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황소서(1)
황소(黃巢)
격황소서
- 여강 최재효
1
서기 763년 2월 8년에 걸친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이 완전히 진압되었다. 두 전란 이후 15년간 당나라는 어렵게 명
맥을 이어갔으나, 국정 운영 전반에 어려움이 극심하였다. 당 조정
은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번진(藩鎭)을 확대하여 각 지
역에 파견된 절도사(節度使)에게 병권(兵權)과 행정을 맡겼다.
“나는 이 지역의 황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 40여 지역의 절도사들이 점차 자신의 세력
을 확대하면서 당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행보를 취하
려 들었다. 당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조정
의 명에 따르도록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당나라 제18
대 황제 이현(李儇)은 강력한 중앙군사조직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재정이 빈약한 당 조정의 중신들은 묘수를 찾아내야 했다.
“경들은 절도사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 해
보시오.”
다급해진 황제는 중신들을 압박하였다.
“폐하, 오랜 전란으로 빈약해진 국고를 채우는 방법은 세금 밖에
없습니다. 상서성(尙書省)과 호부(戶部)에 명을 내려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는 방법을 강구하라 명하소서.”
황제를 그림자처럼 호종하는 환관 전령자(田令孜)가 당당하게 아
뢰자 다른 중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령자의 눈 밖에 나
면 그날로 벼슬에서 쫓겨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하기
일쑤였다.
“오오, 과연 전령자시오. 그리하도록 하지요.”
황제의 명에 따라 상서성과 호부에서 고민한 끝에 내놓은 대책은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책으로 자질구레한 세수방
안을 고안해 냈다.
가뜩이나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살림은 가혹한 징세(徵稅)
에 파탄 나고 말았으며,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들과 문벌귀족 그리
고 신흥관료들의 대립은 날로 첨예화 하여 정국을 혼란스럽게 하였
다.
“이대로는 더 이상 못살겠다. 황제를 갈아치워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이참에 당 왕조를 엎어버려야 한다.”
“허수아비 황제와 간신 전령자를 처단해야 우리가 살 수 있소이다.”
“옳소. 황제와 간신배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웁시다.”
당 조정의 가혹한 세금 정책에 반항하는 민란이 전국에서 들불처
럼 번지기 시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난으로는 서주(徐州) 지방의 군인이었던 방훈(龐
勛)이 일으킨 난과 절강(浙江) 지역에서 구보(裘甫)라는 농민이 이
끄는 민란이었다. 그들은 곧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874년
하남(河南) 지역에서 소금 밀매업을 일삼던 왕선지(王仙芝)가 군
사를 일으켰다. 이듬해 산동 지역에서 소금 장수 황소(黃巢)가 봉기
하였다.
“동지들, 나는 허수아비로 전락한 황제와 조정의 벼슬아치들을 믿
을 수 없소이다. 우리가 분연히 일어서서 썩어빠진 당왕조를 엎어버
리고 백성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새나라를 만들고자 합니다. 동조
하여 주시오.”
“왕선지 장군 만세!”
왕선지는 스스로 천보평균대장군(天補平均大將軍) 겸 해내제호도통
(海內諸豪都統)이라고 칭하고 당 왕조의 무능을 규탄하며, 백성들에게
봉기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돌렸다. 순식간에 수만 명의 농
민들이 민란에 가담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 당의 조세제도는 초기에 도입된 조용조(租庸調)제도
에서 덕종(德宗) 황제 때 양세법(兩稅法)으로 바꾸었다. 조용조는 소농
민의 파산, 균전제의 붕괴 및 빈부의 급격한 분화를 불러와 다른 세법
(稅法)이 필요하였다.
양세법은 농민들은 소유하고 있는 농지의 양과 질에 따라 6월에 하세
(夏稅)와 11월에 추세(秋稅)로 나누어 세금을 내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당 조정은 양세법에 의한 세수만으로는 번진의 운영에 드는
막대한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당 조정은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신 제오기(第
五琦)를 염철사(鹽鐵使)로 임명하고 소금의 전매제도(專賣制度)를 실
시했다. 이 전매제도는 전국의 소금을 국가가 매수하여 관리가 직접 운
반 또는 판매하고, 민간의 소금의 밀조(密造) 및 밀매(密賣)를 금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새 전매제도 실시 초기에는 소금 가격이 1두당 10문이었으나, 소비세
100문을 붙여 110문을 받았으며, 가격이 점차 인상되어 소금 1두당
300문에 이르렀다. 가격의 폭등은 당 조정이 재정이 악화될 때마다 소
금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소금 가격이 원가의 30배까지 오르자 밀매업자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밀매업자를 염적(鹽賊)이라 하며, 규제에 나섰고
적발되면 엄하게 처벌하였다.
“나 황소는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지금의 황제를 용서할 수 없소
이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뒤에 숨어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는 환
관들과 일부 무능한 고관대작들 역시 방치할 수 없어 군사를 일으키고
자 합니다.
당 왕조는 지난 이백년 동안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빨아먹고 버텨왔
습니다. 진작 망할 당나라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소금
장사들이 낸 세금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제는 소금을 가지고 장난
질을 치고 있어 만백성들이 살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썩어빠진 왕
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듭시다. 여러분, 나를 믿고 따르시오.
새 나라를 만듭시다.”
황소의 사자후는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거한(巨漢)
인 황소의 말 한마디는 황제의 명령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황소 장군, 만세!”
“황소 황제, 만세!”
왕선지의 봉기 소식을 접한 산동(山東) 지역의 소금 장수인 황소(黃
巢)가 일으킨 민란도 기세가 대단하였다. 평민 출신인 황소는 소금 밀
매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는 주로 호전적인 북방 사람들을 돈
으로 회유하여 민란에 가담시켰다.
황소는 어려서부터 당 왕조에 불만이 많았다. 여러번 과거시험에 낙방
한 경험이 있는 그는 뒷배경이 없이는 과거에 합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당 왕조를 불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