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황소서(終)
문창공 최치원 선생 존영
격황소서
- 여강 최재효
終
말이 공기와 공간을 매개로 한 의사전달 수단이라면, 문자는 종이나
돌, 쇠, 목재 등에 새기거나 써놓음으로써 불특정 다수에게 의사를 전
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나 문장가는 반영구적인 의사전달
체계 수단인 문자에 자신의 마음과 혼(魂)을 담아내는 예술가이며, 문
자를 조탁(彫琢)하는 마술사라고 할 수도 있다.
문자를 알면 누구나 문장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희로애락을
글로 묘사하는 재주는 하늘이 정한 자 아니면 가질 수 없다. 한자(漢
字)는 글자 하나하나가 언어의 음과 상관없이 일정한 뜻을 지닌 표의
문자로 풍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시문(詩文)이나 제술(製述)에 있
어 뛰어난 기능이 있다.
“그게 정말입니까?”
“폐하, 소신이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습니다. 황소가 고변
태위가 보낸 그 격문을 읽다가 피를 토하며, 말에서 떨어져 자리에 누
웠다고 합니다.”
“과연, 고변 태위는 하늘이 짐에게 보낸 충신이로다.”
이현 황제는 박장대소하며 좋아하였다.
“폐하, 소신이 알아본 바로는 격황소서는 고변이 쓴 것이 아니고
그의 휘하에 있는 도통순관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 신라인 최치원
(崔致遠)이 쓴 것이 확실하다고 하옵니다.
당초에 최도통순관이 격문 초두에 제도도통검교위태위(諸道都統檢
校太尉) 고변(高騈)으로 써서 올렸는데, 고변이 자신의 이름을 빼고
모관(某官)으로 수정하라고 하였답니다.”
전령자가 이현 황제에게 아뢰자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대신들도 전령자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폐하, 행재도지휘처치사(行在都指揮處置使), 전령자님의 말씀이 맞
습니다. 소신들도 이미 알아보았습니다. 고변이 자신의 이름 두자를
삭제하고 대신 ‘모관’으로 고치라 하였답니다.”
다른 중신이 아뢰자 황제 이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령자
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반응을 살폈다. 전령자와 고변은 지
난번 회동 때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갈등을 빚고 있었다.
“짐도 시문에 관심이 많아 시경(詩經)과 초나라 굴원(屈原)부터 시작
하여 설도(薛濤)와 어현기(魚玄機)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시문을
섭렵(涉獵)하였지만 최치원의 ‘격황소서’ 만큼은 아니었다.
비록 우리 당나라 사람은 아니지만 외국인으로서 귀기(鬼氣)가 감도
는 빼어난 문장으로 흉악하고 패악무도(悖惡無道)한 역적 황소를 한
번에 망가트렸으니, 천군만마를 지휘하는 장수보다 위대하도다. 지금
이후로는 짐에게 가장 든든한 신하가 바로 최치원이다. 변란이 끝나면
짐이 그를 후하게 칭송하고 상을 내릴 것이다.”
웬만해서는 외국인에게 칭찬하는 법이 없던 당황제 이현은 침이 마
르도록 해운을 칭송하였고, 중신들도 황제의 극찬은 당연한 처사라고
입을 모았다. 황소가 해운이 작성한 격문을 보고 병이 난 뒤로 그의
위세는 땅에 떨어졌다. 황소를 따르던 장졸(將卒)들의 이탈이 빈번하
면서 황소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괴소문까지 나돌았다.
“폐하, 이제 장안으로 군사를 보내 황소를 죽이고 종묘를 다시 재건
하셔야 합니다.”
“폐하, 최치원이 쓴 격문을 보고 황소가 전의(戰意)를 상실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에게 시간을 주면 안 됩니다. 속히 군사를 보내셔야
합니다.”
중신들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황제 이현에게는 장안에 보낼 군사가
없었다.
“폐하, 독안룡 이극용의 흑아군(黑鴉軍)을 활용할 시기가 왔습니다.
지난번 소신이 달단(達靼)에 가서 이극용 부자를 만났을 때 그들을
설득하여 당 조정에서 부르면 언제든지 출병한다는 약조를 받아냈습
니다. 독안룡에게 출전을 윤허한다는 성지를 내리소서.”
“아, 그렇지요. 전령자께서 그 부자에게 성지를 보내시고 전국의 모든
절도사들에게도 장안으로 군사를 출동시키라고 조서를 내리십시오.”
전령자의 주청에 황제는 이극용에게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에 봉하
고 즉시 장안으로 출전하여 황소를 격퇴하라는 성지를 내렸다.
격황소서를 전국에 보낸 고변은 이극용이 장안으로 출전한다는 말에
불안하였다. 장안으로 출병은 하지 않고 양주에 주둔하여 사태를 관망
하고 있는 자신의 행동을 황제와 전령자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변은 또 출전을 할지 말지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뭐라, 이극용이가 토벌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오고 있다고?”
“폐하, 큰일입니다. 그자의 용맹은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일단 장안으로 통하는 길을 통제해야 합니다.”
‘이거 큰일이군. 그자의 흑아군은 귀신 집단 같아서 한 번도 패퇴한
적이 없다는데, 어찌해야 하나?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 지하의 귀
신들조차도 짐을 죽이려고 모의한다’는 그 격문이 맞아 떨어지는 것
인가? 신라인 최치원이 도대체 어떤 자인지 만나보고 싶구나.’
병석에 누워 겨우 몸을 일으킨 황소가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한탄하
였다. 대장군 주온과 재상 상양 그리고 황소 휘하의 제장(諸將)들이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어찌해야 할 지 난감해 하였다. 한참
동안 누워서 골몰하던 황소가 명을 내렸다.
“대장군 주온은 휘하의 군사들을 낙양으로 통하는 길목에 주둔시키
고, 상양은 짐의 군대 십오만 명을 친히 이끌고 양전파(梁田陂)에서
이극용을 막으시오. 짐은 두 분만 믿습니다.”
또 황소는 간자(間者)들을 여러 지역에 급파하여 백성들의 동태를
파악하라고 하였다. 이극용의 군대가 장안으로 달려가자 흩어졌던
근왕병들이 다시 장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황소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황금 십만 냥과 대장군 직책을 하사하
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장안을 탈환하라. 황소의 군대는 지쳐있다.”
당 조정은 토벌군들의 사기를 올리려고 달콤한 말을 남발하였다.
“황소의 군대는 오합지졸이다.”
“먼저 주온의 군대부터 궤멸시켜라.”
이극용은 자신의 군대와 전국에서 올라온 근왕병들과 연합하여 주온
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주온은 자신을 따르는 제장들을 소집하였다.
“이미 대세는 글렀다. 장안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차단되었다. 황소
황제만 믿고 있다가 우리는 어육(魚肉)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용
케 포위망을 뚫고 장안으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황제가 우리를 살려두
지 않을 것이다. 나 주온은 당 황제에게 투항하여 나 살길을 찾으려
한다. 그대들도 살고 싶으면 나를 따르라.”
“저희들도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주온은 군사를 거두고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이극용의 군대가 목전
에 있어도 못 본체하였다.
“뭐라, 주온이 당 황제에게 투항하였다고? 정말이냐?”
“폐하, 사실입니다.”
‘아아, 세상에 믿을 놈이 없구나. 이제는 귀신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백성들도 나를 원망하며, 내가 죽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니 앞
으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해운이 작성한 ‘격황소서’를 보고 말에서 떨어져 병을 얻은 후로 황
소는 이미 천하를 얻으려는 뜻을 포기하였다. 그는 백발의 노인이 되
어 있었다.
“폐하, 어서 장안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이대로 있다가 독안 든 쥐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성안은 이미 물자가 떨어져 병사들이 하루
한 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실정입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군관들이 황소에게 장안을 버리자고 하였다.
“세상천지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황소는 눈앞이 캄캄하였다. 장안의 동쪽을 지키던 황소의 대장군 주
온은 전쟁의 형세가 불리하자 당 조정에 항복하였다. 당 황제는 주온
의 투항에 의기양양했다.
“투항한 주온에게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그를 선무군절
도사(宣武軍節度使)에 임명하라. 이제 황소를 장안에서 몰아내는 일
은 시간문제다.”
당황제 이현은 주전충의 군대를 당의 토벌군에 편제하고 이극용과
연대해서 장안을 탈환하도록 지시하였다. 곧이어 이극용의 흑아군은
양전파를 지키던 상양이 이끄는 황소의 15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며,
패전 소식을 듣고 황소는 허겁지겁 남전(藍田)으로 후퇴하였다.
황소군은 장안에서 후퇴하면서 금은보화를 길에 뿌려 놓았다. 당의
토벌군들은 황소군을 쫓다가 보물 줍기에 혈안이 되기도 하였다.
“땅 끝까지 쫓아가 반도(叛徒)의 수괴인 황소의 목을 가져오라.”
당 조정의 절도사가 된 이극용과 주전충은 토벌군을 이끌고 집요하게
황소의 뒤를 쫓으며 반란군을 괴롭혔다.
황소군은 토벌군과 싸움에서 연전연패하며, 결국 태산의 낭호곡(狼虎
谷)에 이르렀다. 한때 대제(大齊)의 황제였던 황소는 패장(敗將)이 되어
병든 몸을 이끌고 도망하는 딱한 신세로 전락하였다. 그를 따르는 군사
는 겨우 1천명 정도였다.
“패장 황소와 봉기군들은 투항하라.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만약 끝까지 반항하다 잡히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독수리 밥이 되게
할 것이다. 어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이보시게. 황소는 이제 글렀네, 우리들만이라도 목숨을 부지하세.”
“그럽시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소. 황소는 이제 죽은 목숨이오,”
계곡에 갇힌 황소의 목숨은 한때 자신의 충복(忠僕)이었던 주전충에
게 달려 있었다. 걷지도 못하는 황소를 남겨두고 봉기군들은 모두 병
장기를 버리고 주전충에게 투항하였다.
“황소를 잡았다.”
토벌군 병사들이 황소를 오랏줄로 꽁꽁 묶어 선무군절도사 주전충 앞
에 무릎을 꿇렸다. 주전충은 손수 황소를 옭아맨 오랏줄을 풀었다.
황소는 이미 예전의 황소가 아니었다. 황소는 양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고 앞을 잘 보지 못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다. 주전충은 황소를 보면서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미안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황소가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주장군, 부탁이 하나 있네.”
“황제 폐하, 신을 용서하소서.”
주전충이 황소에게 공손하게 응대하였다. 주전충은 한때 자신이 모시
던 황제, 황소에게 마지막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자네는 이제 나의 신하가 아닐세. 자네는 이미 내 휘하에 있을 때 대
장군도 하고 이제는 당 황제가 임명한 선무군절도사이니 부러울 게 없
을 것일세. 나의 목이 탐 나는가?”
“폐하, 아닙니다. 소신이 어찌 감히 그 같은 생각을 품겠습니까?”
“그럼, 나에게 잠시 시간을 주시게.”
주전충은 황소가 무슨 행동을 할지 알고 있었다.
“폐하, 많은 시간은 드릴 수 없사옵니다.”
“금방 끝날 걸세. 아주 잠시야.”
주전충은 말없이 황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소는 주전충을 보고 한번 씩 웃더니 다시 계곡으로 내려갔다. 주전
충은 황소가 힘없이 웃는 의미를 알고 숙연했다. 그의 눈가에 맑은 액
체가 스며 나왔다. 그는 영웅의 죽음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아, 나는 이렇게 허망하게 가는 구나. 나를 파멸로 이끈 최치원이
란 자를 꼭 만나고 싶었는데, 격문에 적힌 ‘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
지하의 귀신들조차도 짐을 죽이려고 모의한다는 그의 말이 정확하구
나.
이제 보니 최치원이란 자와 주전충 그리고 이극용이 바로 귀신이었어.
그런데 신라에서 온 자가 어찌 오늘 나의 비참한 운명을 예견했을까?”
황소는 대성통곡한 뒤에 비수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874년 왕선지와 황소가 당 조정에 반기를 든 뒤로 거의 10년간 당나
라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황소의 난은 884년 완전히 진압되었다. 전
국은 유리걸식하는 불쌍한 백성들로 넘쳐났고 당 제국의 경제기반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황소의 난으로 황소가 장안에서 황제로 등극하여 장안 주변을 지배하
고 있는 동안 전국의 절도사들은 독립된 군벌로 성장하였고 그들은 자
신의 왕국을 만들려는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
“황소의 난을 진압한 것은 주전충과 이극용의 칼이 아니라 신라인 최
치원의 ‘격황소서’ 이다. 짐과 당 나라 만백성은 그대의 노고와 신라의
우의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당황제 이현의 칭찬은 최고의 미사여구를 사용하였다. 중신들은 황제
의 칭찬이 너무 과하다고 속으로 투덜댔다.
해운이 모시던 태위 고변은 적극적으로 반군을 토벌하러 나서지 않았다
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되어 야인이 되었고, 해운은 당 황제로부터 자금
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자금어대는 당 황제가 정5품 이상의 문관
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였다. 당 황제 이현은 해운에게 포상하면서 해
운과 신라의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하였다.
- 끝 -
_()_ 8편까지 긴 작품을 감상하여주신 귀하께 진심으로 머리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곧 다른 작품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인천서 여강 최재효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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