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황소서(3)
격황소서
- 여강 최재효
3
신라 조정에서 최초로 당나라에 국비 유학생을 보낸 것은 640년 선
덕여왕 때 였다. 주로 진골 계급의 자제들을 당나라 국자감에 보내
공부를 시켰으며, 이후로 많은 신라 출신 학생이 숙위학생(宿衛學生)
이란 이름으로 유학하였다.
이때는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에서도 귀족가문의 자제들이 당
나라에 유학하여 세 나라 유학생간에 경쟁이 치열하였다. 신라가 삼국
을 통일하고 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기 시작하
였는데 이때는 5두품 자제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는 삼국 일통 후에 대폭 늘어난 국가조직과 이 조직을 운영할 인
재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신문왕(神文王)은 국학(國學)이라는
교육기관을 설치하였고 원성왕 통치기간에는 국학에 독서삼품과(讀
書三品科)를 병설하였다.
국학은 5두품 이상의 자제들에게만 입학 자격이 주어져 6두품 이하
의 사람들에게 불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6두품 이하의 자제
들은 신분의 상승과 장래를 위하여 개별적으로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도 하였다.
국비 유학생뿐만 아니라 6두품의 자식들이 빈공과에 급제하는 경우
도 많았다. 신라에서 파견된 국비 유학생의 체류기간은 보통 10년 정
도였고 10년을 채우고 신라로 귀국한 유학파 학생들을 질자(質子)라
부르기도 하였다.
당나라 유학이 한창 유행일 때는 신라 출신 학생이 100여명에 달하
였다. 유학생들은 당나라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를 하
였다. 국비 유학생의 경우 유학하는데 드는 경비는 국고에서 보조하
였고, 먹고 입는 문제는 당나라의 홍로사(鴻魯寺)라는 기관에서 부담
하여 유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당나라 유학생은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외교사절 역할도 수행하였
다. 그들은 유교, 불교, 도교를 비롯한 음양학(陰陽學), 역학(曆學) 등
선진문물을 신라에 전파하는 문화사절 노릇도 수행하였다. 당나라
유학생들에게는 신라의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골품제도를 벗어나 자
유롭게 수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헌덕왕 때 김운경(金雲卿)이 국비 유학생 중에서 최초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빈공과 합격한 자 중에는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는 유학생들도 있었으나, 대개가 외관(外官)의 말직(末職)
에 한정되었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친 유학생들은 대부분 신라로 돌아오게 되는
데 진골들의 홀대(忽待)로 인하여 귀국을 미루거나 당나라에 눌러
앉는 사람도 있었다. 신라 유학생들은 귀국한 뒤에 외직이나 문한직
(文翰職)에 임명되었는데 그들은 신라 지도층에게 유교적인 정치이
념을 제시하고 자문을 하였다. 선진 문물에 눈을 뜬 이들은 점차 신
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주류로 부상하게 되면서 기득권 세력과 갈등
을 빚기도 했다.
치원은 현자무가(懸刺無暇)와 인백기천(人百己千)이라는 고사를
만들어 낼 정도로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현자무가는 치원의 공부하
는 방법으로 졸음을 쫓기 위하여 상투를 천장에 매달고(懸),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 가며(刺) 잠시도 쉴 겨를 없이(無暇) 스스로를 독려
하였다.
인백기천은 사람들이 백번하면 나는 천 번 하겠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 할지라도 게을리하면 둔재(鈍才)가 되기 마련이다. 치원은
두 문장을 책상 앞에 써두고 실천하였다. 치원의 나이가 너무 어려
국자감의 정규반에서 공부할 수 없었다. 국자감에서는 신라에서 유
학 온 신동(神童)을 위하여 특별히 예비과정을 만들어 공부하도록
배려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신라국 서라벌 최씨
가문의 어린 자손 치원이 만리타국 당나라 장안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무탈하게 지내도록 도와주시고 나라와 가문의
명예를 세우도록 도와주소서.”
치원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이 당나라로 떠난 뒤부터 매일 새
벽 하루도 빠짐없이 장독대에 정화수(井華水) 올려놓고 천지신명에
게 치성(致誠)을 드렸다. 부부는 아무리 사나운 비바람이 치고 추운
날씨라도 치성을 빠트리는 법이 없었다.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
타야훔.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지혜의 힘으로 행여 있을지 모
르는 아우의 죄업을 씻어주시고, 아우가 정진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불제자가 된 치원의 형 현준 역시 세속의 아우를 위하여 부처님
전에 빌고 또 빌었다.
치원과 서라벌에서 같이 당나라에 온 일부 미욱한 신라 유학생들은
공부보다 장안의 화려한 모습에 더 관심을 보였다. 밤이면 끼리끼리
모여 주루(酒樓)를 찾아 낭만을 찾고 살거리가 기가막힌 기녀(妓女)를
품으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들은 치원보다 서너 살 위였고 신라에 있을 때부터 술 맛과 여인
의 요분질에 이골이 나있었다. 치원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들
은 자기들끼리 어울려 자주 홍등가(紅燈街)를 찾았다. 어떤 유학생은
음종한 기녀에게 홀려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몽땅 잃기도 하고, 포
악한 포주를 만나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세월은 쏜살같이 흐르고 있었다. 당나라 국자감에는 전세계에 몰려
든 유학생들이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출신 유학생들과
발해에서 온 학생들 간에 경쟁이 무척 치열하였다. 그들은 공부에 있
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치원도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정식으로 국자감 학생의 신분이 되었다.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중에 발해인 오소도(烏炤度)와
신라인 이동(李同)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치원과 함
께 숙위유학생에 선발된 김가기와 최승우도 좋은 성적을 보였다.
그들은 치원보다 서너살 위였고 국자감 입학도 몇년 앞서서 했다.
국자감에서는 매년 서너 번 중간시험을 보는데 오소도와 이동이
수석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시험 때만 되면 누가 수석을 차지하느냐
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중간시험에서 오소도가 수석을 차지하면 다음
번에는 이동이 수석을 차지하였다.
당나라 심장부 장안에서 신라와 발해의 두 청년이 나라의 명예를
걸고 붓으로 혈전(血戰)을 벌이고 있었다. 유학생을 가리키는 교수
들도 두 편으로 갈리어 신라와 발해의 자존심을 건 두 청년을 지도
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곧 있을 빈공과의 본 시험인 진사과(進士科)에 누가 장원으로 급제
하느냐가 이제는 발해와 신라의 조정에서도 최대 관심사가 되어 있
었다. 872년 황제가 참가한 가운데 치러진 진사과 시험에서 발해인
오소도가 당당하게 장원을 차지하여 발해의 위상을 높였다.
응시생 중 반수 이상이 신라 출신 유학생들이었다. 당 황제도 장원
을 차지한 오소도에게 치하하며, 상을 내렸다. 치원은 아직 시험 볼
자격이 없었다.
“아, 신라가 발해인에게 뒤지다니 이 일은 신라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결과를 지켜보던 치원은 충격을 받고 탄식하였다.
이동이 장원을 차지할 것이라고 기대를 하던 신라 출신 유학생들
뿐만 아니라 신라 조정에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발해에게 장원을
빼앗긴 유학생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한동안 방황하였다. 치원
에게 다음번 진사과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치원은 하루 종일 공부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은(羅
隱)과 고운(顧雲)이라는 당나라 두 문인(文人)을 벗으로 두었다.
그들은 국자감에서 공부를 하다가 뜻이 맞아 자주 교류를 하게 되
었다. 나은과 고운은 어린 나이에 멀리 타국에 와서 공부에 전념하
는 치원에게 호감을 갖고 각자 지은 시문을 교환하며, 문우(文友)
의 정을 다졌다.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 창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 고향을 향하네
“해운(海雲), 지난번에 우리에게 보여준 추야우중(秋夜雨中)은
절창이었소. 해운께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구
려.”
“해운, 너무 외로워하지 마시구려. 우리가 있지 않소.”
웬만해서는 남을 인정하지 않는 시인 나은은 치원이 쓴 시를 보고
감탄하였고, 고운 역시 치원의 문재(文才)를 칭찬하며, 치원을 알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고 있었다.
“과찬입니다. 두 분 모두 알아주는 시문의 귀재(鬼才) 아니십니까?”
해운 최치원 역시 나은과 고운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하며, 우정을
돈독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해운이 외로워하는 기색이 있으
면 득달같이 달려와 말벗이 되기도 하고, 문장을 논하며 학문 토론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해운, 곧 진사과 시험이 있을 예정입니다.”
나은이 치원의 눈치를 살폈다.
“신라를 떠나 장안에 온 지 어언 육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번 시
험에 응시하고자 합니다. 처음 보는 시험이라 많이 떨리기는 합니
다.”
해운 최치원은 10년 내로 빈공과에 급제하지 못하면 부자지간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늘 가슴 속에 새기고 있었다.
“해운은 이미 장원급제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중간시험을
볼 때 마다 최고의 성적으로 필명을 날리지 않았습니까?”
“고운의 말이 맞습니다. 국자감 유학생 중에는 해운의 능력을 따
를 자가 없습니다. 국자감 교수들도 해운에게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입을 모은 답니다.”
“두 분께서 오늘 저를 너무 띄우십니다.”
강파른 성질의 나은과 수더분한 고운은 입이 마르도록 해운의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세 사람은 차를 들면서 정담을 나누느라 시간 가늘
줄 몰랐다.
874년 건부(乾符) 1년 갑오 1월에 당 조정의 예부시랑 배찬(裵瓚)이 주
관하는 빈공진사과(賓貢進士科)가 치러졌다. 이 시험에서 18세의 신라인
해운 최치원이 처음으로 시험에 응시하여 당당하게 장원으로 급제하였
다.
당나라에는 "三十老經 五十少進士"란 말이 있다. 과거 예비시험인 명경
(明經)은 30세에 따면 늙은 편이고, 과거 본시험인 진사는 50에 따도 젊은
편이란 말이 있었다. 그만큼 진사 급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
로 대변하는 말이다.
2년 전 발해인 오소도에게 빼앗긴 신라의 자존심을 되찾은 것이었다. 해운
최치원이 장원을 차지한 소식은 금방 당나라 수도인 장안 뿐만 아니라 멀리
고국인 신라의 서라벌까지 전해졌다.
“오오, 장한지고. 과연, 과연 하늘의 문창성이 신라에 강림한 것이 맞도다.
이는 최씨 가문의 영광이기 전에 신라의 자랑이며, 만백성에게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도다. 즉시 최치원에게 과인의 치하를 전하는 교서
를 보내도록 하시오.”
신라왕 김응렴은 해운의 장원급제 소식을 접하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질투
심 많은 진골 출신 중신들은 애써 모르는 척 하였다.
“부인, 그동안 고생 많았소이다. 이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치원이
십년 걸릴 줄 알았던 장원을 사년이나 앞당겨 차지하였습니다.”
견일은 지어미의 손을 잡고 그간의 공을 치하하였다.
“당신께서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두 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출가인 현준도 본가를 찾아와 부모님을 위로하였다.
지아비와 출가한 아들의 축하를 받으면서도 해운의 어머니는 남몰래 눈
물을 훔쳤다. 소식을 듣고 최씨 문중의 사람들이 견일의 집으로 몰려들었
다.
최씨 문중 사람들뿐만 아니라 조정의 벼슬아치와 견일과 친분이 조금이
라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서라벌 사람들이 몰려들어 견일의 집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견일은 몰려드는 축하객을 위하여 소를 잡고 술을 준비하였
다.
十二乘船渡海來(십이승선도해래) - 열두 살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
文章感動中華國(문장감동중화국) -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十八橫行戰詞苑(십팔횡행전사원) - 18세에 글 싸움하는 과거에 나아가
一箭射破金門策(일전사파금문책) - 화살 한 대로 금문책을 깨었네
당나라 시인이며 치원의 문우인 고운(顧雲)은 시를 지어 벗 해운 최치원
의 빈공진사과 장원을 축하 하였다. 함께 신라에서 유학 온 동료들도 해운
의 장원을 다같이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발해 출신 유학생들은 한동안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였다.
그러나 해운이 18세란 어린 나이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당 조정에서는
해운에 대한 관직 임명을 미루었다. 그는 낙양(洛陽)에 머물면서 당나라
시인묵객들과 어울려 시 창작에 전념하였다. 해운은 금체시(今體詩)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을 하였고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때 지은
시가 부 5수에 시 100수, 잡시부 30수로 모두 3편을 이루었다.
빈공진사과 장원이라는 영광도 잠시였다. 금방 모든 영광이 사라지는 듯
하였다. 해운은 날로 더해가는 외로움을 함께 할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을
가슴 아파하였다. 빈공과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였기 때문에 장
원 급제하였더라도 당나라에서는 크게 대우해주지 않았다.
국자감을 나온 해운은 당나라 관아에서 문서를 작성해 주거나 고관들의
글을 대필해주며 , 근근이 밥 벌이를 하는 어려운 처지였다. 2년 후 해운은
강소성(江蘇省)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해운의 기대와 달리 현위는 미관말직이었다. 낯선 고장에서 벼슬
하기란 녹녹지 않았다. 해운이 신라인이라는 것이 지방을 다스리는데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해운은 자신의 심정을 그의 글에 간략하게 기록
하였다.
현위는 그 직급이 낮으나 그 임무는 매우 중해서 (其官雖卑 其務甚重)
죄수들을 살펴야 하고, 피로한 백성을 위무하니(推詳滯獄 尉撫疲) 동료
공직자는 그 직언을 겁내고 지방수령들도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佐僚能憚
其直聲 宰尹亦懷 其畏色). 사리를 말하자면 실로 훌륭한 인재에게 맡겨야
한다.
‘아, 내가 이름도 모르는 당나라 촌구석에서 미관말직이나 하려고 그 고생
을 하였단 말이냐? 이것은 아니다. 내가 꿈꾸었던 삶이 아니야. 차라리 신
라로 돌아가 벼슬을 하는 게 좋겠어. 그러나, 자식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을
기대하고 계실 아버님과 어머님, 형님 그리고 수많은 서라벌 사람들을 생각
하면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해운은 여러 날 동안 심각하게 자신의 장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외국인을 은근히 천시(賤視)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결국 해운은 현위직을 그만 두고 더 높은 관직을 오르기 위해 박사굉사과
(博士宏詞科)라는 내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을 준비하기 위하여 종남산
(終南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 전란으로 인하여 박사굉사과가 무
기한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운은 절망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그나마 나오던 봉급이 끊기자 당장 숙식 문제를 스스로 해
결해야 했다. 고운은 양양(襄陽)에서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으로 들어가
밥을 얻어먹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자 시험도 포기하고 벼슬자리를 찾아나
섰다.
“회남절도사 고변을 내가 잘 알고 있네. 자네를 소개해 줄 터이니 자기 소
개서와 공직 신청서를 나에게 써주시게.”
고변이 거주하는 양주(揚州)의 외곽에 있는 고우우성(高郵盂城)이었다. 사
고무친(四顧無親)의 해운은 고운의 제의를 무시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만약
황소의 반란군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당나라 관리를 역임하였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해운은 문우인 고운 시인을 통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관직 청원서와 자기 소개서를 제출하고 그의 문객이 되었다. 고운은 고변의
참모로 일하고 있었다. 이때가 황소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전역이 전란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고변이 황소의 난 토벌을 맞게 되자 그는 함께 참전하였다. 해운은 고변
의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황제의 명에 의해 고변이 황소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자, 해운은 그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표(表), 서계(書啓), 격문(檄文) 등의 문서를 작성하
는 일을 맡았다. 고운의 소개로 절도사 고변의 참모가 된 해운은 차차 안정
을 찾아갔다. 학철부어(涸轍鮒魚)의 다급한 상황에서 벗어난 해운은 물을
만난 고기와 같았다.
고변은 태위로 승차되었는데 정승의 반열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감사의
표문을 해운에게 의뢰하였다. 또한 해운에게 다양한 공문서 작성 및 보고
서 등을 위임하면서 해운은 고변의 깊은 신임을 받게 되었다. 해운은 행운
아 였다. 절도사 겸 제도행영병마도통인 고변은 치원을 절도사 직속의 관
역순관에서 도통순관으로 막바로 승진시키면서 황제에게 상주하여 승무
랑(承務郞),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내공봉(內供奉) 등 세 직첩과 포상으
로 비어대(緋魚袋)까지 하사 받게 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