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석궁에 내린 비(3)
요석궁에 내린 비(3)
- 여강 최재효
사람이 언젠가 생각했던 것은 물질세계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 생각이 착하
든 그렇지 않든 생전에 어떤 형태로 든 현상계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내가
타인을 탓하는 심성을 지니면 나 역시 타인에게 질타받는 위치에 있게 되며,
고집이 센 경우에는 병이 생기기도 한다.
주위의 현상과 환경은 본인 마음의 구체화이니 불행한 일이 생기면 어떤 마
음을 고쳐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참회해야 한다. 나쁜 마음을 버리
면 그 불행은 사라지게 된다. 인연과 심체(心體)의 구상화는 무슨 연관이 있
나.
인(因)은 생각 즉, 염(念)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자꾸만 동심(同心)이
일어나면 심신에 각이 그려진다. 원인이 생겨났다고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 연(緣)은 반드시 어떤 계기가 있어야 일어난다. 어떤 계기가 시간과
공간 구도 속에서 걸리고 그 결과 현상이 곧 상념의 업(業)이 된다.
한 밥상에서 밥을 먹었는데도 어떤이는 소화가 안 되고 어떤 이는 멀쩡하
다. 이유는 동일한 연(緣)에 닿아도 각자 인자(因子)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름 난 의사의 처방은 인연을 제거하는 방법이지만 절대로 인을 제거자지
못 한다. 근본을 다스리는 것 보다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인을 제거할 때
병이 사라진다.
인간 사회는 이웃과 옷깃을 스칠 수 밖에 없다. 옷깃이 한번 스치는 데 500
겁(劫)의 인연이 요구된다. 한 겁은 가로와 세로가 80리, 높이가 20리 되는
크기 바위에 선녀가 천년마다 한 번씩 지상에 내려 왔다가 올라갈 때 스치는
옷깃에 바위가 모두 닳아서 사라지는 세월을 말한다.
또한 겁은 어떤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말하는
데 하늘과 땅이 한번 개벽한 때에서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겁이란 세월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의 장구한 시간이
란 뜻이다. 저승에서 500겁을 같이한 사람들이 이승에서 옷깃 한 번 스칠
인연이 된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인연 인가? 비록 옷깃만 스치고 지나칠지라도 그 이전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려는가. 그런 것을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현생에서 부부가 되려면 7,000천 겁의 인연이 지속되야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좋은 사람도 있고 싫은 사람도 있다.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때로 싸우기도 한다. 사람이 군집 사회생활을 하는 대상이에
이 같은 현상을 피할 수 없다.
사람 누구든 이유도 없이 누구를 좋아한 적이 있을 테고 까닭도 없이 증오한
때도 있다. 누구를 좋아하는 만큼 그 역시 사랑받았을 테고 누굴 증오하는
만큼 미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 부인께서 직접 원효스님을 만나 스님의 속내를 파악하셨다고요?”
“폐하, 소첩이 두 전군과 요석공주를 대동하고 분황사에 다녀왔습니다. 원효
스님의 법문에 은연 중 공주를 원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기왕 마음을 굳히셨다면 서둘러도 될 것 같습니다. 공주도 분황사에 다녀온
뒤로 스님을 더욱 흠모하는 기색이 뚜렷합니다.”
김춘추는 문명왕후 문희와 보희부인과 함께 저녁 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과연, 과연. 원효는 세속을 등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자신의 해탈을 위해
평생을 수련하는 여타 스님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짐은 이미 알고 있
었습니다. 부인께서 직접 원효스님의 의중을 보셨으니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서라벌에도 곧 꽃이 피고 벌 나비가 날아들 테니 좋은 날을 잡아 공주를 원효스
님에게 하가(下嫁)하도록 하십시다. 원효가 스스로 파계를 하여 신라의 만백성들
가슴 속에게 파고들어 자신의 사상을 깊이 침투시키고자 하는 바를 짐이 간파
하였습니다. 몰가부 노래도 그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폐하, 너무 조급하신 것 같습니다.”
김춘추의 말에 보희부인은 난색을 표하였다. 그러나 김춘추의 의도는 확고
부동한 듯 보였다. 초저녁부터 김춘추, 김보희, 김문희 세 사람이 지밀전(至密
殿)에서 즐기는 조촐한 주연은 무척이나 재미있고 화기애애한 자리가 분명해
보였다.
김춘추는 술이 어량해지자 문명왕후와 보희부인을 번갈아 보면서 솟구치는 음
심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김춘추는 문희를 맞을 때를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
를 지었다. 김춘추는 술기운이 오르자 눈을 감고 옛 일을 회상했다.
“춘추야, 저 아이 배속에 있는 아이가 네 아이가 분명하렷다?”
김춘추는 유신공의 집에 놀러갔다가 유신공의 고의적인 희롱에 옷고름이 떨어
졌다. 유신공은 큰누이동생 보희에게 김춘추의 옷고름을 꿰메도록 기회를 주었
으나 보희는 부끄러워하며 주저하였다. 그때 보희부인의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떨어진 옷고름을 꿰메주었고 그 인연으로 문희는 김춘추와 통정(通情)하여 임신
하게 되었다.
김유신은 여동생 문희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누구의 씨앗인지 잘 알고 있었지
만, 김춘추가 머뭇거리자 서라벌 한 복판에 장작불을 지피고 사통하여 임신한
여동생 문희는 가문의 수치라고 소문을 내고 화형(火刑)에 처하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김춘추를 대동하고 서라벌 남산에 행차했던 선덕여왕은 서라벌 한 복판에서
연기가 나자 모르는 척 하였다. 선덕여왕은 이미 김유신과 김춘추의 관계를 상
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성골과 진골 등 골품제가 엄격했던시대였다. 김
춘추의 이모였던 선덕여왕은 성골의 자격이 있으면서도 진골로 지내며 대신
들로 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조카 김춘추가 안타까웠다.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선덕여왕의 암묵적 승락하에 김춘추는 산 채로
화형을 당할 뻔한, 사랑하는 여인 김문희를 구해 낼 수 있었다. 김춘추의 정실
부인이 된 문희는 언니의 오줌 꿈을 산 연유로 왕비가 되자 늘 언니 보희부인
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왕후, 그때 얼마를 주고 오줌을 사셨습니까?”
“네에?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문명왕후 김문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아비 김춘추와 언니 김보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오. 아니오. 내가 술이 좀 올라 해본 소리입니다.”
김춘추는 술잔은 연거푸 비우며 박장대소하였다. 보희부인과 문명왕후 김문
희는 지아비의 말뜻을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 하며, 엉뚱한 이야기로 화재를
돌렸다.
“언니,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조카의 하가를 서두르는 게 좋아요.
아마도 조카와 원효스님의 혼사(婚事)가 서라벌 전해지면 한바탕 휘오리 바람이
일거예요. 먼젓번에 폐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조카와 원효스님의 혼사는 국가의
중흥과 백성들의 결집을 위한 중차대한 일이니 빨리 진행시키는 게 옳다고 봐요.
원효스님이 항상 폐하와 뜻을 같이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바에야 서둘러
하가시키는 게 좋다고 봐요. 그 스님 발목에 족쇄를 채워놓아야 그 스님이 폐하의
삼국통일에 대한 대망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말이 없을 겁니다. 왕실은 커다란
걸림돌을 제거하여 하늘을 떠바칠 든든한 기둥을 얻으니 좋고 그 스님은 파계하여
백성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명분이 있어서 좋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지요.”
문명왕후가 김춘추와 언니 보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너무 빠른 것 같아서-.”
요석공주의 이모 문명왕후가 한마디 거들자 보희부인은 난처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여봐라, 요석공주를 불러오너라.”
“폐하, 공주를 다 부르시다니요?”
보희부인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원숙미로 보나 미모로 보나 궁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있는 두 자매를
바라보는 김춘추의 시선에 행복감이 묻어있는 듯 했다. 김춘추는 당사자인 요석
공주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웬만해서 김춘추는 지밀전으로 왕자나 공주를
부르지 않았다.
“오늘은 짐이 공주의 얼굴이 보고 싶구려. 그 아이를 본지도 꽤 된 듯 해요.”
김춘추의 말에 보희부인과 문명왕후의 표정이 엇갈렸다.
“폐하 이왕이면 궁궐에 있는 왕자들과 공주를 모두 부르시지 않고요?”
“왕후, 그럴까요?”
문희는 태자인 김법민을 장차 보위에 올리고 싶어 했다. 문희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 딸이 있었지만 제 각각 특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문명왕후 문희는 기
회만 되면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식들은 김춘추에게 자주 대면시키려 애를 썼다.
“여봐라, 지금 궁 안에 있는 왕자들과 공주들을 모두 이곳으로 들라하고 옥로주
(玉露酒)와 맛있는 음식도 넉넉하게 내오도록 하라.”
“폐하, 궁궐 안에 있는 왕자, 공주들을 모두 부르시다니요?”
“짐이 아이들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요.”
보희부인은 동생 문희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으나 지아비 김춘추 앞에서는 전
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서 나온 김개지문과 김지원 전군 그리고
요석공주는 분명 이 시각에 술에 절어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김춘추의 명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궁궐 안에 있던 왕자 공주들이 김춘추가 있
는 지밀전으로 모여들었다. 부왕의 하명을 감히 어길 왕자와 공주는 없었다. 부왕
의 말 한마디에 신라의 산천초목이 벌벌 떠는 세상이니 감히 누가 김춘추의 명을
어길 수 있겠는가.
“소자 법민(法敏), 부왕과 두 분 어머님을 뵙습니다.”
“미거한 소자 인문(仁文), 부왕과 어머님 그리고 이모님을 뵙습니다.”
“소자 문왕(文王), 부왕과 두 분 어머님을 뵙습니다.”
“노차(金老且),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이모님을 뵙습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요석궁의 미거한 소녀가 부왕과 왕후님, 어머
님을 뵙습니다."
요석공주가 살포시 웃으며 날아갈 듯 세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미련한 소자 지경(智鏡), 부왕과 어머님, 이모님을 뵙습니다. 그 동안 강녕
하셨습니까?”
“소자 개지문, 부왕과 왕후님 그리고 어머님을 뵙습니다.”
“소자 지원, 부왕과 왕후님과 어머님을 뵙습니다.”
“소녀 지소(智炤), 부왕과 어머님, 이모님을 뵙습니다.”
문명왕후의 소생으로 나이 어린 김춘추의 셋째딸 지소가 넙죽 엎드려 절을 하자
김춘추의 입이 벌어졌다. 김춘추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여운 막내딸이 었
다.
“소자 차득(車得), 부왕과 두 분 왕후님에게 인사 올립니다.”
“소자 마득(馬得), 아버님과 두 분 왕후님을 뵙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김춘추의 네 번째 부인 용보(龍寶)의 소생 차득과 마득이 김춘추와 김보희, 문희
자매에게 절을 하였다.
“오냐, 오냐. 너희들을 보니 짐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구나.”
“폐하께서는 복도 많으십니다.”
문명왕후가 여러 왕자와 공주를 둘러보고 지아비 김춘추를 보며 한마디 하였다.
“그래요? 왕후, 오늘 궁궐에서 무슨 잔치라도 있었습니까?”
“폐하, 오늘 법민이 여러 동생들과 누이들을 초대하여 조촐한 연회가 있었습니
다. 그동안 법민 왕자가 폐하를 도와 동정서벌(東征西伐)하느라 동생들을 건사
도 못하고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여 오늘 위무연을 열었답니다.”
“오, 그래요? 짐만 모르고 있었구려.”
“폐하께서는 국사로 바쁘시니 아이들만 모인 듯 합니다.”
김춘추는 태자 법민을 비롯한 자신의 소생들을 일일이 바라보며, 흐뭇한 표
정을 지었다. 왕실에 자식들이 많다는 것은 곧 풍요와 후사의 건실함을 뜻했
다. 자식이 없어 왕위를 물려주지 못했던 선대왕들의 고충을 김춘추는 일찍
파악하고 많은 자식들을 보았다.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첫째부인 보라궁주의 소생인 고타소(古陀炤) 공주와
김문주 그리고 몇몇 전군(殿君)들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고타소 공주는 얼마
전에 대야성에서 남편 김품석과 백제군을 맞서 싸우다 사망하였기 때문에 함
께 할 수 없었다.
아들딸 11명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대부분 입에서 독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부왕의 지엄한 명령이라 궁궐 안에 있던 왕자와 공주 그리고 전군들
은 부왕의 명을 받들어야 했다. 부왕의 명을 받고 달려온 왕자, 공주, 전군들
은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바싹 긴장한 상태였다.
“아버님, 소자가 여러 형제자매를 초빙하여 다과를 베풀고 있었 사옵니다.
갑자기 저희들을 찾으시니 무슨 일이 일어 났는줄 알고 걱정하였사옵니다.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태자 김법민이 형제자매를 대신하여 부왕 김춘추에게 고하였다. 김법민은
후리후리한 키에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전장에 나가면 무척 용맹하
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훗날 김춘추의 보위를 이을 강력한 후보자로 거론되
고 있었다.
“그것 참으로 잘 되었구나. 아비가 너희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보는 게 얼
마만이지 모르겠구나. 이 아비나 너희 모두 각자의 사생활이 있으니 그려러
니 생각한다. 너희들은 갑자기 부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석공주를 원효스님에게 하가시키려고 하는데 너희들의 뜻이 어떤지 한번
물어보고 싶구나. 이 아비의 처사에 이의가 있거나 불만이 있으면 아무 말이
라도 좋으니 기탄없이 해보거라.”
“너희들도 귀가 있으면 원효스님이 지은 노래를 이미 듣고 있을 것이다.”
문명왕후가 거들고 나섰다.
“문왕 왕자, 몰가부(沒柯斧)의 뜻을 알고 있느냐?”
“어머니, 소녀가 말씀드릴까요?”
“요석공주는 가만히 있거라. 오라비에게 물었다.”
보희부인의 말에 김문왕과 요석공주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네, 어머님. 몰가부란 자루가 없는 도끼를 뜻하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즉,
풀이하자면 남편과 사별하였거나 헤어진 여인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춘추의 넷째 왕자인 김문왕은 부왕을 도와 정사를 보고 있었다. 주색을
가까이 하지도 않고 특별한 잡기도 없었다.
“개지문은 지천주(支天柱)가 무슨 뜻으로 알고 있느냐?”
왕자 김문왕이 재미없는 답변을 하자 이번에는 김춘추가 전군인 김개지문에
게 물었다.
“아버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라는 듯으로 곧 나라의 큰 인재(人材)
를 말합니다.”
“오. 그래. 네가 제법이구나. 늘 술만 마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김춘추는 김개지문 전군의 총명함을 칭찬하며 호쾌하게 웃었다.
“송구하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인문(仁文)이가 원효스님이 요즘 서라벌에 퍼트리고 있
는 노래를 불러보고 그 뜻을 풀이해 보거라.”
“부왕, 소자가 어찌 감히.”
“괜찮다. 어서 풀이해보거라.”
김인문은 이모인 보희부인과 요석공주의 눈치를 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하면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하리라, 즉,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
이는 불제자의 입에서 나오기 다소 민망한 말이기는 하나, 속뜻이 매우 깊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권력과 여근(女根)을 상징하는 도끼를 원한다는 것
도 예삿일이 아니지만 나라를 위하여 든든한 기둥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 큰
반향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하오나, 부왕과 형님께서 삼한을 통일한 이후에 일을 원효스님께서 간파하시
고 부왕께 인재를 손수 만들어 드리겠다고 하니 마다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 신라 왕실의 경사이며, 천년 왕국을 떠받칠 동량지재를 얻
을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아버님,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시면 안 될 것
입니다.
소자가 얼마 전에 아버님과 외삼촌 그리고 두 분 어머님이 의견을 교환하
시고 요석 동생을 원효스님에게 하가시키기로 결정을 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소자는 네 분의 합의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소자는 길어야 십년 안으로
우리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시켜 남삼한을 흡수하고 뿐만 아니라 당나
라에 빼앗긴 옛 조선의 고토(故土)까지 통일할 것으로 내다 보고 있습니다.
전장이 끝나면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등을 다독거릴 훌륭한 문장이 필요
합니다.
부왕께서는 원효스님의 높은 학식으로 통일 후 신라의 정치를 모색하시고
백성들의 높은 인기를 흡수하여 민심을 잡아야 합니다. 스스로 파계하고 백성
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정토신앙을 부르짖는 원효스님이야말로 우리 신라왕실
에 절대로 필요한 인물입니다.
원효 스님이 언행이 다소 거칠기는 하오나 속이 깊사옵니다. 그 분을 왕실과
인연을 맺도록 하여 발목을 잡아 놓으시고, 삼국을 통일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자 하는 아버님에게 사상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 분의 종교적
영도력은 진골 출신 불제자들 중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사옵니다. 아버님, 두 분
어머님, 소자의 간언을 받아 주소서.“
부왕과 형 법민을 도아 삼국통일을 위하여 동부서주하고 있는 김인문은 행
정가이면서 문장가이기도 하였다. 김인문은 평소에도 요석공주와 사이가 돈독
하였고 과부가 된 이후에는 더욱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물론 요석공주와
문명왕후의 소생들과는 모두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김인문은 친 오
라비인 김개지문이나 김지원보다도 요석과 친한 사이였다.
“과연, 과연. 내 아들이로다. 네가 이 아비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구나. 인
문아, 정말로 명민하구나.”
김춘추는 여러 명의 아들 중에서 김인문 왕자를 가장 총애하였다. 만약 법민
이 장자가 아니었다면 김춘추는 당장이라도 김인문에게 보위를 물려 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둘째가 정말로 영특하구나. 이 어미도 네 말에 동감이다.”
문명왕후도 침이 마르게 둘째 아들 김인문을 칭찬하였다.
“인문 오라버님께서 정확히 부왕과 원효스님의 의중을 짚으셨어요. 원효스
님은 신라, 고구려, 백제 더나가 당나라를 통틀어 오직 한분 밖에 안 계신 생
불(生佛)이세요. 뿐만 아니라, 그 분은 천문(天文), 지리, 중생의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계를 꿰뚫고 계시 답니다. 그런 분의 정기(精氣)를 받는 다는 것은
파천황(破天荒)에 버금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테지요.
소녀는 아버님과 외삼촌 그리고 두 분 어머님의 뜻을 받들어 원효스님을 파
계시키고자 한답니다. 그 분이 지금보다 더 신라 백성의 가슴을 파고들어야
신라는 천년 왕국을 기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문 오라버니 말씀대로 호랑
이 사냥이 끝나면 칼이나 활은 창고에 보관하고 앞으로의 일을 걱정해야 합
니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은 나라 건설 후에 한신(韓信)을 비롯한 많은
장수들을 제거하였습니다.
지금 백제왕 부여의자(扶餘義慈)는 신라국 선화공주(善化公主)님과 무왕(武
王) 사이에 태어나신 분입니다. 따지고 보면 선화공주이 부왕의 이모님이시
니 아버님과 이종사촌 지간입니다. 그러나 혈연에 의한 정은 이미 사라진지 오
래입니다. 얼마 전 고타소(古陀炤) 큰 언니와 형부 김품석(金品釋) 대야성 성주
께서 백제왕의 부하인 부여윤충(扶餘允忠)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일로 부왕께서는 이종사촌인 백제왕에게 원한을 품으시었고 반드시 삼국
을 통일하시겠다고 다짐을 하셨습니다. 인문 오라버님 말씀대로 머지않아 아
버님과 외삼촌께서 신라내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을 잠재우시고 삼국을 통
일하실 거로 믿습니다. 나라를 잃고 방황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流民)들 그
리고 불안해 할 신라의 백성들을 붓으로 위무할 위인(偉人)이 필요합니다.
소녀는 바로 그런 인걸(人傑)을 생산하여 아버님에게 효도를 하고 싶습니다.
물론 현재 소녀에게 전 남편인 김흠운 장군의 핏줄인 두 딸이 있습니다. 소녀
가 불제자를 파계시키고 혼인한다고 하여 두 딸들이 잘 못될 일은 없을 것입
니다. 훗날 법민 오라버님께서 소녀의 두 딸들을 잘 돌봐주시리라 믿사옵니다.
이번 일이 잘 성사되어 부왕과 두 분 어머님께서 크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습
니다.
오라버니들 제가 당대의 선지식(善知識)이며, 수많은 신라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 같은 원효스님에게 하가하는 것을 욕하지 말아주세요. 만약 제가 그 분과
혼인을 한다면 서라벌이 발칵 뒤집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소용돌이는 한때라
고 봅니다. 이 동생의 몸에서 장차 신라 조정을 지탱할 천주(天柱)가 나온다면
우리 신라 왕실의 영광이요, 설씨가문에 대대손손 큰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
다.”
청산유수 같은 요석공주의 달변(達辯)에 부왕 김춘추와 보희부인, 이모 문
명왕후 그리고 여러 왕자들 그리고 전군들은 말문이 막혔다. 늘 어린 여동생
이라고 보았던 요석공주의 오라버니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부왕인
김춘추와 이모 김문희 왕후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요석공주를 잘 못 알고 있었
다고 판단하였다.
“오, 요석공주야. 이리 가까이오너라. 이 아비가 그 동안 너를 잘못 생각하
고 있었구나. 네 지아비가 조천성에서 전사한 뒤로 내가 아비로서 한 일이 없
구나. 오늘 공주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비가 부끄럽구나. 네가 사내대장부로
태어났다면 유비의 제갈공명이나 유방의 장자방 뺨쳤을 듯 싶구나. 이 아비가
공주에게 술을 한잔 내리고 싶구나.”
김춘추는 요석공주의 말에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얘야, 그동안 정말로 미안했구나. 너의 깊은 속을 몰랐구나. 앞으로는 네가
자주 이 아비를 찾아와 말동무라도 해주렴. 지존의 자리는 정말로 외롭단다.
법민과 인문 그리고 모든 왕자들이 앞으로 너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줄 것 이
야.”
“아버님에게는 두 분 어머님이 계시잖아요. 소녀가 어찌 감히.”
“어쩌면 말하는 것도 이리 예쁠꼬. 하하, 하하하.”
김춘추는 보석을 가까이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무관심에 깊이 후회
하는 눈치였다. 김춘추는 연거푸 술 석잔을 요석공주에게 내렸다.
“폐하, 공주가 술을 잘 못하옵니다.”
보희부인이 동생 문명왕후 눈치를 한번 보고 속삭였다.
“부인, 괜찮소. 부녀가 처음 수작(酬酌)을 하는 겁니다. 짐이 오늘 공주의 말
을 듣고 눈이 번쩍 뜨였소이다. 너무 괘념치 마오.”
“언니, 폐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그 동안 고타소 공주의 죽음으로 폐하께서
무척 우울하고 적적해 하셨어요. 내일부터는 요석공주가 폐하를 즐겁게 해드
려야 할 것 같아요.”
요석공주의 야무진 말에 대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두 왕후와 왕자들은 듣거라. 짐이 요석공주를 서둘러 원효스님에게 혼인을
시킬 것이다. 짐의 판단이 옳다면 요석공주는 장차 신라의 동량지재를 탄생
시킬 것 이다. 그러니 지금 이후부터 두 분 왕후와 너희 왕자들과 공주는 요석
공주를 이 아비를 대하듯 할지어다. 이 말은 짐의 지엄한 명이니라. 알아듣겠
느냐?”
추상같은 김춘추의 명령에 여러 왕자들과 전군들은 머리가 방바닥에 닿을
정도로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저희 두 자매는 폐하의 명을 받잡겠나이다.”
눈치 빠른 문명왕후 김문희가 김춘추의 비위를 맞추었다.
“아버님, 소자 법민을 비롯한 아우들은 아버님의 지엄하신 명을 받들겠나
이다. 장차 통일된 제국, 신라의 기둥을 생산할 요석공주를 정성껏 보호하고
원효스님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왕자들과 지소 공주는 다시 한 번 부왕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렸다.
“오냐. 오냐. 법민이와 여러 왕자들을 믿으마.”
“아버님, 소녀도 언니를 곁에서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지소야. 너는 언니와 잘 지내야 한다. 그동안 언니와 잘 지냈을
테지만 이 아비의 뜻을 오늘 알았을 테니 앞으로는 더욱 더 마음을 나누며 친
자매처럼 지내거라.”
김춘추는 어린 지소공주를 무릎에 앉히고 등을 다독거렸다.
“아버님, 소자 개지문. 누이동생을 그리 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
다. 친 오라비로서 앞으로 동생을 더욱 가까이서 챙기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너희들이 비록 전군(殿君) 같기는 하나 이 아비에게는 법민
이나 문왕이처럼 다 같이 소중하고 귀한 자식들이다. 누이동생을 잘 보호해
주거라. 또한 원효스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거라. 법민은 내일 날
이 밝으면 예부(禮部)와 협의해서 요석공주와 원효스님의 혼인 사실을 공포
하거라.”
“소자, 부왕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김춘추는 개지문, 지원 등 두 전군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버님께서 예전에 안 하시던 말씀을 하시며, 요석공주와 개지문, 지원 형
제에게 크게 관심을 보이시네. 우리 형제들의 효심이 마음에 안 드시는가?
요석공주를 중에게 시집보내시겠다는 부왕의 심사를 이해할 수가 없네, 아무
리 나라의 인재를 얻는 일이라 하여도 그렇지 중에게 공주를 하가시키겠다는
말씀이신가? 그것참, 알 수가 없네. 부왕이 노망이 드신 게 분명해. 킁-.’
부왕 김춘추의 행동을 말없이 바라보던 여섯째 왕자 김노차(金老且)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배가 다른 동생이지만 김노차는 평소 요석공주를 남
몰래 은애(恩愛)하고 있었다. 김노차와 김개지문, 둘은 여러 명의 왕자들 사이
에서도 무척 친하게 지내면서 자주 요석궁에 드나들었다. 그렇다보니 자연 요
석공주와 각별한 정을 나누고 있었다.
“여봐라. 나인들은 술과 맛있는 음식을 잔뜩 대령하렷다. 짐이 오늘밤 두 왕후
와 왕자, 공주들과 취하도록 마시고 싶구나. 속히 대령하렷다.”
신라의 영웅 김춘추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의 명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죽음
이 뒤따랐다. 김춘추는 후덕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지만 냉정한 승부사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친자식이라도 자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제재를 가하였다. 그러나 한번 믿고 정을 주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성격의 소유
자 였다.
“벌도리 스님. 소문 들었어유?”
“아미타불. 개보스님, 무슨 소문을 말하는 것인지요?”
“아따, 스님은. 서라벌 사는 분이 맞아유?”
“나무석가모니불. 무슨 소문인데 그러는가요?”
서라벌의 크고 작은 불사(佛舍)에 속한 불제자들은 모이면 요석공주와 원효스
님 이야기뿐이었다.
“글쎄 김춘추 둘째딸 요석공주가 원효 스님에게 시집을 간다고 합디다. 그게 말
이 되는 소린가유? 그것도 진골(眞骨) 신분의 여인이 육두품 밖에 안 되는 설씨
(薛氏) 가문에 시집간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유.”
“나무관세음. 그것참.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구만요.”
“나무아미타불. 세상이 망조가 들었어. 어떻게 중이 속세의 여인과 혼인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감.”
요석공주가 원효스님에게 하가한다는 신라 예부의 발표는 서라벌을 요동치게
하였다. 서라벌뿐만 아니라 신라 전역의 불교 종단(宗團)에서 이단아(異端兒)
취급을 받는 원효스님이 요석공주와 혼인을 한다는 조정의 발표는 서라벌 사람
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청불 스님, 요석공주가 원효스님에게 하가(下嫁)한다네. 그게 말이 되는 소
린가? 그것도 진골(眞骨) 신분의 여인인 신라의 공주가 육두품 밖에 안 되는
설씨(薛氏) 가문에 시집간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나무광세음. 천지가 개벽할 일이네 그려. 살다보니 별 일을 다보네.”
“지존께서 아마 실성이라도 하신 게 틀림없어. 어떻게 공주를 속승(俗僧)에게
하가를 시킨다는 거야, 말세로세. 말세야.”
스님들은 쉬는 시간이면 삼삼오오 모여서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사님, 원효 스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나무관세음보살. 원효가 누구지? 아, 요석인가 요강인가 하는 공주와 살을 섞
고 싶어 한다는 그 미친 땡중놈 말이로군. 허-. 나라가 망조가 들려나. 은지야,
여기 술 한 동이 더 내오거라. 대안, 대안, 대안-.”
“대사님, 벌써 대취하셨어요. 그만 드시어요.”
“나무광세음보살. 허허-. 고년 참. 내오라면 내올 것이지 웬 잔말이 많은 고.
대안, 대안, 대안-.”
서라벌 중심가에 신라에서 제일가는 기루(妓樓)와 유곽(遊廓)이 밀집되어 있
었다. 살아있는 존자(尊者)로 백성들로부터 추앙받던 대안대사(大安大師)가
낮부터 '극락'이라는 주점에서 작부(酌婦)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안대사는
괴이한 옷차림을 하고서 항상 저자거리에서 구리 밥그릇을 두드리며 '편안하
라'는 뜻의 ‘대안-’을 외치고 다닌다하여 그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원효스님은 대사님 제자가 아니던가요? 대사님께서 말려보세요. 만약에 원
효스님이 공주님에게 장가를 가면 나는 어쩌나?”
“네가 원효를 짝사랑이라 하는가 보구나. 대안, 대안, 대안-”
“은지야, 원효는 부처님의 제자지 나의 제자가 아니란다. 그러니 부처님이 말
려야지. 대안, 대안, 대안-.”
은지는 입을 삐쭉내밀며 대안대사의 빈 잔에 독주를 가득 따랐다.
“아잉-. 난 몰라. 정말로 원효스님이 장가가면 저는 팍 죽어버릴거에요. 대사니
임-,
원효스님이 장가 못가도록 말려주세요. 아니면 저 정말로 죽을거에요. ”
“허허. 그 무슨 망말인고. 천지신명이 주신 목숨을 함부로 버리려 하다니? 대
안, 대안, 대안-.”
주독(酒毒)으로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색된 대안대사는 풍덕한 은지의 엉덩
이를 쓰다듬었다.
‘음-, 김춘추가 반전론자(反戰論者)인 원효의 입을 막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
아닌가? 본인이 몰가부(沒柯斧)란 노래를 지어 서라벌에 퍼뜨리더니 김춘추가
이때다 싶어 원효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속셈이 분명할거야. 김춘추와 김유신이
신라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원효를 두고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우니까 미리 꼼수를 쓰는 게야.
그렇지 않으면 원효가 스스로 망가져서 민중에게 널리 포교(布敎)를 위하여
기행을 할 수도 있어. 서라벌에서 기행은 나 혼자로도 충분한데 원효까지 가세
한다면 나의 입지가 좁아지겠구나. 신라왕실과 고관대작 위주로 포교를 해온
그의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것일까. 정토(淨土) 불교를 실천하기 위하여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부처님을 널리 알리려 하는 조치라면 천만다행이
지만.
그러나 신앙을 떠나서 아무리 계집이 좋아도 한번 시집가서 애를 둘이나 뽑
아낸 여자가 뭐가 좋다고 구애를 한단 말인가. 허허. 참말로 원효를 알다가도
모를 사람일세. 하기사, 신라 제일의 미인을 품어보는 일도 꽤 의미가 있는 일
이기도 하지. 그것도 신라 지존의 딸을 말이야. 아무튼 원효 그 사람 재주도
좋구먼. 오랜 세월 금욕을 했을 텐데 하초가 제 기능이나 할까?‘
대안 대사는 술이 가득 들어있는 잔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대사님, 제가 봤을 때 원효스님이 그만큼 망가졌으면 되었는데도 스스로 파
계까지 하면서 굳이 공주님과 혼인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저는 그게 궁금해
죽겠어요.”
“은지야, 네가 진정으로 원효를 은애하는가 보구나?”
“요즘은 원효스님도 저희 주루(酒樓)를 찾지 않으세요. 제가 보고 싶지도 않
은가 봐요. 하루가 멀다하고 오시더니. 원효 스님은 우리 주루에 오시면 저만
예뻐해 주시는 데.”
서라벌에서 내로라하는 은지였다. 원효 스님은 기행을 시작하면서 은지를 속
세의 여인으로 두고 있었다. 절세가인으로 소문난 은지였다. 대안대사와 원효
스님은 주점 '극락'에 들면 은지에게 세속의 욕망을 해소하곤 했다.
“여보게 개똥어멈, 소식들었어?”
“소똥어멈, 뭔 소식을 말하는 거여?”
“어머? 이 여편네는 귀를 틀어막고 사는가보네. 아이고, 이리 세상 소식에 어
두워 어찌 할꼬.”
“이 여편네야. 뭔 소릴 듣고 그러는 거여? 간밤에 어느 집 과부가 머슴하고 정
분이라도 통했다는 거여 아니면 귀신이 개똥네 씨나락이라도 까먹었단말여?”
빨래터에 모인 아낙네들은 빨래를 내팽개쳐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글씨, 나라님 둘째딸인 요석공주가 원효스님에게 시집간대.”
“뭐시여? 이 여편네가 나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내가 무식하다고 지금 나
를 놀리는 거여?”
“이 멍청한 여편네야, 어제 조정에서 나온 관리들이 서라벌 거리마다 요석공
주님과 원효스님의 혼인 소식을 알리는 방(榜)을 붙여 놓았대.”
“시방 그 말이 참말이지? 나를 놀리면 경을 칠거여.”
서라벌의 평범한 남녀노소는 모이면 요석공주 시집가는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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