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버들 잎을 띄워(1)
- 본 역사 단편소설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과 그의 제1왕비인 신혜왕후
(神惠王后) 유씨(柳氏)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입니다. 5부까지 계확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묏버들 잎을 띄워
- 여강 최재효
1
천년 제국 신라가 무너지고 있었다. 신라 효공왕(孝恭王)은 쇠잔해 가는
나라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각지에서 민란과 반란이 끊임없이 일
어나며 군웅할거의 시대로 변모해 가자 상당히 지쳐 있었다. 국토의 북부
지역은 궁예(弓裔)가 후고구려를 세워 웅거하며, 점차 영토를 넓혀가고 있
었고. 신라의 남서부 지역 완산주에는 신라 장군 출신 견훤(甄萱)이 후백
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송악(松嶽) 사람 왕륭(王隆)은 정세의 흐름을 읽는 혜안이 있었다. 그는
송악 일대를 주름잡던 호족이었고, 그의 조상대부터 이 지역 갑족(甲族)으
로 행세했다. 신라 조정의 통제력이 패서(浿西) 지역에까지 미치지 못하자
이 지역은 몇몇 호족들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했다.
평주의 박지윤(朴智胤), 황주의 황보제공(皇甫悌恭), 정주의 유천궁(柳天
弓)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중 단연 송악의 왕륭이 가장 큰 유력자였다. 왕륭
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궁예에게 바치고 그의 휘하에 안주하자 궁예는 왕륭
에게 금성태수(金城太守) 자리를 제수하였다.
왕륭에게는 왕건(王建)이란 걸출한 아들이 있었다. 왕륭은 그의 아들로 하
여금 삼한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어느 날 왕륭이 궁예
를 찾아가 아들을 소개하였다.
“대왕께서 삼한의 주인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에 성(城)을 쌓고 저
의 아들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경의 아들이 영걸이라 들었습니다.”
송악 사람들은 왕륭의 아들 왕건을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용의 얼굴에 이
마는 해처럼 솟아났고 턱은 모나 있었다. 또한, 도량이 큰 데다 말소리가 우
렁차 능히 세상을 구제할 만한 역량을 갖추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왕건이 궁예를 알현하였다.
궁예는 단번에 왕건의 역량을 알아보았다. 궁예는 왕륭의 제의에 따라 왕
건에게 송악산 기슭에 보제참성(菩提塹城)을 쌓게 한 뒤에 그를 송악의 성주
겸 태수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궁예와 견훤은 첨예한 상태에서 각축을 벌였다. 신라는 두 호걸과 대적할
수 없는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했다. 왕륭은 왕건에게 어릴 때부터 각종 무
예와 마술 등을 가르쳤고,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서를 익히게 하였다.
궁예는 왕건이 단기간에 성을 견고하게 쌓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으며, 그를
가까이 두고 쓰고자 하였다. 국토의 중심 지역에는 여전히 군웅(群雄)이 활개
치고 있었다.
궁예는 이때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에서 ‘고려’로 개명하고 송악을 도읍지로
삼았으며, 왕건에게 군사를 내주고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靑州), 당성
군(唐城郡), 괴양군(槐壤郡) 지역에 할거하고 있는 소 영웅들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궁예로서는 반도의 서남부를 배경으로 득세하고 있는 견훤을 상대하기 위하
여 사전에 잔가지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은 왕건이 궁예에게 혁혁한
전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산천이 짙은 녹음에 물든 어느 날, 왕건이 군사 이천여 명을 이끌고 남쪽 지
방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아침에 송악에서 출발한 왕건의 군대가 정주(貞州)
지역의 한 마을로 들어섰을 때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왕건이 도착한
곳은 정주 지역 호족인 유천궁이 사는 행촌(杏村)이었다.
이천여 명의 군사들이 황톳길을 걸어 행촌마을로 들어서자 놀란 마을 사람
들이 모두 나와 군사들의 행진을 구경하였다. 행촌마을 입구에는 빨래터와 우
물이 있었다.
이 마을 호족인 유천궁과 촌장을 비롯한 원로들은 왕건이 이끄는 고려 군사
들이 마을에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급히 마중을 나갔다. 왕의 직속 군대가
마을을 비껴 지나가면 그만이었으나, 군대가 마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때 마을의 촌장이나 원로(元老) 또는 장자(長者)는 빨리 군대를 맞아야 했
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장수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군대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면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왕장군, 어서 오십시오. 저희 마을에 잘 오셨습니다. 존명(尊名)은 예전부터
듣고 있었사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장군님을 가까이
서 뵈니 큰 영광입니다.”
여낙낙하고 헌거로워 보이는 유천궁이 아들뻘 되는 청년 장수 왕건에게 공손
히 고개를 숙였다.
“장자가 유천궁이구려. 그대의 고명은 익히 들은 바가 있습니다. 바쁘실 텐데,
손수 소장을 마중 나오셨습니다. 오늘은 날이 저물어 마을 어귀에서 군사들과
하룻밤 숙영(宿營)할까 합니다.”
유천궁과 원로들이 왕건의 비장(裨將) 이하 군관 일행에게도 공손하게 고개
를 숙였다. 왕건이 나이가 어리다고 하지만, 고려국의 장수로 송악의 성주 겸
태수의 직함을 가진 영걸이었다. 유천궁은 왕건의 부친 왕륭과 친분이 있었다.
유천궁은 정주 지역뿐만 아니라 패서 지역에서도 인덕(人德)과 지덕(知德)을
겸비한 인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왕건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정주 유
천궁의 인품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를 들었다.
왕건은 이상하리만치 행촌이 마음에 들었다. 마치 고향 송악에 온 느낌이 들기
도 했다. 마을 아낙들이 왕건과 그의 군사들을 바라보며 신기해하였다. 길옆 우
물가에도 서너 명의 마을 아낙이 빨래하다 말고 일어서서 왕건을 흠모의 시선으
로 바라보며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아낙들 가운데 유난히 외모가 아름답고
올되 보이는 한 처녀가 있었다.
“주인마님께서 어째서 아씨를 우물가로 나오라고 하신 거예요? 그것도 아주
예쁘게 차려입고 나와 있으라고 하니 주인마님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혹
시 저기 저 군사들을 구경하라고 하신 건가요?”
*그미의 몸종 여리는 유장자의 지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리는 그미를 오랫
동안 모신 십대 후반의 소녀로 버들아씨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정도
였다.
* 그미 - 주로 소설에서, ‘그녀’를 멋스럽게 이르는 말.
“글쎄다. 나도 아버님의 의도를 잘 모르겠구나. 여리야, 조라 떨지 말고 조신
하게 있어야 한다. 알았지?”
버들아씨는 행여 여리가 새퉁이처럼 함부로 떠들어 댈까 걱정하였다.
“아씨, 저기 군사들 앞에서 흰말을 타고 오는 분이 왕건 장군이라고 하는데,
고려에서 최고로 용맹하고 잘생긴 사내래요. 저기 좀 보셔요. 어머나, 정말로
멋지게 생겼네요.”
여리의 말에 그미도 왕건을 바라보았지만,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상태라 그
의 자세한 얼굴은 파악할 수 없었다. 왕건을 바라보는 그미의 양 볼이 갑자기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리가 찧고 까부는 사이에 군대의 선두(先頭)가 빨래터가
있는 우물가 가까이 다가왔다.
앞에서 군사를 이끌던 청년 장수 왕건이 마침 목이 말라 말에서 내려 우물가
로 걸어갔다. 그의 뒤로 유천궁과 마을 원로들이 따랐다. 우물가에 수백 년 되
어 보이는 버드나무가 길고 야들야들한 가지를 치렁치렁 내리고 있는데, 마치
처녀의 머리카락을 풀어 놓은 듯 했다. 누구나 손을 뻗으면 가지를 잡을 수 있
을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물가로 쏠렸다. 비장과 군관들도 우물가로
걸어가고 있는 왕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자 버드나무 가지들이
살랑살랑 춤을 추었다. 우물가에 모여있던 아낙들은 청년 장수가 다가오자
당황하여 웅성거렸다.
“소장이 목이 마릅니다. 물 좀 마실 수 있겠습니까?”
왕건이 아낙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낙들이 왕건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모두
피하자 아낙들 뒤에 있던 그미와 여리가 그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왕건은
도깨비 문양이 새겨진 투구를 벗으며, 그미에게 다가가 물을 달라고 요청하였
다. 그미가 수줍은 듯 반쯤 고개를 숙이고 헌헌장부 왕건에게 바가지에 물을
떠서 건넸다.
“장군님, 천천히 드시어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그미의 목소리가 왕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왕건에게 건넨 물바가지에 버들잎이 둥둥 떠 있었다. 왕건은 버들잎을
후후 불어 물을 마셨다. 그는 물을 마시면서 기분이 찝찝했다. 마을 처녀에게
물을 청한 것이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 같아 왕건은 얼른 바가지를 돌
려주고 돌아서려다 말을 걸었다.
“저어, 낭자, 물에 버들잎을 띄운 이유가 있습니까?”
왕건의 말에 그미는 얼굴이 더욱 달아올라 잘 익은 능금처럼 변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습습해 보이는 왕건을 살며시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가까이서 마주쳤다. 순간, 왕건의 가슴이 방망이질 쳤고, 그
미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오, 천상의 선녀로다.’
‘아, 여리 말대로 보기 드문 미남자로다. 하늘에서 강림한 신장(神將)이거나
제석신(帝釋神)이 틀림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인지…….’
두 사람은 잠시 말문이 막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서로의 모습에 마음
을 빼앗긴 것이다. 그미가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하였다.
“장군께서 군사들과 먼 길을 달려오신 듯하온데,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할까
염려되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불민한 소녀를 용서하셔요.”
그미가 수줍어 고개를 숙였다.
‘아, 나를 위해 부러 버들잎을 따서 물 위에 띄웠구나. 얼굴도 고운 낭자가
마음씨 또한 비단결 같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낭자의 눈동자처럼 깊고
그윽하구나. 송악에서도 보기 어려운 천하의 미색(美色)이로다.’
왕건은 그미의 정중한 태도와 말솜씨에 반하여 멍하니 그미를 바라보았다.
그때 왕건 뒤에서 두 사람의 언행을 바라보던 유천궁과 마을 원로들은 가슴을
졸였다. 행여, 그미가 왕건의 심기를 언짢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면 어쩌나 걱
정하는 눈빛이었다.
“소장이 목이 말랐는데, 낭자가 건네준 감로수에 해갈이 되고 기운이 납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어-, 낭자의 이름과 *춘당(春堂)의 성함이 어찌
되는지 알려 줄 수 있습니까?”
왕건은 비록 촌이지만 아름다운 처자의 이목구비와 언행에 매료되어 그냥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는 아직 혼인 전의 총각이었다. 그미가 머뭇거리자 여
리가 얼른 그미 앞에 나와 대신 대답했다.
*춘당 – 남의 아버지의 존칭
“우리 아씨 이름은 버들이라 하구유, 장군님 뒤에 계신 분이 아씨 아버님되
시는구먼유. 지는 아씨 몸종 여리라 하구유.”
왕건이 유천궁과 버들아씨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여리의 답변에 숨을 죽이
고 있던 유천궁이 두 손을 비비며, 앞으로 나와 왕건에게 고개를 한번 조아리
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왕장군, 저 아이는 저의 여식입니다. 물을 길러 왔다가 우연히 장군과 조우
하였습니다.”
“오, 장자에게 항아(姮娥) 뺨치는 고운 따님이 있었구려,”
유천궁의 답변에 왕건은 입이 양 귀에 걸렸다. 그는 물을 건넨 낭자가 유장
자의 딸이라면 금지옥엽으로 자랐을 것은 물론이고, 교양있고 정숙한 여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낭자의 신분을 알게 된 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유천궁은 왕건이 마을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딸을
우물가로 나오게 했다. 왕건이 자신의 딸과 인연이 닿기를 고대하는 아비 유
천궁의 깊은 배려였다.
유천궁은 왕건에게 딸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처음 보는 젊은 장수에게 아무
명분도 없이 딸을 소개할 수는 없었다. 아낙들 가운데 수줍게 서 있는 그녀는
군계일학이었다. 왕건이 멀리서 보아도 금방 시야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그미
를 보고 마음이 움직인 것은 사내의 본능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군께서 저희 행촌에 납시셨으니, 오늘은 제집에서 하룻밤 유하시지요. 행
촌 앞뜰은 병사들이 숙영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활개지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천궁은 왕건이 마을을 지나치는 것이 아니고 마을로 진입하였다는 말에 이
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얼마 전에 거대한 황룡(黃龍) 한 마리가 자신의 집
지붕에 내려앉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유천궁은 마야부인에게 꿈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발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저어되어 부인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함구
하고 있었다. 왕건이 군사들을 이끌고 마을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유천궁은 무릎을 쳤다.
“유장자님의 제의는 고맙습니다. 그러나 소장은 전쟁하러 가는 장수입니다.
어찌, 나 한 몸 편하자고 사사로이 민가에 들겠습니까?”
“장군, 제집은 꽤 큰 편입니다. 장군을 비롯한 비장과 군관들만이라도 제집에
들어 저녁 식사를 하시지요.”
“장군, 그리하시지요. 저희 원로들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고생하는 장군을 잠
시라도 모시고 싶습니다. 늘 장군의 인품을 흠모해 왔습니다.”
“장군, 그리하시지요. 행촌 백성들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유천궁은 어떻게 해서든지 왕건을 하룻밤만이라도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가
재우고 싶었다. 유천궁은 뜻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그 뜻을 이루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의 사내이기도 했다. 유천궁과 촌장 그리고 마을 원로들이 왕건
한 사람만이라도 유천궁의 저택에 들러 저녁을 들라고 간청하였다.
유천궁은 정주에서 소금 무역업을 하며 거상(巨商)이 되었다. 송악과 정주는
서해로 흐르는 신지강(神智江)으로 연결되어 있어 예로부터 당나라를 상대로
무역업이 크게 발달하여 있었다. 그는 무역업뿐만 아니라 대농(大農)으로 정주
일대 땅의 대부분이 그의 소유였다.
정주에서 유천궁의 땅을 밟지 않으면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무역
업과 농장경영으로 모은 재산을 신지강 가에 조선소를 만들어 상선(商船)을
대량으로 제조하여 당나라에 수출하기도 했다. 신지강의 여러 곳의 포구에 그
의 소유인 크고 작은 선박 수백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유천궁을 장차 나의 지지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잘 지낼 필요가 있다. 또한,
아버님하고도 막역한 사이니, 하룻밤 정도는 신세를 져도 되겠지. 더구나 아
리따운 딸까지 있으니 기대된다. 좋다. 민의(民意)도 살필 겸 하룻밤 묵자.’
“장군, 병사들은 우리 군관들이 정리할 테니 다녀오시지요.”
“장군, 그리하십시오. 군사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장자와 마을 원로들
의 이야기도 들어보시고 장군의 뜻을 말씀드릴 겸 해서 다녀오십시오.”
왕건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비장과 고급 군관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에
게 권했다. 왕건은 잠시 갈등하다가 유천궁의 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미와
여리는 집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왕건이 마을
에 들어 원로들과 어울리기를 원하고 있었다.
“병사들과 함께 있어도 됩니다만, 그럼, 신세를 지겠습니다.”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가 병영을 이탈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
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크게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궁예의 명령은 시급한 것이 아니었으며, 지방에서 준동(蠢動)
하는 세력을 진압하는 것도 왕건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천궁의 저택을 찾은 왕건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송악이나 서라벌
에서도 볼 수 없는 저택이 왕건과 부장들을 압도하였다.
송악에 있는 자신의 집보다 훨씬 커 보였다. 왕건은 유천궁이 거부(巨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 왕륭의 재력(財力)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유천궁은 미리 종자(從者)를 시켜 부인에게 ‘왕건이 혹시 집으로 향할
지 모르니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기별하였다. 왕건이 그의 저택에 도착하였을
때 유천궁의 부인과 그미가 대문 밖까지 나와 청년 장수를 맞이하였다.
“장군님, 어서 오십시오. 누추한 곳에 납시었습니다.”
“장군님, 어서 오셔요. 저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유천궁의 지어미 마야부인(摩耶夫人)과 그미가 공손히 머리 숙여 왕건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그미는 조금 전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녹색 당의(唐衣)에 붉은색 치마를 입은 그녀는 곧 대례(大禮)를
치르기 위하여 칠보단장을 마친 신부 같았다. 왕건은 두 여인을 향해 정중
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세 사람이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유
천궁은 속으로 마뜩해 했다.
“소장을 이리 환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장군,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유천궁과 왕건이 나란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촌장과 원로 그리고
군관 서너 명도 뒤따라 들어갔다. 푸른 기와, 붉은 기둥, 금빛으로 칠한 벽,
넓은 정원에 연못과 흐드러진 기화요초, 수십 명의 하인, 집안 곳곳에 서 있
는 대리석으로 된 장명등, 벽에 그려진 진경산수도(眞景山水圖) 등, 왕건은
마치 왕궁에 들어온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집안을 살펴보면서 감동을
하였다. 유천궁은 왕건과 군관들을 안채 대청(大廳)으로 안내하였다.
언제 상을 차렸는지 커다란 교자상에 산해진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술이 가득 든 은주전자와 금잔(金盞)이 상 위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왕건은 유
천궁의 집에 들면서부터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유천궁이 왕건을 주연석 가운
데 좌정토록 하고 마을 원로들을 좌우로 앉게 하였다. 그 와중에 여종들이 연
신 기름진 음식들을 가져와 상위에 올려놓았다. 금방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
았다.
“왕장군께서 우리 행촌에 왕림하여 주신 것을 마을 백성들 전체가 쌍수를 들
어 환영하는 바입니다. 장군이 가는 곳마다 악의 뿌리가 사라지고 희망의 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오늘은 제집에서 마음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유천궁이 왕건의 금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환영사를 하였다. 그의 환영사에
이어 왕건의 답사(答辭)가 이어졌다.
“소장이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누립니다. 행촌은 유장자를 비롯한 촌장 이하 원
로들께서 백성들을 잘 이끌어 살기 좋은 고장으로 가꾸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
다. 우리 고려가 나날이 국력이 신장하여 가고 있습니다. 대왕과 나는 전국 각지
에 준동하고 있는 비적들을 소탕하고 곧이어 후백제의 도발을 제압하여 장차 삼
한을 일통할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나라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주시리
라 믿습니다.”
왕건의 답사에 유천궁과 마을 원로들은 손뼉을 치며, ‘왕건 장군 만세’를 연
호하였다. 마야부인과 그미는 대청 가까이 서서 주연석에서 들리는 소리를 엿
듣느라 귀를 쫑긋 세웠다. 주연석이 차려진 대청은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와 웃
음소리가 뒤섞여 주흥(酒興)으로 가득했다. 왕건과 잔을 마주하던 유천궁은
내실로 들어가 마야부인과 그미를 만났다.
“부인, 며칠 전에 내가 들려준 꿈 이야기 기억하시지요? 오늘 같은 일이 있기
위하여 미리 몽조(夢兆)가 있었던 겁니다. 오늘 우리 집에 황룡이 내려앉았습
니다. 황룡은 곧 임금을 뜻합니다.”
“장자께서 말한 황룡이 왕건 장군이란 말이예요?”
그제야 마야부인은 지아비의 꿈 이야기를 기억하고 몸을 떨었다. 마야부인
도 왕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려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유천궁을
비롯한 많은 호족이 왕건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고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
보고 있는 터였다.
어쩌면 왕건이 자신의 집에 왔다는 것은 천우신조 없이는 불가한 일일 수도
있었다. 마야부인은 지아비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몸이 달았다.
“얘야, 오늘 밤 장군을 모셔야 할 것 같구나. 오늘 밤이 어쩌면 너와 우리 가
문에 역사적인 날이 될 수도 있을 것이야. 아비의 간절한 청을 거절하지 않았
으면 좋겠다. 황룡과 어울리면 같이 승천하는 거란다.”
그미도 아버지의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미는 마야부인을 바라보았
다. 마야부인은 눈을 찡끗하면서 ‘괜찮다’라는 뜻을 전했다.
“소녀, 아버님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유천궁은 딸의 말에 입이 벌어졌다. 부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야부인은
안도하였다. 유천궁이 방에서 나가자 마야부인은 그미의 귀에 대고 속살거
렸다.
“버들아, 꽃물은 열흘 전쯤 끝났지?”
그미는 대답 대신 얼굴을 붉혔다. 딸이 혼기가 차자 마야부인은 그미에게
여인의 정조와 첫날밤 신랑을 대하는 방법 그리고 몸가짐 등에 대하여 세세하
게 가르쳤다. 그미에게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초야(初夜)가 꿈결처럼 찾아온
것이다.
유천궁은 왕건과 대작하면서 그의 마음을 뜨개질했다. 삼한 최고의 사윗감
이 집안에 들었는데,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왕장군께서 아직 미장가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만간 가야 할 텐데, 할 일이 많아 혼인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전장을 누비며 달래고 있습니다.”
왕건은 술잔을 비우며, 유천궁이 자신의 미장가에 관하여 관심 두는 이유가
자못 궁금했으나, 그에게 과년한 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으로 흐뭇해했
다. 왕건은 우물가에서 물을 건네주던 버들아씨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렸다.
“장군, 등하불명이란 말이 있지요. 인연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사방천지
발길 닿는 곳은 모두 인연이 있는 곳이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연이 마치
바다 건너나 하늘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요.”
‘등하불명?’
왕건은 유천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유천궁이 말하는 ‘등하불명이란 무엇
일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유천궁이 하인에게 수신호를 보내자 마야부인
이 딸과 대청으로 들더니 왕건 앞으로 다가왔다. 마야부인과 그미는 마치 자매
같았다. 칠보단장한 그미가 사뿐사뿐 걸어와 다시 한번 왕건에게 반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장군, 제 여식입니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유장자, 오늘 밤은 소장이 마치 천상에 놀러 온 기분입니다. 세분의 환영이
소장에게는 너무 과합니다.”
“버들이라 합니다. 장군님을 뵙게 되어 소녀와 저희 가문에 큰 영광입니다.
오늘 밤은 저희 집에서 고단함을 푸소서. 소녀가 가까이 모시겠나이다.”
그미가 왕건의 곁에 다소곳하게 앉아 속삭였다.
‘뭐라, 나를 가까이서 모시겠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오호라. 유장자가 등하
불명이라 한 뜻을 이제야 알겠다.’
주연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유천궁은 하인들에게 명하여 숙영지에 있는
병사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보내도록 조치하였다. 유천궁의 저택에서 고단함을
푸는 군관들과 마을 원로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웃고 떠드는 소리에 밤이 깊어
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왕건에게 밀려드는 술잔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대충 술 두말은 마신 듯 했
다. 아무리 장사라 하여도 술을 이기는 자는 없었다. 유천궁은 왕건과 함께 온
군관들에게 자신의 저택에서 하룻밤 묵게 하고 왕건과 그미는 별채로 들게 하
였다.
별채에 들어 비단 이불을 덮을 때까지 왕건은 술을 이기지 못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미는 그의 옷을 벗기고 물수건으로 손과 발을 닦아 주었다. *삼경
(三更) 쯤 되자 흥청망청 이어지던 주연이 파하고 사람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유천궁의 집 담장 밖에는 군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소쩍새가
마을 뒷산에서 애절하게 울어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마을 앞산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밤꽃이 묘한 향기를 뿜어냈다.
* 삼경 – 밤 11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 사이
‘아씨는 좋겠다. 고려 최고 미남자와 동침을 하시니…….’
여리는 밤이슬을 맞아가며 별채 앞마당을 이리저리 바장이며 중얼거렸다.
이미 사경(四更)이 지나 오경(五更)에 접어들고 있었다. 동녘에서 여명이 희붐
하게 비칠 때쯤 여리는 안채에서 흘러나오는 미묘한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집중했다. 그미와 청년 장수가 흘려보내는 묘음이 분명했다. 여리는 마른 침을
삼키며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자웅의 화락지음(和樂之音)을 엿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