직한 성품
으로 오랫 동안 자신의 신병을 보호해준 고마움을 조금은 느끼고 있었다.
그미의 초대를 받아 계루부에서 사흘 동안 원 없이 먹고 마시며 주지육림(酒池
肉林)에서 환상적인 시간을 보낸 관노부와 순노부의 수장과 그 일행들은 부여부
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미는 언제든지 두 노부(奴部)의 인력과 병력을 호출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미는 두 수장과 일행이 돌아갈 때 관노부의 주부(主簿)에게는 미녀 춘화(春花)
를, 순노부 장자 승(丞)에게는 설화(雪花)를 딸려 보내 일 년간 시첩(侍妾) 노릇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두 장자에게 두로의 구명(救命)을 부탁했다. 또한, 두 수장을
수행하고 함께 왔던 일행에게는 은자 한 상자씩 안겼다.
그미의 미인계에 두 노부의 수장들은 낚시 바늘을 문 물고기와 같았다. 뿐만 아
니라 그미는 두 수장이 돌아갈 때 어수(於漱)에 관하여 좋은 소문을 대대적으로
내달라고 하였다. 두 수장이 돌아간 다음날부터 관노부와 순노부 그리고 주변 노
부에 까지 어수에 대한 소문이 왜자했다. 발 없는 말이 순식간에 고구려 전역에
퍼졌다.
“호동어멈, 들었어?”
“뭘?”
“이 여편네는 귀를 뒀다 뭐하는 거여? 시방 어수 공자님이 장차 고구려의 태왕이
될거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걸 몰랐단 말이야?”
“길동 어멈, 어수 공자가 누군데?”
“어이쿠, 이런 빙충맞은 여편네. 밤낮 술에 취해 사는 호동아범 뒤치다꺼리만 하
지 말고 세상 돌아가는 거에도 신경을 쓰라고. 어수 공자는 유리 태왕의 손자이며,
계루부 고추가이신 재사님의 아들이잖아. 생김새는 천왕랑 해모수 같고, 두 손으
로 돌절구를 열 개나 번쩍 번쩍 드는 장사에다가, 백 근이나 되는 철퇴(鐵槌)를 자
유자재로 휘두른대. 거기다가 이미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손자병법에 달통하여 능
히 백만 대군을 호령할 수 있대.”
“태왕에게는 태자가 있다고 했는데?”
“해익인가? 해기인가 하는 태자는 밤낮 술에 취해 궁녀들과 몸을 섞고 정신을 못
차린대. 어린 태자가 벌써부터 그러니 싹수가 노랗다고. 그 애비에 그 아들이야.
그런 자가 장차 고구려의 태왕이 되면 제 애비보다 더 할 거야. 매일 수십명의 사
람이 죽어 나가게 될 거라고.”
아낙들은 우물가나 동네 정자각에 모이면 어수 공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소문이 또 다른 소문을 양산하면서 침소봉대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마을의 삼척동자는 물론 강아지도 어수 공자를 알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어수 공
자는 고구려 전역에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서 태자 해익은 형편
없는 사람으로 매도되었다.
“성주, 소문 들었습니까?”
“뭔 소문 말인가?”
졸본성의 비장(裨將)은 최근에 고구려 전역에 퍼져있는 소문을 성주 *욕살(褥薩)
에게 똥겼다. 이야기를 듣던 욕살은 입이 벌어지면서 만면에 웃음이 화사하게 번
졌다. 계루부 소속의 욕살은 오래전부터 재사와 친분이 있었다.
‘부여부인이 드디어 건곤일척의 묘수(妙手)를 던졌구나. 이번에는 꼭 성공해야
할 텐데. 그런데 고추가 대신 어수 공자를 ……. ’
소노부 소속 지방장관이나 성주들은 갑작스럽게 돌풍처럼 밀려드는 어수 공자
에 대한 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수 공자보다 재사와 부여부인에게 더 관심을 두었다. 두 사람은 해우 태왕의 숙
부와 숙모이고, 만약 두 사람이 딴 마음을 먹고 계루부를 중심으로 추종세력을
규합하면 언제든지 현재의 태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 욕살 - 고구려는 지방 통치조직을 대성(大城)·성(城)·소성(小城)에 중앙관리를 파견하였는데, 대성의
장관을 욕살(褥薩)이라고 하였다.
“좌보대인께서는 지금 즉시 절노부의 고추가를 만나서 두로의 구명을 부탁하세
요. 또한 대인께서 친분이 있거나 막역하게 지내는 소노부를 비롯한 다른 노부 소
속 중신들에게도 두로의 구명을 호소하세요.”
그미의 두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일었다.
“대부인, 두로는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곧 죽게 될 자입니다. 그놈은 지은 죄
가 많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자를 구명하라니요?”
좌보대인은 물러가면서도 그미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좌보가 물러가자 곧이어 우
태대인이 그미의 처소에 들었다.
“우태대인께서는 투옥되어 있는 두로를 만나서 지금 오부의 수장들과 중신들이
두로의 구명을 위하여 백방으로 뛰고 있다고 전하세요. 그들 뒤에는 내가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언질을 주고, 두로가 억울하게 투옥되어 크게 걱정한다는 말도 잊
지 마시고요. *학철지부(涸轍之鮒)의 생명을 구명해주면, 구명된 자는 반드시 목
숨을 바쳐서라도 구해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 법이랍니다”
“하오나, 그놈은 죽어 마땅합니다. 그자를 구명할 가치가 있을까요?”
우태대인 역시 그미의 깊은 속을 헤아리지 못하고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조쌀해 보이는 그녀의 시선과 우태대인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민충한 우태대인
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미는 빙그레 웃으면서 우태대인에게 손에 들고
있던 죽선(竹扇)을 선물하였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
우태대인은 부채에 쓰여 있는 문구를 보고 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 그미에게 넙
죽 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그미의 뛰어난 용인술(用人術)에 탄복하였다. 좌
보와 우태대인은 즉시 행동에 돌입하여 맡은바 소임을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
다. 두 대인에게 그미의 명령은 태왕의 그것보다 지엄하고 반드시 수행해야 했다.
좌보대인은 먼저 절노부의 고추가를 찾아갔다.
* 학철지부 -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 곤궁한 처지나 다급한 위기를 비유한 말.
* 이이제이 - 한 세력을 이용하여 다른 세력을 제어하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 에서 나온 말.
“두로는 사람들이 알다시피 부정부패를 일삼은 관리입니다. 대부인께서 그런 자
를 구명하시라니 나로서도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나 대부인의 청이니 따를 수밖
에요.”
절노부의 고추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미의 청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추가 대인,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부인이 누굽니까? 대부인의 청이나 부탁대
로 해서 여태껏 잘못된 적이 없었어요.”
절노부 고추가는 그미의 부탁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두 번이나 지아비 재사
를 고구려 태왕의 위(位)에 앉히려다 실패는 하였지만, 그미의 보이지 않는 후광은
너무 막강하여 절노부 고추가뿐만 아니라 다른 노부의 수장이나 장자들도 감히
그미의 청을 거역하기 어려웠다.
“두로, 고생이 많소이다.”
우태대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두로를 면회하였다.
두 사람은 절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척을 지고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우태대인이 눈짓을 하자 옥졸(獄卒)이 감옥 밖으로 나갔다. 감옥에는 소
노부 소속의 우보와 사자대인도 있었지만 우태대인은 두로만 불러냈다. 우태대
인은 두로 보다 관등도 높고 나이도 위였다.
“우태대인께서 어인 일로 이 사람을 면회 오시었습니까?”
“두로, 내일이면 그대의 목숨이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오. 지금 오부의 수장과 중
신들이 그대의 목숨을 구명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난리라오.”
‘오부의 수장과 중신들이 나를 살리기 위해?’
두로는 우태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그는 우태대인이 계루부의 사람이라 자신을 구명하기 위하여 움직일 사람이 아
니라고 판단하였다. 두로는 곧 있을 태왕의 국문을 대비하여 이런저런 생각에 골
몰해 있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미 태왕이 자신의 집과 주변의 사정을 모
두 파악하고 있을 것 같았다.
“오부의 수장들이 어째서 나를 살리기 위하여 난리를 친단 말입니까?”
“두로, 잘 들어 보시오.”
우태대인은 두로에게 현재 두로가 처한 상황과 곧 있을 태왕의 국문 그리고 바로
처형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점을 조리 있게 설명하였다. 현재의 태왕은 이미 이성
을 잃고 중신들과 백성들에게 신임을 잃었다. 태왕이 어떤 조치를 내려도 백성들은
수긍하지 않는다. 5부 수장들과 대인들은 누군가가 두로를 시기한 나머지 두번의
장자들 참수 사건 관련한 벽서에 재수 없이 이름이 올랐다.
이에 5부의 수장들과 중신들은 모두 일치단결하여 충신 두로를 구명하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두로는 절대로 희망을 잃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라. 우태대
인의 말에 두로는 정색을 하고 우태대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는 자신이 충신이
라는 말이 나올 때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우태대인, 고맙습니다. 내가 방면되면 대인을 평생의 은인으로 알고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두로는 일어나 우태대인에게 허리가 꺾어질 정도로 몸을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
다.
“두로, 충성은 나에게 할 게 아니고 부여부인에게 해야 하오.”
“네에? 부, 부여부인이요? 계루부 고추가 재사 왕자님의 부인이신 부여부인님을
말씀하시나요?”
“쉿-, 부여부인께서 그대를 고구려 최고의 충신으로 생각하고 계시오. 이번에 오
부 수장들과 중신들이 그대의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움직이는 일도 모두 부여부인
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두로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아-, 부여 대부인님, 고맙습니다. 이 은혜 각골난망입니다.”
두로는 벌떡 일어나 계루부가 있는 쪽을 향해 수도 없이 절을 하였다.
그의 두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울먹이면서 ‘고맙습니다.’
를 되뇌었다. 두로는 삶을 포기하고 있던 상황에서 우태대인이 전한 말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손가락질 하는 마당에 부여부인이 앞장서서 구명한다
는 말에 두로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차가운 감옥 창살을 뚫고 달
빛이 희미하게 쏟아졌다.
‘부여 대부인님, 제가 구명되면 대부인님과 재사 왕자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
습니다. 부인께서 하명하는 일은 무엇이든 받들겠습니다.’
두로가 잠도 자지 않고 혼자서 실실 웃자 곁에 있던 우보대인과 사자대인은 두로
가 곧 죽음을 앞두고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닌지 걱정하였다. 먼동이 터오는가 싶
더니 금방 국내성에 맑은 아침이 찾아왔다. 날이 밝자마자 국문장이 설치되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우보대인, 사자, 두로가 나졸들에게 끌려나와 태왕 앞에 무릎 꿇
려졌다.
“네놈들의 죄를 인정하느냐?”
태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했다.
“태왕 폐하, 소신들은 지은 죄가 없사옵니다. 억울합니다.”
우보대인이 울먹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태왕이 노발대발하며 그들에게 다가갔
다. 금방이라도 세 사람을 잡아먹을 기세였다.
“네놈들이 짜고 짐을 능멸하였다. 짐은 우보와 사자가 소노부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후하게 대했다. 그러나 네놈들이 그 같은 과인의 마음을 모르고 궤변으
로 짐을 기망했다. 당장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종자들이다. 두로 놈을 조사하는
자는 어째서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조회(朝會)를 마친 터라 조정의 모든 중신들과 중, 하급 관리들이 국문장으로 몰
려들었다. 5부 연맹은 물론 지방에 나가있던 욕살이나 처려근지(處閭近支)도 몇
명 있었다.
“태왕 폐하, 두로의 뒷조사를 해보았으나 두렷한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
다. 두로의 말대로 그의 집에 기거하고 있는 여인들은 오갈 데 없는 처지라, 두로
가 임시로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하고 무상으로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고 있
었습니다.”
태왕의 지시로 두로의 뒤를 조사했던 조의(皁衣)가 고하였다.
“뭐, 뭐라고? 아무런 혐의가 없다고? 네놈도 두로와 같은 놈이로다, 여봐라, 지
금 당장 저 네놈을 효수하여라.”
태왕이 마구발방 길길이 날뛰면서 형국장 안을 이리저리 바장였다. 태왕이 명령
을 내렸음에도 나졸들과 군사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때
여러 중신들 가운데 있던 재사(再思)가 헛기침을 서너 번 하더니 태왕 앞에 나섰다.
그가 나서자 중신들과 모든 관리들은 숨을 죽이며 형국이 어떻게 전개될 지 촉각
을 곤두세웠다.
“태왕 폐하, 소신 재사입니다.”
“숙부님, 조회 때도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광인(狂人)처럼 반쯤 정신이 나가있던 태왕이 재사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
다. 해우가 아무리 고구려의 태왕 지위에 있더라도 아버지 대무신 태왕의 친 아우
인 재사에게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태왕 폐하, 소신이 생각하기에 우보와 사자는 신하로서 본분을 잊고 태왕에게
말을 함부로 한 점은 있사오나, 두로는 그동안 태왕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견마지
로를 다했습니다. 두로를 조사하였지만 뚜렷한 비리가 없으니, 방면하시어 태왕께
서 공명정대하게 나라를 통치한다는 점을 만백성에게 보이시기 바랍니다.
추모 태왕 할아버님께서 고구려를 건국하시고 반백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서서
히 나라의 기틀을 다져가는 시점에서 사소한 일로 중신들을 처단한다면, 이웃나
라에서 태왕 폐하를 업신여길까 저어됩니다. 소신의 충언을 부디 외면하지 마소
서.”
재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5부연맹 중신들이 모두 땅바닥에 엎드렸다.
“태왕 폐하, 재사 고추가님의 충언을 외면하지 마소서.”
“태왕 폐하, 재사 왕자님의 의견을 수용하여 주소서.”
태왕은 숙부인 재사의 고언(苦言)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태왕은 숙부가 뇌꼴스
러웠지만, 여러 중신들 앞에서 숙부 재사의 말을 모르쇠하거나, 망신을 주었을 경
우에 어떤 결과가 이어질 지 두려웠다. 두 번이나 태왕의 자리에 오를 뻔 했던 숙
부였기에 더더욱 해우 태왕은 재사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또한, 모든 중신들이 재사의 충언을 가납하라고 엎드려 고하니 태왕은 끓어오르
는 분노를 억누르며, 정신을 가다듬고 이성을 찾으려고 무진 애썼다.
“좋습니다. 숙부님의 고언을 받아들이지요. 사자(使者)만 일벌백계로 효수하고
나머지는 방면한다.”
조카와 숙부의 대결에서 숙부가 보기 좋게 승리하였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조정 중신들과 모든 관리들은 새삼 재사의 보이지 않는 권위
와 위력에 속으로 감탄하였다. 사자의 목이 국내성 저자거리에 내걸리자, 소노부
소속 장자들과 유지 그리고 백성들은 태왕의 지나친 처분에 분노하였다. 사자는
평소에 소노부 백성들에게 크게 욕을 먹거나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소노
부의 고추가와 장자 그리고 백성들은 사자의 죽음을 계기로 태왕에게서 완전히
멀어지고 말았다.
“태왕 폐하, 지금 국내성뿐만 아니라 졸본성 그리고 지방의 여러 성과 지역에서
어수 공자님에 대한 칭찬이 대단합니다. 그와 반대로 태자님에 대한 안 좋은 소문
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한 중신이 태왕에게 은밀하게 고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 아들, 고구려 태자인 해익이 뭐가 어떻다는 게야? 도대체
무슨 소문이 돌기에 그리 야단인가? 답답하다. 그 소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세하
게 말해 보거라.”
태자 해익은 벌써부터 주지육림에 빠져 태자의 본분을 잊고 향락에만 골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비는 국고(國庫)로 사치품을 사들이고 밤마다 향연을 열어
나라의 기틀을 무너뜨리고 있다. 왕비는 태왕을 보필할 현모(賢母)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계루부 고추가 재사의 아들 어수는 군자의 표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언행이 신중하며,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정평이 나있다. 고구려의 앞날을 책임
질 자는 바로 태자 해익이 아니라 어수 공자이다.
“그만, 그만하라.”
태왕은 더 이상 신하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왕비는 콧대가 세서 태왕의 말도 듣지 않고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는 것을 왕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신들도 다 알고 있었다. 태자 해익 역시 소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어미와 아들의 삐뚤어진 행태와 소문은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바
이니,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어수의 일은 그냥 묵과할 수 없었다.
‘숙부가 왕비와 태자에 대한 험담을 퍼트리고 있단 말인가? 숙부가 아직도 태왕
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언젠가 짐에게 도전해 올 것이 분명하다.
이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숙부와 어수를 대역죄로 몰아 죽여버려?’
태왕은 소노부의 고추가와 우보대인 그리고 장자 서너 명을 불렀다. 태왕이 의
지할 곳은 그래도 소노부 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로의 비리 사건에 사자를 일벌
백계로 처단한 일로 인하여 소노부 사람들은 태왕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불려온
소노부 사람들은 해우 태왕과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지난번 사자의 처형은 짐이 소노부를 좀 더 강하게 단련하기 위해서 그리한 조
치였습니다. 그러나 짐의 마음은 늘 소노부에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요즘에 듣자하니 왕실 사람들에 대한 구지레한 풍문이 저자에 돌고 있다고 들었
습니다. 소노부에서는 그 소문에 대하여 어찌 생각들 하고 있는지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세요.”
태왕은 애써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소노부 사람들에게 손수 술까지 따라주었다.
술잔을 받고도 그들은 태왕의 눈치만 볼 뿐 말이 없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장자
들 중에서 고추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태왕 폐하, 소문은 그냥 소문일 뿐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소서.”
“과연 경의 말이 맞습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고구려는 태왕을 중심으로
오 부연맹이 협력하여 운영되는 정치체제입니다. 어느 한 노부(奴部)가 위세 좀
있다하여 도도히 흐르는 대세를 하루 아침에 바꿔놓을 수는 없는 겁니다. 다른
분들은 짐에게 할 말이 없습니까?”
태왕과 소노부 장자들 간의 만남은 술 몇 잔 마시고 별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태왕은 자신이 소노부의 장자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태왕의 근거지인 소노부에서 그럴진대, 다른 노부는 말해 무엇할 것인가? 라는 생
각에 이르자 태왕은 정신이 돌 것만 같았다. 그는 대낮부터 술을 찾고, 여인을 불
렀다. 태왕은 술에 취하면 광기가 발동하여 사람이 죽어나가기 일쑤였다.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줄 알아야 한다.”
“좌보대인님, 고맙습니다. 부여대부인님을 직접 뵙고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데
안 계시다니 소신의 뜻을 대신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두로는 그미를 찾아 왔으나, 그미는 부러 그를 만나지
않았다. 좌보대인은 술상을 내어 두로와 술잔을 부딪쳤다. 술이 서너 순배 돌고 나
서 좌보대인은 그미가 두로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면서 그의 충성심을 유도하는
말을 하였다.
“자네는 지금의 고구려를 어찌 생각하고 있는가?”
좌보대인이 두로의 의중을 뜨개질하는 말을 꺼냈다.
“대인, 어찌 생각하다니요? 고구려의 정치 사정을 말씀하시나요? 아니면 지금의
태왕을 말씀하시나요?”
“후자를 말하는 것이네.”
“태, 태왕은……. 태왕은 빨리 권좌에서 내려와야 하겠지요. 지금의 상황이 연장
된다면 고구려는 곧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두로는 말을 하고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두로, 자네가 정확하게 보았네. 역시 자네는 충신이 분명하이. 내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주겠네. 잘 들어 보시게.”
이백 이십여 년 전에 대륙에서 주나라 왕실이 패망하고 전국의 칠웅(七雄) 중 진
(秦)이 대륙을 통일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연(燕)나라에 형가(荊軻)라는 열사가
있었다. 그는 본래 제(齊)나라 출신인데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연나라에 정착
하게 되었다.
진나라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연나라도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연나라의
태자 단(丹)은 부왕과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진왕(秦王)인 영정(嬴政)
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태자의 신분으로서 자신이 진나라까지 가서 진왕
을 죽일 수 없었다. 때마침 연나라에 검객인 형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단은 여
러 번 그를 찾아가 진왕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진왕은 의심이 많은 자라 함부로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연나라에는 진나라
장수로 있다가 도망쳐와 살고 있는 번오기(樊於期)라는 자가 있었다. 그의 가족은
진왕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여 이를 갈고 있었다. 단 태자는 번오기에게 사정을 말
하자, 그는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진왕은 번오기의 목에 현상금으로
천 근(斤)과 읍(邑) 만 가(家)를 내건 상태였다.
단 태자는 형가에게 번오기의 목과 연나라의 중요한 지역인 독항(督亢)의 지형
도를 주고 진왕에게 접근하라고 했다. 형가는 진나라로 건너와 어렵게 진왕을 알
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품속에 비수를 숨기고 있었다. 형가가 진왕을
가까이 다가가 독대하는 순간 형가가 비수를 뽑아 진왕의 심장을 노렸으나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만약에 형가가 진왕을 죽이는데 성공했더라면 형가는 연나라의 재상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나 대공사에 끌려가 떼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왕
이 바로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이었다.
“참으로 아쉽네요. 일이 성공했더라면 형가는 영웅이 되었을 건데요.”
좌보대인의 이야기에 두로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네 말이 맞네. 형가가 진왕을 죽였더라면 그는 연나라 재상이 되었을 뿐만 아
니라, 그의 가족들과 후손들은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일세. 또한, 형가라
는 이름은 공자나 맹자처럼 성인의 반열에 올라 추앙받는 인물이 되어 청사(靑史)
에 길이 남았을 걸세. 우리 고구려에도 진왕 못지않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있지요. 아마 그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면 진시황보다 더 할 것입니다. 자칫 고
구려가 한나라나 백제 또는 사로국(斯盧國)에게 망할지도 모르지요?”
두로는 흥분하여 두 주먹을 치켜들었다.
“바로 보았네. 지금 고구려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모두 눈치만 보고 있지.
고구려에서 누구를 제거해야 이 나라가 강성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 잘 알지
않는가? 어떤가? 자네는 몸이 비호같고 담력과 근력이 일당백이 아니던가? 이것
을 받게.”
좌보대인이 보검 한 자루를 두로에게 건넸다.
“대인님, 이 보검은 뭡니까?”
두로의 눈이 화등잔 만해 졌다.
“이 검은 고구려를 건국하신 주몽 태왕이 내리는 검으로 생각하시게. 주몽 태왕
은 사람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나라를 갈망하셨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의 상태
는 어떤가? 나의 이야기는 여기 까지일세. 그 이후의 행동은 전적으로 자네가 잘
판단해서 하면 되네. 나는 계루부의 사람이며, 내 뒤에 누가 계시는지 잘 알지 않
는가. 고구려의 형가가 되어보시게.”
좌보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고 두로를 노려보았다.
“저를 살려주신 왕자님의 은혜를 반드시 갚겠습니다.”
두로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검을 빼들고 허공
을 갈라보았다. 쉭-, 쉭하는 바람 소리가 났다. 그는 재사와 그미가 살고 있는 저
택을 향해 공손히 절을 하였다.
우보대인은 두로에게 술 석잔 을 따라주었고, 두로는 계루부에 충성을 맹세하였
다. 또한 좌보대인은 두로에게 은자 한 상자를 건네면서 은연중에 그미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모두가 외면하던 자신을 구해주고 영웅 대접하는 계루
부의 배려에 두로는 매우 고마워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