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풍(3)
- 본 작품은 고구려 제6대왕인 태조왕의 어머니 부여태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부여 출신 여인으로 고구려 왕자 재사(再思)와 혼인하여 아들 궁(宮)을
낳습니다. 그녀는 7살의 궁을 고구려 태왕의 지위에 앉히는 여장부 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주변의 약소국을 정벌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여걸이기도 합니다. 그럼, 천천히 감상하세요. ....... 여강 최재효 -
여풍
- 여강 최재효
3
계루부의 장자회의는 고추가인 재사와 그의 지어미 부여부인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머지않아 계루부에서 고구려의 태왕이 나와야 한다는 목표를 천명하는 수준에서 마무리 되었다. 대부분의 계루부 장자들은 현재의 해우 태왕을 폐위시켜야 한다는 대의에는 동의하면서도, 구체적인 방책에 대해서는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대월단은 5부의 장자들에 대한 비리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그미에게 보고하였다. 5부 소속 장자들의 비리는 그미가 가늠한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잔인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미는 비리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서 장자들의 비열한 행동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미가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는 두로(杜魯)에 대한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태왕의 최측근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긁어모았고, 나라의 곡물을 마음대로 빼내 치부(致富)하였으며, 열 명이나 되는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있었다.
두로의 첩이 된 여인들 중에는 양가의 처녀뿐만 아니라 유부녀도 서너 명 있었는데, 모두가 그의 고리대금의 교묘한 술수에 빠진 사람들의 부녀자들이었다. 대월단이 조사한 보고서에 적힌 내용만으로도 두로는 감옥에 갇히고도 남을 죄인 이었다.
그미는 그를 엮어 넣을 방법을 궁리하였다. 재사는 당장 조카인 해우 태왕을 만나 두로의 죄상을 고하고 싶지만, 지어미의 활동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아 꾹참기로 했다.
‘처첩이 열 명이나 있다면 호색한(好色漢)이 분명하다. 대개가 여인네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은 무뇌아(無腦兒)가 많다. 좋다. 제일 먼저 두로를 확실하게 포섭해야 겠어. 비리에 연루된 5부의 장자들 보다 두로 한 명만 우리 사람으로 만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 보다 훨씬 득이 될 것이야.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험을 볼 수 있는 조건이야.’
그미는 늦은 밤에 좌보대인과 우태대인을 불렀다. 두로가 그미의 첩보망에 걸려든 이상 그는 그미의 손아귀에서 절대 빠져날 수 없었다. 무능한 해우 태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태왕을 제거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거사(巨事)가 완벽하게 마무리되면 두로만 희생시키거나 또는 그를 감쪽같이 빼돌려 국외로 추방하면 만사가 간단히 마무리 되는 거였다.
“좌보대인, 우태대인 두로의 비리를 보셨지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기분입니다. 태왕이 나라의 도적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빨리 그 쥐새끼 같은 놈을 처단해야 합니다.”
“만무방 같고 천격스러워 보이는 위인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더니, 그놈 뱃속에 능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습니다. 왕실과 나라를 위해서 속히 처단해야 합니다.”
두 대인이 대월단에서 보고한 문서를 보고 치를 떨었다. 태왕의 경호만 열심히 하는 줄 알았던 두로가 큰 비리를 저지르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두 대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 역시 두로를 착한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도 안 되는 사람 속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미는 두 대인에게 따끈한 술을 대접하였다. 그미가 두 대인과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질 때 지아비 재사는 관여하지 않았다. 술 한 잔 마시자 두 대인은 더욱 열이 받는지 두로의 겉 다르고 속 다른 행동에 분노하여 마구발방으로 욕을 쏟아냈다.
“대부인, 충격입니다. 두로가 제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자인지 몰랐습니다. 본분을 잊고 참람하게 행동하는 자를 태왕의 곁에 두면 장차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두로 그놈은 정말로 나쁜 놈입니다. 속히 그놈을 죽여야 할 것 같습니다.”
좌보대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놈은 나라의 대들보를 무너트릴 놈입니다. 즉시 처단해야 합니다. 하루라도빨리 죽여 없애야 합니다. 그냥 놔두면 양순한 고구려 백성들만 계속해서 고통 속에 빠질 겁니다.”
우태대인은 씩씩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했다.
“두로를 그냥 죽이면 쓰나요? 두로는 앞으로 우리 계루부의 충견(忠犬)이 될 것입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두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좌보대인은 오늘밤 대월단에 명령하여 이 명단에 있는 소노부의 해돈(解豚)과 절노부의 시구(屎狗) 장자를 처단하세요.
그 두 사람은 5부족 장자들 중에서 가장 비리가 극심합니다. 처단 즉시 국내성과 주요 대성(大城)에 그 두 사람의 비리를 적시한 벽서를 붙이세요. 그 벽서에 슬쩍 두로의 이름도 집어넣고 사나흘 지켜본 뒤에 두로를 은밀히 계루부로 불러들이세요.”
조쌀한 그미의 얼굴에 단호함과 결기가 넘쳐흘렀다. 그미의 과감한 결단에 두 대인은 연신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역시 대부인이십니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존명, 즉시 명을 받들겠습니다.”
두 대인이 돌아가고 그미는 지아비 재사의 처소로 갔다. 두 사람은 각각 안채와 바깥채를 사용하였다. 바깥채는 늘 재사를 찾아오는 손님들로 붐볐다. 그미는 두 대인들에게 지시한 사안에 대하여 재사에게 알렸다. 재사는 지어미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기꺼워하였다.
어떤 목표를 두고 여러 사람과 계책을 논하고 최종적으로 결과물을 도출하는 데에는 자신 보다 지어미가 훨씬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재사는 그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부인이 두로를 직접 만나는 것보다 때를 봐서 우태나 좌보 대인을 시켜 그를 만나 우선 거사 계획을 넌지시 알리고 각서를 받아보는 것도 방법이기는 합니다. 그자는 말로해서는 듣지 않을 것입니다. 두로를 납치해서 단단히 주의를 줘서 풀어 주고, 다시 한 번 납치해서 강도를 높여 압박을 하는 방법도 있어요.
그자의 비리를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 그는 속앓이를 하다가 결국 우리의 지시를 따르게 될 겁니다. 계루부가 자신을 주머니 속의 구슬쯤으로 여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두로는 태왕 보다 우리의 명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재사가 빙그레 웃으며 그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방책을 제시했다. 재사는 그미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때 지시가 아니라 의견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전했다.
“알겠습니다. 고추가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 방법을 강구해 보지요. 아마 그 같은 방법을 쓰면 두로가 제 아무리 기를 써도 우리 계루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승복(承服)하고 스스로 충견이 될 겁니다. 이번에는 고추가의 계략이 주효할 것 같습니다.”
재사는 그미가 직접 만나 설득했다가 자칫 일이 틀어질 경우를 염려하였다. 부부가 중요 사안을 두고 자주 의견 교환을 하면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여 부부간의 신뢰를 돈독히 했다. 두 사람은 대무신 태왕의 제1비인 지금의 해우 태왕 생모의 곰상스럽지 못한 경우를 자주 봐왔다.
태무신 태왕의 제1비는 후궁의 아들인 호동왕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소생을 태왕의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했지만, 왕자를 죽게 한 여파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백성들은 해우 태왕의 생모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고, 그 반감이 결국 해우 태왕에게 독이 되고 있음을 잘 알았다.
“달선(達仙)은 지금 즉시 제1분대를 인솔하여 소노부로 잠입하여 해돈(解豚) 장자를 참수하고 그의 목을 마을 입구에 내걸어라. 흑녀(黑女)의 제2분대는 절노부로 잠입하여 시구(屎狗) 장자를 참수하여 그의 목을 절노부 중심에 걸도록 하라. 일을 마치면 이 벽서를 서너 곳에 붙여놓아라. 이일은 귀신도 모르게 시행해야 한다. 자, 지금이 *인시(寅時)다. 출발하라,”
달선(達仙)과 흑녀(黑女)는 그미의 지시에 의해 대월단의 중간 수령(首領)이 되었다. 달선은 조의(皁衣) 출신으로 검술의 달인이며, 흑녀는 말갈족 출신으로 표창과 채찍의 달인이었다. 두 사람은 그미가 수족처럼 부리는 심복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낮에는 그미의 대저택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그미의 부름이 있을 때만 나타났다. 집안 사람들도 그 두 사람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다.
달선과 흑녀는 대월단원 중에서 발이 빠르고 무술에 능한 자 사십 명을 차출하여 한 분대에 스무 명씩 편성하였다. 특별히 차출된 단원들은 일당백의 전사로 이미 전장(戰場)에서 잔뼈가 굵은 자들이었다. 계루부에서 검정색 옷을 입은 전사들이 바람처럼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침 그믐이라 밤하늘에 잔별만 반짝거릴 뿐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웠다. 간밤에 진눈깨비가 내린 탓에 국내성은 꽁꽁 얼어 있었다.
* 인시 -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
“폐하, 침수(寢睡)드실 시각입니다.”
“두로 이놈아, 진심으로 짐을 걱정하는 것이냐?”
“폐하, 소신은 신심으로 폐하를 모셔왔습니다.”
“그랬지. 너는 짐이 저승에 갈 때 함께 가야 한다. 너는 짐의 저승길 동반자란 말이다. 너뿐만 아니라 짐의 시침을 들던 궁녀들도 모조리 동반자가 되어 저승 가서도 짐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네가 알아서 미리 준비하거라.”
해우 태왕은 늦은 밤에 술을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중신들로부터 머리 아픈 국사를 보고받거나, 논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그는 해마다 반복되는 천재(天災)에 중신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자신에게 원성을 쏟아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왕은 초심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폐하께서 천수를 누리셔야 합니다.”
“짐이 오래 살아야 너도 제명에 죽을 테지. 두로 이놈아, 짐이 무병장수하도록 네놈이 지극정성으로 보필을 해야지. 네놈이 요즘은 짐을 보필하는 수준이 형편 없는 것 같다. 네가 요즘에 침비(寢婢)로 들이는 계집들 육신이 하나같이 겨우내 얼어있다 녹은 무우 속처럼 푸석푸석하구나. 고구려에 미인이 없다면 한나라나 옥저, 부여, 백제를 돌아다니며 찾아보아라. 혹시, 네놈이 괜찮은 계집들을 뒤로 빼돌리는 건 아니겠지?”
“폐, 폐하, 소신이 어찌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두로는 속이 뜨끔했다.
‘태왕이 나의 뒤를 조사했나? 어쩐지 요즘 이상한 자들이 내 집 근처를 자주 왔다갔다 하며, 이웃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것들을 세세히 묻고 다닌다는데, 혹시 그 자들이 태왕이 보낸 사람들인가?’
해우 태왕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두로를 노려보았다. 곁에서 태왕을 시중들던 나인(那人)이 얼른 태왕의 입안에 고기 안주를 넣어주었다. 그 나인은 최근에 두로가 새로 들인 침비였다.
그러나 아무리 어여쁜 침비라할지라도 아침에 태왕이 일어나 기분이 상쾌하지못하면 즉시 끌려 나가 두로의 칼에 목이 잘리기 일쑤였다. 두로는 태왕을 지근에서 경호를 하지만 태왕의 잠자리에 들 여인들의 공급도 책임지고 있었다.
“아이, 폐하, 소첩의 허리는 물오른 버드나무처럼 나긋나긋합니다. 그리고 육신은 바위처럼 단단하고 실팍하며, 요지(瑤池)에서는 밤낮으로 샘물이 쉴 새 없이 용솟음 치고 있답니다.”
“그렇지. 너는 짐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준다. 방금 짐이 한 말은 다른 년들을 말한 것이다. 오늘밤에도 너의 여리디 여린 살갗을 문질러보고 싶구나. 짐은 너의 살 냄새가 좋구나. 아주 신선하고 달콤해서 짐이 요 며칠 단잠을 잘 수 있었단다.”
침비의 붉은 입술이 태왕의 뺨에 닿을 때마다 태왕은 그녀의 세요(細腰)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태왕의 좌우에는 벌거벗은 여인 한명씩 엎드려 있었다. 그 여인들은 태왕의 침목(枕木) 역할을 하고 있었다. 태왕이 대취하여 잠들 때까지 그녀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어야 했다.
태왕의 술타령은 밖이 희붐할 때쯤 끝났고, 서너 명의 여인들이 한 방에서 태왕의 시침을 들어야 했다. 두로는 침전에서 사탕을 녹일 것 같은 교성과 거친 숨소리를 듣고 안도했다. 워낙 변덕이 심한 태왕이라 두로는 밤에도 침전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해돈 이놈, 너는 소노부의 숫백성들의 등골을 빼먹으며 온갖 패악(悖惡)을 저질렀다.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이라 했다. 하늘이 더는 네놈의 착살맞은 짓을 용서하지 않기에 우리가 하늘의 명을 받아 네놈의 목을 따러왔다.”
달선이 이끄는 대월단 제1분대원 십여 명은 해돈의 집 밖에서 경계를 보고 나머지는 달선과 안채로 잠입하여 잠자고 있던 해돈을 깨웠다. 검은 두건을 쓴 괴한들이 칼을 빼들고 해돈을 꾸짖자 그는 오줌을 지리며 벌벌 떨었다.
몸피가 남산만한 해돈은 소노부 소속 백성들의 농토는 물론 얼굴이 좀 반반하다고 소문난 여인은 유부녀나 처녀 가릴 것 없이 빼앗아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해돈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으나 소노부의 고추가는 모르쇠 하였다.
“저, 저는 지은 죄가 없습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요, 죽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돈이 필요하시면 돈을 드리고, 여인이 필요하면 여인을 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네놈은 태산같이 지은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변명만 하는구나. 저승에 가서 속죄하거라.”
대월단원의 칼이 방안의 공기를 갈랐다. 해돈의 목을 취한 달선과 대월단원들은 해돈의 목을 마을 한복판 나무에 걸어놓고 주변에 벽서를 여러 장 붙여 놓았다.
고구려 숫백성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온갖 패역을 저지른 해돈을 하늘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추모왕은 고구려를 짐승이 아닌 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를 건국하시었다. 그러나 몇몇 금수(禽獸)만도 못한 자들이 본분을 잊고 순진
무구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기에 하늘의 명을 받아 응징하였다. 앞으로도 나라의 기강을 흔들고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사익을 추구하려드는 짐승들을 색출하여 처단할 것이다. 특히. 소노부의 고추가와 **장자, **장자,
**장자 그리고 태왕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두*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으 니 유념하기 바란다.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들
“이놈, 똥개야. 어서 일어나라.”
흑녀가 이끄는 대월단 제2분대원들이 절노부 소속 장자 시구(屎狗)의 집에 침입하였다. 그는 젊은 여인을 껴안고 잠을 자고 있다가 복면을 착용한 괴한들을 보고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뉘, 뉘시온지요?”
“우린 하늘의 명을 받고 네놈을 단죄하러 왔다. 네죄는 네가 알렷다.”
흑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시구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저, 저는 무척 양순한 백성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지은 죄는 없습니다. 아참, 지난해 여름 개구리 한 마리를 잡은 죄밖에 없습니다.”
시구 장자는 잠이 덜깬 목소리로 변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러운 똥개 놈아, 네놈이 지은 죄를 모른단 말이냐? 네놈이 고리대금으로 절노부의 순진한 백성들 등골을 빼먹고, 돈을 제때 갚지 못하는 백성들의 처자들을 강제로 잡아와 첩을 삼았다. 그뿐만 아니라, 더러운 한나라 놈들과 내통하여 밀수를 하는 등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하였다. 너는 더 이상 고구려에서 살 가치가 없는 놈이다. 하늘이 내리는 벌을 달게 받아라.”
“나, 나리, 제, 제발 목숨만 살려줍쇼. 제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한번만 용서하여주십쇼.”
시구는 우두망찰 말을 더듬거리며 흑녀에게 애면글면 살려달라고 빌었다. 함께 잠자다 일어난 여인도 덩달아 빌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하늘의 심판은 물릴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았으니 이승에 대한미련은 없으렷다.”
흑녀의 칼이 번쩍하더니 왁살스러운 시구 장자의 목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몸통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방안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여인은 참혹한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르더니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흑녀와 대월단원들은 시구의 머리를 마을 어귀에 세워진 솟대에 매달고 벽서를 군데군데 붙이고 나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먼동이 서서히 터올 무렵이었다. 오스스한 기운이 절노부 소속 마을들을 감쌌다.
절노부의 순진한 백성들 등골을 빼먹고 살며, 온갖 패악을 일삼아온 똥개 시구 장자를 하늘의 이름으로 효수한다. 고구려는 금수강산으로 단군할아버 님이 물려주신 복토(福土)였다. 그런데 시구 같은 착살맞은 자들이 본분을 잊고 나라의 기강은 물론 미풍양속을 해치고 있었다.
천지신명의 명을 받아 시구를 응징하였다. 앞으로도 나라의 기강을 흔들고 타인에게 해악을 가하는 짐승 같은 자들을 색출하여 처단할 것이다. 특히. 절노부의 **장자와 **장자 그리고 **장자는 유념하기 바란다. 또한, 태왕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두*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으니 유념하기 바란다.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들
“그게 정말이오? 소노부와 절노부 장자 두 명이 참수되어 마을에 걸렸다고요?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오?”
날이 밝기도 전에 소노부 고추가는 군사들이 가져온 벽서를 읽으며 치를 떨었다. 벽서에 자신과 세 명의 장자들 이름이 명시된 사안에 그는 정신이 아득했다. 잠시 후에 벽서에 이름이 거명된 세 명의 장자들이 소문을 듣고 고추가를 찾아왔다.
“고추가 대인, 해돈을 참수한 자들은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해우 태왕이 보낸 자객이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벽서에는 두로도 거명하였습니다. 이는 절노부, 계루부, 관노부, 순노부 중 한 노부의 짓이 틀림없습니다.”
“아니오. 내가 고추가 대인 집으로 오는 도중에 들었는데, 절노부에서도 시구 장자도 효수되었답니다. 절노부는 아닌 것 같소. 내 생각에는 계루부나 관노부의 짓 같습니다. 순노부 사람들은 겁이 많아 그런 끔찍한 일은 못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거명된 소노부 장자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근거도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겁에 질린 소노부 고추가는 무엇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 허둥거렸다. 해돈 장자가 죽었다는 풍문은 금방 소노부 뿐만 아니라 5부 전체에 퍼져나갔다. 벽서를 읽어본 소노부 사람들 상당수는 해돈의 죽음을 반기는 눈치였다.
“죽을 놈이 죽은 거야. 역시 하늘은 패역한 자를 그냥두지 않아.”
“암, 해돈, 그놈은 백번 죽어도 싸지. 그동안 우리를 얼마나 괴롭혔어.”
“그런데, 고추가는 왜 살려줬을까? 그놈을 죽여야 하는데, 이상하네.”
“어쩌면 태왕이 소노부를 길들이기 위해 꾸민 일 아닌가 몰라.”
소노부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해돈 장자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며, 속으로 고소해 했다. 충격을 받은 소노부 장자들과 유지(有志)들은 그동안의 자신들 행적을 돌아보며 전전긍긍하였다.
“고추가 대인, 이일은 그냥 묵과할 수 없습니다. 당장 5부연맹 회의를 열어 절노부 장자를 죽인 자를 꼭 찾아내 복수해야 합니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거대한 음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조정에 고하고 태왕의 조치를 두고 보시지요.”
“무섭습니다. 고구려가 건국되고 지금까지 이런 끔찍한 일은 없었습니다. 또 언제 자객들이 들이닥칠지 눈앞이 캄캄합니다. 오늘밤부터 야경을 돌아야 합니다.”
절노부 역시 시구의 죽음으로 발칵 뒤집어 졌다. 그러나 그를 누가 죽였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벽서에 거명된 장자들은 정신이 나간채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갈팡질팡하였다. 절노부에도 소노부의 장자 해돈이 참수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번 사태는 장차 고구려의 앞날에 청운(靑雲) 아니면 암운(暗雲)의 징조가 맞다.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들’은 5부의 모든 일들을 손바닥 보듯 파악하고 있는자들이다. 그렇다면 조정에서 막강한 권세를 지닌 자이거나 왕실 관련 사람들일 수 있다. 그런데, 태왕의 경호를 책임지는 두로를 왜 거명한 것일까? 아리송하기만 하다.’
절노부의 고추가는 깊은 생각에 빠졌지만 큰일을 벌인 사람들의 정체를 몰라 전전긍긍하였다. 모든 절노부의 장자와 유지들이 고추가의 저택으로 몰려들었지만 설왕설래할 뿐 향후 대책이나 토론 없이 큰소리로 떠들어 대기만 했다. 행상으로 가장한 대월단원들이 5부 집단 곳곳을 돌며 사람들의 반응을 듣고 그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세세한 내용을 수집하였다.
소노부와 절노부의 고추가는 간밤에 일어난 사태를 해우 태왕에게 상세히 고하였으나, 태왕은 두 고추가가 건넨 벽서만 읽어보고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