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황소서(5)
격황소서
- 여강 최재효
5
소금 장수 황소와 왕선지가 일으킨 난을 피해 사천(四川) 지역에 피
신하고 있는 당황제 이현은 조속히 장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황소가 장안에 무혈 입성한 뒤에 대제(大齊)라는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자처하고 있는 상태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고, 각 지역의 절도사들
도 각자 자신의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막강한 군벌(軍閥)로
성장해 있었다.
회남 절도사이며, 제도행영병마도통인 태위(太尉) 고변에게 당황제의
밀조(密詔)를 직접 전하고 돌아온 전령자(田令孜)는 날마다 황제와 장안
수복 계획을 논의하였다. 황제와 전령자는 고변에게 장안을 탈환하라고
명을 내렸지만,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뭉그적대고 있는 고변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황제 또한 확실한 묘책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외부와 단절된 장안에 점차 군수물자가 바닥을 보이면서 군사들의 사기
가 땅에 떨어지고 불평불만이 증대되자 황소는 상양(尚讓)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물자가 풍부한 봉상(鳳翔) 지역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봉상 절도사 겸 경성사면제군행영도통(京城四面諸軍行營都統) 정전(鄭
畋)이 황소의 군대를 대적하여 대승을 거두는 일이 있었다.
이 일로 황제는 무척 고무되어 장안을 탈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
었다. 장안의 한 백성이 황소를 조롱하는 방(榜)을 저자거리에 내걸자 화
가난 황소는 당 나라 관리 출신과 서생 3천 여명을 참수하기도 하였다.
장안의 황소가 별로 움직임이 없자 각주에서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던 군
사들이 자발적으로 근왕병을 자처하며, 장안으로 몰려들기도 하였다. 그 수
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황소는 몇 차례 근왕병들을 상대로 전투
를 치르며, 상당수의 병사를 잃기도 하였다. 황소의 군대가 60여만이나 된
다는 것이 거짓임을 눈치챈 근왕병들은 용기를 얻어 황소를 더욱 압박하려
들자 황소는 장안을 빠져 나가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정종초(程宗楚)가 이끄는 근왕병인 관군(官軍)이 장안에 무혈입성하자 그
들은 기고만장하였다. 황소에게 억압과 학대를 받던 백성들은 근왕병들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경계를 소홀히 하며, 백성들의 재
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등 패악을 일삼았다. 근왕병들의 군기가
해이해진 틈을 타서 황소가 다시 장안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재입성 하
였다. 황소가 다시 장안으로 들어간 다음 백성들이 관군을 도와준 것에 대
노하여 장안의 백성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였다. 얼마나 많은 백성이 죽었
는지 수일간 피가 개천을 이루었다.
회남 절도사 겸 제도행영병마도통인 태위 고변도 장안의 소식을 듣고 알
고 있었으나 당장 군사를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좀 더 사태의 추이를 두고
보며, 자신에게 유리한 시기가 올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전령
자가 찾아와 출동을 독촉하자 고변은 고민하였다.
“폐하, 신에게 좋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흑아군(黑鴉軍)이라고 들
어보셨는지요?”
최근에 행재도지휘처치사(行在都指揮處置使)에 임명된 전령자가 이현 황
제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 들어본 적 있습니다. 주사집의(朱邪执宜), 아니지 이국창(李國昌)의 아
들 독안룡(獨眼龍) 이극용(李克用)이가 지휘하는 군대를 지칭하는 말이지
요.”
“맞습니다. 그자를 이용해보심이?”
전령자가 황제 이현의 눈치를 보았다. 황제는 사천에서도 중신들을 물리고
오로지 전령자와 내관인 진경선(陳敬瑄) 등만 불러 국사를 의논하였다. 이에
간관인 맹소도(孟昭圖)가 황제에게 항의하는 뜻으로 상소를 올렸으나 중간
에 전령자가 가로채 황제에게 아뢰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맹소도를 살해하
는 등 여전히 전령자는 황제를 기망하고 있었다.
“그자는 얼마 전에 대동(大同) 방어사 단문초(段文楚)와 하동 절도사 강전
규(康傳圭)을 죽이고 우리군사들에게 쫓겨 돌궐로 도망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군사를 출동하라고 명을 내려도 절도사들은 지금 눈
치만 보고 있습니다. 이때 그들 부자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
들 부자로 하여금 황소를 치라하시지요.”
“그 오랑캐 놈들에게 황소를 치게 한다?”
황제 이현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이국창과 이극용 부자
는 돌궐(突厥)의 분파이며, 투르크계 유목민인 사타족(沙陀族) 출신으로 당
과의 전쟁에서 용감하기로 소문난 전사였다. 그들은 방훈(龐勛)의 난을 진
압한 공으로 당 황제에게 이씨(李氏)성을 하사받아 이국창이라 개명하였
다.
사타족은 천산 산맥 동부에 있던 부족으로 토번의 지배하에 있다가 다시 당
의 간접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사타족의 우두머리는 주사집의였
는데, 당 조정은 그에게 음산부(陰山府)의 병마사(兵馬使) 직을 제수하여 국
경을 지키게 했다. 이극용은 한쪽 눈이 작아서 독안룡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
었다. 그는 몸이 날래서 비호자(飛虎子)하고도 불렸다. 전령자의 제안에 황제
는 솔깃했다. 단 한명의 병사가 절실한 형편에서 용감하기로 소문난 이국창
부자를 끌어들인다면 황소를 장안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전령자께서 짐의 칙서(勅書)를 가지고 이극용을 설득하여 보세
요.”
“폐하, 돌궐 오랑캐들은 머리가 별로 신통치는 않으나 기백은 대단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신이 당장 달려가 그자를 회유해보겠습니다.”
전령자가 달단(達靼)으로 달려가 이씨(李氏) 부자를 만나고자 하였다. 이극
용이 병력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와서 전령자를 맞았다.
“상공, 여기 격문을 작성했습니다. 한번 보시지요.”
해운이 고변에게 황소의 난을 잠재울 격문(檄文)을 작성하여 건넸다. 이틀
전에 해운이 군관회의 자리에서 이삼일 안으로 작성하겠다고 호언했을 때
고변은 반신반의 했었다.
“아니, 최도통순관 내일까지인데 이틀 만에 썼구려. 대단하오. 지금은 내가
여용지(呂用之)에게 신선술(神仙術)을 연마해야 할 시간이네. 다녀와서 읽어
보겠네. 수고했네.”
고변은 입으로 해운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면서도 전쟁터에 나가 단 한 번도
전투를 해본 경험이 없는 서생(書生)이 얼마나 잘 썼겠나 싶어서 격문을 받
아 책상에 올려놓았다.
해운은 고변이 이틀을 고심하여 작성한 격문을 읽어보지도 않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변은 휘하에 도사(道士) 여용지를 막료로 두고 있었다.
여용지는 신선술에 빠져있는 자로 고변에게 신선술을 미끼로 접근하여 고
변을 마음대로 다루려고 하였다.
“해운, 실망하지 마시게. 상공께서 자네의 격문을 보시면 놀라실 걸세. 자
네의 격황소서(檄黃巢書)는 천하의 명문일세. 두고 보시게. 이 격문으로 자
네의 필명이 전국에 알려질 테니.”
해운은 격문을 쓰고 나서 먼저 고운에게 보여주었다. 해운의 격문을 읽어
본 고운은 해운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운은 해운이 이틀 낮밤을 새우
며 격문을 쓴 노고를 칭찬하며, 다과를 들며, 오랜만에 한담을 나누었다.
“자네, 당나라에 온지 몇 년째인가?”
“올해로 십 사년되었네.”
“열두 살 학동(學童)이 이제는 스물여섯의 어엿한 장부가 되었구려. 참한
여인을 만나 장가들어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인데 속절없이 세월만 가네. 어떤
가? 내가 중매를 서 볼까?”
고운이 해운의 반응을 떠보았다.
“나는 당나라 여인보다 신라 여인이 좋네. 당나라 여인은 너무 거칠고 사나
워 말도 못 붙이겠어. 우리 신라 여인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평생의 미덕
으로 알고 살아간다네.”
“그런가? 자네 말을 들으니 나도 신라출신 여인하고 부부의 인연을 맺고 싶
네 그려.”
해운은 고운의 말에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일 년에 서너 차례 인편
으로 부모님과 서신을 주고 받고는 있지만 직접 만나보는 것만 못해 늘 사무
치는 그리움에 향수병이 깊었다.
“이곳 양주에도 기루가 있네. 자네가 워낙 주색잡기를 경계하니 내가 한 번
도 자네를 기루에 데리고 가질 못했어. 양주에요지(瑤池)라고 하는 주루가
유명하네. 그곳에는 미인들도 상당히 많지.
당나라뿐만 아니라 왜국, 토번, 대식국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여인들인데 한
번 가서 보면 기가막힐 걸세. 기녀들은 주로 관리를 상대하는데, 교양이 상당
하다네. 어떤가? 오늘밤 내가 한잔 살 테니 같이 가보지 않겠나?”
고운의 달콤한 말에 해운도 호기심이 일었다.
“고맙네. 자네의 호의를 무시할 수야 없지.”
“내가 고맙네. 당대 최고의 문사(文士)와 주루를 함께 간다는 게 나에게 영광
이 아니겠는가? 오늘밤 요지에 한바탕 난리가 나겠네 그려.”
웬만해서 입에 술을 대지 않는 해운이었다. 늘 관아에 있다 보니 고변이 주최
하는 공식적인 술자리 이외에는 거의 술을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다. 눈비가
내리거나 낙엽이 질 때 해운은 누군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
었다. 해가 지자 해운은 고운과 함께 요지를 찾았다.
“어머나! 고운님, 오랜만에 오셨어요.”
억실억실하게 생긴 요지의 여주인 달려 나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여인의 말투로 보아 고운은 이 기루에 자주 온 듯 했다.
“오늘은 아주 귀한 벗을 모시고 왔네. 멀리 신라에서 오신 해운 최치원 선
생이시니 지극 정성으로 모셔야 하네.”
고운이 여주인에게 해운을 소개하자 여주인은 놀라서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이분이 최연소로 빈공진사과에 장원 급제한 그분이시죠? 어머나,
가까이 뵈니 옥골선풍(玉骨仙風)이십니다. 오늘은 제가 해운님을 밤새도록
모시면 안 될까요?”
여주인은 반쯤 정신이 나가 해운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고 있
었다.
“허허, 이 사람. 자네는 퇴기(退妓) 아닌가? 이 기루에서 제일 미색 둘만 들
이시게. 오늘은 내가 정신 나가도록 술을 마셔보려 하네.”
고운의 핀잔에도 여주인이 아양을 떨며, 해운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마침 잘 오셨어요. 며칠 전에 율수에서 온 기녀가 있는데 절세미인인데다
가 아직 머리를 올려줄 장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늘 두 분께서 그애들
머리를 올려주세요.”
여주인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두 사내 앞에서 몸을 비비꼬며, 교태를 부렸
다.
“율수? 선주(宣州)의 율수(溧水) 말입니까?”
“맞아요. 장씨(張氏) 성을 가진 자매인데 천하일색입니다.”
‘율수의 장씨 성을 가진 자매라?’
해운은 언뜻 4년 전 일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요지는 3층으로 지어진 건물
인데 내부는 무척 으리으리하여 눈알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초저녁인데도
이미 많은 손님들로 왁자하였다. 여주인은 두 사람을 2층에 있는 내실로 안
내하였다. 넓직한 내실에 붉은색 비단 보(褓)를 깐 둥근 탁자가 가운데 놓이
고 금색으로 치장된 의자가 네 개 있었다.
벽에는 선녀와 신선들이 한데 어울려 음주가무를 즐기는 장면이 수놓인
그림이 걸려 있었다. 붉은색 둥근 창은 얇은 흰 비단으로 가려져 있고, 새
장에 새 한 쌍이 지저귀고 있었다.
내실 좌우에 어른 키만한 등이 실내를 환하게 밝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은은한 향내와 함께 비파(琵琶) 소리가 아련
히 들려왔다. 해운은 여기가 선녀 요희(妖姬)가 산다는 곤륜산의 요지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술과 안주들입니다.”
남자 종업원들이 푸짐하게 차린 안주와 술을 가지고 들어와 탁자 위에 차
려 놓았다. 안주는 10여명이 밤새 먹어도 남을 정도로 푸짐하였고, 술은 어
른 머리만한 크기의 독에 가득 담아 열독이나 들였다.
‘아니, 이 사람이 정말로 밤새도록 술을 마실 셈인가?’
해운은 술과 음식을 보고 기가 질렸다. 고운은 술이 들자마자 잔에 술을 가
득 따라 해운에게 건넸다.
“자자, 해운 우선 기녀들이 오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한잔 하자구.”
“고맙네. 자네 덕분에 내가 정말로 요지의 신선이 된 느낌이네 그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수작(酬酌)을 하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이었다. 여주인이 두 기녀를 데리고 내실로 들어오자 고운이 싱글벙글 웃으
며, 박수를 쳐댔다.
“이 아이는 팔낭(八娘)이라하고 저 아이는 구낭(九娘)이라 합니다. 우리 기
루에서 최고의 미인입니다.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오늘 밤 이 아이들
머리를 올려주시면 내일 아침까지 기루에서 푹 쉬실 수 있습니다.”
여주인은 깔깔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팔낭과 구낭? 내가 지금 여우 굴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
“여보게, 우리가 지금 생시에 존재하고 있는 게 맞지?”
고운은 해운의 생뚱맞은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해운의 얼굴을 살폈
다.
“소녀, 팔낭이라 하옵니다.”
“소녀, 구낭이라 하옵니다. 저희는 자매지간입니다. 오늘밤에 두 분 대인들
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앗, 정말로 팔낭과 구낭이다.'
해운은 두 여인을 보자 반갑기도하고 두렵기도 하였지만, 두 여인이 정말로
예전에 운우의 정을 나누던 자매인지 몰라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고르며, 두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고운이라 하고 이 분은 멀리 신라에서 온 해운 최치원이라 하네. 오늘
밤 우리 네 명이 좋은 인연을 만들어 보자고.”
고운이 두 기녀에게 자신과 해운을 소개하였다.
해운이 빈공진사과에 장원급제하고 2년 후에 율수 현위(縣尉)를 제수 받
았다. 해운은 율수현과 고순현(高淳縣)의 경계에 있는 초현관에 자주 들리
곤 하였다. 그런데 그 초현관 앞 야트막한 언덕에 오래된 초분(草墳) 2기가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그 무덤을 쌍녀분(雙女墳)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해운이 이곳에 들렀다가 그 무덤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해운도
이곳 사람들에게 그 무덤에 대하여 듣고 있던 터라, 애틋한 마음에 즉석에
서 7언 율시를 써서 묘비석에 붙였다.
誰家二女此遺墳(수가이녀차유분) 뉘 집에서 두 여인의 무덤을 남겼을까
寂寂泉扃幾怨春(적적천경기원춘) 적막한 황천에서 얼마나 봄을 원망할까
…….
孤館若逢雲雨會(고관약봉운우회) 초현관에서 운우지정을 나눌 수 있으면
與君繼賦洛川神(여군계부락천신) 그대들과 더불어 낙신부를 지어 노래하리
해운이 시를 묘비에 붙이고 초현관에 도착하였을 때, 한 여인이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해운이 그녀의 용모를 자세히 보니 절세가인이었다.
그녀는 손에 붉은 주머니 두 개를 쥐고 있었다. 그녀가 해운을 보더니 다
가와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저는 취금(翠襟)이라합니다. 팔낭자와 구낭자가 수재(秀才)에게 아무도
찾지 않는 유택에 오시어 빼어난 시를 지어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
하라며, 소녀편에 화답시를 보냈사오니 받아주소서.”
“그 두 낭자들의 성씨가 어떻게 되고 사는 곳이 어디입니까?”
“두 분은 장씨(張氏) 가문의 딸이옵고 현재 머무는 곳은 공께서 오늘 시를
지어 붙인 그 쌍분(雙墳)입니다.”
‘뭐라, 두 무덤? 그렇다면 귀신이 보냈다는 말이냐? 그럼, 이 여인도 귀신
이렷다.’
해운은 모골이 송연함을 느끼고 두려움에 다리가 후둘 거렸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주머니 하나를 열어보았다. 팔낭자라고 하는 여인이 해운에게
보내는 화답시가 들어있었다.
當時在世長羞客(당시재세장수객), 당시 세상에 있었을 때는 언제나 낮선
사람보고 부끄러워했지만, 今日含嬌未識人(금일함교미식인), 오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품게 되었답니다.
이어 두 번째 주머니 안에는 구낭자가 보내는 화답시가 들어 있었다. 해운
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가며 시를 읽어 내려갔다.
往來誰顧路傍墳(왕래수고로방분), 오가며 누가 길가 무덤을 돌아보겠는가.
鸞鏡鴛衾盡惹塵(난경원금진야진), 난새 거울과 원앙 이불에 먼지만 쌓였네
해운은 두 편의 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저승에 든 두 여인이 얼마나 외롭
고 쓸쓸했으면, 타국 이방인에게 연모시(戀慕詩)를 보냈을까. 해운이 눈물을
훔치고 나서 취금에게 다음과 같은 답시를 써주었다.
斷腸唯願陪歡笑(단장유원배환소), 애끊는 마음은 오직 웃고 즐기는 일 함께
하고자 하니, 祝禱千靈與萬神(축도천령여만신), 모든 신령들에게 축원 올리고
기도드립니다. 今宵若不逢仙質(금소약불봉선질), 오늘밤에 만약 선녀들의
모습을 만나지 못한다면, 判郤殘生入地求(판극잔생입지구), 반드시 남은 생을
지하에 가서라도 찾아 볼 것입니다.
해운이 시를 건네자 취금이 ‘잠시만 기다리라’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해운은
홀로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 식경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해운이 기다리다 지쳐 관사 안으로 막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갑자기 향기가
풍기고 훈풍이 불어오더니 두 여인이 다정히 손을 잡고 나타났다. 한 여인은
자주색 치마를 입고 또한 여인은 붉은색 치마를 입었다.
‘한 쌍의 밝은 옥이요, 두 줄기 서기 어린 연꽃이로다.’
해운은 두 여인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두 여인도 고개를 숙여 해운에게 인사를 올렸다.
“저희 자매가 수재님을 뵙습니다.”
“바다건너 신라에서 온 보잘것 없는 말단 관리입니다. 제가 외람되게도 어찌
선녀님들을 만나리라 기대나 했겠습니까? 그냥 농담 삼아 지은 시였는데 마음
에 드셨나 봅니다.”
두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희는 율수현 초성향 장씨 가문의 딸입니다. 선친께서 호족(豪族)으로 부
유하였고, 무척 사치하셨습니다. 언니 나이 열여덟, 저는 열 여섯 살 때 선친
께서 저는 소금 장수, 언니는 茶(차)장수와 강제로 혼인시키려 하였습니다.
저희 자매는 신랑감이 마음에 차지 않아 앞날을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울화병이 나서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답니다. 수백 년 동안
저희 무덤 앞을 지나가는 사내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모두가 저속한 자들이
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행히 수재님를 뵈오니, 기상이 금오산(金鼇山)같이
빼어나시어 현묘한 세상의 진리를 함께 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세 사람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주신 게 틀림없습니다.”
해운이 두 여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수재님, 저희 자매를 이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해운은 팔낭과 구낭을 초현관으로 초대해 밤새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 유쾌
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술이 몇 순배 오고가고 모두 얼큰하게 취하자 취금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흥을 돋웠다. 해운과 두 여인은 은밀한 시선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끌리는
춘정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새벽이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
이었다.
“옛날 한나라 범양 사람 노충(盧充)은 최소부의 무덤가에서 사냥하다가 선
연(善緣)이 있어 최씨녀를 만났고, 후한 시대의 완조(阮肇) 는 신선술을 익히
다가 두 명의 가인(佳人)을 얻어 배필로 삼았다 했습니다. 두 낭자께서 허락
하신다면 좋은 인연을 만들고 싶습니다.”
해운의 말에 두 여인은 흔쾌히 승낙하였다. 해운은 너무 기뻐서 깨끗한 베
개 세 개를 나란히 놓고 이불 한 채를 덮고 세 사람이 누우니 밤새 그 즐거움
을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시간은 쏜살같았다. 새벽 첫닭이 울면서 동이 트
기 시작하였다. 팔낭이 정색을 하고 앉더니 해운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즐거움 뒤에는 허전함이 오고, 별리(別離)는 오래가고 상봉은 순
간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빈천한 지위를 떠나 모든 사람이 가장 힘들고 가
슴에 통한으로 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자매와 수재님 사이에는
생사(生死)라는 담장이 있어 가야하는 길이 다릅니다.
저희는 밝은 낮을 부끄러워하며, 청춘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습니다. 수재
와 함께한 이 밤이 우리에게 천년의 정한(情恨)으로 남게 될 겁니다. 수재님
과 함께한 잠자리가 좋았는데, 헤어져야 하니 너무나 슬픕니다. 만일 수재
님께서 다시 저희 무덤 앞길을 지나가시거든 저희 무덤을 살펴주시기 바
랍니다.”
“두 분은 슬퍼하지 말아요. 언젠가 나 역시 천경(泉扃)에 들게 됩니다. 그
전에 또 다시 만나야지요. 하룻밤은 너무나 아쉽고 미련이 남습니다. 내가
이 고장에 있는 한 두 분의 유실(幽室)을 자주 찾아 보살필 겁니다.”
해운의 말이 끝나자 자매가 일어나 해운에게 울면서 절을 하더니 금방 연
기처럼 사라졌다. 다음날, 해운은 자매의 쌍분(雙墳)을 찾아 하루 종일 멍
하니 앉아 주고받은 시를 읊조리며, 허탈해 하였다.
“해운, 뭘 그리 장시간 골똘히 생각하시는가, 어디 불편하신가?”
해운이 두 낭자를 보고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자, 고운은 해운의 옆
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아무것도 아닐세. 잠시 옛 생각이 나서.”
“두 분 대인 어르신, 소녀들의 잔을 받으세요.”
팔낭이 해운에게 술을 따르고, 구낭은 고운의 빈 잔을 채웠다. 해운은 떨리
는 손으로 술을 받으면서도 아무래도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독한 술이 또
서너 잔 뱃속으로 들어가자 해운은 취생몽사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상태
에서도 해운은 두 여인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싶었다.
‘이 두 여인이 사람인가? 아니면 귀신인가? 귀신이라면 내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비석에 붙여 놓은 7언 율시 중 첫째, 둘째 그리고 일곱, 여덟 번째 구시
를 알 테지.’
“내가 예전에 율수의 현위로 있을 때 어떤 쌍녀분에 가서 지은 시가 갑자기
떠올라 읊어 볼 테니 혹시 팔낭과 구낭이 그 시를 들어본 적이 있으면 대구
(對句)를 이어 보도록하오.”
해운은 잔을 비우고 나서 박자에 맞춰 천천히 시를 읊었다.
誰家二女此遺墳(수가이녀차유분), 뉘 집에서 두 여인의 무덤을 남겼을까,
해운이 첫수를 읊고 나서 팔낭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입을
열었다.
寂寂泉扃幾怨春(적적천경기원춘), 적막한 황천에서 얼마나 봄을 원망할까
‘오오, 지금 내가 정녕 꿈을 꾸고 있더란 말이나? 아니면 예전에 하룻밤 사
랑을 나누고 아쉽게 헤어진 팔낭과 구낭이 양주까지 나를 찾아온 것인가?’
영문을 모르는 고운은 손으로 탁자를 탁탁 쳐가며, ‘좋다’하는 소리로 추임
새를 먹이면서 연신 술잔을 비워댔다. 해운은 침을 꿀꺽 삼키며 팔낭과 구낭
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어서 해운이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일곱
번째 시구를 읊었다.
孤館若逢雲雨會(고관약봉운우회), 초현관에서 운우지정을 나눌 수있다면.
해운은 구낭을 바라보았다. 구낭은 미소를 짓더니 시를 읊었다.
與君繼賦洛川神(여군계부락천신), 그대들과 더불어 낙신부를 지어 노래하리.
‘아, 그렇다면 이 두 여인이 내가 율수현위를 지낼 때 하룻밤 만나 사랑을 나
눴던 그 장씨 집안의 자매가 분명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알고 찾아 온
것이 틀림없다.’
해운은 4년만에 다시 만난 팔낭과 구낭을 바라보면서 감격해 하였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