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6. 11. 27. 02:30















                                         












                                     사부곡(思夫曲)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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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된 신분으로 붓다의 마을 극락전(極樂殿)에 엎드려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다. 오늘은 남편이 이승을 떠난 지 정확히 49일째 되는 날이다. 주재(主宰) 스님의

낭랑한 지장경(地藏經) 독경소리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나의 전신을 찌르고 있다. 


 차가운 땀으로 온몸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그 사람의

환영(幻影)이 나를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나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에 혹여 내가 잘못될까

자식들은 걱정이 되어 나의 기도(祈禱)가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극락전 뒤편에서 때 이른 뻐꾹새가 가뜩이나 울고 싶던 나의 누선(淚腺)을 자극하고야 말

았다. 내가 조용히 흐느끼자 큰 아들 성국이 간간이 ‘어머니’를 외치며, 위안을 보내고 있다.

독경소리는 이제 송곳이 아닌 비수가 되어 나의 오장육부를 갈기갈기 찢는다.


 날카로운 메스가 내 폐부(肺腑)를 도려내는 고통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눈을 뜰 수가 없다. 46년 부부의 인연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뇌리를 스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추억의 편린(片鱗)들이 태산보다 많았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지장보살마하살
 ......


 나는 속으로 수도 없이 부처님들의 명호(名號)를 외치며 간신이 눈을 떴다. 세상의 모

든 죄를 용서해 줄 듯한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잔잔한 미소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나를 안심시켰다. 서너 시간을 차가운 마루바닥에 앉아있던 탓에 두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나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 일어섰다. 두 며느리들이 얼른 일어나 나를 좌우에서

부축하였다. 나는 가신님에게 이배(二拜)를 하고 다시 술잔을 올렸다. 나의 불안한 행동

에 아들, 딸,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긴장하고 있다. 나는 분명히 백일몽(白日夢)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보세요? 거기 성미씨네 집이죠?”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저희들이 길을 가다가 어떤 노인 한 분이 길가에 쓰러져 계셔서 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니 풍림아파트에 사신다면서 이 전화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많이 다치

셨어요.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여기는 아파트 입구에서 좌측으로 100여 미터 쯤

떨어진 언덕 있는 곳 입니다.”


 “아네네. 고마워요. 금방 나갈게요.”


 2016년 2월 28일 오후 3시. 아침 운동으로 회원들과 배드민턴을 7게임 하고나서 만수

클럽 회장 이,취임식에 들러 간단히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 누워 TV를 보고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잠시 바람 쐬러 나갔겠지 생각하고 나는 안방에 누웠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

하였다. 남편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기는 하였지만 나도 모르게 피곤해서 그런지 잠시

눈을 붙였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젊은 남성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빨리 나와 보세요. 여기 할아버지가 넘어지셨어요.”


 나는 정신없이 남편이 쓰러진 곳으로 달려갔다. 집으로 전화를 건 30대 초반 남성과

또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있고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은 멀리서도 금방 남편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면서 집이며, 골목이며, 차량들을 온통 하얗게 채색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받쳐 들고 종종 걸음으로 바삐 걸어 다녔다. 마음만큼 발걸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여보, 여보, 이게 어찌된 일이에요.”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얼어가는 남편을 흔들었다. 


 “여보, 나 눈길에 미끄러졌어. 엉치가 아파. 옆구리도 아프고......”
 “할아버지가 많이 다치신 것 같아요. 얼른 병원으로 모셔야 할 것 같아요.”

 나에게 전화를 건 젊은 남자가 나 보다 더 걱정이 되는 듯했다.


 “아이고, 젊은 분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나는 얼른 119로 전화를 걸었다. 길 가던 동네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줄 알고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여보, 나 추워. 어서 집으로 데려다 줘.”
 남편은 아프다며 내 손을 꼭 쥐고 집으로 가자며 채근하였다.


 “여보, 당신 많이 다친 것 같아 119 불렀어요. 병원으로 가야할 것 같아요. 잠시만 기다려

요.”
 “나 온몸이 아프고 추워 죽겠어. 어서 집으로 데려다 줘.”
 “당신 병원으로 가야해요. 이대로 집에 갔다가 큰일 나요.”


 남편은 ‘큰일 난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도 집으로 가자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남편은 바람을 쐬러 나오면서 파카도 입지 않고 얇은 옷차림으로

나왔다.  나는 입고 있던 나의 파카를 벗어 길가에 쓰러진 남편을 감싸 안았다. 15분쯤 지

나자 119 앰뷸런스가 비상등과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 왔다. 지금

까지 세상을 살면서 구급차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아이고, 아주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다치신 것 같습니다.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습

니다.”
 “네. 빨리, 빨리 병원으로 가주세요.”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원들이 들것을 이용하여 남편을 앰뷸런스에 옮겨

실었다. 나도 앰뷸런스에 타서 남편 옆에 앉았다. 앰뷸런스가 긴박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동네를 빠져 나갔다. 119 차량이 남편과 나를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소재 K병원 응급실로

이송하였다. 다급히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였지만 응급실은 이미 환자들로 만원(滿員)이었

다.


 남편은 아프다며 끙끙 앓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간호사들을 붙잡고

빨리 남편을 봐달라고 사정하였지만 환자가 넘쳐나서 그러니 무조건 기다리라는 말만 하

였다. 20여분쯤 지나 응급의사들이 남편의 상태를 보더니 골반과 오른쪽 어깨에 심한 골절

이 의심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정확한 것은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였다. 남편은 이제

아프다며 소리를 지르며 안 아프게 해달라고 나에게 애걸복걸하였다. 소리를 질러댈 때마

다 다른 환자들이 일제히 우리를 바라보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이러다 생사람 잡겠구나.’
 나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너무 당황하여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

지 물었다. 친구들은 만수동에 소재한 J병원이 골절에 용하다며 병원을 옮기라고 하였다. 


 K병원에서 기다리다가는 금방이라도 남편의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점점 더 큰소리로

아프다며 빨리 안 아프게 해달라고 하였다. 불안해진 나는 응급조치 된 남편을 응급차를

이용해 검사한 자료를 가지고 J병원으로 이송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남편분 상태가 아주 심각합니다. 골반 뼈가 부러지고 오른쪽 어깨뼈도 조각이 난 상태

라 상당히 위험합니다. 우선 통증을 가라앉히고 내일 수술을 해야겠습니다.”


 전에 몇 번 본적이 있는 J병원 원장이 나에게 남편의 골반과 어깨를 그림으로 그려가며

남편의 상태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나는 원장의 제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남편은 수술을 받고 남편은 병실에 입원하였다. 진통제 덕분에 낮에는 거의 수면 상태로

있다가 저녁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면 또 아프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옆에 있는 환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참으세요.”
 “내 몸뚱이가 이렇게 아파죽겠는데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염병헐~”


 나는 옆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과 간병인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미안하다고 하였다.

늦은 밤까지 남편은 소리를 질러댔다. 잠깐 잠이 들면 잠꼬대를 하면서 병실을 시끄럽

게 하였다. 밤 10시면 큰아들 성국이가 회사에서 퇴근한 뒤 곧바로 남편이 있는 J병원

으로 왔다. 낮에는 내가 남편 병실에 있고 밤이면 아들들이 교대로 남편 병간호를

하였다.   


 남편은 1차로 고관절 접합 수술을 하고 나는 남편의 병간호를 보는 게 너무 힘이

들어 전문 간병인을 쓰기로 하였다. 병상에 누워 있는 남편의 대소변을 받아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이 79세의 남편의 몸은 무척 나약한 편이었다. 평소에도 집에 있으면서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식사 후 산책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왜소한 체구에 살이 없어 앙상해 보이는 남편의 체구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

였다. 


 남편은 10분도 병상에 누워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누워서도 무엇을 연구해야 한다며

노트와 필기도구를 갖다달라고 하였다. 워낙 여러 분야의 전자, 전기 제품들을 연구해

온 탓도 있겠지만 병상에 누워서도 무언가를 연구를 해야 한다는 소리에 나는 한숨이

나왔다. 


 팔다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연구를 하겠다는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측은

지심(惻隱之心)이 일었다. 80평생을 연구에만 몰두한 분이 병상에서도 또 우언가 연구를

하겠다니. 아직도 본인이 정상인 줄 알고 있는 남편을 보면 한숨이 나왔다.


 “여보, 나 좀 일으켜 줘봐. 연구를 해야 해.”
 “환자가 가만히 누워있지 않고 뭘 하신다고 그래요?”


 “이 사람아 나 멀쩡해.”
 ‘아이고, 못 말려. 저 고집을 누가 말릴 수 있겠나.’


 1차 수술이 잘되어 며칠 후 실밥을 뽑았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어깨뼈 조각 난데를

봉합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병원 측 설명이었다. 남편은 당뇨에 심장도 안 좋고, 폐부전증

도 있어서 수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J병원에 입원한지 3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일주일은 아들과 내가 교대로  남자 간병인을 쓰기로 하였다. 여전히 남편의 대소변은

병상에서 간병인이 받아내고 있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