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황소서(6)
격황소서
- 여강 최재효
6
술독 열개 중 벌써 다섯 독이 비었다. 해운과 고운 그리고 팔낭(八娘)
과 구낭(九娘)은 지상에서 최고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
었다. 두 사내가 각자 자신이 지은 시를 읊고 나면 자매는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웠다.
나중에는 여자 악사(樂士) 두 명이 들어와 향비파와 얼후(二胡)를 연주
하며,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음악 반주에 맞춰 팔낭이 노래하고 구
낭이 반나체 차림으로 요염한 춤을 추었다. 두 미인의 춤과 노래에 자극
을 받은 탓인지 고향을 떠나 멀리 객지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 두 사내의
잠자고 있던 춘심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술잔을 기울이던 고운이 일어
나 구낭의 실버들처럼 여리고 야들야들한 허리를 껴안고 함께 춤을 추었
다.
고운은 해운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역시 상당한 미남자였다. 남녀의 행
복에 겨운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갔는지 요지의 여주인과 다른 객실
에 들어 있던 기녀들이 몰려와 해운이 있는 객실을 몰래 훔쳐보기도 하였
다.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저 두 미남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 텐데.”
“언니, 오른쪽에 앉아 있는 분이 신라에서 오신 해운 최치원이란 분이시
죠?”
“이것아,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 저분은 하늘이 내신 분이셔. 문곡성의
정령(精靈)이 사람으로 화해 신라 땅에 태어나신 거야.”
“그러니까 더 욕심이 생긴다고요. 당나라에는 어째 저런 미남자가 없는
것일까? 잠시라도 함께 있으면 좋으련만-.”
어떤 기녀는 내실의 환상적인 광경을 엿보면서 몸을 비비꼬기도 하고, 또
어떤 노녀(老妓)는 한숨 소리를 토하며, 해운이 들어 있는 내실에 들어가
지 못한 것을 무척 아쉬워하였다.
“저 두 신선님들은 팔낭과 구낭이 딱 어울려. 잘 봐라. 저 네 사람이 한데
어울려 노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신선도 같지 않니?”
“언니, 팔낭과 구낭을 나오라고 하고 우리가 들어갑시다. 샘나서 못살겠어
요. 나 이러다 상사병 걸릴 것 같아요. 나 죽으면 언니가 책임지셔요.”
“멍청아, 저 두 신선님들과 어울리려면 즉석에서 절구(絶句)와 율시(律詩),
부(賦), 곡(曲), 송(頌) 등 다양한 형태의 시문(試文)을 짓고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해. 뿐만 아니라 양귀비 처럼 춤도 출 줄 알고, 예상우의곡(霓裳羽
衣曲) 같은 노래도 능수능란하게 부를 수 있어야 어울릴 수 있어.”
이제는 다른 객실에 들어 있던 남자 손님들까지 몰려들어 난리법석을 떨었
다.
“이것들아, 어서 객실로 들어가 손님들 시중들어. 그러다 손님들 그냥 가버
리면 어쩌려고 그래. 술값 못 받으면 너희들이 물어야 해.”
“언니 혼자 실컷 훔쳐보시게요?”
“기녀 생활 십년이 되도록 저런 미남자들은 한 번도 손님으로 받아보지 못
했으니, 나도 어지간히 남자 복이 없는 년이구나.”
다른 손님들 시중들던 기녀들이 돌아가고 여주인은 해운이 들어있는 객실
안의 요지경 속 같은 모습을 훔쳐보느라 오랫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잠시 좀 쉬었다가 놉시다. 내가 정신이 없구려.”
고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고운이 자리에 앉자마자
자매는 그에게 매달려 쉴 새 없이 술잔을 안겼다. 고운이 이미 대취한 듯
했는데도 자매가 건네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고운님, 참으로 멋지세요. 어쩜 춤을 그리도 잘 추시는지요?”
구낭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고운은 크게 웃으며, 연신 술잔을 비웠다.
해운은 고운이 폭음을 하는 것 같아 불안하였다. 대취하여 불미스러운 행
동이라도 한다면 두 사람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안 좋은 소문이 나면
신분상의 큰 손해를 입을 것 같았다. 객실 안에 술독이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다.
고운이 비틀대며 밖으로 나가더니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자매와
더불어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며, 술을 마시던 해운은 자매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고운과 같이한 연석(宴席)이고, 고운은 4년 전 해운
이 겪은 기이한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지라 일단 오늘은 술만 마시기로
하였다. 그러나 팔낭과 구낭은 어서 고운이 술이 취해 떨어지기를 기다
리고 있었다.
“수재님, 고운님께서 혹시 밑 빠진 독 아니세요?”
“아닙니다. 고운이 술을 즐기기는 하지만 밑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아까운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구낭이 약간 속이 상한 듯 투덜거렸다. 두 식경쯤 지나 고운이 몸을 휘청
거리며 들어왔다. 다른 객실 손님들이 모두 돌아 갔는지 객실 밖은 조용했
다.
“오늘 내가 해운을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는 해운이 이틀 낮밤잠도 자지
않고 격문을 작성하느라 많이 지쳐 있어서야. 내가 그 노고를 치하하고
객고도 좀 풀어 줄겸해서 온 걸세.”
“소녀들도 이미 해운님이 쓰신 격문을 보았습니다.”
“뭐라, 그대들이 해운이 지은 격황소서(檄黃巢書)를 보았다고?”
고운은 자매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믿지 않으려 하였다.
“해운님께서 지으신 그 격문 중 일곱 번째 문장에 ‘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불유천하지인개사현륙), 仰亦地中之鬼巳議陰誅(앙역지중지귀사의음주자’
란 구절에 격문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팔낭이 의기양양해 하며, 고운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아니, 팔낭자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고운은 화등잔처럼 두 눈을 뜨고 팔낭을 쏘아 보았다. 그러나 대취한 고운
의 눈씨는 힘이 없어 보였고,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 보였다. 고운은 정신을
차리려고 자꾸만 냉수를 들이켰다.
“즉, 당나라 온 백성이 너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하 세계
의 귀신들까지 너의 목을 베려고 음모를 논의 하리라. 이 구절을 황소가 읽
게 되면 아무리 담력이 좋은 인사라 할지라도 졸지에 경풍(驚風)이 들어 시
름시름 앓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구낭이 격황소서 문장을 풀이하며, 미소를 짓자 고운은 해운을
의심하였다.
“해운, 자네 내가 잠시 소피보러간 사이에 낭자들에게 격문 내용을 말해
주었는가?”
“고운, 두 분은 이승에 사시는 분이 아니라네.”
해운은 간단히 대답하고 크게 웃었다.
해운이 웃자 자매도 따라 웃으며, 고운을 바라보았다. 해운의 대답에 고운
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세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가 없었다. 고운이 술을 깨려고 계속해서 물을 마셔댔으나 물을 마신 양만
큼 또 술을 마셨다. 맛있는 안주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해운은 4년 전 선주(宣州)의 율수(溧水)의 현위로 있을 때 쌍녀분에 시를
지어 붙이면서 장씨 성을 가진 자매와 있었던 기이한 인연을 소개하였다.
술에 취한 고운은 해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해운이 자매와 짜고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팔낭과 구낭이 명부(冥府)에서 오신 혼령들이란 말인가?”
“저승이 아니라 천상(天上)에서 강림하신 여선(女仙)이시네.”
“자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구먼.”
“아니네. 나는 자네에게 내가 경험한 기이한 일과 지금 진행되고 있는 아름
다운 순간들을 알려주려는 걸세.”
고운은 술잔을 비우면서도 자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운과 자매가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고운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눈을 비비고 다시 쳐
다보았다.
‘분명히 사람인데 해운은 선녀라고 하니, 도대체 내가 취한 것인가 세상
이 취한 것인가, 분간이 안 가네.’
고운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팔낭과 구낭은 분명 사람이었고 당나라에서
보기 드문 빼어난 미인이었다.
고운의 눈에 천정이 빙빙 돌면서 두 미인의 얼굴이 활짝 핀 복숭아꽃 같
기도 하였다. 이제는 술이 고운을 마시고 있었다. 자매는 고운이 졸린 기
색을 보이자 서로 바라보며 눈을 찡끗거렸다. 그러나 고운은 정신을 차리
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해운, 선녀면 어떻고 요지의 기녀면 어떤가? 오늘 하룻밤 즐겁게 지내
면 되는 거 아닌가?”
“대인, 맞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구별이 어디 있나요? 이승이 곧 저승이
고 천상이 곧 명부인 걸요. 지금 소녀의 눈에 보이는 두 분은 과거에 혼령
이었다가 전생에 복덕을 많이 쌓아 인간 세계에 오신 분들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의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답니다.”
팔낭의 말에 고운은 점점 더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까운 시간이 빨리 흐르
고 있었다.
“알았네, 알았어. 이제야 팔낭과 구낭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네. 그런
데, 자네들이 생각해도 방금 전에 언급한 부분이 명문장 아닌가?”
고운이 자매의 소견을 물었다. 구낭이 고운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술에
서 진한 향기가 풍겨 나오니 고운은 한번에 술잔을 비우고 말았다. 팔낭이
배시시 웃으며, 고운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말하였다. 팔낭의 교용(姣容)
에 고운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격황소서의 전체적인 문맥은 옥수가 고요한 달밤에 계곡을 흐르듯 매끄
럽습니다. 진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유요(劉曜)와 왕돈(王敦)의 고사나 장
군 도태위 도간(陶侃), 수나라 대신 양사공(楊司空) 그리고 도덕경(道德
經)과 춘추전(春秋傳)의 글귀를 인용함은 문장에 신뢰를 주는 것이니, 그
같은 전고(典故)를 적절히 삽입한 구절은 가히 천상의 문장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입니다.
또한 문장 첫머리에 도(道)와 권(權)을 들어 세상이 돌아가는 운행의 이
치를 밝히고, 당 제국의 강성함과 난적(亂賊) 무리들의 무모함을 대비하
여 난적들이 사태를 직시하고 항복토록 권유함은 가히 세상 모든 격문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운님의 격문은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으로, 형식미와 대장법(對仗
法)의 작법은 독보적인 것이며, 수사적으로 미적 감각을 느끼게 하는 동
시에 마치 한 쌍의 말이 마차를 끄는 것 같이 아름다운 문장입니다. 이백
이나 두보 또는 유종원(柳宗元)도 감히 해운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팔낭
은 말에 거침이 없었다.
‘아니, 이승 사람도 아니라는 여인들이 어찌 이리 해박하단 말인가?’
고운은 대취한 상태서도 취하지 않은 척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백, 두보, 유종원도 따를 수 없다? 그뿐인가?”
고운이 단숨에 두 잔을 비우고 팔낭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낭
이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해운의 문장이 당나라의 자존심인 이백
과 두보 그리고 유종원 위에 있다는 말에 고운은 기분이 약간 상한 듯 보
였다. 고운은 또 두 잔을 단숨에 비웠다.
해운님의 문장은 글자 하나하나에는 귀기(鬼氣)가 서려 있습니다. 잘 아
시다시피 해운님은 문창성(文昌星)의 화신으로 잠시 인간 세계에 내려와
계십니다. 문창성은 북두칠성 위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인간 세계에 존재
하는 모든 문장과 글을 주관하는 문신(文神)이랍니다.
이틀 낮밤을 새우시며 완성하신 격황소서는 만고에 빛날 명문(名文)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장만으로는 황소를 바로 주살(誅殺)하기 어려우
니 소녀들이 주문(呪文)을 가미해드리고자 합니다. 구낭의 말에 해운이
중얼거렸다.
“주문이라?”
이번에는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해운이 관심을 보였다.
“그 방법은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하세요.”
해운은 또다시 자매들과 마주하였지만 기분이 묘했다. 이 양주 땅에 500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장씨 자매와 인연이 있거나 친족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미루어, 자매가 그 먼 곳에서 이곳 양주까지 온 것은 분명 자
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방금전까지 기분이 상해 있던 고운은
과음 탓으로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해운, 우리 건배하시자고.”
“고운 너무 취했네. 오늘은 그만하세.”
“아니야, 나도 두주불사라고, 아직 서너 동이는 더 마실 수 있어. 우리 옆에
경국지색의 절세가인들이 있으니 내 어찌 술을 마다할 수 있으리.”
자매는 그런 고운에게 술잔을 안겼다. 고운이 억지로 술 두 잔을 더 마시더
니 이내 탁자에 엎드려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고운이 잠이 들자 자매는 회
심의 미소를 짓고 고운을 옆방으로 옮겼다.
“저희 자매가 사년 만에 수재님을 뵙습니다.”
“오오, 과연 율수현에서 뵙던 장씨 가문의 두 선녀님이 맞는군요. 반갑습
니다. 그때 헤어진 뒤로 영영 다시는 두 분을 못 만나는 줄 알았습니다. 양
주 땅에서 다시 만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고운이 잠자리에 들었으니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해운
은 크게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저희 자매는 수재님을 돕고자 불원천리 미리 예고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많이 놀라셨지요? 저희가 수재님을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녀님들이 나를 돕는다? 그리고 나를 찾은 이유가 있다?”
“네.”
4년 전 초현관에서 해운과 운우(雲雨)의 정을 나눈 뒤로 팔낭과 구낭은 오
백 년만에 율수현의 쌍분(雙墳)에서 나와 천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인간도
아닌 귀신이 문창성의 정기를 받는 기적은 3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북두칠성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별로 특히 죽음
을 중요시하여 망인의 업장을 판단하여 윤회와 해탈의 문을 열어주기도 한
다.
비록 귀신이 되기는 하였지만, 처녀의 몸으로는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서
왕모(西王母)가 있는 선계(仙界)에 들 수 없었다. 문창성의 정령인 해운과
초야를 가짐으로써, 자매는 비로소 천상계에 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
다. 천상에 거주하면서도 팔낭과 구낭은 하계에서 보낸 초야의 달콤한 밤
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해운이 율수현위를 사직하고 한 동안 직업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문객생활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였다. 마침 황소가 민란(民
亂)을 일으키자 자매는 지상의 정인인 해운을 내려다보며, 해운이 전란으
로 화를 입을까 걱정하였다.
천상에서는 해운이 지상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상세
히 알 수 있었다. 해운이 제도행영병마도통인 고변의 명을 받아 격문을 쓰
게 되자 자매는 해운을 돕기로 마음 먹고 잠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아, 그리되었군요. 음침하고 답답한 땅속에서 나와 승천하셨으니 참으로
잘 된 일입니다. 여선이 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저희가 승천하여 여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묘품(妙禀)을 지니신 수
재님 덕분입니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팔낭과 구낭이 예의를 갖추어 해운에게 공손히 절을 하였다. 선녀의 절을
받는 해운은 이것이 생시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 갔다.
“아직 고변 병마도통께서 수재님께서 올린 격문을 보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아 돌아가시면 이 주사(朱砂)를 섞어 먹을 간 다음 격문을 다시 작성해서
올리세요.”
팔낭이 계란만한 작은 유리병을 해운에게 건넸다. 병 안에는 붉은 주사가
들어있었다. 그것은 도사나 신선들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闢
邪)나 귀신을 쫓는 축귀(逐鬼)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특수한 물질이었다.
“주사를 섞은 먹으로 글을 쓰면 글씨가 붉게 변하지 않겠습니까?”
해운이 병을 들어 안에 든 붉은 물질을 살펴보았다.
“아닙니다. 글자는 검정색으로 나타납니다. 글자 한자 한자가 독이 묻은
비수가 되어 황소가 수재님의 격문을 보는 순간 그의 심장에 깊이 박히고
곧 눈이 멀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해운은 자매가 자신의 필력(筆力)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 퍽 마음에 내키
지 않았다. 해운의 속마음을 눈치챈 구낭이 입을 열었다.
“물론 수재님의 문장으로도 황소를 충분히 놀라게 하고 병들게 하여 민란
을 잠재울 수 있으나, 더 빨른 효과를 위해 저희 자매가 수재님을 돕고자
합니다. 황소는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당황실과 백성들의 철천지 원수입
니다.
조속히 그와 그를 따르는 검은 세력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수많은 백성
들이 계속해서 고통 속에서 몸부림 치며 죽어 갈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에도 수많은 백성들이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자매는 동포
들이 죽어가는 것을 두고만 볼수 없어 수재님께 부탁드리는 것이니 저희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선녀님의 마음 충분히 알겠습니다.”
멀리서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창이 서서히 여명(黎明)에 물들
고 있었다. 해운은 4년만의 해후(邂逅)를 술을 마시느라 허비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자매는 해운의 마음을 알았는지 수줍게 웃었다.
“수재님은 영원한 저희 자매의 정인(情人)입니다. 얼마뒤 수재님께서
신라로 돌아가시더라도 저희 자매는 신라로 가서 수재님을 그림자처럼 따
르며, 보호해드릴 것입니다. 또 먼 훗날 수재님께서 피안에 드시면 저희
자매가 태상노군과 서왕모께 간곡히 청하여 진인(眞人)의 반열에 올려
드릴 것입니다.”
“그, 그럼 내가 훗날 죽어서 신선이 된단 말입니까?”
해운은 신선이 된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운은 고변을 상관으로
모시면서 그에게서 도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많은 도교관련 서적을 읽으
며,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다.
“이 객실 뒤에 있는 침상(寢牀)은 특별하답니다. 수재님께서 잠시라도 자
리에 드셔야 내일 맑은 머리로 사무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해운이 휘장을 살짝 젖히고 뒤에 있는 침상을 보았다. 어른 서너 명이 편하
게 누울 수 있는 화려한 침상이 있었다. 침상 위에 봉황 무늬가 수놓인 황금
색 이불이 깔려있고 베개 3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침상을 보자 해운은
끓어오르는 춘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빨리 처소로 달려가 격문을
다시 써야 했다.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선녀님 말씀대로 어서 가서 격문을 다시 써야 합
니다.”
“수재님께서 그냥 가신다면 저희 자매는 큰 슬픔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부디, 잠시만이라도 함께 있어주세요.”
팔낭이 은근히 해운의 소매를 잡았다.
‘아아, 어쩌나 병마도통께서 어제 올린 격문을 보기 전에 다시 써서 올려야
하는데…….’
해운은 4년 전 있었던 환상적인 일들을 생각해 냈다. 팔낭의 간절한 눈빛
은 벌써 슬픔으로 변하고, 구낭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꼈다. 해운은 자
매의 청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꿈결같은 순간 순간이 이어졌다.
세명의 청춘남녀 벌이는 환상의 율동은 과연 요지경 속의 광경이었다. 아
마 누가 우연히 세사람이 펼치는 장엄한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는 심장이
멈추거나 혹은 순간 기혈이 막혀 죽음에 이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 청
춘 유려하고 신비한 행동은 세 사람 모두를 동시에 극락으로 이글고 있었
다.
순간이 곧 영원으로 이어지고 그 영원은 또 다시 아쉽고 안타까운 순간
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세 사람이 몽도(夢途)를 걷고 아쉬운 이별을 할때
까지 방안에서는 끊임 없이 도교 경전과 주문을 낭송하는 소리 그리고 간
간이 두 여인이 절정의 묘음(妙音)이 흘러 나왔다.
“해운, 나만 혼자 남겨 놓고 먼저 가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팔낭과 구낭
의 머리를 올려주려고 찾았더니 두 자매는 아침 일찍 본가에 간다며 나갔
다는군.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나는 아무 것도 기억 나
지 않는다네.”
점심때가 다 되어서 고운이 퉁퉁 부운 얼굴로 나타났다. 해운이 팔낭과
구낭의 머리를 올려주고 처소로 돌아와 격문을 다시 써서 고변에게 올리
고 난 뒤였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