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8. 8. 16. 12:08










                                         








                        을불전





                                                                                                                                   - 여강 최재효



                                 제3부


 
 압록재에 잡혀온 추돌과 재모는 재(宰) 앞에 강제로 무릎

꿇려졌다. 재는 이 고장에서 수십 년째 재로 있으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색질을 일삼는 음종한 활리

(猾吏)였다.


 방금전까지도 곧 숨이 넘어갈 듯 마구발방으로 날뛰던 노파

는 이미 재와 잘 아는 듯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재가 두 사람과 조랑말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너희들은 남의 물건을 훔치고 도망가려 하였다. 왜 저 할멈

의 가죽신을 훔치고 도망가려 했는지 이실직고하렷다.”


 재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추돌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설명하였지만 재는 믿지 않았다. 재모가 다시 처음부터

자초지종을 말하였으나 재는 고개만 갸우뚱 거릴 뿐이었다.


 “아닙니다. 저 녀석들이 거짓말하는 겁니다.”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노파가 끼어들었다.


 “여봐라. 저놈들 볼기를 치고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압수

하여 노인에게 드려라.”

 압록재가 추상같은 처분을 내렸다.


 “당신은 압록재로서 양측의 말을 들어보고 정당하게 판결해

야지, 어째서 저 간교한 할망구 말만 듣는단 말이오.”
 추돌이 재를 향해 소리치자 재(宰)는 펄펄 뛰면서 금방이라도

추돌과 재모를 잡아먹을 듯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이놈아, 이 지역에서 내가 곧 법이고, 왕이다.”
 “대장, 포기합시다. 말이 안 통합니다.”
 재모는 추돌에게 항의하지 말고 재의 판결에 따르자고 하였다.


 그에게 대들어야 매만 더 맞고 자칫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자신들만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돈은 다시 벌면 되는

거였다. 추돌은 억울했지만 자신들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없었고,

잘못하다가 신분이 탄로 나면 곧장 체포되어 삽시루 왕에게

보내질 수도 있었다.


  추돌은 재모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구경 온 마을 사람들은

추돌과 재모가 매를 맞는 모습을 보면서 고소해 하였다.


 “역시 압록재께서는 백성들을 자식처럼 살펴주시는 분이셔.”
 “저 두 놈들이 다시는 우리 사수촌에 들어오지 못하게 다리

를 분질러 놔야 해. 저놈들이 언제 다시 와서 해코지 할지 몰라.”


 추돌과 재모는 매를 맞고 가지고 있던 소금과 물건들을 몽땅

빼앗기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기가 막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촌구석에 사는

노파에게 당할 줄 상상도 못했었다. 두 사람은 조랑말을 타고

가면서 서로의 얼굴을 한번 보고 껄껄 웃고 말았다. 추돌은

볼기를 맞고 물건을 몽땅 압수당했지만 신분이 탄로 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대장, 나중에 그 할망구를 찾아가 단단히 혼을 냅시다. 내

생각에는 그 할망구가 압록재와 짜고 한 짓이 틀림없는 듯하

오. 아마, 우리에게 빼앗은 소금과 물건들 반은 그 압록재 놈

손에 들어갔을 거요.”


 재모가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투덜거렸다. 재모는 추돌을

대장으로 받들면서 존대를 하고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그런 노파는 살아 있으면 백성들에게

못된 짓만 할거요. 그리고 그 압록재라고 하는 놈이 더 악랄

하오. 신발만 돌려주면 되었지, 우리 소금과 물건을 몽땅 빼

앗다니, 그자는 탐관오리가 분명하오.” 


 두 사람은 압록수 주변에 설치된 박작상단 중간 거래소에서

다시 소금을 받아서 장사를 계속하였다.


 이번에는 졸본지역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압록수 중간 지점

에서 육로로 조랑말을 몰았다. 추돌이 졸본으로 가는 이유는

그곳 백성들에게서 삽시루 왕의 평판을 들어 보고 많은 인재

들과 인연을 맺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졸본은 고구려가 건국되었을 때 초기 도읍지였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지를 옮긴지도 300년 가까이 되었

지만 아직도 고구려의 주요 군사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

이었다.


 “대장, 졸본까지 가지 않더라도 소금 팔 곳은 많습니다.”
 ‘이제는 재모에게 나의 정체를 알려줘야 하겠어. 그래야 나

의 의도를 이해하게 될 것이야.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

이 적기야.’


 추돌은 재모의 이해를 구할 필요가 있었다. 무작정 먼 곳

까지 재모와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사람은 길을 걷다가 나무 아래서 잠시 쉬어 가

기로 하였다. 들녘에 가을걷이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재모, 이제부터 내 이야기를 잘 들으시게.”

  추돌이 갑자기 일어나 옷맵시를 고치고 근엄한 표정을 지

었다.


 “대장, 무슨 말이든 하십시오. 대장과 나 사이에 못할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재모는 추돌의 돌출행동에 의아해 하면서 일어나 똑바로 앉

았다.


 “나는 고구려 왕 삽시루가 애타게 찾고 있는 을불 태자요.”

 “뭐라고? 을불태자?”

 재모는 추돌이 을불이라는 말에 어거주춤한 자세로 추돌을

려다 보았다. 추돌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력(履歷)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재모는 처음에는 추돌의 이야기를 반신반의 하며, 농담하는

줄 알고 추돌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듣지 않았다. 추돌이 왕자

들만 가지고 있는 금과 옥으로 장식된 신표(信標)를 내보이

자, 재모는 추돌이 진짜 을불 태자라는 사실을 알고 얼른 엎

드렸다. 재모의 이마가 땅에 닿았다.


 그 신표는 고구려 왕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신분증 겸 호패

(號牌)로 손바닥만 한 옥에 붉은 글씨로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삼족오가 새겨졌으며, 둘레는 황금으로 마감하여

무척 호화롭게 보였다. 추돌은 그 호패를 늘 허리춤에 매달

고 다니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 호패를 들여다보곤 했다.


 “대장, 아니 을불 태자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을 죽

여주십시오.”

 재모는 연신 이마를 당바닥에 찧어대며, 죽여달라고 하였

다.

 
 “재모, 이 순간부터 그대는 나의 참모가 돼야 한다.”
 추돌은 재모를 일어나 앉으라고 하였지만 재모는 감히 일어

앉지 못했다. 추돌은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금의 삽시루 왕을 권좌에서 끌어 내릴 것이다. 그는 백성들

마음을 잃었다.


 또한 내외 정세를 읽지 못하고 실정(失政)을 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내가 그

대를 데리고 손해를 보는 소금 장사를 하는 까닭은 불쌍한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와 뜻을 함께 할 동지들을 모으

기 위함이었다. 재생은 죽은 전 국상 상루(尙婁)가 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붙인 종자(從者)이다.


 나는 앞으로 나의 재기(再起)를 위하여 세력을 끌어 모을

것이다. 그대는 나의 진정한 참모가 되어 내가 대업을 이루

는 그날까지 헌신해 주기를 바란다.


 추돌의 엄숙하면서 근엄한 태도에 재모는 감히 고개를 들

지 못하고 계속 엎드려 있었다. 조금 전만 하여도 소금 장

사를 하던 동료가 어느덧 고구려 태자로 탈바꿈해 있었다.


 “을불 태자님, 무엇이든 하명만 하소서. 그동안 소인은 태자님

이 평범하지 않은 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언젠가는 말씀

하시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모의 이마가 다시 땅에 닿았다.


 “재모, 고맙다. 당분간은 나를 지금처럼 추돌이라고 부르고,

그 누구에게도 나의 신분을 말하면 안 된다. 나는 그대를 나

의 그림자처럼 생각하겠다. 그대도 나를 믿고 나의 뜻을 따라

주면 좋겠다.”
 추돌은 이마를 땅에 박고 있는 재모를 일으켜 세우고 등을

다독거렸다. 재모는 스스로 몸을 낮추며 움츠렸다.


 2년 가까이 한솥밥을 먹은 사이였다. 친 형제보다 더 우

애가 깊었다. 추돌은 재모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재모는 추돌의 신분을 확실히 알

게 되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방향을 정

하게 되었다.


 “태자님, 이 천한 목숨 기꺼이 바쳐 태자님께서 대의를

이루도록 헌신하겠습니다. 언제든지 이 놈의 목숨을 달라

하시면 드리겠습니다. 소인의 아비도 조의(皁衣)로 있다가

비명에 가셨습니다.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충성을 다하

겠습니다.”

 재모는 감히 추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의 말에

조금의 거짓이나 삿된 바가 없어 보였다.


 “재모, 고맙다. 지금까지 우리는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한 위험과 험난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합심하여 잘 대처해 나가자.”
 두 사람이 졸본성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해가 저물고 있

다.


  졸본성은 한때 고구려의 도읍지였으나 유리왕 때 국내성

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잠시 쇠퇴하였지만 다시 재기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고구려 조정에서도 추모왕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

라 하여 성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성세(城勢)나 규모는 국

내성 보다 훨씬 못하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쳐

났다.


 “태자님, 저기 객사입니다. 오늘 저기서 묵으시지요?”
 “아니다. 주막을 찾아가자. 백성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들으

려면 주막이 좋다. 나는 저런 객사보다 어쩐지 주막이 마음

에 든다. 그리고 태자라는 말은 입에 올리면 안 된다.

추돌 대장이라고 불러다오.”


 재모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주막을 물었다. 두 사람이 조

랑말을 끌고 주막에 도착하자 젊은 사내가 뛰어나욌다.


 “어서 오세요. 우리 주막은 졸본성에서 제일가는 곳입니다.

주모 예쁘고, 국밥 맛있고, 탁주 맛도 기가 막히지요. 자자,

얼른 안으로 드시지요. 금방 자리가 찹니다.”
 사팔뜨기 사내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이보우, 오늘 무슨 날인데 주막에 사람들이 이리 많은가?”
 “내일 을지 성주님 생신이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내가 누런이를 드러내며 대답하였다.


 “성주 생일에 사람들이 왜 몰려든단 말인가?”
 “두 분도 내일 무술시합에 참가하려고 오신 게 아니세요?”
 “우리는 소금 파는 장사치 일세.”

 두 사람은 사내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매년 을지 성주님께서는 생신날 무술 대회를 열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고 있습니다. 선발된 자들은 일정기간 훈련을

받고 정식 군사가 된답니다. 이곳 젊은이들에게는 관리가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죠.”

 사내는 신이 난듯 침을 튀겼다.


 ‘졸본 성주가 나라를 위하는 생각이 크다, 그자를 만나봐야

하겠어.’
 두 사람이 주막 안 마당 평상에 올라앉았다. 주막은 손님들로

넘쳐났다.


 뒷태가 투실한 주모와 곱상한 여인들은 상을 들고 이리 저리

뛰어다녔다. 평상이 모자라자 사내는 안마당과 바깥마당에 멍

석을 깔아 밀려드는 손님을 받았다.


 하나같이 젊은 사람들이었다. 사내의 말대로 내일 있을 무술

시합에 나갈 사람들 같았다. 둘 또는 서너 명이 함께 온 것으

보아 동무들이나 친인척 사이 같았다. 


 “주모, 여기 국밥하고 탁주 좀 내오게. 고기 안주도 내오고.

그리고 봉놋방 하나 준비해 주게. 오늘 밤 묵을 걸세.”
 재모가 주모에게 미리 은자 두 개를 선불로 건네자 주모의

입이 벌어지더니 허리가 꺾어질 듯 인사를 하였다.  


 “재모, 내일 무술시합에 나가보지 그래. 자네 쌍검술은 우

박작상단에서 최고 아닌가.”
 “대장님은 명궁 아니십니까?”
 “좋아. 내일은 몸 좀 풀어보자고.”


 두 사람은 내일 졸본성에서 개최될 무술시합에 출전하기로

뜻을 모으고 술잔을 부딪쳤다. 늦은 밤까지 주막으로 손님들

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보다 들어오는 손님이 더 많았

다. 추돌과 재모는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촉각

을 곤두세웠다. 술에 취한 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대개가 삽시루 왕을 욕하는 이야기 였다.


 “삽시루인가 삽자루인가 하는 자가 나라를 다 말아먹고 있

어. 그자는 병에도 안 걸리나 염병할. 빨리 왕을 갈아치워야

해.”


 “을불 태자님은 하늘로 올라가셨나, 아니면 땅 속으로 들어

가셨나. 벌써 몇 년째 감감무소식이야. 지금 고구려를 구할

분은 을불 태자님 밖에 없어. 지금 삽시루가 계속 왕을 하면

고구려는 곧 망할 거야. 매년 외적들이 쳐들어와 선대왕들

이 넓혀 놓은 거룩한 왕토를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으니,

대로 가다가는 고구려가 손바닥 만해 질 거라고.”

 투박해 보이는 사내가 주먹을 불끈쥐고 흔들어 댔다.


 “삽시루가 선왕의 후궁은 물론이고 중신들 처와 딸들을 모

두 건드리고 있다는데. 천하에 몹쓸 호색한이로고.”


 “그 자가 정말로 선대왕 아들이 맞나, 가짜 아들 아냐?”
 “그런데 말이야. 똑똑하다고 소문난 창조리 국상은 어째서

그런 패악한 왕을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옛날에는 왕이 정사를 잘못하면 국상이나 조정 중신들이 왕

을 갈아치우기도 했다는데.”


 ‘백성들 마음이 삽시루에게서 완전히 떠났구나.’
 추돌은 잔을 기울이면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

다. 졸본지역 백성들도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했다.


 “대장님, 들으셨지요? 이곳 백성들도 대장님을 원하고 있습

니다.”

 재모가 추돌의 눈치를 보며 속살였다.


 “세력을 모아야 하네. 나 혼자 무엇을 어찌 하겠는가? 덕망

있고 힘 있는 지방 세력을 끌어 모아 든든한 지지 기반을 만

들어야 하네. 지원할 기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졸본성의 밤은 금방 어두워지면서 밤공기가 찼다. 가을 초입

인데도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었다. 추돌이 돌아다니는 곳

마다 백성들은 삽시루 왕을 욕하는 소리를 뱉어냈다. 추돌이

처음부터 대의(大義)를 품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백성들의

틈에 끼어 생활하다 보니 저절로 삽시루 왕을 원망하는 소리

가 튀어 나왔다.


 삽시루 왕이 숙부인 안국공 달가를 죽이자 모용외가 군사를

몰아 고구려를 침범하였고, 달가가 다스리던 숙신족과 양맥

(梁貊)의 부족들이 자주 소요를 일으켜 백성들이 불안해 하

였다.


 또한 지방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날로 더해가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늘어만 갔다. 또한 달가와 돌고를 따르던 지방의 장군

들 사이에서도 불만의 소리가 날로 높아만 갔다. 그러나 삽시

루 왕은 중신들에게 정사를 맡긴 채 사치와 황음(荒淫)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다음은 수실촌 출신 추돌이 순서다. 나와서 활을 잡아라.

화살 스무 발을 쏴서 과녁을 명중하는 개수로 등수를 정한다.”
 추돌은 다음날 무술시합에 출전하여 하였다. 검술, 창술,

마술, 궁술, 격구 등이 있는데 추돌은 궁술대회에 참가하

였다.


 고구려 왕실은 예로부터 왕자가 태어나면 무예를 가르쳤

는데, 특히 궁도는 주몽의 특기이기도 하여 왕실 남자들은

궁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구려 왕자라면 궁술은 기본이었다. 아버지 돌고 역시

명궁(名弓)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고, 안국공 달가는

백발백중을 자랑하는 신궁(神弓)이었다. 약로왕은 을불

태자에게 어려서부터 다양한 무예를 연마하도록 하였다.

그중에서도 을불 태자에게 마술과 궁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추돌, 합격이다. 일차 시합에서 스무 발 쏴서 스무 발

모두 과녁을 명중시켰고, 이차 시합에서도 똑같이 스무

발 모두 명중 시켰다. 또한 달리는 말 위에서도 스무 발

모두 명중 시켰다. 오랜만에 나타난 명궁이다. 장원을

축하한다.”


 재모도 검술대회에 나가 장원하였다. 재모의 집안도

고구려 무관의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의로 있었

는데 성격이 후덕하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었다.


 그는 뇌물을 좋아하는 상관의 음모에 걸려 죽고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재모 역시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직

접 검술을  배우고 익힌 덕분에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

다. 무술대회가 끝나고 장원과 준장원에 든 사람을 성주

가 따로 합격 증서를 수여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오늘은 내 생일을 기념하면서 무술대회를 개최하였습

니다. 그런데 전년에 비해 올해는 눈부신 결과가 있어

나는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 장원과 준장원에 든

분들은 장차 고구려의 사직을 떠받칠 대들보가 될 것

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많이

들고 그간의 노고를 푸시기 바랍니다.”



 ‘성주는 매우 진실한 사람이다. 이마와 관중 그리고 눈

썹과 코를 보면 두 마음을 가진 자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는데, 성주는 고지식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협잡

(挾雜)을 일삼는 자는 아니로다.’


 졸본성의 성주 을지연(乙支淵)은 젊고 유능하다고 조

정에서도 칭찬하는 인사였다. 그는 야망이 크고 장차

조정에 들어가 큰 뜻을 펴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삽시루 왕의 정치행태에 크게 실망하여 지방성

에서 실력을 키우고 장래에 혹시 있을지 모를 일에 대비

하고 있었다. 을지연은 장원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술잔

을 건네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추돌은 을지

연과 초면이었지만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였다.


 “그대는 어디서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는가? 무술대회

에서 그대 같은 명궁은 처음 본다. 백년에 한명 나올까말

까하는 명궁이로다.”
 “중모(中牟)님에게 배웠습니다.”


 “뭐라, 주, 중모?”
 추돌이 ‘중모‘라는 이름을 입에 올렸지만 중모가 누구인

지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이자가 미쳤나. 중모라면 추모왕(鄒牟王)인 주몽(朱

蒙)을 말함인데. 어떻게 이자가 거룩한 주몽 성제(聖帝)의

존함을 감히 입에 올린단 말인가.’
 을지연은 충격을 받은 듯하였다. 끙 하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물었다. 


 “살아있는 중모인가 아니면 돌아가신 중모인가?”

 을지연은 추돌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중모님은 영원불멸입니다. 제 가슴 속에 계십니다.”
 점점 더 이상한 말을 하는 추돌을 을지연은 얼른 그 뜻

을 알아듣고 그를 내실로 불러들였다. 추돌이 성주의 별

도의 부름을 받자 추돌은 재모도 함께 가겠다고 하였다.


 주몽(朱蒙)은 기원전 58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19년 사망

한 고구려 건국 시조였다. 성은 고씨(高氏)이며, 이름은 주

몽 또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중신

이나 장군 또는 군관들 중에서도 주몽의 별명을 모두 기억

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추돌은 재모에게 눈짓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신

호는 재모가 성주에게 자신의 신분을 모두 밝혀도 좋다는

뜻이었다. 추돌은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었다. 운이 좋

으면 천군만마를 얻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목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다시 묻겠다. 조금 전에 자네가 중모에게 무예를 배웠다

고 하였다. 그 중모란 누구를 말함인가?”
 을지연이 근엄한 자세로 추돌에게 물었다. 바로 그때 재모

가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성주께서는 예의를 갖추시오. 이분은 을불 태자님이시오.”
 “뭐라. 을불 태자님?”
 을지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성주는 어서 예를 갖추지 않고 무엇을 하시오. 무엄하오.”
 재모가 굵고 묵직한 소리로 성주를 호통 치는 동시에 추돌은

허리춤에서 옥패를 꺼내 보였다. 그 옥패에 분명 ‘乙弗’이라는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앗, 예전에 보았던 돌고 장군의 옥패와 똑같다. 그렇다면 이

분이 을불 태자님이 틀림없다. 우리 동명당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그 분이시다. 아아-, 을불 태자님이 이곳으로 납시셨구

나.’


 을지연은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도 고구려 왕자들

만 지니고 있는 옥패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이전에 몇

 번 본적도 있었다. 을지연의 눈에 갑자기 물기가 스몄다.

그리고 가슴이 쿵쾅거려 숨조차 쉬기 힘들은지 밭은 몰아

내쉬었다. 


 “소신, 을지연. 태자님을 뵙습니다. 미리 태자님을 알아보지

못한 소신을 죽여주십시오.”
 을지연이 이마를 바닥에 서너 번 찧었다.


 “성주는 나를 삽시루 왕에게 잡아다 바치지 않으려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소신, 돌고 장군님을 뵙는 듯

하옵니다.”


 “성주께서는 나의 아버님을 어찌 아시오?”
 추돌이 을지연에게 물었다.


 “모용외가 처음 국경을 넘어와 신성(新城)으로 피신하

는 삽시루 왕을 쫓을 때 소신이 돌고 장군님을 모시고 모

용외 군대 후미를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린 적이 있습니

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큰 공을 세우시고도 삽시루 왕의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돌고 장군

님의 아드님이신 태자님을 면전에서 뵈오니 장군님을

다시 뵙는 듯하옵니다.”
 을지연은 눈물까지 흘려가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

하였다.


 “성주, 일어나시오. 나 역시 아버님을 모시던 그대를 보

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지금 이 일은 이 방에 있는 우리

세 사람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분간 입니다. 나의 존

재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오.”


 “태자님, 소신의 절을 받으십시오. 이제야 소신의 뜻 하

나가 이루어 졌습니다.”


 을지연은 추돌에게 큰절을 하였다. 추돌은 뜻하지 않게

졸본성주를 만나게 된 것 역시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였

다.


 추돌은 재모를 밖으로 내보내고 을지연과 독대(獨對)

였다. 추돌이 술병을 들어 을지연 잔에 따랐다. 을지연이

황송하여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잔을 받았다.


 “성주는 지금의 삽시루 왕을 어찌 생각합니까?”
 “그는 왕재(王才)가 아닙니다. 이미 민심은 그를 버렸습

니다.”
 추돌은 을지연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그의 얼굴 어디에서 모사(謀事)나 배신의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가슴 속에 숨겨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을지연을 한편으로 고맙게 여기면서도 아직은 속내를

모두 쏟아내기에는 조심스러웠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