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풍(5)
- 본 작품은 고구려 제6대왕인 태조왕의 어머니 부여태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부여 출신 여인으로 고구려 왕자 재사(再思)와 혼인하여 아들 궁(宮)을
낳습니다. 그녀는 7살의 궁을 고구려 태왕의 지위에 앉히는 여장부 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주변의 약소국을 정벌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여걸이기도 합니다. 그럼, 천천히 감상하세요. ....... 여강 최재효 -
여풍
- 여강 최재효
5
해우 태왕은 즉위 초기에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 대륙 서쪽 지역을 기습하여 점령하였다. 한나라 조정은 고구려의 전광석화 같은 기습전에 놀라서 황제 유수(劉秀)가 도망갈 준비까지 했었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劉邦)의 후예 유수는 한나라가 왕망(王莽)에게 멸망하자 지방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한나라 왕조를 부흥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끊임없이 왕망의 신(新)나라를 공략하였다. 결국 유수는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전통을 잇는 후한(後漢) 왕조를 열었다. 후한은 아직 전국적인 행정망과 군사조직 등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반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해우 태왕과 고구려 장수들은 이틈을 노려 방어가 허술한 한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안으로는 해우 태왕이 즉위하면서 해마다 폭우와 가뭄 등 천재(天災)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고,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이 늘어나자 민심도 흉흉해졌다. 집권 초기 군공(軍功)으로 우쭐해진 해우 태왕은 그만 초심을 잃고 주색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였다.
태왕은 중신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모든 국사를 독단으로 처리하려 했다. 태왕은 차츰 의심병이 도지면서 주변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사소한 잘못에도 태왕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 날로 포악해져 가는 태왕은 중신들과 백성들로부터 외면 받는 처지가 되었다. 5부 연맹의 수장들은 태왕의 실덕과 실정을 규탄하면서도 태왕에게 직접적으로 간(諫)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계루부 고추가이며 국태공(國太公)인 재사의 한숨과 탄식도 날로 더해만 갔다. 그는 단순히 계루부가 5부 연맹의 주도권을 잡기위한 암투를 하기보다는 5부 연맹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고구려가 막강한 나라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나라의 전반적인 상황은 그의 바람과 반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부여부인은 지아비의 한숨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능한 중신들과 해우 태왕의 부덕(不德)과 기행(奇行)을 속으로 비난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우가 나라를 이끌어 갈 능력이 없다면 빨리 권좌에서 내려올 것이지, 무슨 미련이 그리 많단 말인가. 고구려가 이대로 가다가는 망하게 될 것이다. 공자와 맹자를 숭상하며, 동기간의 의리와 정을 중시하는 지아비는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나라를 이끌어갈 재목은 못 된다.
이제는 내 아들 *어수(於漱)를 나라 사람들에게 선보일 때가 되었다. 세상에 얼굴을 보이고 백성들로 하여금 태자 해익(解翊)과 비교하도록 해야 겠다. 또한, 해익과 관련한 추문을 만들어 미리 포석을 해놔야 겠어.
30년 전 부여 대소왕(帶素王)이 대무신 태왕 때 고구려 장수의 손에 죽자 대소왕의 사촌 동생과 나는 일만 명이 넘는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로 귀순하였다. 그들이 지금도 고구려 5부 연맹과 섞이지 않고 별도 세력을 가지고 비류수 상류 지역에 터를 잡고 자립하여 살고 있으니, 곧 그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겠다. 그들도 언젠가는 우리 계루부의 일원으로 편입시켜야 한다.’
그미가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있을 때 좌보대인과 우태대인이 그미의 부름을받고 찾아왔다.
* 어수 – 부여부인의 아들 본명은 고궁(高宮), 어수는 아명(兒名).
“대부인, 소신들을 찾으셨습니까?”
좌보대인과 우태대인이 그미를 보고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두 대인을 보자 그미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어서 오셔요.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우선 따끈한 술 한 잔씩 드셔요,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너무 정사에만 매달리지 말고 가끔 술도 한 잔 하시면서 여유 좀 가지셔요.”
그미가 배시시 웃으면서 하얀 옥수(玉手)를 들어 술을 따랐다.
“대부인께서도 안색이 무척 좋아 보입니다. 오늘밤에는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하늘이 꾸물거립니다. 요즘 가물어 눈비가 내려야 합니다.”
그미가 술을 따를 때 술잔을 잡고 있던 좌보와 우태대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미가 손수 술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증좌였다. 그미는 두 대인과 덕담을 나누고 나서 곱게 접은 한지(韓紙)를 건넸다. 두 대인은 그 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좌보대인이 한지를 펼쳐 내용을 읽었다.
“대부인, 이번에는 계루부 유지도 한 명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적귀(赤鬼)라는 자는 비록 계루부 사람이지만, 늘 국가와 계루부 고추가에게 불평불만이 많은 자입니다. 또한 대월단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타인의 농토를 빼앗고 선량한 사람을 세 명이나 죽인 적도 있는 등 비리도 상당합니다. 그자를 철저히 조사해보면 끝도 없이 비리가 쏟아져 나올 겁니다.
결코 그냥 놔둬서는 안 될 자입니다. 소노부의 산인(山人)이라는 유지는 이미 죽은 해돈 장자의 수하를 자처하던 자로 해돈이 효수된 뒤에도 뉘우치기는 커녕 더욱 기고만장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절노부의 전노(錢奴)라는 자는 고리대금업자입니다. 춘궁기에 불쌍한 백성들에게 쌀 한말을 꾸어주고 가을에 쌀 세 가마를 받아내는 흡혈귀 같은 자입니다. 그자는 절노부의 백성들의 공공의 적(敵)이 된지 오래입니다. 지난번에 우리 대월단에 의해 처단된 절노부의 시구(屎狗)란 자의 죽음을 봤으면서도 그자는 전혀 뉘우치지 못하고 여전히 안하무인으로 숫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습니다.
그 세 사람은 고구려에 살아있을 필요가 없는 자들입니다. 오늘밤 안으로 처단해야 합니다. 지난번처럼 참수하여 벽서를 붙여 놓으셔요. 이번에도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미는 두 대인에게 수고비로 은자 스무 개가 든 상자를 안겼다.
“대부인, 지난번에 하사한 상금이 아직도 남았습니다. 또 하사하시니 너무 황망하옵니다. 저희는 대부인님의 하명을 받아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좌보대인과 우태대인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였다.
“이건 뇌물이 아니라 장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헌신하고 있는 두 분의 노고에 대한 나의 보답입니다. 받아두셔요.”
두 사람이 물러가자 그미는 대월단의 중간 두령인 달선(達仙)과 흑녀(黑女)를 불렀다.
“달선과 흑녀, 감히 대부인님을 뵙습니다.”
두 사람이 혼령처럼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너희 두 사람은 오늘 일을 끝내고 내일 대월단 스무 명을 차출하여 계루부를떠나거라. 국내성과 졸본성(卒本城) 그리고 크고 작은 성(城), 비류수 주변 지역과 멀리 옥저와 동예 등지의 대처(大處)를 다니며 이 벽서를 붙이거라. 벽서는 반드시 새벽녘에 사람이 없을 때 붙여야 한다. 또한, 태자의 명의로 몇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 한지에 쓰여 있다. 한 달 내로 일을 끝내고 복귀해야 한다.”
“달선과 흑녀는 대부인의 명을 받잡겠나이다.”
그미는 두 사람에게 행동지침이 담긴 봉투, 벽서 천장 그리고 각각 은자 일만냥을 내렸다. 달선과 흑녀가 물러가고 그미는 집사를 불렀다. 집사는 그미가 부여에서 고구려로 귀순할 때부터 그미를 보필해 온 오십 후반의 홀아비였다.
“대부인, 소인 들었습니다.”
집사가 그미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일 관노부와 순노부의 장자가 올 것입니다. 최고급 음식을 충분히 마련하고 얼굴 좀 반반한 아이 두 명을 단장시키셔요. 또, 논다니들도 스무 명쯤 부르세요.”
“대부인의 명을 차질 없이 이행하겠습니다.”
집사가 물러가자 그미는 경대를 꺼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미는 부여 왕실의 혈족이었다. 그미는 고구려가 차츰 강성해면서 대무신 태왕이 결국 부여의 대소왕을 죽이고 이에 위협을 느낀 대소왕의 친제(親弟)와 종제(從弟)는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야 했다.
부여는 망했지만 친제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 100인과 함께 갈사수(曷思水) 주변에 갈사부여국을 세웠다. 대소왕의 종제(從弟)는 일만 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에 귀순했다. 그미도 그 무리들 중 일부였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대소왕의 종제와 그가 이끌고 온 일만 여명의 부여인을 비류수 근처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하고 자치권도 주었다. 귀순한 부여인들은 자신들의 집단을 서부여(西扶餘)라 했다. 대무신 태왕이 대소왕의 종제에게 낙(絡)씨 성을 하사하자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낙왕(絡王)이라 불렀다.
그미는 대무신 태왕의 소개로 재사를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대무신 태왕은 그미가 보통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보고 동생 재사를 소개했다. 그미는 고구려 왕실의 일원이 된 뒤에도 자신을 친 동생처럼 돌봐주던 낙왕에게 안부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 그미는 손수 낙왕을 찾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낙왕께서 안녕하신지 모르겠네. 내가 안부 서신을 보내면 늘 잘 지내고 있다는 답장만 보내시니……. 곧, 날을 정해 지아비와 어수를 동반하여 낙왕을 찾아 봬야겠어. 나를 보면 무척 반가워하실 테지.’
그미는 헌헌장부 낙왕이 보고 싶었다. 부여에 있을 때 두 사람은 인척지간이었지만 서로에게 연정(戀情)을 느끼고 있었다. 대소왕이 고구려의 장수 괴유(怪由)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부여가 존속했더라면 두 사람은 동혈지우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미는 갑자기 답답한 생각이 들어 말을 타고 압록수를 향해 말을 몰았다. 그미는 종종 머리를 식힐 일이 있거나 잘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 말을 달렸다. 서 너 시진 동안 그미는 산과 계곡을 누볐다. 그미는 문무를 겸했기에 별도의 시종(侍從)이 필요 없었다. 그미가 바람을 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공부를 마친 아들 어수가 들었다.
“어머니, 소자입니다.”
“오냐, 어서오너라. 어미는 너만 보면 세상 살맛이 난다. 오늘은 무슨 공부를 하였느냐?”
어수는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지아비 재사를 닮아 얼굴이 달덩이처럼 둥글고 눈썹이 일자로 만인지상(萬人之上)의 형상이었다. 또한, 키가 6척이나 되고 완력이 강하여 또래의 아이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미는 어수를 강하게 키우기 위하여 어려서 부터 문무(文武)를 배우게 했다. 국내성에서 문명(文名)이 높은 인사를 스승으로 붙였고, 검법의 달인 달선과 흑녀에게 무예를 지도하게 했다.
“어머니, 오늘은 소자가 ‘道之以政齊之以刑民免而無恥(도지이정제지이형민면이무치)라. 道之以德齊之以禮有恥且格(도지이덕제지이례유치차격)’이라는 문장을 배웠습니다.”
“오호, 그러느냐? 참으로 왕의 덕목을 배웠구나. 어수야, 그 뜻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느냐?”
“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린다면 백성들이 처벌은 모면할 지라도 수치심이 없고,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린다면 수치심도 있고 감화도 받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어수는 그미의 질문에 막힘없이 그 뜻을 말하자 그미의 입이 양귀에 걸렸다. 어수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영민한 공자(公子)였다.
“스승께서 공자님의 말씀 중에서 위정편(爲政編)을 가르쳐 주셨구나. 어수가 그 문구를 듣고 무엇을 생각하였느냐?”
“어머니, 소자는 그 문구를 공부하면서 상앙(商鞅)을 떠올렸습니다.”
“왜 상앙을 생각하였지?”
어수의 샛별처럼 맑은 두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미는 어린 아들이 전국시대의 재상 상앙을 거명하자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전국시대 진(秦)나라 재상을 지낸 상앙(商鞅)은 이십여 년 간 개혁을 시행하면서 중앙집권적 법치국가의 틀을 세웠습니다. 상앙이 재상으로 있던 시기에 진나라는 부국강병책을 병행하여 국력이 증강하게 되었고, 이웃 위나라를 제압하고 중원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엄격한 법치에 의한 국가를 운영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상앙의 주장을 따른 진나라는 대륙에서 최강국이 되었으며, 진시황(秦始皇) 시대에는 대륙의 패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앙은 너무 엄격하고 빠른 개혁을 주장하였고, 그 개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백성들이나 반대파의 목소리를 외면한 결과 그는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소자는 상앙 같은 사람은 오래 쓰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승님도 소자에게 상앙의 부국강병책은 존중하되 너무 오래 그의 생각을 좇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겨우 여섯 살 밖에 안 된 아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답변이 아니었다. 그미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린 아들의 비범함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수의 나이라면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죽마(竹馬)를 타거나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뇌꼴스러운 짓을 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시기였다.
“오오-, 과연, 과연 내 아들이로고. 어수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 분명하구나. 이 어미는 어수의 말을 듣다가 너무 놀라고 감격스러워 눈물이 다 나왔단다. 네가 대륙의 전국시대의 상황을 꿰뚫고 있었구나. 장하다.”
그미는 한참 동안 어린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하루 빨리 소노부 계통의 해씨(解氏)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계루부의 출신 고씨(高氏)를 태왕에 앉혀야 한다. 그 시기가 눈앞에 다다랐다. 내 아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고구려의 태왕에 앉힐 것이다.’
그미는 어수가 영특하다는 사실을 어수의 스승을 통해 듣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미는 아들과 자주 함께하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미는 하녀들에게 아들에게 줄 맛있는 음식을 내오게 하였다. 낮 시간이 길지 않은 계절이라 국내성에 금방 어둠이 내려앉았다.
좌보대인과 우태대인 그리고 달선, 흑녀가 은밀히 모처에서 만나고 있었다. 이미 한번 소노부와 절노부 장자를 효수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이번에도 달선과 흑녀는 각각 스무 명의 대월단원을 이끌고 특수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대부인께서 두 사람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두 놈의 목을 쳐서 그놈들이 사는 마을 한복판에 걸어놓으면 됩니다. 이것은 내가 작성한 벽서이니 일을 끝마치고 즉시 마을 요소요소에 부쳐놓으면 일이 마무리되는 겁니다.”
좌보대인이 달선에게 술잔을 내리고 우태대인은 흑녀에게 잔을 건넸다. 네 사람은 부여부인의 밀명을 받아 수행하는 계루부의 핵심 요원이었다. 5부 연맹 사람들과 일반 백성들은 대월단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달선, 흑녀, 두 사람이 합심하여 먼저 계루부 소속의 적귀(赤鬼)를 처단하고 나서 달선은 수하들과 소노부의 산인(山人)을 맡으세요. 흑녀는 수하들과 함께 절노부의 전노(錢奴)의 목을 취하세요. 지난번처럼 전혀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태대인이 두 사람에게 다시 한 번 당부하였다.
“대부인님의 명을 빈틈없이 수행하겠습니다.”
잠시 후 모처를 빠져나온 달선과 흑녀는 각각 수하 스무 명을 이끌고 어둠속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반 시진이면 두 사람은 수하들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현달이 희미하게 밤을 밝혔지만 구름이 하늘에 잔뜩 낀 상태라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형체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해우 태왕은 한 신하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두로를 불렀다. 두로는 늦은밤에 영문도 모르고 태왕 앞에 불려갔다. 최근 들어 태왕은 두로 대신 다른 장사(壯士) 두 명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게 했다. 두로가 태왕 모르게 치부를 하고 처첩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 태왕에게 보고 된 바가 있었다.
“이놈, 네가 죄 없는 백성들의 아녀자를 잡아다 처첩으로 삼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어서 해명을 해보거라.”
‘앗, 태왕이 그걸 어찌 알았지? 큰일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죽게 생겼구나.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두로는 얼른 답변을 하지 못하고 진땀만 흘리고 있었다.
“폐, 폐하,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게 아니고요.”
“이놈, 뭘 주저하느냐? 어서, 사실대로 고하지 못할까?”
태왕이 재우치는 바람에 두로는 다리가 후둘 거려 서있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였다. 그가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태왕은 그의 행동을 의아해 하며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렸다.
“두로는 울지 말고 어서 사실대로 고하라.”
태왕 곁에 있던 사자(使者) 벼슬하는 중신이 두로에게 호통을 쳤다.
“폐하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옵니다. 그러나 소신의 집에 있는 아녀자들은 소신의 처첩이 아니라, 소신이 잠시 보호하고 있는 백성입니다.”
“이놈, 짐이 알아듣기 쉽게 고하거라.”
태왕이 소리쳤다.
“소신의 변명을 들어 보십시오.”
두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억울하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태왕과 신하는 두로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무척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네놈이 이상한 말로 짐을 기망하면 즉시 네놈 목을 칠 것이다.”
두로는 성질이 온순하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며, 주변에 불쌍한 백성이 있으면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잠자리까지 제공하는 등 선행을 이어왔다. 자신의 집에 기거하고 있는 아녀자들은 오갈 데 없는 불쌍한 백성으로 두로가 자비를 들여 숙식을 제공하고 보살피는 중이었다. 그러나 일부 관리들 중에 자신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자들이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어 두로를 괴롭히고 있다.
두로가 마음 붙일 곳 없는 아녀자들을 친 동기간처럼 돌보며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자, 그녀들은 두로에게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집안 청소와 빨래를 하고 집안의 온갖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 같은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억측으로 이상한 소문을 내서 자신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누구의 고자질에 의해 태왕이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두로는 너무 분통이 터지고 억울하여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만, 그만하라, 네 말을 알아들었다. 짐이 네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릴 것이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벌백계로 너를 효수하여 탐관오리의 말로를 백성들에게 널리 보이고 말 것이다.”
“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두로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허청대며 간신히 궁궐을 빠져 나와 소노부로 향했다.
소노부의 고추가는 두로의 사정을 잘 알고 그가 오면 언제든 환영하였다. 두로가 소노부에 도착하여 고추가와 어울려 술을 마시며, 궁궐에서 있었던 일을 상의 하였다. 천지 사방의 만상(萬像)은 깊은 잠에 빠졌는지 적막하였다.
“적귀이놈, 일어나라. 우린 하늘이 보낸 저승사자이니라.”
달선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적귀의 허벅지를 툭툭 차도 그는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옆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젊은 여인이 누워있는데 역시 대취한 상태였다. 적귀의 방안에 든 흑녀는 그만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대월단원 한명이 적귀의 머리통을 걷어차자 그제야 적귀가 눈을 떴다.
“형씨들은 누구시오?”
적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달선 일행을 올려다보았다.
“적귀야, 우린 저승사자다. 네놈 목을 취하려고 왔느니라.”
“내목은 내 것인데 당신들이 왜 내목을 빼앗아가려고 하오? 난 내목을 내줄 수 없소이다.”
적귀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달선이 흑녀의 옆구리를 쿡쿡 질렀다. 더 이상 취한 자에게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았다. 흑녀가 칼을 뽑아들자 그제야 적귀가 정신이 들었는지 넙죽 엎드렸다.
“너의 죄는 네가 잘 알고 있으렷다. 그동안 무고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잘 살았으니, 이승에 대한 미련은 없을 것이다. 다음 생은 축생(畜生)으로 태어나 한 평생 사람을 위해 살기 바란다.”
흑녀가 적귀에게 조용히 타일렀다.
“살려주시오. 잘못했소이다. 살려주시면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적귀는 사지를 벌벌 떨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흑녀의 칼이 파란 빛을 발산하며 피를 뿌렸다. 그때 발가벗은 채 자고 있던 여인이 일어나더니 비명을 지르며 흑녀에게 달려들었다. 또 한 번 흑녀의 칼이 피를 뿌렸다. 달선 일행이 적귀의 머리를 마을 한복판에 있는 느티나무에 걸고 주변에 벽서를 붙여놓았다.
적귀는 숫백성의 농토를 빼앗고 아무 죄도 없는 양민 세 명의 목숨을 취하는 등 이루 말할 수는 패악을 일삼은 자다. 하늘의 이름으로 인두겁을 쓴 붉은 귀 신을 처단한다. 고구려는 백성이 기본이 되는 나라이다. 이 계루부에는 **장 자, **유지, **유지가 만행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음을 알고 있다. 개과천선하지 않으면 다음 차례가 될 것이다. 또한, 태왕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는 두로는 속히 잘못을 뉘우치고 만백성에게 사죄하기 바란다. 두로의 일거 수일투족을 손금 보듯 살피고 있다. 유념하기 바란다.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들
“자, 이제 제1분대는 나를 따르라 소노부로 간다.”
달선이 수하 스무 명과 사라졌다.
“제2분대는 나와 함께 절노부로 간다.”
대월단 마흔 두 명은 마치 유령처럼 계루부를 빠져나가 두 곳의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날이 밝으면 계루부는 한바탕 난리가 날것이다. 지난번 소노부와 절노부 소속의 두 대인이 참수되어 목이 마을 한복판에 걸린 이후로 한동안 고구려 전역에서 비리에 연루된 관리들과 5부의 장자나 유지들이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현 시국이 재사와 부여부인이 중심이 되어 돌아가고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기고만장하여 날뛰고 있었다. 머지않아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움직이는 주체가 누구인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월단 제1분대는 소노부의 산인(山人)을 효수하고 벽서를 붙였고, 제2분대 역시 절노부의 전노(錢奴)의 목을 취해 마을 가운데 있는 나무에 걸고 사방에 벽서를 붙였다. 벽서의 내용은 계루부에 붙은 벽보와 유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