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랑(2)
일지랑
- 여강 최재효
제2부
세상에 평범이라는 말은 존재하여 그 평범이란 말이 세상에 싸
구려로 널리 통용된다면 이상향(理想鄕)이란 말이 필요하겠는가.
태초에 조물주는 만물을 만들어 내면서 오로지 인간에게만 평범
하지 못한 조건을 주문하였을지도 모른다.
삼라가 모두 평온하고 공평무사하다면 그것은 이미 공평무사가
아닌 까닭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 법과 질서 그리고 엄격
한 규율이 있어야 했다.
공평하지 못한 규율이 있어 빈부의 차이가 있고, 부리는 자와 부
림을 당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음양과 자웅(雌雄) 사이에서도
공평은 없다.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의 이유가 있다.
삼국 중에서 유독 신라는 평범하지 못한 사회였다. 자생적이었는
지 혹은 외부 문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라는 뼈가 지배하는 사
회였다. 덕만공주가 신라 최초 여왕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도, 승만
공주가 평민의 목숨을 파리 목숨 쯤으로 여기는 것도 모두 성골(聖
骨)이라는 망국의 골품제가 지탱해주기 때문에 발칙한 일이 가능
하였다.
“숙부, 일지랑에게 이미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다면 승만이 배우
자로 재고해 봐야하지 않겠어요?”
덕만여왕은 숙부 김국반과 승만공주의 배우자감에 대하여 진지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곁에 살거리가 투실한 승만공주도 있었다.
“언니, 싫어요. 저는 무조건 일지랑 아니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어
요. 아니면 억지로라도 일지랑을 집에 데려올 겁니다.”
“승만아, 그건 아니지 싶다. 세상 누구도 사랑하는 연인을 억지로
떼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야. 일지랑 말고도 서라벌에 헌헌장부가
많으니 좀 더 시간을 두고 자세히 알아보렴.”
덕만여왕은 사촌 동생 승만공주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웬만
해서는 한번 마음먹은 일은 절대 물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여왕은
말이 안 통하는 철부지 사촌 동생을 달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언니, 싫어요. 내 마음에 드는 남자도 차지할 수 없다면 제가 무
슨 왕족이고 공주라고 할 수 있겠어요. 왕족이니까 일반 백성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거라고요.”
승만공주는 무람없이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을 내뱉었다.
“폐하, 승만의 말에도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일
지랑을 다시 전선으로 돌려보내고 난 뒤에 일을 도모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소신이 그의 아비 김한신 장군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승만이 배우자 결정 권한은 숙부께 일임하겠습니다.”
덕만여왕은 진평왕의 차녀였다. 아들이 없는 진평왕은 일찍부터
덕만공주를 왕재(王才)로 생각하고 있었다.
진평왕은 슬하에 딸만 셋을 두었다. 큰딸 천명공주(天明公主)는
김용춘(金龍春)에게 하가하여 김춘추를 낳았고, 막내 선화공주(善
花公主)는 백제 무왕(武王)과 혼인하였으며, 차녀인 덕만공주(德
曼公主)는 진평왕의 뒤를 이어 신라 지존의 몸이 되었다.
덕만여왕은 음갈문왕(飮葛文王)과 혼인하였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덕만여왕은 언니 천명공주와 동생 선화공주와는 배가 달
랐다.
자신의 몸에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숙부의 딸이며, 사촌지간
인 승만공주를 자신의 후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덕만여왕
에게 언니 천명공주와 동생 선화공주가 있었지만, 둘 다 정실부인
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에서 승만공주에게 밀렸다.
승만공주는 성골 중에서 마지막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
추고 있었다. 또한 숙부 진안갈문왕이 곁에서 정사를 도와주고
있는 터 였다.
“소신이 다 큰 아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못 되옵니다.
송구하옵니다.”
“경만 믿고 있었는데, 일이 참으로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진안갈문왕은 헛기침만 해댔다.
“송구하옵니다.”
“김장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구려. 그대나 나나 신라 왕실의
혈통입니다. 일지가 왕실로 들어와 진골의 핵심 인물로 환골탈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깟 일반 백성의 여식과 정분은 없었던 일로하면 그만 아닙니
까. 내가 그 묘화라는 처녀의 어미에게는 넉넉하게 보상할 터이
니 경이 일지 마음을 돌려보세요.”
진안갈문왕의 노골적인 요구에 김한신 장군은 답답하기만 했다.
아들 일지가 만나는 여인은 바로 처제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김
한신 장군의 처 선나부인이 죽자 천성부인과 재혼하기 전까지 처
제인 선우부인이 어린 남매를 맡아서 키웠다. 김한신 장군도 아들
일지가 묘화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이 일지에게 말을 해보겠습니다.”
“잘 생각하시었소. 김장군 후손들이 세세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내가 적극 뒤를 봐주리다.”
진안갈문왕의 입이 함지박 만해 졌다. 뒤에서 부왕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승만공주는 어머니 월명부인에게 달려갔다. 모녀는
김한신 장군이 아들을 달래보겠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김한신
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여보, 어찌해야 하오. 가문의 영광이오, 아니면 일지와 묘화의 사
랑이오. 나는 답을 내리지 못하겠소.’
김한신은 덩그러니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 속에 저승에 든
선나부인의 모습이 어리비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들의 일에
대하여 주억거렸지만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늦은 밤 김한신은
아들 일지를 불렀다.
“아버님, 소자는 묘화를 절대 버릴 수 없습니다. 저희는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이입니다. 소자를 용서하십시오.”
“네 마음이 그렇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구나. 알겠다.”
자리에 누웠지만 김한신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덕만여왕과 진안
갈문왕의 실망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여왕과 갈문왕의
진노한 얼굴이 두려워도 장성한 아들에게 사랑을 깨라고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도 가문을 중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억
지로 아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김한신은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진안갈문왕 댁을 찾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김국반은 크게 실망하였다.
“김장군, 참으로 안타깝구려. 일지가 나이도 있고, 명산대천을 다
니며 오래 수련도 하였습니다. 또한 국경에서 적병을 맞아 생사의
갈림길에 서보기도 하여, 어느 정도 세상 물정에 눈이 뜨인 줄 알았
습니다.”
진안갈문왕의 실밍히는 모습에 김한신 장군은 어쩔 줄 몰랐다.
“소신을 용서하소서.”
“아니오. 승만이 고집을 아무도 꺾지 못하는 게 큰 문제입니다.
폐하도 그 아이 고집에 진저리를 칠 정도입니다. 나도 앞으로 이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진안갈문왕은 안색이 변하면서 장차 벌어질 일에 대하여 우려와
근심을 나타냈다.
진안갈문왕 김국반은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아버지였다. 또한 자신의 지위라면 신라에서 못하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김한신은 아들 일지와 고구려
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최전선으로 다시 떠나야 했다.
진평왕 때부터 신라는 당황제에게 미녀를 바쳤다. 그 못된 관습
이 선린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전통처럼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상당수 많은 신료들이 그 정책을 두고 불만이 많았으나, 누구 한사
람 왕에게 간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즈음 덕만여왕도 당황제에게 진상할 공녀(貢女) 문제를 두고 골
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매년 공녀를 뽑다보니 왕실에는 미녀가 없었
다. 왕실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닿는 사람의 딸들은 공녀로 뽑히지
않으려고 부러 칭병(稱病)하거나, 미친 척 하여 나쁜 소문을 내기도 하
였다.
“언니, 그년을 당나라에 공녀로 보내세요.”
여왕인 덕만에게 안하무인인 승만공주는 단 둘이 있을 때 언니라고
불렀다.
“승만아, 그년이라니, 누굴 말하는 게야?”
덕만여왕은 승만공주에게 물었다. 물론 그년이라고 지칭하는 여
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하였다. 이미 조정 중신
의 첩실들에게서 태어난 여식들 네 명을 확보하였지만 한명이 모
자라 애를 태우고 있었다.
“언니, 먼젓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일지랑 아니면 머리 깎고 출가
하겠어요. 이번에 당 황제에게 진공할 공녀 한 명 모자란다고 들
었어요. 벌써 당나라와 약속한 기일도 달포나 지났고요. 더 지체하
다가 당 황제에게 무슨 책망을 들을지 모르니, 묘화라는 그 아이를
채워서 얼른 보내세요. 그리되면 모든 일이 말끔히 해결되잖아요.”
“글쎄다. 일단 중신들과 의논해보고 결정해야 겠다.”
덕만여왕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전선에 나가있는 김한신 장군
과 일지의 처지를 고려하면 도저히 승만공주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승만공주를 차기 지존으로 생각하고 있는 입장에서 덕만
여왕은 그녀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여왕이 공녀문제로 어
전회의를 개최할 때마다 시끄러웠다. 상당수 조정 중신들이 김씨
성을 가지고 있는 왕실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신들의 딸을 당나라에 보내려 하지 않았다.
딸을 당 황제에게 보낸다는 것은 곧 황제의 성적(性的) 만족을 채
워주는 쾌락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황제에 바쳐진
신라 여인들은 대부분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당 황제의 성노리
개가 되어 병이들어 요절하기 일쑤였다.
특히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면 황후나 후궁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는 불쌍한 처지이기도 했다. 또한 성적 가치가
떨어진 공녀들은 황궁에서 내쳐져 장안의 유곽에서 몸을 팔며, 죽지
못해 살아 살아가 기도 했다.
“폐하, 약속한 날짜가 많이 지났습니다. 속히 진상녀들을 보내
지 않으면 당황제의 진노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왕실과 중신
들 여식 중에 마땅한 처녀가 없으면 전, 현직 육두품이나 오두품
또는 사두품의 여식 또는 그들의 친인척들 여식들도 무난하리
라 사료됩니다.”
진안갈문왕은 일지의 정인(情人) 묘화를 염두에 두고 덕만 여왕
을 은근히 압박하였다. 그의 의견에 토를 다는 중신은 한명도 없
었다. 마치 진안갈문왕의 말이 자신들과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이번에는 숙부와 해당부처에서 알아서 하세요.”
“황공하옵니다.”
중신회의가 끝나자마자 진안갈문왕의 지시를 받은 관리들이 선우
부인 댁으로 들이닥쳤다.
일지가 어명으로 다시 전선으로 투입된 터라 묘화와 선우부인은
마음이 무척 심란하였다. 선우부인은 일지가 서라벌에 왔을 때 분
황사에서 부처님을 증인으로 친인척들을 불러 조촐하게라도 혼
례식을 올려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김한신 장군과 일지가 곧바로 임금의 명으로 전선으로 떠
나가자 선우부인과 묘화의 상심(傷心)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묘화 처자는 내일 당나라로 떠날 준비를 하시오. 여왕폐하의
명입니다.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데리러 올 것입니다.”
관리의 말에 선우부인과 묘화는 귀를 의심하였다.
“우리애가 진골도 아니고 귀족 출신도 아닌데 어째서 진상녀가
되었단 말이오? 나는 보낼 수 없습니다. 조정 중신들 정실이나
측실들 몸에서 나온 딸들이 수두룩한데 하필이면 아비도 없는
우리 묘화란 말이오?”
“우리는 여왕폐하의 명을 받들 뿐이오.”
선우부인은 기가 막혔다. 세상에 오로지 딸 묘화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처지에 갑자기 당황제에 바치는 공녀에 뽑혔다는 말
에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선우부인은 어디에 하소연 할 데
가 없었다.
“부인, 묘화 일은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부인, 미안합니다. 황제의 명입니다.”
“오두품의 위치에서 어찌해볼 수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선우부인은 예전에 죽은 지아비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중에
조정에 출사하는 벼슬아치들을 찾아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하였
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어명이라 어쩔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선우부인은 궁성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문지기들에게 저지당
하여 그녀는 한 발짝도 들일 수 없었다.
“여보시오들, 지아비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가
죽었는데, 나라에서 우리 모녀를 보호해주지 못할망정 이리도
무참하게 짓밟을 수가 있습니까? 세상에 이런 법은 없습니다.
정인이 있어 곧 혼인할 아이를 당나라에 공녀로 보내다니요?
도대체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 맞습니까?”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부인 사정은 딱하지만 나랏님이 하
시는 일입니다. 윗선에서 알면 경을 칩니다. 어서 돌아가시오.”
“못 간다. 폐하를 뵙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궁성 정문에 선우부인과 수문장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감히
일반백성이 궁성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오가
던 서라벌 백성들이 금방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당황한 수문장은 윗선에 고하였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사람들이 선우부인이 처절하게 우는 모습을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였다.
“쯔쯔쯔, 예쁜 딸을 둔 게 죄지.”
“저 부인 외동딸이 묘화라고 하는데 김한신 장군 아들 일지랑과
장래를 약속한 사이래.”
“승만공주가 묘화를 점찍어서 당나라로 보낸대요. 공주가 일지랑
과 혼인할 수 없으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했대요.”
“저런, 저런. 승만공주 질투의 불똥이 엉뚱하게 묘화 처녀에게 튀
었군. 승만이 나중에 천벌을 받을 거여. 남자같이 생긴 공주를 어떤
남자가 쳐다볼까. 일지랑을 넘보다니, 언감생심이지. 암 그렇고
말고.”
서라벌 백성들은 저마다 승만공주를 욕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때
쌍두마가 끄는 황금 마차가 궁성 앞에 도착하였다. 마차 안에서 시녀
의 호위를 받으며 한 여인이 내렸다. 여인이라기보다는 방금 하늘에
서 강림한 신장(神將)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손에 장창이나 칼을 쥐어주면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장수
라고 하여도 믿을 법 했다. 수문장이 달려가 깍듯하게 예를 차리고
그녀를 맞았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궁성 문 앞이 왜 이리 시끄럽습니까?”
승만공주는 눈알을 부라리며, 주변을 살폈다.
“저 여인은 당나라 공녀로 가는 묘화라는 처자의 어미인데, 딸을
공녀로 보낼 수 없다며, 여왕 폐하를 뵙게 해달라고 떼를 쓰고 있습
니다.”
승만공주는 울고 있는 선우부인을 째려보았다.
“수문장은 어찌 저런 여인이 감히 궁궐을 범접하도록 합니까? 멀리
쫓아버리든지 매를 쳐서라도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승만공주의 말 한마디에 선우부인은 수직 장교에게 흠씬 두들겨 맞
고 말았다. 사람들은 장교의 매질을 보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겨우 집에 돌아온 선우부인은 묘화를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였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이고, 묘화야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서라벌에 많고 많
은 처녀들 중에 하필이면 너란 말이냐.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우리
모녀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천벌을 내린단 말인가 그래.”
“나무관세음보살. 어머니, 이게 제 운명인가 봅니다.”
“안 된다. 나는 너를 보낼 수 없다.”
“어머니-.”
모녀는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모녀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사방으로
바람을 타고 전해지면서 서라벌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새벽닭이 울
고 금방 동이 터왔다.
“어머니, 절 받으세요.”
“묘화야, 어딜 간다고 그러는 게야?”
묘화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하룻밤 사이에 모녀의 두
눈은 움푹 패여 있었다.
절을 하는 딸이나 절을 받는 어머니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
했다. 선우부인은 절하는 딸을 부둥켜안고 발버둥 치며, 통곡하였다.
그러나 나랏님의 명을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묘화는 어머니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하염없이 나오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묘화는 어서 나와라. 일찍 떠나야 한다.”
묘화가 선우부인에게 막 하직인사를 마쳤을 때 관아에서 군졸들이
찾아왔다. 묘화는 보퉁이 하나 들고 군사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하였
다.
“묘화야. 묘화야, 못 된 것아. 어미를 두고 어디를 가는 거니.”
“어머니. 어머니-.”
잠에서 깬 이웃들이 모녀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밤새 들려오는 모녀의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십년 가까이 봐온 아름다운 이웃 처녀가 갑자기 당나라에 공녀
로 간다는 소식은 이웃들에게도 큰 충격을 받았다.
“에구, 묘화야. 부디 잘 살거라. 황제 사랑 많이 받고 잘 살아야
한다. 그래야, 어머니도 마음이 편할 거야.”
“나라가 힘이 없으니 이런 비극이 벌어지는 거야. 당나라 놈들
은 우리 신라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뒷구멍으로 짐승만도 못한 짓
만 골라서 하고 있어. 빌어먹을 호로놈들.”
“한 남자를 지극 정성으로 사랑한 죄가 이런 결과를 낳다니.
승만공주는 서라벌에 하고 많은 사내들 중에 왜 하필이면 일지
랑에게 집착을 하는 거야. 전선에 나가있는 일지랑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에구. 불쌍한 묘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
는 단 말인가 그래.”
선우부인은 떠나가는 딸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하여 동구
밖까지 따라 나서려고 하였으나, 기력이 쇠하여 그만 땅바닥
에 주저앉고 말았다. 묘화가 공녀에 차출되었다는 소식을 접
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묘화야, 묘화야. 어미만 홀로 남겨두고 어딜 간다는 것이야.
부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겁니까?”
딸의 뒷모습이 가물가물할 때까지 선우부인은 애타게 딸의
이름을 불렀다.
묘화 역시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고 손을 흔들며, ‘어머니’를 부
르고 또 불렀다. 마을 사람들도 억울하게 끌려가는 묘화를 바라
보면서 가슴을 쳐댔다.
그날 오후 묘화를 포함한 5명의 신라 처녀를 태운 배가 개운포
(開雲浦)에서 출발하였다. 뱃길은 개운포에서 출발하여 남해를
돌아 당나라 등주(登州)로 가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앓던 이가 빠진 듯 합니다. 당 황제의 총애를 받고 못 받고는
그년 능력에 달렸어요. 언니, 이제 일지랑을 서라벌로 부르세요.
저는 눈을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오로지 일지랑 생각만
한답니다. 백옥처럼 곱고 하얀 얼굴, 붉은 입술, 부처님처럼 인
자한 모습. 칼을 들면 신장이요, 창을 들면 제석신이라. 아, 빨리
일지랑을 만나고 싶어요.”
승만공주는 복에 겨워 춤을 추며, 좋아하였다.
“승만아, 너와 나는 큰 죄를 지었다. 묘화라는 그 처녀와 우리가
다를 게 무엇이 있니? 단지 왕족과 평민이라는 차이밖에 없어.
우리는 왕족이라는 자리에 앉아서 하면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묘화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덕만여왕은 서름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연신 주억거렸다.
“언니, 사랑도 힘 있는 자가 쟁취하는 겁니다. 나는 전혀 미안한
마음 없어요. 이제는 일지랑과 평생 알콩달콩 사는 일만 남았네
요.”
묘화가 당으로 떠난 뒤에도 승만공주는 틈만 나면 덕만여왕을
찾아왔다. 갈수록 그녀의 요구 사항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서라벌
에 불러올리라는 요구로 시작하여 이제는 5등급인 대아찬(大阿飡)
벼슬을 내려 달라고 하였다. 아들이 아버지 보다 더 높은 벼슬에
올라앉히라는 주문에 덕만여왕은 골머리가 아팠다.
이때 신라의 국내,외 정세는 굉장히 변화무쌍하여 변방을 지키
는 병력이나 군관을 함부로 이전시킬 수 없었다. 잠시라도 변방
수비가 허술한 틈을 보이면 백제나 고구려가 기습을 하여 순식
간에 신라의 성들을 탈취하였다. 진안갈문왕 조차도 딸의 요구
를 덕만여왕에게 요구하고 나섰다.
“숙부, 중신들과 백성들의 눈이 있어요. 좀 더 기다렸다가 일지
랑을 서라벌로 불러올릴 생각입니다. 잠시만 더 기다려 주세요.”
“폐하의 영명한 처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조정의 중신들 중에서도 덕만여왕의 처결에 불만을 가
진 자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진안갈문왕 부녀의 만행을 알면서
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불만이 지난번 공녀
사건과 맞물려 큰 사단을 불러올 것 같았다.
“등주다. 저기가 당나라의 관문이다.”
“우와, 드디어 육지에 도착하였다.”
선원들이 소리쳤다. 개운포를 떠난 배는 보름 만에 당나라 등주
포구에 입항을 앞두고 있었다.
신라의 공녀들은 모두 갑판으로 올라와 처음 보는 당나라 등주
시가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다를 건너고 있을 때는 망
망대해라 고향 생각만 났지만 막상 당나라 도착을 앞두고 앞으
로 자신들에게 펼쳐질 낯선 곳의 생활에 기대와 두려움으로 희비
가 교차하였다. 어떤 처녀는 신라가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하는가
하면 어떤 처녀는 노래를 부르며, 착잡한 마음을 달랬다.
“나무관세음보살. 어머님, 저는 이미 한 남자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몸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어머님 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하는
못난 딸을 용서하세요. 일지랑, 사랑합니다. 저승에 들더라도 당신의
영달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부처님, 불쌍한 저의 어머님을 보살
펴 주소서.”
신라를 떠날 때부터 묘화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지랑이 아닌 또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기느니 차라리 일지랑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는 방법을 모색한 결과
였다. 당나라에 도착하여 요행으로 황제의 눈에 들어 부귀와 영
화를 얻는다하여도 그것은 한낱 억지로 만들어진 일시적인 신기
루 일 뿐이었다.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느니 고고한 절개를 지키기 위
한 방법 역시 죽음 이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묘화
는 갑판에 올라 신라가 있는 남쪽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치마를 둘러쓰고 바다에 뛰어 들었다. 바다
에 거센 파도가 일면서 금방이라도 배를 집어 삼킬 기세였다.
“공녀가 투신하였다.”
배가 포구에 접안을 시도할 때쯤이었다. 풍덩하는 소리가 선원들
귀에 전달되었다. 선원들이 소리치는 바람에 다른 공녀들과 선원
들이 갑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묘화 언니다. 묘화 언니가 어젯밤부터 죽고 싶다고 하더니만 바
다에 뛰어 들었어.”
함께 온 공녀 한명이 소리쳤다.
“허허, 이거 큰일 났군. 조정에 보고하면 경을 칠 텐데. 이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공녀를 호송하는 신라의 관리는 겁이 덜컥 났다. 지금까지 한 번
도 공녀가 바다에 투신한 적이 없었다.
“선원들은 빨리 투신한 공녀를 찾아보시오.”
관원이 선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파도가 저리 심하게 치는데 어떻게 찾습니까. 바다가 잔잔해도 찾
기 힘들어요. 공녀 찾다가 우리도 물귀신 되기 십상이오.”
“바다에 뛰어든 공녀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떼놈에게 몸을 더럽히
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게 좋아. 잘 되었어.”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신라의 처녀여, 이 풍진 세상을 잊고 부
디 극락왕생하소. 극락에 태어나거든 헌헌장부 만나 행복하소.”
어떤 선원들은 합장한 채 묘화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공녀를 호송
하는 관리는 신라에 돌아가면 어떻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덕만여왕은 시시각각 조여 오는 백제와 가야의 협공에 대처하기 위
하여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
나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은 신라를 지원하는 대가로 진흥대
왕 때 신라에 빼앗긴 아리수((阿利水) 유역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김춘추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감옥에 가두
고 말았다. 고심 끝에 덕만여왕은 김유신에게 군사 일만을 내주고
김춘추를 구하라고 명하였다. 김유신의 군대가 고구려 변방을 침범
하자 이에 놀란 고구려 조정은 김춘추를 석방하였다.
“뭐라, 묘화라는 아이가 등주 앞바다에서 바다에 투신하였다고?”
묘화가 떠나고 두 달 후에 당 황제의 공녀로 떠난 묘화가 당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바다에 투신하였다는 소식이 덕만여왕에게 전해졌
다.
“폐하, 너무 심려하지 마소서. 다음에 한 명 더 뽑아 보내면 됩니다.”
“언니, 차라리 잘 되었어요. 일지랑이 곧 돌아오면 그년이 죽은 사
실을 알고 빨리 마음을 돌릴 겁니다. 신경 쓰지 마셔요.”
‘아아, 내가 정말로 큰 죄를 지었구나. 내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
다니. 왕이 되어 차마 할 짓이 아니었어. 그 아이 말고 차라리 다른
처녀를 뽑는 건데…….’
덕만여왕은 자책하고 있는데 반해 승만공주는 박수를 쳐대며 좋
아하였다. 진안갈문왕은 남의 일 인양 헛기침만 해댔다. 묘화가
바다에 투신하였다는 소식은 곧 선우부인에게도 전해졌고, 이틀 후
그녀는 목을 맸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일지는 여왕의 부름을 받
고 서라벌로 돌아왔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