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불전(4)
을불전
- 여강 최재효
제4부
을지연은 그동안 자신과 뜻이 맞는 지방의 장관들에게 연
통하여 을불을 찾고 있었다. 물론 조정에도 친분이 있는 중
신들이 더러 있었으나, 그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들 중에 박작성주, 오골성주, 요동성주, 개모성주, 남소성
주 등과는 속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들은 오골성의
성주가 중심이 되어 비밀 결사인 동명당(東明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이 동명당을 결성한 것은 삽시루가 왕이 되면서
부터였다.
고구려의 영웅 안국공 달가와 돌고 왕자가 삽시루 왕으로부
터 모함을 받아 모살되거나, 사약을 받고 나자 일단의 성주들
은 각자도생하면서 자신들을 지켜줄 자구책으로 비밀결사가
필요했다.
그들은 오골성주를 중심으로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젊고
패기만만한 성주들이 그동안 받들어 모셨던 정신적 지주였던
달가와 돌고가 거의 동시에 사라지자 그들은 한 동안 방황하
다가 비밀결사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돌고가 죽고 을불 태자마저도 사라지자 그들은 을불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당사자인 을불 태자가
추돌이라는 가명으로 스스로 나타나자 을지연은 감격하였다.
“성주의 뜻이 몇 개입니까?”
“두개입니다. 하나는 무술대회를 열어 태자님을 찾는 거였고,
또 하나는, 또 하나는…….”
“괜찮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추돌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을지연을 안심시켰다.
“나머지 하나는 잃어버린 고조선의 땅을 찾는 일입니다. 삽
시루 왕은 실지 회복에 뜻이 없습니다. 태왕의 위에 오르자마
자 죄없는 안국군 달가님을 죽였고, 그것도 모자라 아우인 돌
고 장군을 죽였습니다. 이제 저희 동명당과 고구려 모든 백성
의 희망은 오직 태자님 한분 뿐입니다.”
을지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를 동명당의 회원으로 받아 주시겠습니까?”
추돌이 을지연에게 물었다.
“태자님은 이미 동명당의 주인이십니다. 소신을 비롯한 동명
당원들은 태자님을 벌써부터 주군(主君)으로 생각하고 있습
니다.”
을지선의 말에 추돌은 감격해 하였다.
“동명당의 규모와 지지 기반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추돌이 을지연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을지연은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술을 받으면서도 손을 바르르 떨었다. 추돌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무척 곡진해 보였다.
그는 오매불망 찾아 헤매던 을불 태자가 어느 날 자신의 눈앞
에 우뚝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같은 일이 실
제로 펼쳐지자 을지연은 두 눈을 뜨고도 현실을 믿지 못하는 듯
했다. 그는 앞에 있는 사람이 을불 태자가 틀림없음을 확인하고
태자가 졸본성에 나타난 것은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고구려의 각 성에서 소속된 군사는 성의 규모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보통 한 성에 2만 명 정도며, 그중 기마대는 5천
명 정도였다.
동명당은 6개의 성주가 일치단결되어 결성된 조직이었기 때문
에 6명 이외에는 아무도 동명당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6명의 성
주들은 자신들의 생일이나 명절 또는 경조사가 있는 경우를 제
외하고는 만남을 극도로 피하며, 보안 유지에 철저를 기하였다.
지금 현재 각 성에 반년 치 군량미와 창검, 기타 무기들이 비축
되어 있어 언제라도 출병이 가능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유사시에 9만 명의 보병(步兵)과 3만 명의 기병(騎兵)
동원이 가능하다. 현재 국내성을 지키는 병력은 약 이만명이고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는 근접 지원 병력이 약 삼만 명 쯤 된
다. 다행히도 도성을 방어하는 병력 중에는 기병이 변변치 않다.’
추돌은 재바르게 속셈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성(城)은 대성
(大城), 성(城), 소성(小城)의 3단계로 나누고 중앙에서 관리를 보
내어 다스렸는데, 이 가운데 대성의 장관을 욕살(褥薩)이라고 하
였다. 동명당의 성주 중 오골성의 성주가 바로 욕살이었고 나머지
는 처려근지(處閭近支) 혹은 도사(道使)였다.
동명당의 회원으로 오골성주 해사갈(解師葛), 박작성주 사중해
(思中海), 요동성주 고해사(高海斯), 개모성주 명림모달(明林冒
達), 남소성주 대중걸(大仲杰), 졸본성주 을지연(乙支淵)이었다.
그중 가장 관등이 높은 해사갈이 중심이고 나머지 다섯 명의
성주는 조정의 명령보다 그의 지시를 더 중히 여기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이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반역의 뜻을 품고 군사를
움직여 국내성으로 들이 닥친다면 고구려의 운명은 끝장이었다.
“태자님, 마침 닷새 후면 오골성주 해사갈의 생일날입니다.
저희 동명당의 성주들이 모두 모입니다. 소신이 태자님을 직접
모시고 가서 다른 성주들에게 소개할까 합니다.”
“잘 된 일입니다.”
추돌은 졸본성에서 머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까이에 지난 선대왕 때까지도 제사를 모시던 추모왕 주몽
의 사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추돌은 사당에 들렀다. 미리
준비한 술과 음식을 진설(陳設)하고 참배하였다. 옆에 을지연과
재생이 서 있고 사당 밖에는 중무장한 병사들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를 섰다.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할아버님께서 기틀을 마련하시어
세운 고구려가 어두운 세상을 만나 백성과 산천초목이 모두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혈손이 할아버님의 진취적인
기상을 되살려 주변 오랑캐들을 제압코자 합니다.
소손이 단지 보위가 탐이 나서가 아닙니다. 고구려는 끊임
없이 주변을 정복하여 잃어버린 단군 할아버님께서 다스리던
대륙의 땅을 모두 수복할 때까지 단 한순간도 멈춰서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소손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삽시루가 왕위를 찬탈하였어도 할아버님처럼 고구려의 기상
을 드높여 진나라와 그들의 괴뢰들 그리고 부여를 비롯한 주변
국들을 무릎 꿇게 하는 군주라면 소손은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자에게 조국의 내일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소손이 왕위를 찬탈한 삽시루를 내치고 새롭게
고구려의 기상을 다시 살려 보고자 합니다. 할아버님께서
소손에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
추돌이 절을 하고나서 을지연과 재모 그리고 함께 온 군관
들이 차례로 추모왕 위패 앞에서 향불을 피우고 절을 하였다.
을지연은 미리 오골성주에게 전령을 보내 그간의 사정을 전
했다.
“도대체, 그 놈이 하늘로 올라간 것이야, 아니면 땅속으로 기
어 들어간 것이야. 벌써 칠년이 다 되도록 그 놈 흔적도 못 찾
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것이냐고. 아니면 그대들이 그 놈을
감싸고도는 거 아닌가. 과인이 언제까지 그자가 잡히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삽시루 왕은 중신회의가 있을 때마다 신하들을 달달 볶아
댔다.
“폐하, 을불은 고구려에 없는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전국토를
이 잡듯 뒤져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폐하, 그자는 이미 죽어서 뼈와 살이 문드러져 흔적조차 없을
것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소서.”
중신들은 삽시루 면전에서 변명을 늘어놓기에 급급했다.
“그 놈을 잡는 자에게는 포상을 내리겠노라. 만약 관리들이 잡
으면 두 계급 특진과 함께 황금 만 냥을 하사하고, 백성들이 잡
아오면 관리로 특별 채용하면서 황금 만 냥을 내리겠다.”
삽시루 왕은 요즘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들려오는 소문에는
을불이 곧 대군을 거느리고 국내성으로 쳐들어 올 거라 하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그 같은 소문이 이미 파다하였다.
삼인성호라 하였다. 근거 없는 소문이 사실처럼 떠돌았다. 일
부 관리들은 벌써부터 을불이 곧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에 현혹
되어 조정에서 지시하는 사안에 대하여 업무를 태만히 하거나
건성으로 하기 일쑤였다.
“궁전은 한 나라의 위용을 나타내는데 모용외가 쳐들어와서
신궁을 불태웠다. 이 궁전은 선왕께서 지내시던 궁이었다. 또
한 지금의 대궐 전각으로는 나의 후궁들이 거쳐할 장소가 몹
시 협소하고 누추하다. 세금을 더 거둬들이고 백성들을 동원
하여 대궐의 전각을 더욱 화려하고 크게 짓도록 하라.”
아무리 태왕의 지위에 있다하여도 백성들의 처지를 무시한
명령은 중신들과 백성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었다.
“폐하, 최근 몇 년간 가뭄과 역병으로 백성들의 사정이 아주
곤란한 지경입니다. 많은 백성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유리걸식하는 가하면 고향을 버리고 도적떼가 되어 날로 민심
이 흉흉해 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굶주린 백성들을 동원하여 궁궐을 증축하는 일은 곤란하옵니
다. 재고하여 주소서.”
국상 창조리가 삽시루 왕에게 고하였다. 나머지 중신들도 왕
의 부당한 명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왕은 고성을 질
러댔다.
“이 나라의 하늘과 땅과 산천은 오로지 왕을 위하여 존재하
는 것이다. 때문에 왕이 비루하고 보잘것 없는 집에 살고 있으
면 주변국들도 나를 우습게 본다. 그러니 경들은 과인의 명에
토를 달지 말라.”
‘삽시루가 이제는 미욱해지고 제정신이 아니구나. 정사는
나 몰라라 하고 매일 주지와 육림에 묻혀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모르니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창조리는 장탄식을 하며 물러났다. 아무리 중신들이 공사를
중단하고 세금 거둬들이는 조치를 중지하라고 거듭 주청하여
도 삽시루는 듣지 않고 도리어 신하들이 자신의 명을 거역한
다며, 처벌하겠노라고 협박까지 하였다.
중신들은 가급적이면 중요한 국정 사안이라 하여도 왕에게
보고하기를 꺼리고 대충 마무리 하였다. 창조리는 몇몇 중신
들을 집안으로 초대하여 조촐한 술상을 차렸다.
추달과 을지연은 날짜에 맞춰 오골성에 도착하였다. 땅거미
가 내려앉는 시각이었다. 이미 도착한 네 명의 성주들은 추돌
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돌 일행이 오골성에 도착하자 나발이 울리면서 군사들이
일렬도 도열하여 추돌 일행을 맞이하였다. 성안에 들어서자
마자 오골성주를 비롯한 다섯 명의 성주들이 달려와 추돌을
맞이하였다.
“소신, 오골성주 욕살 해사갈(解師葛)이라 하옵니다. 주군을
뵙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해사갈이 추돌에게 큰절을 하였다.
“박작성주 도사 사중해(思中海) 주군을 뵙습니다.”
“요동성주 처려근지(處閭近支) 고해사(高海斯) 주군을 뵙습
니다.”
“개모성주 도사 명림모달(明林冒達) 주군께 인사 올립니다.”
“남소성주 도사 대중걸(大仲杰) 주군을 뵙습니다.”
성주들이 차례로 추돌에게 큰절을 올리자 추돌은 감개무량하
였다.
오골성은 요동에서 국내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전략상
아주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에 역대 고구려왕들은 오골성의 가
치를 알아보고 욕살을 파견하여 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태자 을
불은 여러 성주 앞에 당당하게 섰다. 추돌과 성주들은 내실로
들었다.
“반갑습니다. 을불입니다.”
을불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성주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자후
(獅子吼)를 토해냈다.
한낱 도망자에 불과한 이 몸을 이리 환대해 주시니 여러 성주
님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졸본성주에게 동
명당의 전모에 대해 이야기 들었습니다. 특히 오골성주 욕살
해사갈님을 중심으로 하여 똘똘 뭉쳐 구국의 일념으로 오로지
나라의 안녕을 생각하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요동성, 개모성, 남소성은 사마씨의 진나라와 모용부 같은
오랑캐들의 침입을 막아내는 방패와 같은 곳입니다. 또한
박작성과 오골성은 바닷길과 연결되어 해로를 타고 고구려
를 침입하려는 외적을 막아내는 가장 중요한 성이기도 합
니다.
물론 졸본성은 규모는 작아졌지만 고구려가 태동한 신성한
지역입니다. 동명당이란 이름 아래 고구려의 웅비를 꿈꾸던
여러 성주님들의 꿈을 펼칠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이 을불
이 여러 성주님들의 꿈을 실현시켜 드리겠습니다.
나라는 항상 발전 동력원이 돌아가야 활기를 띠게 됩니다.
무사안일을 고집하거나 추구하는 자 또는 집단은 곧 사멸하
게 됩니다. 이 을불은 삽시루처럼 황음에 빠져 주색잡기를
하느라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는 줄도 모르는 혼군은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추모왕이나 대무신왕, 태조왕 등 여러 태왕들께서 밤잠을
못 주무시고 말 잔등에서 일출과 일몰을 보시며, 동벌서정
하시어 지금과 같은 대제국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삽시루는 동네의 파락호 같은 모용외의 침입을 두
번씩이나 받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모용외가 서천태왕의
능을 파헤치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는 패악을 일삼았지
만 삽시루는 보고만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에 고구려를 책임지는 위치에 선다면 하늘을 이
불삼고 대륙을 침상으로 삼아 동서로 십만 리 남북으로 오
만 리의 잃어버린 단군조선의 고토를 반드시 회복하겠습니
다. 그리하여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군왕이 될 것을 이
자리에서 확약합니다.
지금 고구려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천
년 제국을 꿈꾼다면 여러분은 이 사람을 믿고 따라 주시면
분골쇄신하겠습니다. 반드시 고구려의 기상을 만방에 알려
사해가 우리 고구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몸을 믿고 따라주십시오.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주군께서 목숨을 달라하시면 당장 내드리겠습니다.”
“불속에 들어가라 하시면 들어가겠습니다.”
을불의 열변을 듣고 여섯 명의 성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
리며, 모두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그들이 지금껏 듣고 싶어
했던 사자후였다.
“여러분, 일어나십시오. 오늘은 우리 동명당이 새롭게 태어
나는 날입니다. 또한 해사갈 성주의 생일입니다. 마음껏 드시
고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해사갈 성주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학수고대하던 을불 태자님이십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우리의 목숨은 태자님에게 드렸습니다.
태자님의 대의와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다함께 만세를 부
르겠습니다.”
“만세. 만세. 만세.”
만세소리가 오골성을 넘어 멀리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추달은 오골성에 도착한 뒤로 부터 추달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정식으로 을불이라는 이름을 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호칭은 동명당원 사이에서만 제한하여 사용하였
다. 해사갈 성주는 조정의 중신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
며, 조정의 정국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동명당을 이끄는 당주답게 도저하고 조용하면서 눈빛이
매서웠다. 을불은 성주들에게 첫인사를 받으면서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주었다.
비단 모자를 쓰고 녹색 비단옷을 입은 을불은 고구려 태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가 열 발짝만 움직여도 검술에 능
한 호위무사 네 명과 재모가 그림자처럼 따라 움직였다.
첫날은 모두가 옥주와 가효(佳肴)를 들며, 유쾌한 시간을 보
냈고 다음날 오후에 중요한 회의를 하기로 하였다. 을불은 성
주들로부터 밀려드는 술잔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녁 만
찬은 밤이 깊어서 파했다.
“어서 오세요. 누추한 집에 여러 대인들을 오시라 했습니다.”
창조리는 삽시루에게 총애를 받는 간신들을 빼고 여러 중신
들을 한자리에 불렀다. 그들도 국상의 초대를 받고 대충은 국
상이 초대한 까닭을 눈치 채고 있었다.
국상의 집에 초대된 사람은 우탁(于卓), 을로(乙盧), 오맥남
(烏陌南), 방부(方夫), 조불(祖弗), 소우(蕭友), 을보(乙寶), 창
멱(倉覓), 우풍(于豊) 등이었다.
창조리는 손님들에게 술잔을 돌렸다. 초대를 받고 올 사람
과 오지 않을 사람을 알고 있었다. 초대에 응한 사람들은 평
소에도 창조리의 일에 적극 협조하는 인사들이었다.
창조리는 자주는 아니지만 자신의 저택이나 저자거리의 잘
나가는 기루에서 중신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니 조정의 중신들이 창조리의 집에 모였다고
하여 의혹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국상, 오늘은 술상이 어느 때보다 푸짐해 보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오늘은 포식 좀 해야겠습니다.”
을불의 외조부 을보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는 풍신이
크고 평소에도 농담하기를 좋아하였다. 조정에 출사를 하고
있지만 늘 외손자인 을불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또한
조정에서 창조리와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인사이기도 했다.
“오늘 자리는 요즘 태왕의 정치에 대한 각자의 허심탄회한
생각을 나눠보자는 뜻에서 마련하였습니다.”
창조리의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각자의 소회(素懷)를 토해
내기 시작하였다. 태왕에 대한 불만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이대로는 곤란합니다. 초후, 연후, 태후, 기타 후궁들
의 새로운 거처를 위하여 궁궐을 증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유리걸식하고 있는 처지
입니다.”
을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을로님 말씀이 지당합니다. 음험한 삽시루가 보위에 오르
고 나서 거의 매년 역병이 창궐하고, 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가뭄이 심한 지역 백성들은 산적
이 되거나 유랑민이 되어 고향을 떠나고 있습니다. 삽시루는
백성들의 고통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궁궐 증축은 나중
으로 미뤄져야 합니다.”
조불이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다.
“삽시루가 왕이 되고 나서 우리 고구려가 약소국으로 전락
하였습니다. 무슨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오맥남이 눈치를 보고 있다가 한마디 하였다.
“고구려는 움직여야 합니다. 한겨울 곰처럼 굴 속에 들어가
잠만 잔다면 고구려는 주변의 이리떼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방탕한 삽시루 왕은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
지 않습니다. 당연히 특단의 방안이 있어야 합니다.”
우풍은 을불이 태자 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삽시루는 이미 백성들의 마음에서 떠났습니다. 그가 무얼
하든 백성들은 냉소로 일관하고 있어요.”
소우가 잔을 비우고 나서 묵직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창조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말없이 술잔만 비우자 중신들도
창조리의 눈치만 살폈다. 술자리가 무거운 침묵으로 빠져
들었다.
“국상, 한마디 하시지요.”
을보가 정적을 깼다.
“그럼, 한마디 하겠습니다.”
창조리의 목소리에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의 한마
디 한마디는 삽시루 왕에 대한 실망감과 새로운 왕재(王才)
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나라가 망조에 드는 길은 왕이 정사를 뒤로 하고 계집과
술에 빠져 살고, 신하를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쓰지 않음
에 있습니다. 또한 계집들의 치맛자락에 따라 인사를 하면
서 국정에 경험이 많은 원로들의 말을 듣지 않는데 있습니
다. 여러분들의 말씀을 듣고 종합적으로 판단해보건대 여러
분들은 삽시루 왕의 정책에 불만이 많으십니다.
또한 특단의 대책이란 굳이 내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 뜻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겁니다. 우풍 대인께서 방금 말
씀하셨듯이 우리 고구려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창천을 날던 새가 잠시 한눈을 팔고 날개짓 하는 것을 잃
어버린다면 새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여러 대인님들의 속마음을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여 여러분께 제시하겠습니다.
고구려의 태왕의 위(位)는 홀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
여 존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만백성을 보듬고 그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면서 배곯지 않게 해줘야 합니다.
백성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백성은 곧 하
늘입니다. 즉, 민심이 천심인 것입니다. 백성의 마음을 얻
지 못했다 함은 하늘이 태왕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께서 제가 특단의 대책을 추진할 경우 지지해주
실 것으로 믿습니다. 창조리가 열변을 토하자 좌중은 고요
하였다.
“옳습니다. 국상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특단의 대책을
바로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다 아는 사실 아
닙니까.”
“국상, 특단의 대책을 지금 말씀하셔도 됩니다.”
조불과 소우가 창조리에게 지지의 뜻을 보내며, 특단의
대책을 즉시 공표하라고 채근하였다.
‘그래. 좋다. 이 자리에서 공표하자.’
창조리는 우묵한 눈으로 한사람 한사람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무거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특단의 대책을 말씀드리고 여기 계시 대인들께
서 해야 할 각자 임무를 고지하겠습니다.”
창조리는 특단의 대책으로 생각하고 있던 복안(腹案)을 발
표하기로 마음먹었다. 복안의 핵심은 삽시루를 권좌에서 끌
어 내리고 을불 태자를 새로운 태왕으로 앉히는 거 였다. 대
인들은 창조리의 대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각자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불, 조우, 오맥남 대인은 내일부터 을불 태자를 수소문
하여 소재를 파악하시오. 그리고 우탁(于卓), 을로(乙盧),
을보(乙寶), 창멱(倉覓), 우풍(于豊) 대인은 조정 대신들을
개별 접촉하여 지지기반을 확보하시고, 지방 장관들은 우
군으로 접수해주시오. 또한 도성과 가까운 성주들을 우군
으로 확보해야 유사시에 우리의 거사가 탄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오골성과 졸본성 그리고 개모성, 남소성을 반드시
우리 우군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오골성주 해사갈은 나
의 심복이나 다름없습니다. 해사갈을 따르는 일단의 성주
들이 힘을 합할 것입니다.
우리는 중앙군을 장악하고 해사갈 성주가 지방 성주 몇몇
을 포섭하면 일은 쉽게 마무리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일
은 제가 중심이 되어 이끌겠습니다. 창조리는 이야기를 마치
자 거사 계획안을 적은 문서를 회람토록 하고 아래에 연서
(連署)하도록 하였다.
국내성의 밤은 깊어만 가고 창조리의 집에 모인 중신들의
마음은 이미 한뜻이 되어 천지개벽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
신들이 회람한 문서가 발각될 경우 연서한 자들은 목이 달
아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일이었다. 창조리는 보안을
강조하며 각별히 입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