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몽(花夢)
- 여강 최재효
새벽부터 주인도 없는 꽃밭에 들어가 뒹굴었지
홍화(紅花)는 손길 닿는 대로 쓰러지고
설화(雪花)는 눈길조차 외면하는데
어화(語花)는 고개숙여 눈치만 살피고 있네
본디 나 역시도 신명(神明)의 꽃이었거늘
춘년(春年)에 꽃 찾아 동서남북 발길 멀리 놓고
성년(盛年)에 꽃 그림자에 자주 넋을 잃었는데
중년(中年)에 겨우 그 진한 향기를 품을 수 있었지
대저, 나 이외에 장화(墻花)란 무엇이던고
어제는 그대가 나의 일부였고
오늘은 내가 타인의 한편으로 살아가고 있나니
인사(人事)란 정해진 것이 어디 있으리
한 시절 봄날의 정분(情分)은 허망하고
목숨 같던 맹약도 허언(虛言)이 되는 세태여서
한 세월을 고주(苦酒)로 벗을 삼았더니
무던했던 청안(淸顔)에 수심만 천 길로 담겼네
자시(子時) 지나 차가운 금침(衾枕) 덮고 누우면
홀연히 만상(萬象)들 꽃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마치 구름 사이에 달이 숨은 듯하여
밤새도록 뒤척이니 탄식만 천지에 가득하네
- 창작일 : 2016.3.1일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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