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8. 10. 13. 14:13











                                                           

                                                          황소(黃巢)







                           격황소서


                                                             - 여강 최재효


                                                           1




 서기 763년 2월 8년에 걸친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완전히 진압되었다. 두 전란 이후 15년간 당나라는 어렵게

맥을 이어갔으나, 국정 운영 전반에 어려움이 극심하였다. 당 조

은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번진(藩鎭)을 확대하여 각 지

역에 파견된 절도사(節度使)에게 병권(兵權)과 행정을 겼다. 


 “나는 이 지역의 황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 40여 지역의 절도사들이 점차 자신의 세

확대하면서 당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행보를 취하

려 들었다. 당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조정

에 따르도록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당나라 제18

황제 이현(李儇)은 강력한 중앙군사조직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재정이 빈약한 당 조정의 중신들은 묘수를 찾내야 했다.


 “경들은 절도사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

보시오.”
 다급해진 황제는 중신들을 압박하였다.
 “폐하, 오랜 전란으로 빈약해진 국고를 채우는 방법은 세금 밖

없습니다. 상서성(尙書省)과 호부(戶部)에 명을 내려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는 방법을 강구하라 명하소서.


 황제를 그림자처럼 호종하는 환관 전령자(田令孜)가 당당하게

뢰자 다른 중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령자의 눈 밖

그날로 벼슬에서 쫓겨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하기

쑤였다.


 “오오, 과연 전령자시오. 그리하도록 하지요.”
 황제의 명에 따라 상서성과 호부에서 고민한 끝에 내놓은 대책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책으로 자질구레한 세수방

안을 고안해 냈다.


 가뜩이나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살림은 가혹한 징세(徵稅)

파탄 나고 말았으며,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들과 문벌귀족 그리

신흥관료들의 대립은 날로 첨예화 하여 정국을 혼란스게 하

다.


 “이대로는 더 이상 못살겠다. 황제를 갈아치워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이참에 당 왕조를 엎어버려야 한다.”
 “허수아비 황제와 간신 전령자를 처단해야 우리가 살 수 있소다.”


 “옳소. 황제와 간신배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웁시다.”
 당 조정의 가혹한 세금 정책에 반항하는 민란이 전국에서 들

번지기 시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난으로는 서주(徐州) 지방의 군인이었던 방훈(龐

勛)이 일으킨 난과 절강(浙江) 지역에서 구보(裘甫)라는 농민이 이

끄는 민란이었다. 그들은 곧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874년

하남(河南) 지역에서 소금 밀매업을 일삼던 왕선지(王仙芝)가 군

사를 일으켰다. 이듬해 산동 지역에서 소금 장수 황소(黃巢)가 봉기

하였다.


 “동지들, 나는 허수아비로 전락한 황제와 조정의 벼슬아치들을 믿

을 수 없소이다. 우리가 분연히 일어서서 썩어빠진 당왕조를 엎어버

리고 백성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새나라를 만들고자 합다. 동

하여 주시오.”


 “왕선지 장군 만세!”
 왕선지는 스스로 천보평균대장군(天補平均大將軍) 겸 해내제

(海內諸豪都統)이라고 칭하고 당 왕조의 무능을 규탄하며, 백성들에게

봉기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돌렸다. 순식에 수만 명의

민들이 민란에 가담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 당의 조세제도는 초기에 도입된 조용조(租庸調)제도

에서 덕종(德宗) 황제 때 양세법(兩稅法)으로 바꾸었다. 조용소농

민의 파산, 균전제의 붕괴 및 빈부의 급격한 분화를 불와 세법

(稅法)이 필요하였다.


 양세법은 농민들은 소유하고 있는 농지의 양과 질에 따라 6월하세

(夏稅)와 11월에 추세(秋稅)로 나누어 세금을 내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당 조정은 양세법에 의한 세수만으로는 진의 운영에 드는

막대한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당 조정은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신 제(第

五琦)를 염철사(鹽鐵使)로 임명하고 소금의 전매제도(專制度)를 실

시했다. 이 전매제도는 전국의 소금을 국가가 매수관리가 직접 운

반 또는 판매하고, 민간의 소금의 밀조(密造) 밀매(密賣)를 금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새 전매제도 실시 초기에는 소금 가격이 1두당 10문이었으나, 비세

100문을 붙여 110문을 받았으며, 가격이 점차 인상되어 소금 1두

300문에 이르렀다. 가격의 폭등은 당 조정이 재정이 악될 때마다

금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소금 가격이 원가의 30배까지 오르자 밀매업자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밀매업자를 염적(鹽賊)이라 하며, 제에 나섰고

적발되면 엄하게 처벌하였다.


 “나 황소는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지금의 황제를 용서할

이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뒤에 숨어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는 환

관들과 일부 무능한 고관대작들 역시 방치할 수 없어 군사를 일으키고

자 합니다.


 당 왕조는 지난 이백년 동안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빨아먹고

습니다. 진작 망할 당나라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우리 소금

장사들이 낸 세금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제는 소금을 가지고 장난

질을 치고 있어 만백성들이 살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썩어빠진 왕

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듭다. 여러분, 나를 믿고 따르시오.

새 나라를 만듭시다.”


 황소의 사자후는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거(巨漢)

인 황소의 말 한마디는 황제의 명령보다 더 강력한 힘발휘했다.


 “황소 장군, 만세!”
 “황소 황제, 만세!”


 왕선지의 봉기 소식을 접한 산동(山東) 지역의 소금 장수인 (黃

巢)가 일으킨 민란도 기세가 대단하였다. 평민 출신인 황소는 소금 밀

매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는 주로 호전적인 북방 사람들을

으로 회유하여 민란에 가담시켰다.


 황소는 어려서부터 당 왕조불만이 많았다. 여러번 과거시험에 낙방

한 경험이 있는 그는 뒷배경이 없이는 과거에 합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당 왕조를 불신하게 되었다. 황소는 과거를 포기하고 장안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待到秋來九月八(대도추래구월팔) - 가을이 되어 98일을 기다리니

  我花開後百花殺(아화개후백화살) - 내 꽃이 피고 나면 다른 꽃은 질 테지

  衝天香陣透長安(충천향진투장안) - 충천하는 향기는 마침내 장안을 채우고

  滿城盡帶黃金鉀(만성진대황금갑) - 온 성이 황금 갑옷 두르리



 위기감을 느낀 밀매업자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당 조정

하기 위하여 황소의 난에 가담하였으며,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당 조

정의 염적 토벌(討伐)은 오히려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선지와

황소는 서로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봉기군을 지휘하였다.


 “전국의 절도사들에게 명하여 왕선지와 황소의 반란군을 토라 하

시오. 짐의 직할인 금군(禁軍)이 토벌군의 중심이 되어 절도사들을 지휘

하여 조속히 난을 평정하시오.” 


 “폐하, 절도사들이 예전 같지 않사옵니다.”
 “당 왕조는 죽지 않았습니다. 병부령은 짐의 조서(詔書)를 속도사

들에게 전하고 지체없이 출병하라 하시오.”


 두 지역의 봉기군의 기세가 점점 드세 지자 황제 이현은 토벌군을 소집

하고 번진의 절도사들에게 봉기군을 진압하도록 하다. 그러나 절도사

들은 당 조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적극적로 나서지 않았다. 당 왕조는

이미 절도사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폐하, 절도사들이 움직이지 않으려 하옵니다.”
 “뭐라? 황제의 명령에도 절도사들이 움직이지 않으려하다니. 자, 이

일을 어찌해야 하오?”

 환관 전령자를 아버지처럼 받드는 황제 이현은 대신들이 아닌 전령자에

게 타개책을 물었다.


 “폐하, 소신의 생각으로는 절도사들이 명령을 듣지 않으니 우소와

왕선지에게 벼슬을 하사하시고 나중을 도모하소서.”
 “호오, 좋은 방책이오. 과연 전령자시오.”


 다급해진 황제는 봉기군 수장에 대한 회유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황제는

왕선지에게 좌신책군압아(左神策軍押牙) 겸 감찰어사(監御使)를 제안하

였다.


 “당 황제가 일개 소금밀매업자였던 나에게 압아와 어사직을 겠다고? 

평생 나의 소원이 벼슬을 하는 것이었는데. 참으로 되었어.”

 왕선지는 당 조정의 제안을 받고 기뻐하였다.


 “왕장군, 그까짓 미관말직을 받고 기뻐하시다니? 제정신이오? 왕장군은

십만대군을 통솔하는 대장군이시오."
 “황제가 황소 장군에게도 벼슬자리를 제안한 것으로 아는데?”


 “왕장군, 이것은 황제의 기만술책입니다. 하찮은 벼슬을 내리리 봉기

군을 잠재우려는 여우같은 수작이란 말입니다.”

 황소는 왕선지 보다 한수 위였다.


 “아, 그런 것이었습니까? 난 황제의 속셈도 모르고 좋아하였
다. 황장

군 말이 옳습니다. 미안합니다. 내 잠시 벼슬에 눈이 멀습니다.”  


 왕선지는 동요하였지만 황소는 당 조정이 자신들에게 보잘 것 없는 관직

을 주어 봉기군을 제압하려는 속셈을 눈치 챘다. 왕선와 황소는 황제의

회유책을 거절하고 본격적으로 군사 행동입하였다.


 “제군들, 나 왕선지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당 왕조를 뒤엎는 군사작전

에 돌입할 것입니다. 나의 뒤를 따라 대업을 위해 고군투해 주십시오.

나는 피를 나눈 형제 보다 여러 분들을 더 사랑합니다.”


 “왕장군 만세!” 
 “나 황소는 왕선지 장군과 보조를 맞춰 당 왕조를 멸망시킬 니다.

제장들과 모든 병사들은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자세로 하겠소이다.

이 황소를 믿고 따라 주시오. 자, 장안성을 향해 진격합시다. 황제탐관

오리들에게 짓밟혀 죽지못해 사는 백성들을 해방시킵시다.”


 “황소 장군님, 만세!”
 “황소 황제, 만세!” 


 왕선지는 장안의 서쪽으로, 황소는 동쪽으로 각각 진격하였다. 왕선지는

복주와 조주(曹州)를 공격했고 얼마 뒤 황소와 병사를 합쳤다. 이후 기주

(蘄州)를 점령하고 악주(鄂州)를 함락시켰으며, 이어 주(宋州)와 안주(安

州), 복주(復州), 영주(郢州)와 형남(荊南) 각지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승승

장구 하였다. 그러나 878년 호북(湖北) 지역으로 출전했던 왕선지는 황매

(黃梅) 전투에서 당나라 장수 증원유(曾元裕)에게 패해 전사고 말았다.


 “황소 장군, 우리 왕선지 장군 휘하의 군사들을 받아 주십시오.”

 왕선지의 휘하 군관들이 황소를 찾아왔다.


 “왕장군이 황매전투에서 적이 쏜 화살에 어이없이 죽고 말았소. 한참 기

세를 올려 장안을 향해 진격할 시점이니, 주온(朱溫) 부장속히 왕선지

장군 휘하에 있던 군사들을 우리 봉기군과 통합하시오.”


 “신, 주온, 장군의 명을 받잡겠습니다.” 
 황소의 부장 주온은 뛰어난 무술과 전략으로 황소의 군대에
각을 나

타내고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출신이었다. 일찍 아버지 주성(朱誠)을 여위 형 주존

(朱存)과 함께 어머니 왕씨를 모시고 친척뻘 되는 사람의 땅을 빌어 소작

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는 큰 뜻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그는 학문과 무예에 전념하였다. 황소가 에서 봉

기하자 주온은 자신에게 때가 왔음을 알고 형 주존함께 황소의 봉기군

에 가담하였다. 형제는 용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백전백승하는

과를 올려 일찌감치 황소의 눈에 들어 승차를 거듭하였다.


 “저희들은 황소 장군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소이다. 왕선지의 군사들은 곧 나의 군사들이나 같소. 앞로 나를

믿고 진충갈력(盡忠竭力)해 주시오.”


 왕선지의 부하들은 모두 황소에게 의탁했으며, 황소는 충천대군(衝天

大將軍)으로 추대되었다. 왕선지의 10만 대군까지 흡수한 황소는 60만

대군의 두령(頭領)이 되었다.


 황소는 대군을 이끌고 하남(河南), 산동(山東) 및 강서(江西), 복건(福建),

광동(廣東), 광서(廣西), 호남(湖南), 호북(湖北)으로 이동하며, 차례로 황

제의 영지를 접수하였고 낙양(洛陽) 방향으로 향했다.


 “이제 황제가 있는 장안이 멀지 않았습니다. 낙양만 함락시장안성은

저절로 우리에게 들어오니, 제장들은 전력투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장안성

이 함락되면 그간의 여러분의 노고에 답하겠습니다.”


 “황소 황제, 만세!”
 그러나 낙양 부근에 수십만 관군이 집결되어 황소의 봉기군
벌하려

했다. 황소는 급할 게 없었다. 그는 전략을 바꿔 낙양을 뒤하고 광주로

진군하여 광주성을 함락시켰다.


 서기 880년에 황소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낙양을 공격하여 점령

였다. 이어 봉기군은 그 여세를 몰아 당 제국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향

했다.


 “뭐라, 낙양이 황소 수중에 떨어졌다고, 전령자, 이제 어찌해오?”
 “폐하, 일단 피난 가셔야 합니다. 이대로 장안에 계시다가는 황소에게 붙

잡혀 능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알았소. 황실 사람들은 놔두고 나와 전령자 그리고 꼭 필요한 사람들만

대동하고 갑시다.”
 “폐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일단 피하셨다가 나중을 도모하셔
니다.

황소는 우둔한 자라 나중에 얼마든지 장안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황제 이현은 대신들과 서둘러 사천(四川)으로 피란을
났고 피란을 가

지 못한 대신들이 황소에게 투항하였다. 황소장안성에 무혈입성(無血

入城)하였다.


 “황소 장군께서 장안성에 입성하셨다. 이제는 황씨의 세상이 되었다.”
 “황소 장군, 만세!”


 “황소 황제, 만세!”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리겠구나. 황소 황제, 만세다.”


 장안성에 입성하는 황소를 피난 가지 못한 당 조정의 대소황실

사람들 그리고 장안성의 모든 백성들이 나와 대대으로 환영하였다. 백

성들은 지긋지긋한 당 왕조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는 기대에 황소와 봉기군들을 환영하였다.


 “나는 당 왕조의 착취와 압박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사를

일으켰습니다. 전장을 누빈지 칠 년 만에 나는 무능하고 주색잡기에 정신

이 나간 황제를 몰아냈습니다. 이제부터 전국의 백성들은 나, 황소를 믿고

예전처럼 생업에 전념하면서 새로운 나라 건설에 적극 협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봉기군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탐하거나, 인명을 해치면 용서하

않겠습니다. 천지가 개벽되었습니다. 나를 믿고 따라주십시오.”


 “황소 황제, 만세!”
 “황소 나라, 만세!”


 황소는 장안에 입성한 뒤에 지지자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의 에 올

라 국호를 대제(大齊)로 정하고 연호를 금통(金統)하였다. 그는 당

왕조의 관료들과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여 백성에게 나눠 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황소가 청년시절 여러번의 과거에 낙방하고 지은 시중에

'滿城盡帶黃金鉀'의 구절이 예언처럼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백성들은 날마다 ‘황소 황제,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황소는 사천 지역

으로 도망친 황제 이현을 추격하지 않았고 번진과 도사들의 군대도 무

장해제 시키지 않았다.






                                                                                                                                               - 계속 -




































                  당나라에 유학갔다가 황소의 난를 맞은 고운 최치원 선생님의 자취를 단편소설로

                더듬어 보았습니다. 탈고 전이라 오탈자도 있습니다. 깊은 이해 바랍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세요.......... 인천서  여강 최재효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