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공간/자작시 감상실 2

내가 죽고 그대가 산다면

여강 최재효 2018. 5. 1. 15:55












                                

                                 제주 애월읍 유수암리 의녀 홍윤애 묘를 참배하며










             내가 죽고 그대가 산다면
                      - 정헌 조정철과 의녀 홍윤애를 기리며 -




                                                                                                                                                                                    - 여강 최재효







 “공(公)의 삶이 나의 죽음에 달렸구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여인은 동헌(東軒) 마루
대들

보에 거꾸로 매달려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계속 가해지는 나(羅卒)의

매에 여인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보였다. 허벅지와 엉덩이 그리고 젖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손끝에붉은 구슬처럼 맺혀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루 바닥은 선홍빛 피로 흥건했다.


 아기를 출산한지 100일 쯤 지난 터여서 여인의 유방이 부풀어 있는 상태

다. 치마와 저고리는 이미 갈가리 찢어진 상태여서 여인의 치부가 모두 드러

있었지만 목사와 나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짓 자백을

강요하며 매를 쳤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여인은 혀를 깨물었다.   


 18세기 말, 붕당정치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멀리 탐라에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제주목사 김시구(金蓍耈)는 목사로 부임하자마자 정적(政敵)으로

간주하고 있던 유배인 중 한 사람인 조정철의 연인 홍윤애(洪允愛)를 잡아

와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홍윤애는 자결을 택함으로써 조정철의 목숨을

구하고 요절하고 말았다.


 홍랑(洪娘)이라 불리는 의녀 홍윤애는 조선 말기인 영조와 정조 시대 제

주목에 살았던 여인이다. 그녀가 목숨을 바쳐가며 사랑했던 정헌(靜軒)

조정철(趙貞喆)은 1777년(정조 1년) 8월 처가(妻家) 일족들이 일으킨

정조임금 시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목으정배(定配)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고 있었다.


 공은 1751년 세가(世家)인 양주 조씨 가문에서 태어나 1775년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 가도를 달리는 앞날이 보장되어 있던 청년이었다. 공의

증조부는 영조 임금을 보위에 올리는 데 목숨을 바친 4충신의 한 사람으

로 좌의정을 지낸 조태채(趙泰采)이며, 아버지는 호조참판을 지낸 조영

순(趙榮順)이고 장인은 형조판서인 홍지해(洪趾海)였다.


 대대로 노론계열인 공의 집안과 처가의 불행은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

(李祘 - 정조)이 보위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1776년 보위에 오른 정조

는 즉위 일성(一聲)으로 ‘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노론 벽파(辟派)들이었다.


 그들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영조 임금에게 끊임없이 사도세자를 모함

하는 진언을 하며, 다정했던 부자지간을 견원지간(犬猿之間)으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비 정순왕후와 그의 동생들, 홍인한, 화완 옹주

와 그의 양자 정후겸 그리고 많은 노론 인사들이 정조가 보위에 오르

것을 끝까지 방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조가 보위에 오르면서 한 일성으로 노론들은 살길을 도모해야 했다.

마침내 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 종1품)를 역임한 홍계희(洪啓禧)

의 집안에서 거사를 도모하였다. 정조 임금을 시해하고 그의 이복 동생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을 보위에 앉히려 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역모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홍계희의 큰 아들 홍지해는

공의 장인이었다. 거사는 장인의 동생이며, 전 황해도관찰사였던 홍술

의 처와 아들 홍상범이 주축이 되어 계획되었다. 이때 홍상범의 여종 

(甘丁)이 공의 집안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이유로 공은 역모죄에 연루

되고 말았다.


 역모죄는 3족이 멸족을 당하는 큰 죄였으나 정조는 공의 할아버지 이우

당 조태채가 영조 임금을 보위에 올리는데 큰 공이 있다하여 참형에서

유배형으로 감하여 제주에 유배를 보내 버렸다. 공의 형 원철(元喆) 역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니 두 아들을 유배 보내는 공의

어머니 속은 이미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공의 집안은 제주도와 인연이 깊다. 경종 2년(1722)에 일어난 신임사화

(辛壬士禍) 때는 공의 증조부 조태채가 대역죄인으로 몰려 진도에서 사약을

받았고 그의 아들 딸들은 모두 귀양을 가는 화를 입게 된다. 그 중 큰 종조부

조정(趙鼎彬)은 제주 정의현(旌義縣)에 유배 되고 10년 뒤인 영조 7년

(1731) 중종조부인 대사헌인 조관빈(趙觀彬)이 제주 대정현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또한 영조 30년(1754)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 종6품)으로 재직하던 공

의 아버지 조영순(趙榮順)은대정현에 유배되었다. 반 백년만에 한 집안에

서 3대에 걸4명이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선 500년 역

를 통틀어 이 같은 경우는 공의 집안 밖에 없었다.


 1777년 9월 공이 화북(禾北) 포구를 통해 제주목에 도착했을 당시 제주목사

는 황최언(黃最彦)이었으나 이듬해 새로 부임한 김수영(金永綏) 목사는 유독

조정철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여 이에 위협을 느낀 공이 늘 적거(謫居 - 유

배지)에만 머무를 정도였다. 


 제주목사의 하수인들인 판관과 아전들은 유배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심할

정도로 간섭하였다. 공이 제주에 도착하고 얼마 후에 한양의 본처가 자결하

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자신의 집안으로 인하여 지아비가 유배를 가게 되

다는 양심의 책에 그만 8개월 된 아기를 두고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공은 호시탐탐 노려보는 관헌들의 감시에 슬픔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공이 제주목 적거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공을 눈여겨보던 여인이

있었다. 바로 홍윤애라는 스무살 된 처녀였다. 그녀의 조상은 제주 입도조

윤강(洪允康)으로 시조 홍은열(洪殷悅)의 15세손이며, 문하시중 문정공 홍

언박(洪彦博)의 손자로 중훈대부 사재감(司齋監)을 지냈다. 조선 태종2년

(1402)에 아들과 손자 등 가족과 함께 낙향 입도하여 제주 조천리에 정착

하였다.


 이후 자손들은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지방에서 향리를 지내는 정도의 벼슬

에 만족하였으며홍윤애의 아버지는 홍처훈(洪處勳) 역시 제주의 향리(鄕

吏) 출신이었다. 홍윤애는 홍처훈의 1남 2녀중 막내였다. 어머니는 전주 이

였다. 그녀는 1754년(영조30) 쯤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오빠 윤성(允成)은 요절하자 문중에서는 팔촌 되는 우상(禹祥)을

입양여 후사를 잇게 하였다. 이때 홍윤애는 공의 유배지 근처에서 노모

빠, 언니 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섬 소녀답지 않게 늘씬한 체구와

얀 얼굴 상냥한 마음씨로 마을 청년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적거지 주인 신호(申好)의 처는 하루 종일 방안에 앉아 글만 읽는 한양

선비의 처지가 딱해 빨래와 식사 정도만 거드는 사람으로 이웃 녀 홍윤

애를 소개하였다. 공은 사면초가이며,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고향인 경기도 장단에는 연로하신 어머니 한 분만 있었다. 몰락한 양반

가로 전락한 본가로부터 공은 쌀 한 톨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난감한 처지였

다. 하루 하루 겨우 피죽으로 연명해야 했다.


 당시에는 적거가 있는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유배인의 살림을 도맡아

살펴야 했지만 먹고 살기 어려운 그들에게 유배인은 큰 골칫덩이나 마

지였다. 유배인이 유배지를 관할하는 목사나 현령 등과 친분이 있을 경우

그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역모죄로 유배된 공에게는 관헌

들의 무서운 감시만 있을 뿐이었다.


 제주로 유배 가는 벼슬아치들의 운명은 환국(換局)이나 정변(政變) 등으

로 시국이 바뀌어 한양으로 돌아와 조정에 복직되거나 아니면 현지에서

임금이 내리는 사약을 받고 죽거나 또는 영영 육지를 밟아보지 못하고

귀양지에서 늙어 죽어야 했다.


 1521년(중종 16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된 전, 형조판서

김정(金淨)이 사사된 적이 있었다. 또한 1641년 인조반정으로 보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이 제주 유배생활 중에 유명을 달리 하였으며, 많은 조정

의 신료들이 제주에 유배되어 비운의 삶을 살기도 했다.


 처음 공과 홍윤애는 서먹한 사이였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공을 위

헌신하는 제주 처녀의 소박한 마음씨에 공의 마음도 차차 열리면서 존

경하는 사이에서 어느덧 사랑하는 사이로 변하고 말았다. 관헌들의 감

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하여 홍윤애는 주로 깊은 밤이나 새벽을 틈타

공의 적거를 드나들었다.


 낮에는 바다에 나가 해녀로 일하면서 노모를 봉양하고 밤에는 공의 시중

을 드는 바쁜 몸이었다. 그녀는 공의 따뜻한 인성과 늘 시문을 가까이하

며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는 의젓함에 매료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희망이며, 상을 살아가는 낙이었다.


 그녀의 복중에는 사랑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공은 사랑의 결실이

어가는 것이 기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였다. 만약 목사나

판관이 알면 사랑하는 여인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 같았다. 1781년 2월

에 홍윤애는 예쁜 딸을 딸을 분만하였다. 두 사람은 의 분만을 철저히 숨

겨야 했다. 두 사람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1781년 3월 공과 적대관계에 있던 남인 계열의 김시구가 목사로 부임

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김목사는 공을 죽일 요량으로 공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의 적소를 감시하던 끝에 홍윤

애가 목사의 감시망에 포착되었다. 목사는 홍윤애에게 죄인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모진 문을 가하였다.


 “조정철이 본가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양식을 조달하였으렷다. 바른

대로 말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그러나 계속 고집을 피우면 네년은 죽음

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으리, 소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밥이나 짓고 빨래를 해드린

밖에 없습니다.”
 “저런 발칙한, 저년을 대들보에 매달아 실토할 때까지 매를 쳐라.”

 
 여인의 비명은 바람을 타고 제주목 관아 담장을 넘어 백성들 귀
에 전

해졌다. 사람들은 목사가 생사람을 잡는다며 몸서리 쳤다. 목사가 아무리

매를 치며 자백을 강요하였지만 홍윤애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만약 그녀

가 혹독한 매에 굴복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사랑의 힘 앞에 무소불

위의 권력도 어찌할 수 없었다. 


 제주 처녀 홍윤애는 사랑하는 낭군 조정철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제주목사가 무고한 제주 여인을 죽였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김목사는 공이 제주에 유배 온 죄

인들과 연계하여 역모를 꾸몄다고 조정에 거짓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

서는 서둘러 민심을 수습해야 했기에 급히 사를 파견하여 사건의 전

말을 조사토록 하였다.


 조사 결과 제주목사의 보고는 거짓임이 드러나자 조정은 목사와 판관

그리의현과 대정현감까지 갈아 치우는 결단을 보였다. 공은 이

건으100여일 동안 제주관아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과 신문을 받아야

했다. 그 석 달 동안의  고통은 조정의 의금부나 포도청에서 시행하는

문초보다 더 심했다.


 공은 1782년 정의현으로 이배(移配)되었고 1890년 추자도로 또 다

이배될 때 까지 8명의 목사가 바뀌었지만 공에 대한 감시는 더욱 했다.

어느 날 정의현 관헌들이 공의 적거를 뒤지더니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님

이 주신 수의(壽衣)를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추자도에서 13년의 유배 생활을 살던 공은 전라도 광양현 그고 황해

도 토산현과 경기도 장단으로 옮겨 다니다 1805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27세에 시작한 기막힌 유배생활이 29년 만에 끝났으나 공은 백발이 성

성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공은 조정에 복직하였고, 1811년 6월에 자신을 살리

위해 목숨을 버린 연인 홍윤애가 묻혀있는 제주도에 제주목사 겸 전라도

방어사로 부임하게 된다. 공은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통곡하며, 그녀의 원혼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30년 만에 딸과 눈물의 상봉을 하게 된다. 또한 공은 ‘洪義女之墓’

라 쓴 묘비를 세우고 뒷면에 홍윤애의 행장과 추모하는 시를 지어 새겨

았다.


 《洪義女鄕吏處勳女 □宗丁酉余以罪置耽羅義女時出入余謫辛丑壬人

余以義女作餌殺機墮突血肉狼藉義女曰公之生在我一死旣不服又雉懸

而殉閏五之十五日也後三十一年余蒙 思以防禦來鎭玆方象設墓道系以

詩曰


□玉埋香奄幾年 誰將爾怨訴蒼旻 黃泉路邃歸何賴 碧血藏深死亦綠

千古芳名烈 一門雙節弟兄賢 鳥頭雙闕今難作 靑草應生馬□前

 濟州牧使兼全羅道防禦使 - 趙貞喆 書》


 홍의녀는 향리 처훈의 딸이며, 내가 죄를 얻고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적소에 드나들었다. 1781년 제주목사가 사건을 꾸며 나를 죽이려는 미기

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를 살리는 길은 죽음뿐이라고 결심하고 형장(刑杖)

을 받았으나 불복하고 죽었다. 윤 5월 15일이었다. 나는 임금의 은혜로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로 도임하여 의녀의 무덤을 단장하고 시를 쓴다.



옥 같던 그대 모습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먼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었어도 인연은 이어졌네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리니

한 가문에 높은 절개 모두 어진 형제였네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표할 길이 없어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譯 ; 홍순만‘열녀 홍윤애전’에서 인용)


 나는 서울에서 시작하여 완도, 추자도, 의녀 홍윤애 묘터, 제주목, 정의현

등 공의 험난했던 유배길과 현재 공이 영면해 있는 충주시 수안보면 안보

리 박석고개를 돌아보며, 200여 년 전 한 유배인의 겪은 참담한 삶을 생각

해 보았다. 조선 500년 동안 제주에 유배를 간 조정의 관리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대부분 유배인들은 제주의 여인을 객고를 달래주거나 필요에 의

해 고용한 천비(賤婢) 쯤으로 여기고 유배가 풀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 여인의 사랑이 200여 성상이 지나도록 나그네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해풍과 풍를 헤집고 두 분의 유택을 찾아다니며 술 한

따르고 장고(長考)에 빠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수안보 박석고개 공의 묘소 앞에는 2004년 양주 조씨 문중에서 세운 묘

비석이 있다. 비문에는 공은 생전에 세분과 인연을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

다.


 첫 번째가 정부인 남양 홍씨로 공과 합장한 상태고 두 번째가 의녀 남

홍씨로 바로 제주여인 홍윤애이며, 세 번째가 공이 유배에서 풀려 고향에

돌아가 혼인한 정부인 영월 신씨(辛氏)로 공의 묘역 월편(越便)에 영면해

있다. 의녀 홍윤애는 200년이 지나 양주 조씨 가문의 정식 며느리로 인정

받았다.


 서양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고, 우리에게는 이몽룡과 성춘향이 있으

나 모두 실존 인물인지 불분명하다. 정헌 조정철과 의녀 홍윤애는 200여

년 전에 실존했던 인물이며,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공이 쓴 정헌영해

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는 그때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시문인협회에서는 의녀 홍윤애가 사망한 음력 5월15일에 홍윤애추

모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제7회가 된다. 두 연인의 이야기는 오

페라로 만들어져 이미 여러 번 공연된 적이 있으나 아직도 조정철과 홍윤

애의 가슴 시린 애가(哀歌)는 해도(海島) 안에서만 맴도는 것 같아 씁쓸

하다.


 언젠가 두 분이 만인의 연인으로 우뚝 서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면서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뒤늦게 두 님을 찾은 송구했던 나그네 마음을 졸시

(拙詩)로 지어 용서를 빌고자 한다.










                                    소회(素懷)
                                            - 의녀(義女) 홍윤애를 기리며 -




               지난밤 사나운 비바람에 붉은 꽃잎 휘날리더니
          낮은 언덕 청택(靑宅)에 소복하게 쌓였네
          춘흥(春興)은 봄 가지 마디마디에 걸려 있고


          나그네 밤새워 천리 험한 바닷길 달려
          돌고 돌아 뒤늦은 인사가 송구하여
          감주(甘酒) 한잔 올리고 차마 고개 들지 못하네


          한양 선비 사랑한 죄가 태산 같고
          목숨 바쳐 임을 구한 의기(義氣) 하해와 같은데
          쌍쌍이 창공을 나는 새들은 임의 뜻 알고 있는지

  
          바다 건너 고향 가신 낭군 소식 천금 같은데
          빈손으로 찾아온 객지 길손 임 뵐 낯이 없어
          두 뺨을 적시는 뜨거운 원루(寃淚)로 대신하네


          박석고개 임의 춘정 날마다 남쪽으로 향하고
          영주(瀛洲)의 임은 밤마다 뭍으로 난 꿈길 걷는데
          어느 날 청사초롱에 밤새 불을 밝힐거나


          원앙의 인연은 삼세(三世)에 걸쳐 이어지리니
          창해(滄海)가 풍성한 뽕잎으로 뒤덮이는 날
          두 님은 백록담 무지개 오작교에서 상봉하리


                      -  2018.4.23. [14:25]
                        제주 애월읍 유수암리 의녀 홍윤애 묘에서







       

    충주 수안보면 안보리 박석고개에 소재한 정헌 조정철님 묘소




    

  정헌 조정철님 묘소 앞 비문에 세분의 인연이 적혀 있는데 좌측에서 두번째

  "의녀 남양홍씨 묘 제주 금덕"이라고 씌여 있다.




    

  충주 수안보면 안보리 박석고개에서 본 정헌 조정철님 묘소 전경



  





     

       제주시 일도동  전농로에 있는 의녀 홍윤애 무덤 터 표지석




     

      제주목 관아




   

    제주 애월읍 유수암리  의녀 홍윤애 묘(좌측), 우측은 손자

  박팔규의 묘




   


  의녀 홍윤애 묘비석 뒷면 - 조정철 목사지 지은 행장과 추모시가 적혀 있다.




     

       제주 성읍마을 초가 





 조정철과 홍윤애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D_L7RJNBWjo

https://www.youtube.com/watch?v=dy7f6Kaeq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