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곡(3)
사부곡(3)
- 여강 최재효
“어머니, 아버지를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대요. 그런데 아직 중환자실에 빈자리가 없어서
자리가 나면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기신대요.”
“왜 그러는데?” “아버지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서 빨리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 대요.”
“그, 그래”
나는 성국이의 이야기를 듣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었다. 의사와 남자 간호사가 교대로 남편의 심장에 충격기를 대고 심폐소생술
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 낯선 광경을 보고 멍하니 서있었다. 그때 일본에 출장 갔던
성원이가 병실에 들어섰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두 다리에 맥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하였다. 성국이와 성원이가 나를
양쪽에서 부축하였다. 겨우 휴게실 소파에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 남편의 심폐
소생술을 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했던 50년 가까운 세월이
고속으로 흐르는 영화의 장면들처럼 이어졌다.
“어머니, 아버지 심장이 멎어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중환자실로 모셔야 하는데 다시 심장
박동이 되었다고 하니까, 오늘 내일은 넘기실 것 같다고 합니다. 중환자실이 나오기를 기다
려야 한대요.”
성미가 중환자실에 들어갈 때까지 병실을 지키기로 하고 아들과 난 집으로 와서 가시는 분
잘 보내드릴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성미는 새벽 5시경에 아버지를 중환자실에 자리가
나서 옮기고 집으로 왔다.
4월 5일 아침 11시 30분에 면회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대충 연락할 곳을 찾고 다음 날
아침 중환자실로 남편을 면회 갔다. 남편은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닌 듯 했다. 겨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부산에 있는 남편의 형제들에게 남편의 급박한 상태를 알렸다. 성국이는 남편의
상태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성국아, 성원아, 그리고 성미, 며늘 아가들아. 아버지가 얼마 못 가실 것 같다. 정신 똑바
로 차리고 마음 단단히 먹거라. 아버지는 이미 생사의 강을 건너고 계신 듯 하구나. 준비를
해야 하겠다.”
나는 아들, 딸, 며느리들에게 임종 맞을 준비를 시키고 성국이에게 제반 준비를 하라고 하
였다. 남편의 힘겨운 사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아아, 부처님, 조물주님, 남편을 도와주세요. 남편이 너무 힘들어 합니다. 이왕 데려 가실
거라면 편안하게 가도록 도와주세요. 차마 눈뜨고 바라 볼 수 없습니다. 잠자는 듯, 편히 쉬
는 듯한 상태로 남편이 임종을 맞도록 도와주세요.’
나는 속으로 부처님과 천지신명을 부르며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평소에 잘 찾지 않았던
절대자들을 찾아 남편의 평안한 저승을 부탁하였다.
부산에서 남편의 형제들이 모두 올라왔다. 형제들은 남편의 상태를 보고 충격을 받은 모습
들이었다. 정확하게 2016년 4월 6일 오전 11시 40분 남편의 심장이 멎었다. 담당 의사의
사망판정이 선언되었다.
남편은 형제들과 처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9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아들
과 며느리들은 소리 내어 흐느끼고 딸 성미는 대성통곡을 하였다. 형제들은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지 눈가를 훔치고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큰 아들이 남편의 두 눈을 살며시 감겨드
렸다.
“아빠, 아빠-, 이렇게 너무나 허망하게 가시면 저희 자식들은 어찌 살라고요. 아빠......”
성미는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서서히 식어가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나도 숨이 멎은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온기가 차차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지난 두 달 가까이 병상에만 누워있던 남편의 애처로운 모습
과 현재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나는 환영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님, 아버님, 불쌍한 우리 아버님, 고생만 하시다가 이리 가시다니요.”
큰며느리와 작은 며느리는 울음을 삼키면서 애써 설움을 꾹 참고 있었다.
“어이구, 아버지. 아버지......”
두 아들들은 남편의 두 손을 꼭 잡고 아버지를 연발하였다.
“여보, 성국이 아버지, 성원이 아버지, 성미 아버지. 당신을 놓아드리고 싶지 않지만 갈 길이
바쁘시니 그러지도 못하겠어요. 부디 편안히 가세요. 남아있는 아들 딸 며느리 손자들은 내가
잘 건사할 테니 아무런 걱정하지마시고 편히 가세요. 지난 47년간 나와 사시면서 처자식들
먹여 살리시느라고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 이제 이승의 짐은 훌훌 내려놓으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편히 가세요.”
나는 남편의 형제들과 자식 며느리 손자들이 빙 둘러 서서 남편을 지켜보는 가운데 이별사
(離別辭)를 고하였다. 누구나 처음 겪는 일이지만 내가 침착하게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내
가 정신을 차리고 중심을 잡아야 아이들도 나를 의지하여 큰일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의 시신은 곧바로 영안실로 모셔졌다. 나는 아들들과 딸 성미 그리고 두 며느리들을 불
러 모으고 신속하게 남편의 부음을 친인척과 지인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문자나 카카오톡
을 이용하여 알리라고 주문하였다.
오전이라 전파를 타고 남편의 부음이 전국과 전 세계 지인들과 친인척들에게 전달되었다.
나 역시 내 주변의 지인들과 친정 그리고 지연과 학연으로 인연이 이어진 분들에게 남편의
부음을 알렸다. 휴대전화로 부음을 받은 사람들은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 오후 내내 나는
전화, 문자, 카카오톡으로 전해오는 문자에 일일이 답변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성국이가 병원을 통하여 상조회에 연락을 하여 병원에 빈소를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K병원에 빈소를 차릴 만 한 공간이 없었다. 나는 두 아들들과 의논하여 인천 연수구에 소재
한 J병원 장례예식장으로 남편의 빈소를 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지인들에게 문자로
남편의 빈소를 알렸다. 건물은 오래되고 누추해 보였지만 주차장이 넓고 외부에서 찾아오
기가 편리하였다. 오후 2시에 빈소가 차려지자 조문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사장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리도 건강하시던 사장님께서 이리 허무하게 세
상을 버리시다니요?”
남편의 옛 사업체인 S전자 시절 함께 일했던 회사원들이 달려와 헌화하며 남편에게 절을
하고나서 흐느꼈다. 아들딸과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된 남편의 빈소에 서서 조문객을 맞이
해야 했다.
“아이고, 김 박사, 이게 어찌된 거여? 나도 아직 살아 있는데 벌써 가시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야.”
한때 남편과 같은 업종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던 머리가 하얀 분들이 남편의 부음을 접
하고 몰려들었다.
한때 남편과 사업을 하면서 포부도 크고 꿈도 컸던 분들이 이제 모두가 머리에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세월은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하는 법인지, 나 역시 젊었을 때 모습은 간 데가 없
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낯선 얼굴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대부분 나와 남편이 70여년
넘게 쌓은 인연들의 발걸음들이었다.
“여사님, 이게 어찌된 일이에요? 건강하셨던 김 사장님이 갑자기 웬일이래요? 정말이지 믿
기지 않아요.”
나와 한때 I시 N의회에서 의정생활을 함께했던 옛 동료의원들이 문상을 와서는 내 손을 잡고
안타까워하였다. 나는 남편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료들은 모두 놀라워하는 표정들이었다.
“남편이 지난 2월 눈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많이 다치셨는데 연세가 있다 보니 여러 가지
로 안 좋아지고 합병증이 와서 ......”
나는 무척 궁금해 하는 옛 동료들에게 지난 과정을 다 말해주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여사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김 박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다니요?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남편과 비슷한 시기에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알게 된 지인들의 한결같은 질문이었다. 남들
에게 갑작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남편에게는 지난 두 달이 악몽 같은 시간이었고, 나
역시 밤, 낮으로 고통의 시각이었다. 그런데 남들은 갑작스럽다고 말을 하니 나는 남들 눈
에 남편을 잘 챙기지 못하여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빈소를 차린 첫날 문상객이 많았다. 밤 9시경 100평이나 되는 빈소에
남편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두 나와 그이 그리고 아들딸들과 직, 간접
적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산업계통으로는 남편의 인연들이 많았고 정치나 사회운
동 분야는 대부분 나의 인연들이었다. 물론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성미의 인연들도 많
았지만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아마도 남편의 사업이 지금도 승승장구하
며 잘 나갔더라면 지금보다 몇 배는 많은 문상객들이 조문을 왔을 것이었다.
큰일을 치르고 나면 인간관계가 정리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남편의 부음을 받으면 꼭 올 사
람들이 꽤 있는데 밤이 늦어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일 올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하
였다. 오랫동안 소식도 없이 지내다 남편의 소식을 듣고 온 분들도 꽤 있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여야 했다. 인연이란
맺기도 힘들지만 끊기도 역시 힘든 것이 분명하다. 선연(善緣)은 오래오래 지속되는 법이라
하였다. 남편과 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오리라 기대하였다.
밤 12시가 넘도록 많은 문상객들이 남편의 빈소를 찾아왔다.
“어머니, 너무 피곤해 보이세요. 방에 들어가셔서 쉬세요. 새벽 한시가 넘으니 문상객들이
뜸하네요.”
“어머니, 빈소는 저희들이 볼게요. 쉬세요.”
성국이와 성원이가 나를 걱정하였다. 더욱 둘째 성원이는 전에 허리 다친 게 다시 아파와
힘이 들텐데...
“난 괜찮아. 너희들이나 좀 쉬렴. 무척 힘들 텐데......”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눈을 붙이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
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