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4. 8. 3. 18:52

 

 

 

 

 

 

 

 

 

 

                                                  

 

 

 

 

  

 

                                                                  월하무정

                                                                                                                                                  - 여강 최재효

 

 

 

 

                                                                                  5

 

 

 

 

 태왕 무휼은 호동왕자가 낙랑국에서 가져온 북이 낙랑국을 지켜

주는 전설속의 자명고自鳴鼓인 줄 알고 낙랑국으로 쳐들어갔다가

무참히 참패한 후 궁궐에 들어 앉아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무

휼은 넓은 영토와 많은 백성이 있어야 강성한 나라를 만들 수 있

다는 믿음은 확고했다. 비록 낙랑국에 출정하여 보기 좋게 망신을

당하기도 했지만 영토 확장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왕후 송씨의 변덕은 날로 더 심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무휼

태왕의 둘째아들인 해우解憂는 아직도 자리에 누워 유모乳母의 젖

을 먹고 있었다. 왕후 송씨는 자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의 매일

같이 연나부椽那部 여인들이나 자신의 마음에 맞는 대신들을 초대

하여 술자리를 만들었다. 초대받은 연나부 여인들은 왕후 송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값나가는 장신구나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들어와 왕후에게 선물하였다.


 “왕후님. 어서 빨리 해우왕자님을 태자로 만드셔야지요? 만약

태왕폐하에게 변고라도 일어나는 날이면 다음 태왕의 자리는 호동

이 차지할 겁니다.”


 연나부 소속 고추가古鄒加의 처는  해우왕자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왕후의 의중을 떠보았다.



 “나도 속이 탄답니다. 태왕에게 강보襁褓에 쌓여있는 해우를 태

자로 임명해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른 듯 해서 고민이랍니다.”
 왕후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아이고, 왕후님, 이르다니요? 절대로 이르지 않습니다. 해우왕자

님이 비록 젖을 먹고 있는 아이라고 하지만 얼마든지 태자에 임명

될 수 있답니다. 늘 전쟁터에 나가 있는 태왕께서 전사戰死라도 하

는 날에는 왕후께서 수렴청정하시면 됩니다.”


 “수렴청정이 무엇입니까?”
 “왕후, 수렴청정이란 태자가 왕위에 올라으나 너무 어려 정사를 볼

 수 없을 경우 태자의 모후母后께서 발을 쳐놓고 대신들을 만나 국정

을 논의하거나 태왕을 대신하여 명을 내리는 것입니다.”


 “어머나, 그런 제도가 있었나요?”


 “우리 고구려에서는 아직 시행된 적은 없지만 이웃나라에서는 자주

활용되는 제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서둘러 해우왕자님을 태자에 봉하

시라고 태왕께 말씀드리세요. 해우왕자님을 태자에 올려놓으셔야 왕

의 지위가 안전하게 됩니다. 만약 호동이 태왕에 앉는다면 왕후님

은 처참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고마워요. 하루 빨리 해우를 태자에 앉혀야 겠네요.”

 
 “호동은 비록 태왕의 큰 아들이라고 하지만 있으나 마나한 갈사부

여曷思夫餘 왕의 손녀 해씨解氏가 낳은 자식으로 고구려 왕비족 출

신인 왕후마마 몸에서 나온 해우왕자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호동이

고구려의 태왕이 되면 나라를 통째로 부여나 혹은 낙랑국에 바칠게

뻔합니다.


 사정이 이러하오니 장차 해우왕자와 왕후님 그리고 고구려가 사는

길은 하루 빨리 해우왕자님이 태자가 되는 겁니다. 왕후마마, 서둘

러야 합니다. 때를 놓치시면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기시게 됩니다.”


 “대부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로 그러네요. 그러나 태왕은 내가

아무리 졸라도 해우가 아직 어리다고 태자에 임명하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도 더 확실한 방법이 없을까요?”


 왕후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어린 왕자 해우解憂를 태자에 앉히기

위한 더 확실한 방법을 원했다.


 “왕후,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왕후의 친정 조카뻘 되는 여인이 조심스럽

게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떤 좋은 방법이 있니?”
 “호동을 죽이는 방법입니다.”


 “호동을 죽여? 내가 어미의 입장으로서 호동이를 죽이면 나 또한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야.”
 왕후는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저었다.


 “왕후, 죽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 네가 아는 방법을 모두 말해 보거라.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
 왕후는 잔을 단숨에 비우고 조카의 입에서 묘안이 나오기를 기대하였다.


 “왕후, 사람이 죽는 방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과 타인의 손에 죽

는 타살他殺이 있습니다. 타살은 죽인사람의 목숨도 위험하오니 좋은 방

법이 못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

은 자살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자살을 유도한다? 그래. 조카야, 계속 말해 보거라.”


 “호동이 자살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만들면 됩니다. 지난번 낙랑의 계

집과 함께 고구려로 돌아오면서 태왕에게 가짜 자명고를 가져오지 않

았습니까? 태왕께서는 호동의 말만 믿고 낙랑국에 쳐들어갔다가 아까

고구려 병사들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호동과 낙랑에서 온 계집이 간

사한 혀를 놀려 비록 목숨을 건지긴 하였지만 그 일은 호동과 그 낙랑

년이 백번 죽어 마땅한 대역죄입니다. 호동은 그 일로 두고두고 태왕이

고구려 대신들 또한 지난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의 가족들로

부터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왕후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태왕께 호동이 오만하고 왕후에게 부도덕

한 짓을 한 죄를 고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태왕께서는 계속 호동을 감싸

고 돌뿐입니다. 확실하게 호동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올가미를

만들어 보세요. 확실한 증거와 증인 혹은 정황이 있다면 태왕께서도 호

동이를 더 이상 두둔하지 못할 것입니다.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시면 왕

후와 연나부가 주도적으로 호동의 죄를 물고 늘어지시면 태왕께서도 속

수무책일 겁니다.”
 왕후의 조카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네가 유방劉邦의 장자방張子房 보다 똑똑하구나. 조카야, 너는 앞으로

내 처소에 자주 들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정적政敵을 물리치는 방법

을 자문하면서 나의 장자방 역할을 하거라. 일이 잘되면 내 너에게 후한

상을 내릴 것이야.” 


 “왕후, 이런 말씀 올리면 어떨지 모르지만 호동을 두세 번 더 가까이 부

르시어 술자리를 만들고 호동이 음행淫行을 하도록 유도해 보심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리고 궁인들을 증인으로 세우면 호동이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이미 왕후와 호동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연나부 여인들은 모

두 알고 있었다. 왕후가 호동을 유혹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네가, 일전에 나라에 큰 빚을 졌다. 너는 다시 한 번 낙랑국으로 가서

정말로 자명고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아보고 만약 우리가 모르는 자명

고가 있다면 파괴해야 한다. 자명고가 반드시 낙랑국 궁궐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으니 면밀하게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무영단이

란 실체도 다시 한 번 추적해서 와해시켜 아비가 낙랑국을 정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이번에 네가 큰일을 해내면 너를 태자로

임명할 것이야.


 그러나 또 실패한다면 너를 향한 비난을 아비도 막아낼 수 없을 것이

다. 이번에는 무예에 뛰어난 전사 열 명을 호위무사로 데리고 가거라.

자명고를 찾아내면 곧바로 찢어버리고 무영단의 실체를 파악하면 그

영단을 움직이는 중요 핵심 인물만 제거하면 될 것이야.


 그리고 즉시 아비에게 전서구傳書鳩를 띄우면 아비가 대군을 동원하

여 낙랑을 정복할 것이다. 이번이 아비와 아들이 마지막으로 합심하여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이니라.”


 무휼은 낙랑공주를 낙랑국으로 돌려보내 놓고 술로 실의의 나날을

달래고 있던 호동에게 밀명을 내렸다.


 무휼은 호동을 향해 날로 거세져 가는 왕후의 트집을 잠재우고 지난

전쟁에서 체면을 구긴 고구려 태왕의 자존심을 되찾고 싶었다. 이번

에 호동이 확실하게 공을 세우면 호동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호동을

태자에 봉해버리면 호동을 향한 왕후와 왕후의 지지 세력들의 불평불

만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고 무휼은 판단하였다.


 신흥제국 고구려의 태왕으로서 무휼은 하루 빨리 태자의 문제를 매

듭짓고 싶었다. 호동이 왕자의 신분으로 남아 있으면 송왕후의 트집

과 불평은 끊이지 않을 것을 무휼은 잘 알았다.


 “아버님, 소자 아버님의 명을 받고 내일 낙랑국으로 떠나겠습니다.

이번에는 소자가 반드시 공을 세우고 당당하게 고구려의 태자가 되

겠습니다. 아버님께서 소자를 믿어주시니 소자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효도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님. 흑-.”
 호동은 무휼 앞에 엎드려 속으로 흐느꼈다.


 “장하다.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무휼은 호동의 등을 다독거렸다.



 ‘이 녀석이 이번에는 반드시 공을 세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왕후와 왕비족 그리고 지난번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대소신료들이

나 백성들의 불평이 날로 더 할 텐데. 아비로서 자식을 적국에 보내

억지로 공을 세우라고 등을 떼민다는 것이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힘없는 외가外家를 가진 너의 운명이기도 하거니와 너는

이미 왕후와 깊은 관계에 있으니 국내성에서 조용히 살 수가 없는

입장이 되었다. 아비로서 차마 입에 올리기 민망한 일들을 이번에

네가 큰 공을 세움으로써 모든 불신과 의혹들을 날려버리기 바란

다.’


 무휼은 쓰린 속을 참아가며 얄궂은 운명에 놓인 아들 호동을 연민

의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네 시아비 되는 무휼이란 자는 극악무도하구나. 사람의 신뢰

를 이리 무참히 짓밟다니 그 자는 사람이 아니라 영토 확장에 눈이 먼

미치광이가 확실하다. 너는 다시는 고구려에 갈 생각하지 말라. 호동이

북을 달라고 하여 주었으면 만족하고 양국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 생각

을 해야지. 곧 바로 군사를 몰고 낙랑국에 쳐들어오다니.


 내가 분명히 호동왕자에게 그 북은 자명고가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두드려야 울리는 북이라고 했거늘. 그 북을 자명고로 알고 낙랑국으

로 쳐들어오다가 고구려 병사들이 몰살되시피 했으면 정신을 차려

야지. 아무 죄도 없는 너를 왜 쫓아 보내?”
 낙랑국왕 최리는 딸 애랑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 노발대발하였다.


 “아버님, 호동왕자님을 나무라지 마세요. 왕자님은 시아버님에게

사실대로 이야기 하였지만 시아버님의 욕심이 커서 일이 이리된 것

을요. 얼마 지나다보면 호동왕자님이 소녀를 데리러 낙랑국으로 오

실 거예요.”


 “애랑아, 너는 그렇게 당하고서 고구려로 다시 가고 싶으냐?”

 “아버님, 소녀는 낙랑국 공주이기 전에 이제는 고구려 태왕의 며느

리입니다. 지어미가 지아비를 따라야 하는 게 도리 아닌가요?”


 “안 된다. 호동이가 오건 무휼이 오건 나는 너를 고구려로 보낼 수

없다.”

 “아버님, 그럼 소녀는 혼인한 처지로 평생 낙랑국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나요? 차라리 죽는 게 좋겠어요.


 “애, 애랑아, 그런 게 아니고......”
 낙랑국왕 최리는 슬피 우는 딸을 바라보며 자신의 과욕을 탓하였다.


 “아버님, 소녀는 이제 고구려로 갈 수 없다면 낙랑국에도 있을 수 없습

니다. 백성들이 소녀를 비웃을 게 뻔 한데 어떻게 낙랑국에서 살 수 있

어요? 차라리 호동왕자님과 한나라나 흉노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살고 싶습니다.”



 
 ‘아,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구나. 호동은 고구려 태왕 무휼의 아들이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란 것을 내가 왜 간과하였단 말인가? 무휼은 나와

사돈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고 우리 낙랑국의 정복을 원하고 있는데 괜

히 내 딸만 생과부로 만들게 되었구나.


 장차 이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저애가 호동이를 정말로 사랑하

는가 보구나. 그러나 호동이도 내 딸을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딸애 말대로 호동이와 애랑이를 한나라에서 살도록 할까?


  아니야, 그리되면 한나라에서는 저애들을 미끼로 무리한 요구를 해올

수 있어. 그렇다면 흉노는 어떨까? 아니면 남삼한南三韓 중 진한辰韓이

나 변한弁韓으로 보낼까? 만약 호동이 싫다고 하면 아무것도 되는 일

없겠지.


 저애를 또 다시 고구려로 보낸다면 무휼의 처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듣자하니 그 여인은 욕심도 많고 악독하여 저애가 혹독한 시집살이를 할

수도 있어.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이일을 어찌할꼬.’


 고구려와 한바탕 전쟁을 치른 낙랑국은 더욱 고구려에 대한 경계태

세를 강화하고 전군全軍에 비상대기령을 하달하여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낙랑국왕 최리는 무영단의 조직을 점검해보고 만

약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최필과 무영단 주요 인물들에게 주의를 주었

다.


 고구려와 낙랑국은 잠시 평화를 유지하였다. 양국의 국경을 보면 아

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낙랑공주 최애랑은 호동왕자가 너

그리워 밤마다 눈물로 지새웠다. 그러던 차에 호동이 낙랑공주를

찾아왔다.




 “공주, 이게 얼마만입니까?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눈을 떠도 그대 생

각, 눈을 감아도 그대 생각, 잠을 자도 그대 생각, 온통 그대 생각으로

고통의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왕자님, 소녀도 왕자님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소녀는 고구려에서

돌아온 뒤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어요. 이렇게 돌아와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호동이 수하들과 함께 낙랑국에 들어오자 낙랑국왕 최리는 겉으로

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듯 하였으나 속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다,


 “대왕, 사위 호동입니다. 지난 번 두 나라 간에 일어난 뜻하지 않은

전쟁으로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 줄로 압니다. 모두가 이 사위가 부족

하여 그리된 일이니 용서하소서. 제가 아버님에게 자명고에 대한 이

야기를 잘못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아버님께서도 낙랑국에 자

명고가 없다는 사실을 아셨으니 앞으로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네가 그리 말하니 내 알아 듣겠네. 그래, 자네 아버님, 어머님은

무탈하신가?”


 “네에, 덕분에 잘 계십니다.”
 “지난번 자네 아버님이 우리 낙랑국을 침범한 일은 참으로 유감일

세.”


 “송구하옵니다. 저도 아버님께 강하게 항의하였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정말로 앞으로 양국 간에 아무 일도 없을 것인가? 나는 자네 아버님이

두렵네. 언제 또 우리 낙랑을 침범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네.”


 “제가 낙랑국에 오지 않았습니까? 당분간은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내 자네의 말을 믿어보겠네. 이왕 왔으니 크게 상처 입은 애랑이 마음

을 다독거려주고 푹 쉬도록 하게.”


 호동은 낙랑국 궁에 머물고 수하들은 궁 밖에 있는 민간에 머물도록

조치하였다. 낙랑공주 애랑은 날마다 하루 세끼 몸에 좋다는 각종 보약

을 구해서 호동에게 복용토록 하였다.


 호동은 애랑이 아직도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판단

하고 가급적 정치 이야기는 피하고 사랑이야기만 하였다. 호동은 애랑

을 데리고 가까운 산으로 사냥을 가거나 말을 타고 산책을 하면서 낙랑

사람들에게도 호동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부단

히 노력하였다.


  “애랑, 지난번 일은 정말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욕

심 많은 아버님께서 벌인 일입니다. 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그 일로 애랑이 낙랑으로 쫓겨 오게 되었고 나 역시 아버님과 어머님

크게 질책을 받았답니다.”


 “아니어요. 이제 다 지나간 일인걸요. 지난 일을 자꾸 생각하면 머리

만 아파요. 왕자님, 우리 이제 그 일은 잊어버리고 앞으로 우리가 살길

을 생각해봐요. 아버님은 저에게 고구려로 가지 말고 낙랑에서 살라고

하세요. 그리되면 왕자님도 이곳에서 사셔야 하잖아요. 왕자님은 고구

려의 왕자님이시잖아.”


 “아버님께서 그대를 고구려로 가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네에.”


 “이거 정말로 큰일입니다. 부부가 한 집에 살면서 희로애락을 나눠야

하거늘 나는 고구려 애랑은 이곳 낙랑에 있으면 부부라는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요? 대왕께서 괜히 해보는 말일 겁니다. 이제 내가 왔으니 얼

마간 머물다 나하고 고구려로 가도록 해요. 부부는 한집에 살면서 행복

을 추구해야 합니다. 부부가 같이 있어야 아이들도 태어나고 그 아이들

키우는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야 지요.”


 “소녀의 뜻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나 양국 간에 전쟁을 벌이는 형국

이니 언제 양국의 관계가 좋아질지 모르겠어요. 왕자님께서 낙랑국과

고구려가 화친和親하도록 애써 주셔요.”





 “애랑, 걱정 말아요. 내가 그리하려고 온 겁니다. 공주는 이제 마음을

열고 내가 양국 간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협조해 주세요.”
 “왕자님, 소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나와 애랑은 하늘이 맺어준 부부랍니다. 부부는 몸과 마음이 같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부부도 아니고 단지 애욕에 눈이 먼 불륜관계 일

뿐입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말을 애랑에게 이미 다 했습니다.

구려 조정에 관한 모든 일을 다 이야기 해줬어요. 심지어 국가 일급비밀

 사항까지도 다 알려주었어요. 그만큼 애랑은 나에게 지어미일 뿐만 아

니라 고구려의 며느리이기 때문입니다.”


 “소녀도 이미 낙랑국에 관련된 사항은 모두 왕자님에게 말씀드렸어요.”
 “사람은 믿음이 우선해야 합니다. 부부사이에 있어서도 무엇을 자꾸만

감추려 든다면 결국 이별의 강을 건너는 수밖에 없습니다.”


 “왕자님, 이별의 강이라니요? 소녀, 이별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

렁거리고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만같답니다.”


 “애랑, 미안해요. 행여나 애랑이 나에게 감추는 게 있는 거 같아 이별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말입니다. 괘념치 마세요.”


 ‘아, 왕자님이 혹시 무영단의 정체를 알고 계시는 게 아닐까? 어찌해야

하나? 사랑을 택하려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줘야 하는데

......’


 “왕자님, 때가 되면 소녀가 알게 될 일이나 혹시 생각이 안 나서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으면 알려드릴게요. 이제는 앞으로 일어날 우리

이야기를  해요.”


 “좋아요. 나는 애랑에게 아들 딸 열 명만 낳으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네에? 열 명씩이나요?”


 호동은 애랑과 잠시지만 세상의 골치 아픈 일들을 모두 잊고 행복한 시

간을 보냈다.


 “태왕폐하, 항간에 궐 안팎에서 참으로 듣기 민망한 소문들이 꼬리에 꼬

리를 물고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있습니다.”
 연나부 출신 대신 중 한명이 무휼을 찾았다. 


 “경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폐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괴상한 소문입니다.”


 “괜찮소이다. 경은 어서 말해보오.”
 “폐하, 소신이 아뢰는 말씀을 들으시고 역정을 내실까 두렵습니다.”


 “허, 그럴 거라면 말을 꺼내지 말아야지요. 운을 띄워놓고 그만 둘 수

없지 않습니까? 무슨 이야기좋으니 어서 말씀해 보세요.”


 “폐하, 호 호동왕자께서 왕후마마를 강제로 욕을 보였다는 소문이 파

다합니다. 장차 이일을 어찌해야 옳을지 소신들은 참으로 난감하옵니

다.”


 “허, 또 그 이야기요? 그 이야기는 누군가 호동이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퍼뜨린 소문이란 것을 은 이미 알고 있소이다.”


 “먼젓번에도 그 같은 소문이 있었다는 것을 소신도 알고 있습니만 이

번 소문은 아주 구체적이며 몇몇 궁인들도 보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런 하찮은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오. 호동이는 지금 낙랑국

에 짐의 밀명을 받고 나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큰 공을 세울 겁니다.

그러니 경들은 그 아이가 돌아올 때 가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

겠습니다.”


 “폐하, 그래도 신이 간단히 아뢰겠으니 한번 들어보소서.”
 “경은 근거도 없는 말로 짐을 힘들게 하지 마시오. 호동이는 아우를

죽일 만큼 악독한 아이가 아니오.”


 무휼은 크게 역정을 내며 대신을 못마땅하게 대했다. 호동이 왕후 송

씨와 나이가 비슷하다보니 왕후를 어머니로 대접하지 않고 함부로 대

한다는 것과 태왕이 궁을 비우면 호동이 왕후의 처소로 찾아와 왕후와

제로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것과 어린 이복 동생인 해우왕자를 죽이

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태왕은 호동이 계모인 왕후 송씨를 강간하려고 들었다는 이야기를

왕후 송씨에게서 수차례 들었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호동이 어린 이

복동생을 죽이려 한다는 말은 처음 이었다.


 연나부 대신은 무휼에게 감히 해서는 안 될 말들을 가리지 않고 쏟아

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왕 무휼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대

신이 고하는 이야기 중 상당수는 왕비 송씨나 연나부 사람들이 호동을

해하기 위하여 고의로 지어낸 말이라고 판단하였지만 호동이 이복

동생을 죽이려 했었다는 말에 무휼은 간담이 서늘했다. 원비元妃 송씨

와 차비次妃 해씨解氏 소생인 호동 간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보면서

무휼은 자신의 형들을 생각했다.


 아버지 유리왕 재위 20년경 도절都切 태자가 죽었다. 유리왕은 당시

도읍지였던 환인桓因에서 즙안輯安으로 옮겨 왕권 강화를 시도하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도절에 이어 태자에 책봉된 해명解明 왕자는 유리

왕의 명령에 의해 자결하였다.


 유리왕은 해명이 이웃나라 황룡국黃龍國에서 선물한 활을 꺾어버렸

다고 하여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게 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해명태자를

자결케 하였다. 위로 두형이 죽는 바람에 졸지에 태자가 된 무휼에게

가슴 아픈 가족사는 두고두고 무휼을 괴롭혔다.


 ‘아, 또 가족의 비극이 일어나려 하는 것인가? 안 된다. 절대로 아비

가 아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일은 없어야 해. 호동과 해우는 내 아들이

다. 지난 가슴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면 안 된다.


 그러나 왕후는 해우를 왕위에 앉히기 위하여 연나부 사람들과 공모

하여 호동이를 음해하려 들고 있다. 마음이 유약한 호동이 절대로 아

우를 죽일 만큼 강단이 있지 않아. 앞으로 왕후가 또 얼마나 나를 괴롭

힐 것인가.’
 무휼은 호동의 앞날이 걱정이 되었다.


 “왕후, 태왕께 호동이의 죄를 고했습니다. 태왕께서 이번에는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동생을 음해하려고 하였다는 소신의 말에 태왕

께서 크게 노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요?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그대뿐만 아니라 다른 대신들도 수

시로 태왕을 찾아가 호동의 악행에 대하여 고해야 합니다. 옛말에 삼인

성호三人成虎라 했어요.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으면 사람들은 그 말

을 차차 믿게 됩니다.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 계속해서 태왕을 만나

똑같은 말을 하도록 하세요.”


 “태왕도 연나부 출신 대신들의 일관된 고변을 듣고 함부로 흘려버

리지 못할 겁니다. 이일이 잘되면 연나부 출신 대신들에게 포상을 내

리고 훗날 해우가 태왕의 자리에 오르면 후하게 관직을 내릴 것입니

다.”


 “왕후, 고맙습니다. 신들이 일치단결하여 반드시 호동이가 죽도록

하겠습니다.”
 “집안 대신들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시니 고마울 뿐입니

다.”


 “호동이 태왕의 자리에 앉는 날이면 우리 연나부는 손발이 묶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호동이 낙랑국에서 돌아

오면 함정을 파서 빠뜨려야 합니다. 소신이 앞장설 것이니 왕후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이는 해우왕자의 장래와 우리 연나부의 미래가 걸린 중

차대한 일입니다.”


 “역시, 친정밖에 없군요. 고마워요.”
 왕후는 연나부 출신뿐만 아니라 다른 나부那部 출신 대신들에게도

은밀하게 손을 써서 자신이 낳은 해우왕자가 무휼의 뒤를 이어야 한

다는 뜻을 전하며 자신의 편을 만들고 있었다.


 “애랑, 사랑해요.”
 호동과 애랑이 한창 운우지정을 나누고 있었다.


 “왕자님, 소녀는 이제 왕자님 안 계시면 살 수 없어요. 고구려에 가

지마시고 여기서 살아요.”
 “애랑, 내가 여기서 살면 무엇을 해줄 것입니까?”


 “소녀가 가지고 있는 거, 알고 있는 거 모두 드릴게요. 그러니 제발

여기서 소녀와 함께 살아요. 고구려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여기서 아

버님 나라를 이어받아 왕이 되어 편안하게 살아요.”




 ‘응? 내가 낙랑왕이 되라고? 애랑의 말도 전혀 나쁘진 않아. 고구려

로 돌아가면 왕후가 나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니 애랑이 말대로 고구

려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살아볼까.


 그러나 내가 고구려 왕자의 신분이니까 낙랑왕이 나를 우대하는 거

야. 내가 고구려의 왕자 신분이 박탈되는 순간 나는 이 나라에서 쫓겨

날 테지. 그렇다면 나는 낙랑국의 비밀을 알아내서 멸망시키고 아버

님에게 태자의 자리를 달리고 해야 돼.


 내가 태자의 자리에 앉으면 왕후를 비롯해 나를 헐뜯던 자들은 감히

나에게 대항하지 못할 거야. 안 된 일이지만 나는 반드시 낙랑국의 비

밀을 알아내야 해. 그게 내가 사는 길이야.’


 “애랑, 사랑해요. 내 그대 말대로 이곳에서 왕으로 사는 방법도 생각

해 보겠습니다.”
 “왕자님, 소녀의 청을 들어주시어 고마워요. 우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요. 왕자님 말씀대로 아들 딸 열 명 낳고요.”


 “애랑, 내 사랑. 죽어도 그대를 잊지 않을 겁니다. 사랑합니다.”
 창문이 희미한 여명黎明에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호동이 나부裸婦

가 된 애랑을 입술로 애무하였다. 호동의 입술이 민감한 부위에 닿을

때마다 애랑은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애랑, 무영단을 누가 이끌고 있습니까?”
 “소녀는 몰라요.”


 호동이 애랑의 깊은 곳을 더욱 세게 압박하였다. 애랑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몸을 좌우로 뒤었다.


 “애랑, 무영단을 혹시 그대가 이끌고 있습니까?”
 “아니에요. 제가 아니에요.”


 애랑은 호동의 능수능란한 혀와 손길에 무아지경에 빠져 마치 최면

에 걸린 사람 같았다.


 “그, 그럼 누가 이끄나요? 혹시 작은 아버지 최필이 이끄는 게 맞지요?”
 “네에, 맞아요.”


 “애랑, 고마워요.”
 호동은 애랑의 깊고 푸른 샘물을 마시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무영단은 듣기로 전국적으로 단원이 삼천 명쯤 된다는데 맞아요?”
 “네에, 맞아요.”


 애랑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낙랑국을 지탱시키는 최대 비밀

조직인 무영단의 운영자를 알려주고 말았다. 호동은 정사를 끝내고 땀

에 흠뻑 젖어 할딱거리며 쾌락의 여운에 취해 누워있는 애랑의 육신을

안아 주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