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7. 5. 7. 20:46






                             





 

                  요석궁에 내린 비(2)



                                                                                                                      - 여강 최재효


  

                                      

                                                                 2


 
 무량아승지(無量阿僧祗)는 필설(筆舌)로나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

숫자의 단위이다. 이러한 세월을 두고 보시를 행한다 할지라도

좋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널리 말해 준다면 그 복이  더 수승하리

라. 그러나 남에게 아무리 좋은 말이라하여도 말해 줄 때는 응당

형상을 취하지 말고 말해야 된다.

 

 상대의 빈부귀천이나 잘나고 못남을 집착해서 설 하지 말아야 하

며, 생각이 들뜨거나 헛갈리거나 하지 않는, 항상 변함없는 여여한

이치를 통하여 동요함이 없이 연설을 해 주어야 한다. 정말로 생각

자연스럽고 천진하며 지혜롭고 밝은 마음으로 말할 때에 상대방

기뻐서 호응할 것이며,  상대방의 근기를 볼 수가 있고 말해야

때와 그쳐야 할 때를 알 수 있으리라.

 

 또한 상대의 그릇을 잘 살펴서 이익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스스

로 자신이 없고 동요하는 마음으로 남에게 말을 한다면 상대방이

온전히 그것을 받아 들이겠는가. 더구나 상대를 보아 가면서 손익

을 계산하면서 가르치려 든다면 더욱 어긋나리라. 

  

 그렇지만 무작정 상대의 그릇됨과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도 보지

않고 마구잡이로 마음만 앞세워 말을 전하려 든다면 거부감만 생

고  이익을 주지 못 할 뿐 아니라 더욱이 비방하는 마음만 일으

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체 함이 있는 법을 유위(有爲)라 하며, 세간의 움직이는 모든

모습들이다. 그런 모습이나 법들은 꿈과 환상이며, 물거품이고

그림자와 같고, 그리고 이슬과 같으며 번개와 같다. 모든 만상은

마땅히 허망한 줄로 생각하고 보아야 한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왕후님과 두분 왕자, 공주님을 뵙습

.”

 젊은 남자 스님 한 분과 동자승이 일주문에서 보희부인과 전군, 공

주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보희부인은 경내를 둘러보았다. 얼마 전

에 왔을 때 보다 분위기가 약간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마음이 불안하

거나 안정이 필요할 때 보희부인은 자주 분황사를 찾아 부처님 전에

향을 사르고 공양을 올렸다.

 

 “부처님을 좋아하시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부처님 명호를 호명

십시오. 그 것만이 삼악도(三惡道)를 벗어나 삼선도(三善道)에 들

거나 해탈할 수 있는 길 입니다. 아미타파. 자자, 왕후님과 왕자님들

그리고 공주님, 경내로 드시지요. 스님께서 진작부터 기다리고

십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보희부인과 요석공주가 마치 친자매처럼 팔장

끼고 분황사 본전을 향해 걸었다. 김개지문,  김지원 전군은 숙취

남은 듯 갈짓자 걸음으로 두 여인의 뒤를 따랐다. 모녀가 다정스럽

게 걷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던지 안내하던 스님은 흘끔흘끔 모녀

를 훔쳐 보았다.


 “아미타불, 소승, 왕후님과 두분 왕자, 공주님을 뵙습니다.”

 보희부인 일행을 발견한 원효스님이 달려와 합장을 하고 허리를 반

쯤 굽혀 보희부인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스님, 아침 일찍 번거롭게 하여 송구하옵

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왕후님,  소승은 잠이 별로 없습니다. 간밤

에 기별을 받고 한 잠도 못 자고 기다렸습니다.

 모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원효 스님의 얼굴에 웃음 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원효스님을 뵙습니다. 잠을 못주셨다니, 피곤하시겠어요?”  

 나무관세음보살. 스님을  뵙습니다. 선연이 존속되길 원하옵니.”

 “나무아미타불, 스님을 뵙습니다.”

 나무아미타불광세음보살. 소승 역시 왕자님들과 선연이 세세도록 이어

지 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날씨가 쌀쌀하니 어서 법당 안으로 드시지요.

 

 개지문과 지원 전군이 원효스님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한 전군이라 할지라도 신라 만백성이 우러러 존경하는 불제자를 불경스럽

게 대할 수 없었다. 보희부인과 요석공주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 듯 원효

스님의 환대에 응대하였다.  

 

 "피차의 관계가 악연이냐 선연이냐 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나에게 비난할 때 내가 한 번 웃어 주느냐, 화를 내느냐가 삼생을 악

연으로 만들 수도 있고, 선연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네분, 정말로 잘 오셨

습니다. 이 만남은 소승과 깊은 연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랍니다." 

 요석공주는 원효스님의 말뜻을 잘 알지 못하였으나, 부처님 앞이라 감히

몸가짐이나 생각이 불경하면 지벌을 받을까 두려웠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자재보살-.”
 잠이 덜 깬 두 전군들은 원효스님과 시선이 마주치면 마지못해 부처의 명

호를 외쳤다.

 
 보희부인은 아침 일찍 요석공주와 김지원(金知元)과 김개지문(金皆知文)

등 두 전군을 앞세우고 분황사를 찾았다. 신라의 지존인 김춘추가 직접 원

효스님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보희부인은 백성들의 눈이 많고 왕이 직접 원

효스님을 찾는다면 괜한 소문을 양산시킬 수 있다면서 만류하였다.

 
 간밤 오랜만에 내린 눈으로 서라벌은 물론 분황사 주변이 모두 설백(雪白)

의 세상으로 변해있었다. 서라벌에는 웬만해서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

성들은 천지가 하얗게 변한 것을 보고 서라벌에 곧 좋은 일이 있을 조짐이

라며 들떠 있었다. 지난밤 지아비인 김춘추와 친정 오라비 김유신이 나눈

대화를 듣고 보희부인은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보희부인이 지아비와 오라비의 술 시중을 들고 자신의 처소로 왔을 때 이

미 새벽이 되어 있었다. 보희부인은 즉시 요석궁으로 달려가 요석공주를

대면하려고 하였다. 보희부인이 요석궁에 도착했을 때 요석공주는 두 오

라비들과 한창 주연을 즐기고 있었다. 보희부인은 원효스님이 있는 장소

로 향하면서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을 잠시 떠올렸다.

 
 “어머님께서 미리 기별도 없이 이 야심한 시각에 어인일로…….”
 요석공주는 이미 대취한 상태였으나 예상치 못한 보희부인의 행차

에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소자, 어머님을 뵙습니다.”  

 

 “늦은 시각에 소자, 어머님을 뵙습니다.”
 요석공주의 오라버니인 김지원과 김개지문 두 전군이 모후(母后)인

보희부인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두 여동생 김문희, 김보희와 차례로 혼인하였

는데 정비가 된 문희에게서 태자인 김법민을 비롯하여 왕자로 김인

문, 김문왕, 김노차, 김지경, 김개원을 두었고 딸로는 지소공주(智炤

公主)를 두었다. 보희부인 또는 영창부인(永昌夫人)으로 불리는 김보

희와 김춘추 사이에서는 김개지문, 김지원 전군과 요석공주를 슬하

에 두었다.

 
 영창부인 김보희의 소생들은 정비인 이모 문희에게서 출생한 왕자

나 공주들에 비해 신라왕실에서 차지하는 권세가 미미하였다. 김춘

추는 그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비와 후궁 사이의 문제인

지라 모르는 척 하였다. 보희부인 소생의 자식들은 김춘추를 이어 보

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을 한탄하며 술과 가무 등 풍

류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전장에서 지아비를 잃고 길고 긴 겨울밤을 혼자 지내야 하는 누이

동생 요석공주를 위로하기 위하여 이날 밤에도 보희부인의 소생 두

전군들이 요석궁에 모여 가무를 즐기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김춘추는 자식들의 방탕한 생활을 잘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두 전군들이 야심한 시각에 누이동생 처소에서 이 무슨 일

이더란 말이냐? 이 어미만 빼놓고 너희들만 유흥을 즐기니 섭섭한

생각이 드는구나.”
 보희부인은 정말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지아비와 오

라비와 어울려 주연을 즐기다 온 관계로 보희부인도 두 볼이 발가

스름하게 익어 있었다. 


 “어머니, 죄송해요. 어머님을 모시려고 시자(侍子)를 보냈으나

어머님이 아버님과 외삼촌 그리고 이모님과 대전에서 주연을 열

고 있다고 하시기에 저희들만 모였습니다. 누이동생이 요즘들어

너무 울적해 하는 것 같아 오라비들이 잠시 위로하는 자리를 만

들었습니다.”
 장남 김개지문 전군이 불콰한 얼굴로 모후에게 고하였다. 

 

 “너희들이 함께 모여 유흥을 즐기는 자체에 대하여 이 어미는

조금도 나무랄 생각이 없다. 마침, 다들 한자리에 있으니 참으로

잘되었구나. 이 어미가 너희들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단다.”
 늘 엄격한 모습의 어머니 보희부인을 보아온 남매들은 어머니의

의외의 반응에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다.  


 “어머니, 다과를 올릴까요?”
 “입안이 깔깔하구나.”
 요석공주가 보희부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보희부인이 고개를 끄

덕거리자 요석공주는 시녀들에게 눈짓을 하였다. 술을 즐기지 않

는 보희부인은 식혜 종류의 달달한 음료를 좋아하였다.
 

 “어머니, 이 늦은 시각에 요석궁을 찾으신 것을 보니 요석공주에

게 급히 전하실 말씀이 있으신것 같네요. 급히 전할 것이 무엇인지요?”
 눈치 빠른 둘째 아들 김지원이 모후의 안색을 살폈다.
 “어머니, 감주와 과자를 준비하였습니다.”
 요석공주가 잔에 감주를 따라 모후(母后)인 보희부인에게 올렸다. 

 

 “너희들은 이 어미의 친 자식들이란다. 너희 이모의 자식들과는

태생이 다르다. 이 어미의 바람은 너희들이 문명왕후의 소생들과

달리 궁에서 조용히 살면서 인생을 즐기면 되는 것이니라. 이모는

욕심이 많아 태자 법민(法敏)을 부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리기

위하여 많은 정성과 노력을 하고 있다.”

 
 보희부인은 김춘추의 뜻을 잘 알기에 자신의 몸에서 출생한 자

식들의 입신양명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칫 동생

문명왕후의 견제를 받을까 조심하였다.

 
 “어머님, 저희들도 다 같은 아버님의 자식입니다. 이모님의 자

식들은 조정의 일에 깊이 관여하며 부왕의 국사(國事)를 돕는데

저희들은 음지에 앉아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답답하답니다. 저희

형제가 아무리 왕자보다 한단계 낮은 전군(殿君)이라 하지만 아버

님께서 저희를 너무 홀대 하십니다.”
 지원 전군이 울분을 토하듯 언성을 높이자 보희부인은 순간 창

밖을 흘깃 주시하더니 검지를 입에 댔다.

 
 “요석공주는 지금부터 이 어미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어미의 말은 곧 부왕(父王)의 말씀이시다. 다만 이 어미가 아버

님의 의중을 전할 뿐이다.”
 “어머님, 무슨 말씀이신데요?”
 정신이 약간 든 듯 요석공주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보희부인이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해 하였다.

 
 “어머니, 부왕께서 금은보화라도 선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김개지문 전군이 엉뚱한 말을 하였다.
 “그렇구나. 부왕께서 네 누이동생에게 아주 큰 선물을 하시겠다

고 하시는구나. 그러니 공주와 너희 형제들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야.”
 부왕 김춘추의 큰 선물이라는 보희부인의 말에 남매는 취중에서

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해 했다.

 

 

[주] 전군(殿君) - 정비(正妃)의 자식이 아닌 후궁(後宮)의 자식이거나 정비가 왕이 아닌 다른 남자

와 사통(私通)하여 낳은 자식           

                          .


 “어머니, 부왕께서 소녀에게 큰 선물을 하신다니요? 제가 얼른 알아

듣지 못하겠습니다. 부왕께서는 소녀의 지아비가 조천성에서 백제군

과 싸우다 전사한 뒤로 소녀에게 가끔 금주(錦酒)나 가효(佳肴)를 시

녀들 편에 보내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개지문 오라버

니 말씀처럼 소녀에게 금은보화라도 보내주시려나 봅니다.
 요석공주는 궁성 밖에서 거주하다가 지아비 김흠운이 전장에서 전사

하자 김춘추는 요석공주를 왕궁에 거주토록 하였다.


 “부왕께서 공주를 원효스님에게 하가(下嫁)하도록 하시겠단다. 이 결정

은 이 어미의 친정 오라버니인 김유신 대총관과 상의하여 내리신 결정이

란다.”


 “네에? 아니 어머니, 그게 말이 됩니까? 신라 제일의 미색인 누이동생을

땡중에게 시집을 보내시겠다니요? 어디 동생을 시집보낼 데가 없어서 하

필이면 중이랍니까? 조천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매부(妹

夫) 일길찬(一吉飡) 김흠운의 집안에서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동생에게는 나이어린 두 여식(女息)이 있습니다. 매부와의 정을 생

각해서라도 그리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소자는 도저히 부왕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부왕과 외삼촌에게 말씀드려 동생이 원효

에게 하가하는 것을 막아주세요.”
 김지원 전군은 가슴을 두드리며 한탄하였다.


 “어머님, 아버님이 점점 기력이 약해지시더니 이제는 허언(虛言)

까지 하시는 상태가 되셨나 봅니다. 원효는 누이동생보다 한참 나

이도 많고 요즘에는 기행을 밥 먹듯 하며 서라벌을 휘젓고 다닌다

는데, 부왕과 대총관은 어째서 그런 중에게 꽃보다 아름다운 누이

를 하가토록 하신답니까? 조국의 안위를 위하여 백제군과 싸우다

사한 매부의 원혼이 지하에서 통탄할 것입니다. 어머님께서 아

님께 간곡히 말씀드려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두 전군들은 보희부인의 말에 한마디씩 내뱉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요석공주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 소녀 부왕께 너무나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왕께

서 소녀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시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님

의 하명을 소녀는 기꺼이 받아 드리겠습니다.”
 요석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왕 김춘추가 있는 대전을 향해

큰절을 하였다. 그 표정이 방금 전까지 술에 취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공주야, 네가 지금 술에 취해서 하는 말이냐? 아니면 제 정신이

들어서 하는 말이냐? 이 어미는 공주의 말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나는 네가 죽어도 하가할 수 없다고 말할 줄 알았구나.”

 보희부인은 딸의 행동에 어안이벙벙한 모습이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어머님, 이제야 소녀의 소원이 이루어

지려나 봅니다. 소녀가 김흠운에게 출가하기 훨씬 전부터  어머니

를 따라 황룡사나 분황사에서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면서부터 소

원이 있었습니다. 그 소원은 소녀가 비구니가 되거나 아니면 불심

돈독한 지아비를 만나 해로동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야 그 꿈

이루질 모양입니다.”

 요석공주는 진정으로 행복한 듯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

의 태도에 두 전군들도 크게 놀란 듯 했다.


 “동생아, 네가 지금 어머니 앞에서 확실히 제정신이 들어서 하는

이렷다. 추호도 거짓이 없는 말이렷다. 진정으로 참말이지?”
 김개지문 전군은 요석공주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하얗

변하여 여동생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 믿었던 형제자매에게 배신을 당하는 그 참담한 심정을

개지문 전군은 어찌하지 못하고 흥분하였다. 보희부인은 말문이 막

는지 멍하니 요석공주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개지문 오라버니, 원효스님은 생불이십

니다. 서라벌에 살아있는 부처님은 오직 원효스님 한 분 밖에 없습

니다. 이 여동생이 부처님과 혼인을 하겠다는 데 축하를 해주지는 못

할망정 훼방은 놓지마셔요. 소녀는 아버님과 외삼촌의 처사에 천번

만번이라도 흔쾌히 따를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술에 취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던 공주가 갑자기 돌

변하자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공주야, 네가 얼마 전에 그 스님에게 손수 지은 승복(僧服)과 모란

꽃을 선물하였다고 들었다. 정녕, 원효스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냐?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이나 치기(稚氣)에서 비롯한 행동이더냐?”

 보희부인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딸에게 물었다.


 “나무아미타불. 어머니, 소녀가 원효스님에게 승복과 모란을 선물

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분은 비록 출가하였지만 진정한 불자(佛子)

가 맞습니다. 대부분의 스님들은 머리를 깎고 깊은 산속에 있는 절

에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로지 자신의 득도(得度)를 위하여

노력하지만 원효스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딸의 알 수 없는 말에 보희부인은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동생아, 좀 우리가 알아듣도록 말해보거라. 승복을 선물한 것은 그

렇다 치고 왜 하필이면 모란꽃을 선물한 것이냐?”
 김지원 전군은 하필이면 많고 많은 꽃 중에 요석공주가 원효스님에게

모란을 선물한 이유가 몹시 궁금하였다.


 “나무관세음보살. 오라버니, 모란(牡丹)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꽃

이랍니다. 사람들은 모란에 향기가 없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모란의 방향(芳香)은 너무나 은은하고 향기로워 십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답니다. 스님에게 모란을 선물한 이유는 님을 파계(破戒)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요석공주는 입을 열 때마다 부처의 명호를 외쳤으며, 대답은 거침이 없

었다. 공주의 입에서 파계라는 단어가 나오자 보희부인과 공주의 두 오라

비들은 번개를 맞은 듯 멍하니 요석공주를 바라보고 얼른 말을 잇지 못

했다.


 “고, 공주야. 파계라니? 누가 누구를 파계시킨다는 것이니?”
 보희부인은 제대로 발음도 하지 못하고 파랗게 질려 겨우 물었다.
 “나무아미타불. 어머니, 누구긴요? 원효스님을 말하는 거예요.”
 “뭐라고? 네가 워, 원효스님을 파계시키겠다고? 공주가 지금 술이 덜 깨서

그런 말을 한 거지? 맞지?”
 보희부인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냉수를 찾았다.


 “동생아, 네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원효스님이 누군데 네가 어

떻게 파계시킨다는 게야?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말거라. 네 말이 밖으로 새

어 나가면 그 파장은 나라를 뒤흔들 것이다. 또한 그 스님은 신라 사람 누구

나 존경하고 따르고 있다. 네가 무리 신라 최고의 미색이라고 하지만 어

떻게 생불이라고 하는 그 스님을 파계시킬 수 있단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

리 그만하거라. 괜히 네가 정신이 이상한 여인이라고 소문이 날까 두렵

나.”
 김개지문 전군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요석공주에게 점잖게 타일렀다.


 “공주야, 원효스님을 생불이라고 하면서 파계를 시키겠다니 네 말이 앞

뒤가 맞지 않는구나.”


 “어머니, 원효스님이 생불이기에 소녀가 하가하여 파계시키겠다는 말씀입

니다. 소녀가 원효스님을 파계시키지 못하면 신라는 완전한 삼한 일통을 할

수 없습니다. 소녀가 원효 스님이 백성들에게 반전(反戰)을 부추기는 의지

를 꺾겠습니다. 아버님의 삼국통일 염원을 해소해 드릴 것입니다. 어머님께

도 부왕과 외삼촌의 듯에 따라 소녀가 원효스님에게 하가할 수 있도록 허

락해 주세요.”
 요석공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은 보희부인과 지원, 개지문 전군은 말문이

막힌 듯 했다.


 “네가 점점 알 수 없는 말로 이 어미를 시험에 들게 하는구나. 생불이니까

파계시킨다는 너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공주가 술이 덜 깬듯하

니 오늘밤은 이만 이야기 하고 이제 잠자리에 들거라. 공주와 두 전군은 내

일 아침 일찍 이 어미와 함께 분황사를 방문하자.”
 “어머니, 분황사에는 왜 가시는데요?”
 분황사에 함께 가자는 소리에 요석공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공주야, 이는 아버지의 지엄한 명이다. 분황사에는 원효스님이 잠시 머물

며 서라벌 백성들을 만나 법문을 하시고 있다 들었다. 내일 이 어미가 직접

원효스님을 만나 요상한 노래를 퍼트리는 이유와 우리 요석공주를 어찌 생

각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겠다.”


 “스님은 참으로 용하시기도 하셔라. 요석궁에 자루 빠진 도끼가 스님 생각

에 전전반측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김지원, 김개지문 두 전군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

들었다.


 “아미타파광세음보살. 왕후님, 왕자님, 공주님, 이른 아침에 누추한 으로

어려운걸음 놓으셨습니다. 소승 원효, 문안 인사 올립니다.”
 원효스님은 합장을 한 채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세 사람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기골이 장대한 원효스님의 두 눈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요석공주는 원효스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무아미타불나무관세음. 스님, 저희들이 스님을 귀찮게 해드렸습니다.”
 “왕후님, 아닙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차를 한잔 마시고 있을 때 궁인(宮

人)이 오셔서 기별을 넣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밤 오랜만에 내린 눈

으로 날씨가 제법 찹니다. 어서 법당 안으로 드시지요.”


 “나무관세음. 스님을 뵙습니다. 그동안 여여하셨는지요?”
 요석공주가 합장한 채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원효스님를 올려다보았다.


 “아미타파광세음보살. 공주님, 달포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때보다 더욱

하십니다. 잘 오셨습니다.”
 원효스님의 눈빛이 더욱 강해지면서 농익은 요석공주의 자태를 훑어보았다.

그 시선은 속인(俗人)의 은근함과 기대에 찬 것이었다. 


 “스님, 농(弄)은 아니시겠죠?”
 요석공주는 왼쪽 눈을 찡끗하면서 원효스님에게 추파를 던졌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공주님, 불제자는 농을 할 줄 모른답니다.”


 “험-. 나무관자재보살. 스님, 여기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원효스님이 요석공주에게만 관심을 두자 두 전군은 헛기침을 해댔다.


 “아미타파. 지원 왕자님, 개지문 왕자님, 송구합니다. 두 분 왕자님들,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소승 두분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원효스님은 보화부인의 요청으로 왕궁에서 자주 설법을 한 인연으로

왕자들과 전군들 그리고 공주들하고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네 사람이 대웅전에 들자 원효스님은 손수 차를 다려 손님을 대접하

였다. 
 

 “아미타불. 소승이 지리산(知異山)에서 직접 따서 군 차입니다. 귀인

(貴人)에게만 대접하는 것이니 한번 음미해보십시오.”
 “스님, 감사합니다. 다향(茶香)이 아주 좋습니다. 감칠맛도 느껴지고요.

잘 마시겠습니다. 하옵고 스님에게 사람에게 있어 인연은 무엇인지에 대

하여 알고자 아침 일찍 찾아뵈었습니다. 하오니, 미몽에 빠져있는 중생을

위하여 법문을 주십시오.”
 보희부인은 원효스님에게 공손하게 반절을 하였다.


 “스님, 그리고 남녀의 관계에 대하여도 말씀해주세요. 저는 지금 남녀관

계가 어떻게 해서 맺어지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남녀 중 한쪽이 진정한

사랑을 원하면 반대쪽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소신껏 행동해야

하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요석공주는 어린 소녀처럼 해맑게 웃으며 원효스님을 빤히 쳐다보았다. 

원효스님은 얼마 전에 요석공주가 선물한 승복을 입고 있었다. 요석공주

만 원효가 입은 승복이 자신이 선물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미타파. 잘 알겠습니다. 두 분의 질의는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인간사의 단면을 대변하는 것이지요. 인연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인연의 굴레에서 남녀와 암수는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소승

이 두 분의 물음에 답하기 전에 수많은 부님 말씀 중 한마디를 독경(讀

經)하고자 합니다. 소승을 따라하셔도 됩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도일체고액 사리자색불이공 공불이색 …….


 원효스님은 보희부인과 요석공주의 요구에 부처님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목탁을 잡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독경을 시작하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청아하고 시원한지 네 사람은 간밤에 늦도록 마신 술의 주독(酒毒)이 몸에

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보희부인과 요석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며, 원효

님이 암송하는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을 따라 자그마한

소리로 낭송하였다.


 그러나 요석공주의 두 오빠들은 마지못해 입만 놀리며 낭송을 하는지 마

는지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하였다. 어머니 보희부인의 권유에 못 이겨 분황

사에 오기는 하였지만 지난밤에 마신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불경이 귀에 들

어 올리 가 없었다. 두 전군 역시 어머니를 따라 부처님에게 절을 하기 시작

하더니 서너 번 하다말고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 않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

부정 부증불감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원효스님의 독경이 끝나자 법당 안은 향기가 가득하였다. 원효스님은 입가

에 미소를 띠며, 보희부인과 요석공주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원효

스님을 따라 불경을 낭송한 두 여인의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맺혔다. 원효스

님은 두 전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고했다는 의미의 미소를 보

냈다. 이어서 원효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인(因)이라는 것은 결과를 내는 내적이고 직접적 원인이며, 연(緣)은 결과의

도출을 돕는 외적, 간접적 원인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가운데 주된

것이 인이며, 보조의 것이 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인을 광의(廣義)로 보면  인과 연을 더해 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

와 반대의미로 연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종연생종연멸(從緣生終緣滅) 즉,

삼천대천의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 멸한다.


 세상 모든 존재의 나고 죽음은 진실한 모습이 아니어서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인연마저도 실존성이 부정될 수 있으므로 모든 존재

실재는 공(空)이라 했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며,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전생(前生)은 곧 금생(今生)의 과거이며, 내생(來生) 역시 금생의 미래라

할 수 있다. 범인(凡人)들은 어제를 회상하며 내일을 기약하고 금일(今日)

의 생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생을 생각하고 다음 생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

아가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약사여래불.”
 원효스님의 법문 중간 중간 네 사람은 연신 부처님의 명호를 외쳤다.


 어째서 지난 날을 돌아볼 줄 알면서도 전생은 나 몰라라하고, 몇십년 후의

생을 예측하면서도 내생(來生)은 잊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과거생과 다음

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이 순간의 찰나에 너무나 집착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과(因果)와 응보(應報)의 윤회를 절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삼천대천의 모든 삼라만상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라고, 우리가 모

사이에 익어가고 있다. 사람의 심성 역시 생각과 모양이 불분명하여 볼 수

없지만 운명이 있어 서로 작용하고 있지 않는가. 삼세의 인연들 또한 시공

(時空)의 파장으로 전생의 일과 생각했던 일은 현생에도 하게 되고 금생에

하던 일은 내생으로 연장하여 다시 생각게 된다.


 인연을 따라 생겨나고 인연을 따라 사라지는 종연생종연멸은 만고의 법칙

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이상은 삼세(三世)의 윤회는 존재하는 것

이다. 윤회는 인(因), 연(緣), 업(業), 과(果)의 넷으로 구성되어 있는 필연

적인 연기(緣起)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연업과(因緣業果)에서 ‘인’은 씨앗이고 ‘연’은 씨앗이 뿌려지는 밭이며,

‘업’은 씨앗이 튼실한 결실을 볼 때까지 정성을 다하여 가꾸는 행위이다.

이와 같이 인과 연과 업이 합해지면 결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

자가 좋고 밭이 좋아 농사를 잘 지었다면 풍년이 될 것이고, 종자가 좋지

않고 밭 역시 좋지 않고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면 결실이 안 좋은 것은 당

연한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고 받을 것이니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

가 바로 염부주(閻浮州) 인간 세계의 진리이다. 어떻게하면 업과 윤회의 돌

고도는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방법은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수행하기

따라 벗어날 수도 있고, 눈앞의 현상만을 보고 살아간다면 육도(六道)의 굴

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자재보살.”
 “나무미륵불.”


 인간사에서 아주 좋은 인연이란, 움켜쥔 인연 보다 나누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각박한 인연보다 넉넉한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내가 기다리는 인연보다

찾아가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의심하는 인연보다 믿고 의지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눈치를 주는 쌀쌀한 인연보다 감싸고 보듬어 주는 인연으로 살

아야 하고, 슬픔을 겨 주는 인연보다 기쁨을 선사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

다.


 타인을 시기 하는 인연보다 손뼉을 쳐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비난하는 

인연보다 칭찬을 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무시하는 인연보다 존중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원망하는 인연보다 감사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흩어지는 인연보다 하나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변덕스러운 인연보다

한결 같이 변함이 없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타인을 속이는 인연보다 솔직한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부끄러운 인연보다

떳떳한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해(害)가 되는 인연보다 복이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짐이 되는 인연보다 힘이 되어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씨

앗을 주면 그 씨앗으로 꽃을 피우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원효스님의 인연에 대한 심오한 법문이 잠시 일단락되었다. 잠이 덜 깬 듯

앉아 있던 두 전군의 두 눈동자에 광채가 번뜩거렸다. 원효스님 법문 한마

디 한마디가 가슴속에 비수처럼 박혀들었다. 보희부인과 요석공주의 두뺨

으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스님,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스님, 스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나무광세음보살. 나무광세음보살. 스님 고맙습니다.”
 “나무미륵불. 스님,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
 보희부인을 비롯한 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원효스님께 절을 올렸다.


 “나무샤카무니불. 나무관세음보살. 소승의 어려운 법문을 이해하신 듯 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문제 중에서 남녀관계에서 발생하는 일

이 가장 골치가 아프답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 보면 아주 간단하답니다.

지금 소승의 앞에 앉아 있는 두 분은 먼 과거세에 소승의 어머니였거나 소승

의 부인이었거나 혹은 소승의 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두 왕자님 역시 먼 과거세에 소승의 아버지거나 소승의 아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왕후님과 요석공주께서 먼 과거세에 두 분 왕자님들의 부인

이었거나 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인연 특히 남녀의 관계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법당 안에 소승을 포함

다섯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다섯 사람의 위로 열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한

뿌리와 닿습니다.


 우리 다섯 사람은 과거와 미래세에 연관이 있기에 지금 이 시각에 한 자리

에 앉아 있습니다. 광대한 삼천대천(三千大千)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오로지 찰라(刹那)만 있습니다. 찰라의 연속으로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하고

잠시 순간이 지나면 과거라 하고, 곧 이어질 순간의 연속성이 미래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우리 인간들의 척도로 분리해 놓은 허망한 단위에 불과

합니다.


 삼천대천에는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다섯 사람은 곧 사

라질 환영(幻影)에 불과합니다.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은 색즉

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며,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으로 이해합니다.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

이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습니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닙니

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색과 공을 차별적인 개념이 아닌 일의(一義)

관조해야 합니다. 색과 공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색이 변괴(變壞)

되어서 공을 이루는 현상적인 고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당체(當體)

를 직관하여 곧 공임을 볼 때,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

다.

 

 나 자신이 여자라고 깨닫는 순간 상대적으로 남자가 있다는 것을 동시에

알게 됩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여자가 없으면 남자도 없는 것입

니다. 남녀관계는 물과 불의 관계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물이 있어야 불

이 나오고 불이 있어야 물이 생겨납니다.

 

 왕후께서도 지금의 지존을 만나 왕자와 공주를 출산하셨습니다. 공주님께

서는 김흠운 장군을 만나 두 따님을 두셨고요. 왕후께서는 지존 한분으로

만족한 인생이 되셨습니다만 공주님에게는 하늘이 정해준 한 번의 인연이

더 남아 있습니다. 그 인연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 인연을 멀리하게 되면 이는 나라와 가문에 크게 욕이 되는 것이니 그 인

연을 반드시 성사시키셔야 합니다. 좋은 인연은 자주 오는 게 아닙니다. 보

통 사람에게 좋은 인연은 두세 번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를 몰라 그냥 흘려보내기 일쑤랍니다. 금생에 좋은 인연을 한

번 맺기 위해서는 과거로 천세(千世), 내세(來世)로 또한 천세가 있어야 가능

합니다. 과거세에도 미래세에도 아닌 바로 금(今世)에 공주님의 호연(好緣)

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에?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 금세에요?”
 요석 공주는 금세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아, 스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구나. 그래서 몰가부(沒柯斧)란

노래를 지어 서라벌에 퍼트렸구나.’


 보희부인 역시 요석공주가 금세에 또 다른 인연이 기다리고 있다는 원효스

님의 말에 마음이 심란하였다. 자신이 아들,딸을 대동하고 아침 일찍 분황사

를 찾은 이유를 미리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