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황소서(7)
황소
격황소서
- 여강 최재효
7
문자(文字)란 인간의 의사전달 체계의 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의 구강(口腔)에서 만들어진 말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문자는 시공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만큼 문자의 파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말이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청자(聽者)가 있어야 전달의 기능하지
만, 문자는 상대방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천 년 전에 선조(先
祖)께서 문자를 이용하여 지은 시문(詩文)을 천년이 지나서 후손이 읽고
감동을 받는다. 문자이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천 년 전 선조가 한 말은 후손들이 알 수가 없다. 한자(漢字)는
어느 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청동기 이후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
는 많은 부족이나 민족이 공용으로 사용하였다. 단지 익히고 쓰는 과정
이 지난(至難)한 면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것이 정말로 내 휘하에서 일하고 있는 신라인 해운 최치원
이 작성한 격서(檄書)란 말이냐?”
“태위 어른, 분명히 해운이 쓴 글이 맞습니다. 해운이 이 격문을 쓰느
라 이틀 낮밤을 꼬박 지새웠습니다. 격서를 다 썼을 때 해운이 소직(小
職)에게 먼저 보여주면서 서평(書評)을 의뢰하였습니다.”
격황소서를 읽어본 제도도통검교태위 고변(高騈)은 반쯤 정신 나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격서는 사람이 썼다고 볼 수 없네. 귀신
이 아니고서는 이 같은 문장이 나올 수 없어. 제갈량이 위나라와 일전
을 치르기 위해 전장에 나가기 전에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
禪)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도 이 격문을 따라가지 못하네.”
고변은 속에서 열이 나는지 자꾸만 냉수를 찾았다.
“그렇습니다. 공명의 출사표는 밋밋하고 너무 감정에 치우친 면이 있
습니다. 그에 반해 해운의 격문은 읽는 사람의 심장을 뛰게 만들어 역
적 황소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게 하고, 병장기를 들고 금방이라도 전장
으로 뛰쳐나갈 마음을 갖게 합니다.
또한 서너 군데 인용한 고사(古事)의 전거(典據)는 황소의 만행을 규
탄하고 회유하는 문장으로 가히 하늘의 문장(文章)이라고 말 할 수 있
습니다.”
고운이 문우(文友)인 해운을 칭찬하자 고변은 덩달아 고무되어 몸이
달아 오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몸이 이상하네. 이 격서를 읽고 난 뒤로부터 심장
을 예리한 비수로 찔린 느낌이야. 그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띵
한 것이 금방이라도 내가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태위 어른, 이 격서는 해운의 정기(精氣)가 서려 있습니다. 이 글이
제대로 사람을 만나면 피를 토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즉, 황소가
직접 이 격문을 본다면 즉사할 수도 있습니다.”
고운은 한 술 더 떠서 고변에게 겁을 주었다.
“옳거니, 자네 말이 맞네. 그런데 이 격문 서두(序頭)에 제도도통검
교태위와 내 이름이 들어갔는데, 내 이름을 빼고 싶네. 해운에게 미
안한 생각이 들어서 그러네. 나는 시문이나 몇 줄 쓰는 수준이라네.
이 격서가 전국에 붙으면 남들이 부하의 실력을 훔쳤다고 나를 욕할
까 두렵네.”
고변은 계속해서 속이 불편한 지, 이제는 얼굴에 경련이 일면서 밭은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태위 어른, 고(告)하는 분은 당연히 태위 어른이라는 것을 다 알고있
을 텐데, 굳이 어르신 이름을 뺄 필요가 있습니까?”
고운은 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던 고변이 왜 갑자기 자신의 이름
을 빼라고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공명(功名)만을 추구하던
자가 자신의 이름을 빼라고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때 해운
이 헛기침을 하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 어서 오시게.”
고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해운의 두 손을 잡았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수고했네, 정말로 수고했어. 어떻게 이틀 만에 천의무봉(天衣無縫)을
재단할 수 있었나?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네. 과연 해운일세. 정말로
빈공진사과 장원급제한 문재(文才)가 맞네.”
해운은 고변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신의 손을 잡고 연신 헤프게 웃
고 있는 상관이 이상했다.
“태위 어르신, 과찬이십니다. 그냥 한번 써봤습니다.”
“나도 문장을 좀 쓴다고 우쭐거리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문장
중에서 자네의 격문이 최고 일세.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네. 격문 첫머
리에 있는 내 이름 두 자를 빼주면 안 되겠는가?”
고변은 간곡하게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달라고 하였다.
“네에? 이 격문을 황소에게 통보하는 주체는 태위 어르신이십니다.”
“알지. 알고말고. 그냥 나의 직함만 쓰고 이름 두자는 지워주시게.”
해운은 고변의 요구를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요구대로 ‘고변’을 빼고
'모관(某官)'으로 대신 하였다.
"만약 내 이름을 쓰면 나의 실력을 훤히 알고 있는 문사(文士)들이
입방아를 찧을 거야."
고변은 해운이 격문을 수정하는 것을 보며, 들릴 듯 말 듯 혼자서 중
얼거렸다. 해운이 격문을 수정하여 고변에게 건네자 그의 입이 함지박
만큼 벌어졌다.
“새로 작성한 격문 원본을 사자(使者)를 시켜 황소에게 직접 전달케
하고, 필사본 삼천 장을 만들어 전국의 절도사와 근왕병, 군현령 등에
게 빠짐없이 보내도록 하시게. 또한 사천에 몽진(蒙塵)하고 계신 황제
폐하께도 보내시게.”
고변은 두통과 한열(寒熱)로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태위 고변의
명에 따라 사자가 해운이 작성한 격문을 가지고 직접 황소가 있는 장
안으로 향했다. 또한 필사본이 만들어져 양주는 물론 전국 모든 지역
에 해운이 쓴 ‘격황소서’가 전달되었다.
“오오. 과연 고변이로다. 짐이 태위가 시문을 제법 잘 한다는 이야기
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문장에도 이렇듯 빼어난 재주가 있는 줄 몰랐
도다.”
“폐하, 고변은 과연 당 나라 태위입니다.”
“남자의 가슴을 뛰게 하고 용기백배하도록 가슴을 후벼 파는 문장은
소신도 처음 봅니다. 과연 당나라의 보배이며, 자랑입니다.”
사천에 있던 황제 이현도 고변이 보낸 격문을 받아 보고 중신들과 함
께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폐하, 그자의 머리통에서는 그 같은 미문(美文)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격문은 그의 휘하에 있는 자가 쓴 것이 분명합니다. 고루한 늙은이
머리에서 이 처럼 용사비등(龍蛇飛騰)한 서체와 매끄러운 문장이 나
올 수 없습니다.
소신이 고변의 필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의 시문은 아기자기하
고 오밀조밀하여 마치 초조(初潮)를 막 시작한 계집애들이나 쓸법한
어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격문을 썼단 말이오?”
고변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전령자가 한 마디 하자 다른 중신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황제는 격문을 쓴 자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하였
다. 중신들 중 몇몇은 고변 휘하에 신라인 최치원이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운의 문장은 이미 당 나라 문인들과 고관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었
다. 황제에게 외국인이 격문을 썼다고 말할 경우 그가 불편하게 생각
할 수도 있었다. 격황소서가 당나라 전역에 전해지면서 당나라는 들
끓었다.
어떤 사람은 고변의 필력을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였고, 또 어떤 자
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고변의 문장이 아니라고 떠들어 댔다. 이
제는 과연 그 격서를 누가 썼느냐가 당나라 지식인들에게 최고의 관
심 대상이 되었다.
“폐하, 제도도통검교태위란 자에게서 이상한 문서가 도달하였습니
다.”
황소는 대장군 주온(朱溫)과 재상인 상양(尙讓) 등을 대동하고 장안
성에서 가까운 야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명목상은 사냥이지만 장안성에 갇혀 있다시피한 황소가 무척 답답해
하자, 대장군 주온의 건의로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
만 하여도 장안과 낙양에 자주 출몰하던 당 황제의 근왕병들도 모두
어디로 갔는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상재상, 제도도통검교태위란 놈이 도대체 누구요? 그 놈이 어떤 자
이기에 시건방지게 감히 짐에게 이 따위 종이쪼가리를 보낸단 말이오?”
“폐하, 그자는 현재 양주에 머물고 있는데, 당 황제가 우리 대제국을
장안에서 추방하라고 임명한 관군의 총사령관 고변이라는 자입니다.
그 자가 무슨 일로 폐하께 문서를 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받
아 보시지요.”
“상재상이 확인해 보시구려.”
“그럼, 소신이 개봉하겠습니다.”
상양이 문서 봉투를 뜯고 읽어보다가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
서 사시나무 처럼 떨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가슴을 쥐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주온이 이상한 낌새가 들어
그 문서를 읽어보고 그 역시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말 위에서 몸을
좌우로 휘청거리다 하마터면 말 등에서 떨어질 뻔했다. 황소는 두 신
하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문서에 도대체 무엇이 쓰여 있는지 무척
궁금해 했다.
“왜 그러시오? 그 문서를 이리 줘보시오. 짐이 읽어보겠소이다.”
“폐, 폐하, 아니 되옵니다. 그 문서를 절대로 보시면 아니 되옵니다.”
상양이 말에서 내려 황소에게 다가 갔다.
“허허, 거참. 내가 까막눈인 줄 아시오? 짐이 소싯적에는 과거도 몇
번 보았고, 시문을 쓰기도 했었다오. 무슨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가
있기에 그리 어려워하는 게요? 이리 주시오. 짐이 해석해 보리다.”
“폐, 폐하. 보지 마소서,”
이번에는 주온 대장군이 황소가 탄 말 앞으로 다가가 문서를 보지
말라고 강력히 권했다.
“경들은 짐을 어린애 취급하는 거요? 얼른 이리 주시오.”
주온은 황소의 재촉에 할 수 없이 황소에게 문서를 건넸다.
황소는 문서를 펼치는 순간 ‘헉’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가슴을 움
켜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를 바라보던 신하들이 황소에게 달려들었
다. 황소는 가슴의 통증을 참으려는 듯 인상을 쓰며, 머리를 숙여 말
갈기에 얼굴을 묻고 움직이지 않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왜 그러십니까?”
“괘, 괜찮소. 짐은 멀쩡하오. 잠시 정신이 오락가락 했을 분이오.”
황소가 가슴을 치면서 일어나 다시 문서를 펼쳤다. 황소의 얼굴 역
시 창백해져 있었는데, 금방 죽을 사람같이 보였다. 그는 심호흡을
서너 번하고서 다시 문서를 읽어내려 갔다.
“격황소서? 광명 이년 칠월 팔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 모관(某官)은
황소에게 고한다? 이건 짐에게 보내는 격서가 아닌가? 이런 발칙한
놈을 보았나? 감히 대제(大齊)의 황제인 짐에게 이 따위 글을 보내다
니. 찢어 죽일 종자로다.”
황소는 격서를 보자마자 펄펄 뛰면서도 그 격서를 또 읽기 시작했다.
“폐, 폐하, 폐하의 두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사옵니다.”
주온이 놀라 황소에게 마른 수건을 건넸다. 황소도 수건으로 피눈물
을 훔치고 크게 놀랐다.
“폐하, 그 문서를 소신들에게 주시고 어서 서둘러 환궁하소서. 그문서
에 요기(妖氣)가 서린 듯 하옵니다.”
상양이 큰소리로 아뢰자 황소는 껄껄껄 웃고는 대범한 척하며, 계속
격서를 읽어 내려갔다. 신하들은 선홍빛 피눈물을 연신 닦아내며, 말
위에서 격서를 읽고 읽는 황소가 위태로워 보였는지 일제히 말에서
내려 황소 곁으로 다가갔다.
“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천하 백성들 모두가 짐을 공공연히 죽이려 마음먹고 있을 뿐만 아니
라, 땅속의 귀신들 조차도 짐을 죽이려고 모의하였을 것이다. 짐이 숨
을 쉬니 혼이 붙어 있다고는 하지만, 벌써 넋은 도망갔을 것이다?”
황소가 큰소리로 격서를 중간 쯤 읽을 때였다.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었다. 말이 놀라 날뛰자 황소는 피를 토하며, 말에서 떨
어지고 말았다.
“앗, 황제 폐하께서 말에서 떨어지셨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이년들, 이 요망한 요귀년들 어서 저리 가지 못할까? 주온 저년들,
저년들을 단칼에 베어라. 어서. 어서 베지 않고 무얼 하느냐?”
주온과 상양이 땅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거리며, 버둥대는 황소를 흔
들었다. 황소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고 숨을 겨우 쉬면서 허
공에 대고 손을 휘저으며 헛소리를 하였다.
“빨리 황제 폐하를 모시고 환궁하라.”
주온이 칼을 빼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뇌성벽력은 계속해서 천지
를 뒤흔들었다. 황소를 호위하던 병사들이 벼락에 맞아 몸이 새카맣
게 타죽거나 머리가 터져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 되기도 했
다.
황소와 함께 사냥에 나선 모든 사람들이 넋이 나가 우왕좌왕 하였
다. 황소는 들것에 실려 급히 장안으로 돌아와 그만 자리에 눕고 말
았다.
“황소 황제께서 제도도통검교태위 고변(高騈)이 보내온 격문을 읽
다가 피를 토하며 말에서 떨어졌다네. 그리고 두 눈에서 피가 나고
헛소리를 하는 등 지금 제정신이 아니래. 용하다는 의원들이 진찰을
해보아도 병명을 모른다네.”
“그 격문의 내용이 천하의 명문이라면서? 과연 고변 태위는 하늘이
보낸 사자로구먼. 칼도 아닌 붓으로 황소 황제를 말에서 떨어트리고
단번에 기절시켜 병이 들게 만들다니, 붓이 칼보다 세다는 말이 맞는
구먼.”
관리들은 삼삼오오 모여 급변(急變)을 두고 설왕설래하였다.
“아니래. 황제 측근이 그러는데 고변이 지은 게 아니고 그의 휘하 부
관이 작성한 거래. 그자의 이름이 뭐래더라? 아, 최 뭐라 하던데.”
“아, 그 자라면 신라에서 건너와 빈공과에 장원급제한 수재를 말하는
거 아닌가?”
“천하의 문장가라고 소문났다는데?”
장안에는 벌써 황소가 고변이 보낸 격문을 읽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
상을 입고 자리에 누었다는 소문이 왁자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격문을 쓴 사람이 고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
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고변이 쓴 것으로 알고서 고변을 칭찬하는 소
리가 매일 이어졌다. 졸지에 고변은 구국의 명사(名士)로 이름을 날리
게 되었다. 황소는 사나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의, 짐의 심장에 비수가 박힌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통증이 이어지고, 두 눈에서 피가 나오는데 멈추질 않는다. 그리고 밤
마다 두 요귀가 나타나 짐을 희롱하여 한 순간도 잠을 이룰 수 없도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그 요귀들이 나타나니 도대체 짐이 갑자기 왜 그런
것인가? 속 시원히 말 좀 해보거라.”
황소는 며칠사이에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살이 빠지고 머리가 백발
이 되었으며, 두 눈은 10리쯤 움푹 들어가 이미 이승의 사람 같지 않
았다.
“폐하, 소신이 사람의 질병을 연구하고 치료한지 어언 육십년이 다
되었지만 그 같은 증세는 처음 접하여 무어라 말씀드릴 수가 없사옵
니다. 무엇인가에 크게 놀라신 것 같은데, 마땅히 처방할 수 있는 약
이 없사옵니다.”
“뭐라, 약이 없다.”
“소신이 보기에는 마음의 병 같습니다. 가슴에 담았던 모든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면 씻은 듯 나을 수도 있습니다.”
어의의 말에 황소는 자신의 지난날들을 돌아보고 한숨을 쉬었다.
‘천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조차도 짐을 죽이려고 모
의한다니? 도대체 그 고변 태위가 어떻게 그 같은 문장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나도 문장에는 일가견이 있는데, 상대의 심장에 수를 꽂는
문장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문장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 이미
천상의 수준에 도달하였도다.
내가 왕유(王維), 한유(韓愈), 이백(李白), 두보(杜甫), 잠삼(岑參),
가도(賈島), 유종원(柳宗元), 백거이(白居易) 등 당나라의 내로라하는
문장을 모두 보았지만, 모두가 유려하고 과장이 심한 미사여구로 덧
칠한 문장들만 나열했을 뿐이거늘, 고변의 격문은 사람을 숙연하게
만들고 논리 정연하여 감히 내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도다.
나는 그만 마음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 소금 장수나 해야겠다.
괜히 고집피우다 정말로 귀신들 손에 죽을지도 몰라.’
황소는 격황소서(檄黃巢書)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치를 떨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