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석궁에 내린 비(1)
요석궁에 내린 비
- 여강 최재효
1
음양의 조화는 반드시 천지신명의 계시가 있거나, 특이한 현상과 그 인과
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하다 나약한 인간의 한 방울의 눈물이나
탄식이 하늘을 감화시키거나, 동화시킬 수 있으리라. 우리가 있는 지점이
곧 하늘이고 땅이며, 광대무변한 우주의 구성으로 이해할 수 만 있다면 이
미 경지에 이르렀다 하리라.
천 년 전에 어느 특정한 곳에 살아 숨 쉬던 사람이 웃거나 혹은 울며, 허공
에 내뱉은 말 한마디는 영원히 우주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 우주는 수십여
개의 다차원으로 구성된 상태이며, 성주괴공을 끊임없이 반복하니 어찌 하
찮은 사람의 능력으로 그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특정인이나 단체 혹은 국가가 스스로 행한 업의 인과를 무시하거나, 그 현
상을 잘 알고 있으면서 애써 외면하려 든다면 세상은 이미 문명의 암흑기에
들었거나 유인원 수준에서 더 이상 진일보하지 못한 채 멈춰있으리. 뻔뻔하
게도 사바에서 지은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하여 삿대질을 해대면서 하늘
의 탓으로 돌리거나, 상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아 결국은 너도 없고 자신도
없는 무인계(無人界)가 되리라.
양기는 음기에서 출발하여 현상계를 돌고, 무현상계(無現象界)를 거쳐 인
간이 알 수도 없고, 신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무극에서 천변만화로 무쌍하
다. 인간은 한낱 잠시 불어오는 바람 속에 티끌로 존재하였다가, 흔적도 없
이 사라져 허무하니, 법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랴.
음기는 양기와 주종 관계를 유지하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양기로 화하여
오묘한 조화를 끊임없이 유지하니,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정기(精氣)의 본
질이리라.
하늘은 곧 땅이요, 물은 곧 불이니, 두 기(氣)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수컷
은 곧 암컷이며, 그 암컷은 수컷을 양산하고 있다. 수컷과 암컷의 경계 역시
분명하지 않다. 암수의 경계가 불변하다면 어떻게 사람이 있고, 짐승들이
존재할 수 있으리오.
남산에 복숭아나무 한 그루 있어 봄이 오면 꽃이 피고, 무수히 많은 미생
물과 벌 나비가 모여 든다. 남산은 하늘이며, 곧 생명의 터전일 테니, 경외
의 대상이다. 복숭아 나무와 도화(桃花)는 하늘과 땅의 정기를 이어주는
매개체이며, 세상이 세상답게 치장해 주는 물건이니 어찌 영물이라 하지
않으리. 그 영물이 있어 봉접(蜂蝶)이 모여들어 도화경(桃花景)이 열리고
극락이 열린다.
미련하게도 사람들은 하늘이 두렵고 땅을 경외하여 법이니, 규율이니 하
는 말도 안 되는 영어(囹圄)의 틀을 만들어 놓고 자신과 이웃 그리고 국가
를 속박하려 든다. 지상이 열리고 오로지 그 지상에 남,녀 한 쌍만 존재한
다면 감옥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젊은 사람 열 명이 있고, 그 열 명 중 수
태 가능한 여인이 한 명 밖에 없다면 어찌될까.
이 경우에 평화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투쟁만 존재한다. 인간사회 뿐만 아
니라 생명체의 현상계(現象界)와 무생명의 지대(地帶)에서도 전혀 다르지
않다. 수백만 년 전에 세상에 인류가 출현하면서부터 투쟁은 시작되었다.
투쟁은 곧 새로운 생명을 이어주는 분명한 원천이자 ,인류에게 있어 필수
요소임이 틀림없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혹은 미생물에게 있어서 싸움은 곧 평화의 전제 조건
이며, 죽음의 반대편에서 생명계를 조정하는 역할자의 지위에 있다. 생명
은 극렬한 싸움 위에 존재하니, 어찌 싸움이 곧 생명 창조의 아버지라 아니
할 수 있는가. 가급적 양과 양 또는 음과 음의 갈등은 쓸데없이 힘을 소모
하는, 지루하고 헛된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양이 음의 기운을 구축하거나 양의 세력권 내로 유인하는 일이 바람직스
럽다고 감히 말하며, 하늘의 명으로 받들 수 있어야 마땅하다 싶다. 청춘
남,녀에게 가장 소중하고 긴급한 하늘의 명이란 무엇일까. 정력이 충만한
사람들은 시(詩)와 그림 또는 음률을 그럴 듯 하게 포장하여 이성(異性)을
기망하려 든다. 가득한 음기를 주체하지 못해 전전반측하거나, 기행(奇行)
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는 그런대로 웃음 한번으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는 대방고지(帶方故地)를 둘러 싸고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였다. 초기의 전쟁 양상은 백제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371년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에는 백제군이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
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목숨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수림왕(小
獸林王)과 고국양왕(故國壤王) 대를 거치면서 체제를 재정비한 고구려
가 광개토대왕 때 백제에 대한 설욕전을 성공시키자 상황은 역전되고
말았다.
백제는 광개토왕에게 아리수 이북의 여러 성을 탈취 당했고, 아신왕((阿
莘王)은 세력 만회를 위해 바다 건너 왜와 연결을 도모했다. 한편, 삼국 중
가장 늦게 출발한 신라는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압박이 가중되던 내물이
사금(奈勿尼師今) 후반에 인질외교를 통해 고구려와 밀착했다.
그 결과 신라는 백제와 연결된 왜의 침략을 고구려의 군사 원조를 통
해 분쇄하기도 했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 사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와 왜(倭)가 각기 남북으로 연결되어 복
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장수왕대에 이르러 중국 요서(
遼西) 지역 진출이 차단되면서 고구려는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취하게 되
었다. 427년 장수왕의 평양 천도(遷都)는 남방경영의 의지를 분명히 한
대사건으로 고구려의 기존 정책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백제는 새로운 상황의 효과적 대처를 위해 왜(倭) 뿐만 아니라 신라도 동
맹자로 삼을 필요가 있었고, 광개토대왕 때부터 고구려에 군사적으로 종속
되다시피 했던 신라 역시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대에 이르러 고구려 세
력권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양자의 이해가 성사되었다.
이에 433년 백제 제20대 비유왕(毗有王)과 신라의 눌지왕 사이에 공수
동맹(共守同盟)이 맺어졌다. 475년을 전후, 고구려의 공격이 전방위로 전
개 되자 백제와 신라는 상호 원군의 파견을 통해 공동으로 대처해 나갔다.
493년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이 신라의 왕녀를 맞아 혼인하는 등 양국
간의 관계가 긴밀해 졌다.
551년 백제 성왕(聖王)의 주도로 백제·신라·가야의 3국 연합군이 고구려
로부터 한강유역을 탈환할 때까지 유지되어왔던 양국의 동맹관계는 553
년 신라가 백제의 점령지인 한강 하류지역을 공격하여 탈취하면서 깨졌다.
격분한 백제는 신라를 다시 공격했지만, 554년 성왕이 관산성(管山城) 전
투에서 전사함으로써 백제의 패배로 끝나고, 신라와 백제는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신라의 한강 하류지역 점령은 한강 주변유역의 인적·물적 자원의 확보와
대당 직교역로의 확보가 주된 이유였던 것이며, 나중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
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삼국은 100년 이상 격
렬한 항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일반 민중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 졌다.
서기 655년 새해 벽두부터 신라의 도읍지 서라벌에 이상한 노래가 유행
처럼 번지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듣고 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다만, 당대의 최고 선지식(善知識)인 원효라는 법명을 지닌 젊은 비구승이
부르고 다닌다 하여, 그 노래에 대한 의미가 서라벌 백성들의 궁금증을 자
아내게 하였다. 서라벌 일반 백성들이나 삼척동자들이 뜻도 모르면서 부르
는 노래는 결국 신라의 지존 김춘추(金春秋)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誰許沒柯斧(수허몰가부), 我斫支天柱(아작지천주)
‘음-, 이 노래는 원효가 신라 정치권에 자신의 뜻을 전하는 말이렷다. 자루
빠진 도끼라. 자루 빠진 도끼란,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여인의 거시기를
뜻하는 말일 테고, 천주는 하늘을 바치고 있는 든든한 기둥, 즉 인재(人才)를
말함이다. 그러니까, 과부를 딸로 두고 있는 짐과 같은 사람이 딸을 내어주면
동량지재(棟梁之材)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이군. 요즘 들어 대덕(大德)이 넘
치는 양기를 주체하기 힘든 모양이구먼.’
“폐하, 소신을 찾으셨나이까?”
땅거미가 막 드리우기 시작할 무렵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總官) 김유
신(金庾信)이 반쯤 허리를 숙이며, 대전으로 들었다.
“어서 오시오. 대총관, 짐이 적적하던 차에 경과 술이나 한잔 하려고 뫼시라
했습니다.”
“소신도 마침 목이 칼칼하던 참이었습니다.”
대총관 김유신과 김춘추는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내던 죽마고우같은 사이
였다. 지난해 진덕여왕(眞德女王) 붕어하자 김유신은 화백회의에서 차기 왕
으로 추대된 상대등 알천공(閼川公)을 압박하여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하
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목표로 삼고 어려운 난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
운 사람은 김유신과 김춘추였다. 김춘추는 신라 제25대왕인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조카였다. 그러나 진지왕이 유부녀인 도화녀(桃花女)를
후궁으로 삼으려다 폐위되었기 때문에 왕족이면서도 왕위 계승권이 없는 진골
(眞骨)이었다. 김춘추가 성골(聖骨)이 아닌 왕족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유신의 지대한 공이 있었다.
김유신이 자신의 두 여동생들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낸 이야기는 서라벌 백성
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어느 날, 김유신은 김춘추를 자신의 집으
로 초대하여 함께 공놀이를 하다 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뜯어지게 했
다. 첫째 여동생 김보희(金寶姬)에게 뜯어진 옷고름꿰매 주라고 시켰다. 그런
데 보희가 부끄러워하며, 나서지 않자 둘째 여동생인 김문희(金文姬)가 김춘
추의 옷을 꿰매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와 인연을 맺은 문희는 그의 둘째 부인이 되었으며, 훗
날 정실부인이 되었다. 나중에 언니인 보희도 김유신의 권유로 김춘추의 후궁
이 된다. 이 처럼 겹 혼맥(婚脈)으로 이어진 김유신과 김춘추는 서로 의지하고
지켜 주는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이들은 각자의 출신 성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의기투합하여 삼한 일통을 위한 대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대총관,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란 노래를 들어
보셨습니까?”
“소신도 근자에 들어 그 노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뜻이 미묘하고 외설스
러워 모르는 척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불자인 원효가 부르고 다닌다기에 눈살
을 찌푸리게 하니,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어찌 그런 저속한 노
래에 관심을 두십니까?”
김춘추가 큰 처남 김유신과 의기 투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기 위하여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와중에 지존인 김춘추가 뜻밖에도 원효 이야기를
꺼내자 김유신은 김춘추에게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루 없는 도끼는 짐의 가문에도 있으니 신경이 쓰입니다.”
“네에? 폐하의 가문에 자루 빠진 도끼가 있다니요?”
“대총관 둘째 조카딸인 요석공주를 말하는 것이랍니다. 원효 정도의 대덕이 되
어 고작 여염의 딸을 노리고 그 같은 노랫말을 서라벌에 퍼뜨렸겠습니까? 이는
짐에게 보내는 원효의 의중이지요.”
“소신이 동생, 보희 부인에게 전해 듣기로는 요석공주가 지아비 김흠운(金欽運)
이 조천성(助川城) 전투에서 죽고 난 뒤로부터 마음을 둘 데가 없어서 그런지, 자
주 원효와 어울린다 하옵니다. 동생도 원효와 요석공주가 자주 어울리는 것에 신
경이 쓰이는가 봅니다.”
김유신이 반쯤 술잔을 비우고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총관 말씀대로 짐도 그 아이가 적적할 때 원효를 불러들여 법문을 듣거나 인
생 상담 정도는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법력이 대단한 스님이니 안심이 됩니
다만은 외설스러운 노래를 부르는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원효가 요석공주
를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춘추는 승려의 신분으로 자신의 딸을 달라는 원효의 요구를 어찌해야 할지 고
민이 컸다.
“폐하, 요석공주는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비록 미망인이기는 하
나 한창 나이인 만큼 어찌 남정네를 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제자
가 왕실의 여인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자칫 나라 전체에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으
니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김유신은 귀족도 아닌 일개 속승(俗僧)이 왕실의 여인을 넘보는 처사에 불쾌하
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짐과 경이 일심으로 노심초사하고 있소.
그러나 우리 신라에는 인물이 많지가 않아요. 대개의 인재란 자들은 권문세가
자재인 화랑출신이나 왕실에서 자란 얼뜨기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 신라가 곧
삼한을 일통할거란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도 중요하지만 통일 이후에 백
성들의 피폐해진 마음을 위무해 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얼뜨기
들로는 통일 후 뒷감당하기 벅찰 것 같습니다.
원효는 불제자이며, 대학자입니다. 정토사상(淨土思想)을 외치고 있는 그를 많
은 신라 사람들이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의 혈통을 이은 후손이 태어난다면 아
마도 우리 신라에 큰 재목이 될 것으로 판단합니다. 해서, 짐은 요석공주를 원효
에게 재가(再嫁)하도록 하명할 생각입니다. 짐이 여러날을 고심한 끝에 내린 결
론입니다. 대총관께서도 짐의 뜻에 동조하시리라 믿습니다.”
“폐, 폐하. 조카를 중에게 재가를 허락하시다니요? 심사숙고하셔야 합니다. 진
골인 요석조카와 불제자가 맺어진다면 골품제에 의심을 품는 자들이 나올까 걱
정입니다. 부디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백성들의 조소(嘲笑)는 잠시일 겁니다. 비웃음이 있더라도 짐은 하늘을 떠받
치는 튼튼한 기둥을 얻어 신라 천년 왕국 건설에 크게 쓰고자 합니다. 경도 짐
의 뜻을 깊이 이해하시고 협조해 주시오.”
김춘추는 김유신이 자신의 뜻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
일었다. 지금까지 고구려, 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치루면서 한 번도 두 사람이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폐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소신은 유구무언으로 있으며, 폐하를 돕겠습니다.
메추리가 어찌 대붕(大鵬)의 깊은 속내를 알겠습니까?”
“경은 구만리 창천을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김춘추의 말에 김유신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술잔을 잡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폐하, 보희부인과 문명왕후 드셨습니다.”
두 사내가 한참 서로의 의중을 피력하고 있는 때 밖에서 내관이 큰소리로 외쳤
다.
“오, 마침 대총관의 두 여동생들이 들었습니다.”
‘보희와 문희가?‘
“내관은 어서 두 분 왕후님들을 안으로 뫼시어라.”
김춘추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두 왕후 모두 절색(絶色)으로 김춘추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자매 사이라서 서로에 대한 질투나 시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서로 돕고 보살펴 주는 사이였다.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인 문명왕후와 김춘추
사이에는 태자 김법민, 왕자 김인문 등 6남 1녀를 두었고, 김유신의 첫째 여동생
이며, 김춘추의 세 번째 부인인 보희부인 사이에는 왕자 김개지문과 요석공주 등
2남 1녀를 두고 있었다.
“폐하와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보희, 문희 두 왕비가 김춘추와 김유신을 향해 반절로 정중하게 예의를 표했다.
흰색과 붉은색 비단으로 지은 화려한 왕비 옷이 잘 어울리는 보희부인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한 송이 백합같았다. 보희부인 큰머리에 꽂은 보관(寶冠)에 장식
된 오색 구슬들이 바르르 떨면서 소리를 냈다.
녹색 당의와 붉은 치마로 치장한 문명왕후 문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김유신
옆에 앉고 보희부인은 지아비 김춘추 곁에 앉았다. 두 원숙한 여인들에게서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와 금방 대전 안에 사내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그윽한 방
향으로 가득했다.
“마침, 잘 오시었소. 짐이 대총관과 한창 담소를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김춘추가 문명왕후와 보희부인을 번갈아 시선을 주었다.
“폐하, 저희들도 오랜만에 오라버니가 드셨다는 소식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
왔습 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보희부인이 김춘추의 빈 잔에 감로주(甘露酒)를 따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요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얼굴
이 예전보다 많이 상한 듯 합니다.”
“아닙니다. 고민이라니요?”
문명왕후 김문희의 백옥보다 흰 손으로 술병을 들었다.
두 여동생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김유신은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참
으로 오랜만에 남매가 한데 모이는 자리가 되었다. 김유신의 강력한 권유에
두 여동생들이 모두 김춘추와 부부의 연을 맺었기 때문에 두 자매들은 오라
비 김유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받들었다.
“두 왕비들께서 마침 잘 오셨습니다. 남정네들끼리 술잔을 기우리려니 흥
이 나질 않습니다.”
김춘추는 보희와 문희의 눈치를 살폈다. 언니인 보희는 수줍음이 많아 늘
동생 문희에게 공개석상에서 발언권을 양보하는 편이었다. 그런 성정으로
말미암아 문희가 먼저 왕비의 자리까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나중에 오라비
김유신 천거로 겨우 김춘추의 세 번째 왕비가 될 수 있었다. 보희는 담장 밑
에 수줍게 피어있는 백합이라면 문희는 5월의 장미라고 할 수 있었다.
김춘추는 두 자매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공식적인
행사에는 꼭 두 왕비를 대동하였는데, 대우도 동등하게 해주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두 왕비와 10명이 넘는 왕자와 전군 그리고 공주들을 대동하고 지
존 김춘추가 월성을 나와 황룡사나 안압지로 나들이할 때 광경은 서라벌에
서 흔히 볼 수 없는 굉장한 구경거리였다.
“폐하, 오라버니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소첩들이 방해를 한 게
아닌지요?”
보희부인이 술병을 들어 김춘추의 술잔에 다시 감로주 한잔을 따랐다.
“대총관과 요즘 항간에 나돌고 있는 원효의 이상한 노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김춘추가 잔을 비우고 수염을 쓸어 내렸다.
“폐하, 소첩들도 그 노래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효스님은 고승대덕임
을 자처하면서, 어떻게 그런 요사스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
다. 그 분이 정신이 반쯤 나간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문명왕후 김문희가 불쾌한 얼굴빛을 하였다.
“경이 원효스님에 대하여 소개를 한번 해주시구려.”
문명왕후가 원효에 대하여 언짢아하자,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눈을 찡끗하
였다.
“소신이 간단하게 원효스님에 대하여 소개를 올리겠습니다.”
스님의 법명은 원효(元曉), 법호는 화정(和靜), 속성은 설씨(薛氏)이며, 초
명은 서당(誓幢)이다. 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押梁郡佛地村)에서 태어
났다. 스님은 10세에 출가하였는데, 남달리 총명하여 출가 때부터 스승을 따
라 경전을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는 불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음에 있어서
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 스님은 경학뿐만 아니라 유학에 있어서
도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다.
그이 부친 담날(談捺)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11위의 하급관리인 내마(奈麻)
였고, 조부는 잉피(仍皮) 또는 적대(赤大)라 하는 사람이다. 잉피는 제7세
풍월주를 역임한 설원랑(薛原郞)의 둘째 아들이다. 설담날은 629년 8월 진평
왕의 명령으로 풍월주 출신인 김용춘(金龍春)과 김서현(金舒玄)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칠 때 출전했다가 전사했다.
원효의 아명은 서당(誓幢) 혹은 신당(新幢)이다. 그는 뒷날 자신이 태어난
마을인 밤골을 따서 아호를 율곡(栗谷)이라고 했고, 한때 화랑도에 몸담은 적
도 있었지만 출가하여 밝은 새벽을 뜻하는 원효를 법명으로 삼았다. 원효의
모친이 유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으며, 그때 만삭이었던
그의 모친은 남편과 함께 친정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부부가 밤골에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산기(産氣)가 일어나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남편이 황급히 웃옷을 벗어 나무에 걸고 주위를 가린 뒤 자리를 잡
아주었다. 이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불렀다.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주
위를 덮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먼동이 터오는 새벽에 태어났으니 그가 바
로 원효였다.
스님은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고대산에 주석하고 계신 보덕화상
의 강하(講下)에서 열반경, 유마경 등을 수학하였다. 영취산 혁목암(赫木庵)
의 낭지화상에게 사사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신승(神僧) 혜공화상에게도
사사하였다.
스님은 34세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 법사와 규기 화상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옥에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10년 후 45세 때에 두 번째로 의
상과 바다로 해서 입당하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는 도중 비를 만나 산속
에서 길을 잃고 해매다 겨우 토굴을 찾아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다. 갈증
이 나 토굴 속에서 고여 있는 물을 떠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
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 무덤이었으며, 물을
떠마시던 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하룻밤을 더 지
내게 되었는데, 이에 귀신의 장난에서 활연대오하였다. 마음이 생기면 만
물의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면 무덤, 해골물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즉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유심
(唯心)의 도리를 깨닫는다. 활연대오를 한 스님은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또는 거지행세를 하면서 거리에서 노래
하고 춤추며 민중 포교에 들어갔다.
항간에 나가 표주박에 걸림이 없다는 ‘무애(無碍)’라는 글을 새겨 천촌
만락을 돌아다니며, 거지나 창기들을 비롯한 하층 백성들과 더불어 노래
하고 춤을 추면서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교화하였다.
“소신이 알고 있는 원효스님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였습니다.”
김유신이 원효를 소개하자 보희부인이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보희부인은
이미 원효스님에게 자주 법문을 들어왔던 관계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원효스님은 스님이기 이전에 우리 신라국의 영걸(英傑)이십니다. 비록
골품제도에서는 많이 모자라지만 그분의 인품이나 선지식은 신라, 아니
삼한에서 최고라고 봅니다.
그 분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부처님의 말씀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분의
법문을 듣고 있으면 마치 살아있는 부처님을 알현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소첩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기분이 우울할 때, 부처님을 좋아하는 개지문
(皆知文)왕자나 요석공주를 동행하여 분황사(芬皇寺) 들러 원효스님의
설법을 자주 경청해 왔습니다.
스님은 대중교화를 통하여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마음
으로 일여평등(一如平等)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 사상은 아무런 차별이 없
는데, 오직 망념에 의하여 일체 경계의 차별이 있음 갈파하십니다. 스님은
근원을 알지 못하고 시비와 질시를 일삼는 배타의 마음을 버리고, 모두의
염원이 성취되고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자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 왕후께서는 원효스님의 설법을 존중하시는군요.”
“폐하께서도 언제 좋은 날을 잡아 소첩과 분황사에 납시어 마음의 청정무
구를 얻어 보시지요.”
“좋습니다. 짐은 내일이라도 당장 원효스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요석공주도 함께했으면 합니다.”
김춘추는 말끝에 요석공주를 지목하였다.
“폐하, 내일이요? 그리고 공주도 함께요?”
“짐이 알아보니 요석공주가 아침저녁으로 전장에서 전사한 지아비 김흠운
의 명복을 빌어왔다고 합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
습니다. 그러나 이미 저승에 든 사람을 매일 조석으로 명복을 빈다고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제는 건강을 위하여 공주에게 그만 멈추도록 이야기
하세요. 그 정도로 명복을 빌었으면 충분합니다.
짐이 흠운의 집안에 충분히 보상을 한 만큼 이제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어요. 이왕 간 사람은 간 사람입니다. 그러다 그 아이 몸이 상할까 걱정됩
니다. 내일 짐이 친히 분황사에 행차하여 원효의 본심을 알아볼까 합니다.”
듯 바라보았다.
“폐하, 원효의 본심이라 하옵시면?”
보화부인은 ‘본심’이란 말에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아비 김춘추를 뚫어질
“왕후, 요석궁에 자루 빠진 도끼를 언제까지 방치하려하오? 하루 빨리 단
단하고 곧은 자루를 찾아 도끼가 제대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도끼를 썩히는 것도 큰 죄악입니다. 회임이 가능한 신라의
여인들은 비록, 남편이 전장에 나가 죽었더라도 계속하여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여 후손을 낳아야 합니다. 국가의 근간은 국토와 백성입니다. 국토
는 있는데 백성이 없다면 국가가 아닙니다. 산중에 늑대와 이리가 아무리
많은 들 국가의 근간이 되겠습니까?”
김춘추의 묵직한 음성에 보희부인은 몸둘 바를 몰라하였다.
“네에?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언니, 폐하 말씀이 옳아요. 나라는 사람이 많아야 해요. 조카가 지아비를
잃고 외로워하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한참 나이인 조카가 요즘처럼 길고
긴 겨울밤을 어찌 홀로 지낼 수 있나요. 언니도 참 너무하셨어요.
요석 조카는 신라에서 제일가는 미색으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런 아이를
요석궁에 가둬두고 혼자 지내라는 처사는 너무 잔인해요. 마침, 원효스님이
항간에 노래를 퍼뜨려 조카를 원하고 있다하니 잘 생각해보세요.”
문명왕후 문희는 언니 보희가 차마 자신의 입으로 할 수 없는 말을 지아비
와 오라버니 앞에서 서슴없이 하였다. 문희에게도 지소공주(智炤公主)가 있
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 남자를 몰랐다. 보희부인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준 동생 문희가 밉지 않았다.
“보희부인, 원효스님이 노래를 지어 항간에 퍼뜨린 이유는 차마 폐하께 요
석궁조카를 단도직입적으로 달라고 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기에 그리했을
겁니다. 자루가 빠진 도끼를 빌어 신라왕실을 떠받칠 든든한 천주(天柱)를
선물하겠다는데 주저할 게 없어요. 우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칼
잡이 보다 붓잡이가 필요합니다. 폐하께서는 이점을 중요시 여기시고 계
십니다. 부처님도 라훌라라는 아들이 있고, 아쇼다라라는 정실부인이 있었
습니다. 부디, 깊이 혜랑하시어 폐하의 근심을 덜어주시길 부탁합니다.”
대총관 김유신은 김춘추의 의중을 파악하고 마음을 바꿔 바로 아래 여동
생 보희부인에게 요석공주의 하가(下嫁)를 권유하였다.
“폐하, 오라버니, 두 분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우선 소첩이 요석공주에게
두 분의 의중을 전하고 공주의 마음을 얻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요석공
주에게 어린 두 딸들이 있다는 점을 알아주세요.”
“부인 고맙소. 짐은 그대에게 지아비이며, 요석공주에게는 아비이고 공주의
두 딸들에게는 짐은 할아비입니다. 또한 짐은 신라 만백성의 어버이입니다.
짐은 유신공과 힘을 합쳐 삼한을 일통하고자 합니다. 머지않아 우리 신라가
남삼한(南三韓)의 모든 지역뿐만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도 복속시킬 것입니
다.
또한 바다 건너 열도의 왜나라도 모두 정복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
대제국이 되려면 창과 칼이 필수겠지만, 대업이 성취된 이후에는 병장기는
창고에 넣어두고 커다란 붓을 꺼내 들어야 합니다. 지금이 큰 붓을 만들 시기
입니다. 하여 짐은 당대의 선지식인 원효스님의 정기를 이어받은 핏줄을 우
리 왕실에서 탄생시켰으면 합니다.”
“폐하, 원효스님은 우락부락하게 생겼다는데, 그 분보다 의상스님이 어떠
세요? 의상스님은 왕족의 피가 흐르며, 절세 미남자라 들었는데요.”
문명황후 문희는 부처를 마음에 담고 있지 않아 원효스님을 가까이서 본적
이 없었다. 어쩌다 왕궁에서 부처님을 위한 큰 행사가 있어도 먼발치에서
몇 번 본적이 있을 뿐이었다.
“의상은 지금 신라에 없고 당나라에서 불법 공부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보희부인은 김춘추가 요석공주를
원효에게 재가시키려 하는 데, 반대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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