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후(1)
[주] 필자는 AD197년에 있었던 발기(發岐)의 난(亂)을 소재로 역사단편소설을 창작하였다. 이 난은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 AD179~197년) 사후 형 발기와 동생 연우延優(산상왕:AD197~
227) 사이 왕위계승권을 놓고 벌어진 난이다. 발기의 난’은 고구려가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인
하북성 요동遼東을 상실한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하북성 요동을 상실함으로써 고구려는 대륙
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200여년이 지난 광개토대왕 때 다시 요동을 수복하지만 대륙은
고구려라는 균형추를 상실하여 5호(胡) 16국(國) 시대의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왕후
- 여강 최재효
1
기원후 197년 5월의 밤. 하루 종일 내린 봄비로 국내성國內城은 음습한
분위기 속에서 너무 적막했다. 초저녁이 되자 비가 그치기는 했지만 대전
은 초긴장 상태였다. 어의御醫와 시녀들이 대전을 드나들며 태왕太王, 남
무南武가 얼마나 더 버틸지 속으로 가늠하고 있었다.
왕후王后 우씨于氏는 태왕 곁에서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태왕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태왕이 고통을
참아가며 숨을 헐떡거리다 잠잠해지면 왕후는 왕의 콧구멍을 살피며 새의
깃털을 대보았다. 태왕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마흔 두 살의 태왕, 남무 보다 열 살이나 연하인 왕후 우씨는 연나부椽
那部 소속 우소의 딸로 왕후의 자리에 올랐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5부
연합체로 출발하였다. 5부는 계루부桂婁部, 연나부椽那部, 관나부貫那部,
비류부沸流部, 환나부桓那部인데 계루부에서 태왕의 자리를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연나부는 왕후를 배출하였다.
계루부와 연나부의 단단한 결속으로 다른 부는 감히 태왕이나 왕후의 자
리를 넘보지 못했다. 왕후의 자리를 연나부가 계속하여 차지하자 다른 부
의 불만이 고조되었지만 계루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태왕, 남무는 원래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신대왕新大王 백고
伯固에게 다섯 명의 왕자가 있었다. 태자에 해당하는 큰아들 발기拔奇는
기행을 일삼으며 정치에 뜻이 없는 듯 행동하였다. 둘째 왕자 남무南武는
9척 장신으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인물로 나라의 큰일에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하는 등 일찌감치 왕재王才의 자질을 보이고 있었다.
부왕父王이 죽자 대소신료들은 만장일치로 남무를 고구려 제9대 태왕
으로 추대하였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큰아들 발기 왕자는 자신을 따르
는 무리를 이끌고 요동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았다.
남무의 바로 아래 동생이 바로 발기發岐였는데 큰아들과 이름이 동음同
音이었다. 발기는 형 남무 못지않게 기골이 장대하지만 성질이 고약하여
따르는 무리가 없었다. 술에 취하면 아무나 잡고 행패를 부리거나 싸움을
걸어 백성들이 발기 왕자를 두려워하였다.
넷째 왕자 연우延優는 신대왕의 후비后妃 궁인宮人 주씨朱氏의 소생으
로 남무 못지않게 키가 크고 생김새가 반듯하여 많은 궁녀들과 연나부 출
신 여인들이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나약하여 큰일을 맡기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 보였다. 그
의 아우인 다섯 번째 왕자 계수罽須는 똑똑하고 무예에 능하고 형 연우와
우애가 무척 돈독하였다. 정비正妃 소생인 두 명의 발기 왕자와 남무, 후
궁 소생인 연우와 계수 사이에 늘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정비와 후궁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다섯 명의 왕자들은 보이지 않는 경
쟁심이 작용하고 있었다. 신대왕은 정비인 목왕후 보다 후궁인 궁인 주
씨를 더 총애하여 자식들 간에 자주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왕후님, 태왕께서 곧 붕어하실 듯 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소서.”
왕후 우씨는 어의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의는 깃털을 태왕, 남
무의 코끝에 대고 태왕의 호흡 상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새의 깃털
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왕후는 검푸르게 변한 태왕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지난 17년
간 부부로 살아온 추억이 왕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태왕의 병환
은 뚜렷한 증상이 없이 지난 연말 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봄이되면서 악
화되었다.
“왕후, 훗날 내가 저승에 들더라도 그대를 보호하고 책임질 것이오. 언
제나 나 한사람만 사랑해야 하오. 우리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한 몸
이 되었소. 좋은 날이나 굳은 날이나 우리 서로 의지하며 천세만세 살아
갑시다.”
왕후는 수많은 연나부의 여인들 중에서 왕후로 간택되어 남무와 혼인
하던 날 밤을 기억해 냈다. 두 사람이 밤새도록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
누며 첫날밤을 하얗게 지새우던 그날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왕후는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도 당당했던 분이 이리 나약한 모습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 있으니
참으로 인생이 별거 아니로구나. 어쩌면 나와 이 사람은 처음부터 맞지
않았어. 나는 고구려의 왕후로서 왕을 보필하고 자손을 생산하여 국가의
기틀을 굳건히 세워야 할 입장이었지만 그러하지 못했어.
선조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것이 모두 나의 책임이라고 인정할 수
없어.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거늘 허구한 날 독수공방의
처지로 지냈으니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참으로 지루하고 무의미
한 세월이었지.
태왕은 강직하고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성격이라 나의 친정 식구들이
백성을 폭행하였다고 살려달라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죽였
어. 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집안에 있는 여인에게
수시로 눈길을 주는 일이 더 중요할지 몰라.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는 일보다 수신제가修身齊家가 먼저 일거야.
남자들은 큰 것만 바라보지만 여인들은 작은 것을 먼저 신경을 쓰고 잘
다스린 다음에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법이지. 지난 세월 동서로 말을
달리고 남북으로 창칼을 휘두르며 거친 역정을 달려왔지만 겨우 집안
에 있는 여인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해 이리된 것을 누굴 탓할까.’
왕후 우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태왕의 자리에 오르자 남무는 기원후 184년에 후한 요동태수의 침략
을 좌원坐原에서 격퇴하였고, 연나부 소속 귀족세력인 좌가려左可慮와
어비류於卑留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남무는 5가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잘것 없는 출신인 을파소乙巴素를 국상國相에 임명하여 유력한 귀족
들을 억누르는 중앙집권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또한 심화되는 계급분화에 따라 발생한 몰락농민들이 귀족의 예민隸
民으로 되는 것을 막고 공민公民을 확보하기 위해 진대법賑貸法을 실시
했다. 각 부족의 부명部名을 지방을 나타내는 방위명方位名으로 바꿈으
로써 독자성을 억눌렀다.
“왕후님, 태, 태왕께서 숨이 멎었습니다.”
어의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인명은 재천在天이라하였습니다. 어의는 내가 이 자리에 다시 돌아
올 때까지 태왕께서 붕어하셨다는 말을 입 밖에 내면 안 됩니다.”
“왕후님, 잘 알겠습니다.”
어의는 왕후 우씨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나약해 보이지만
한번 독기를 품으면 누군가 반드시 죽어야 했다.
“근위대장은 대전을 철통같이 경비하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 누구도
대전으로 들이면 안 된다. 또한 대전에서 일어난 일이절대로 밖으로 새어
나가서도 안 된다.”
“왕후마마, 잘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근위대장은 연나부 사람으로 왕후 우씨의 심복이었다. 비록 지아비인 남
무 태왕이 친정 식구들을 도륙낸 적이 있었지만 연나부 사람 모두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우술 비장裨將과 미려는 지금 즉시 출궁出宮할 채비를 하여라.”
우술 비장과 궁녀 미려는 궁인들 중에서 우왕후가 가장 총애하였다. 우
왕후는 두 사람만 대동하고 아무도 모르게 왕궁을 빠져나갔다. 국내성은
왕궁을 중심으로 왕자들과 공주. 왕실사람, 대소신료들이 살고 있었다.
우왕후는 궁성을 빠져나와 태왕의 동복同腹 동생인 발기發岐의 집으로
향하면서 지난밤 정인情人이며 태왕의 이복異腹 동생인 넷째왕자 연우
延優를 만났던 일을 생각하였다.
“형수, 형님 태왕께서 붕어하시면 곧바로 셋째 왕자인 발기에게 찾아
가세요. 발기 왕자에게 방금 제가 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연우, 나는 가고싶지 않아요. 난, 발기왕자와 대면하고 싶지 않다고요.
그자와 얼굴만 마주쳐도 소름이 돋는 답니다.”
“그래도 만나서 내가 알려준 대로 해야 후환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그리할게요.”
우왕후는 연우의 말을 곱씹으며 발기 왕자 집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
을 옮겼다.
5월인데도 밤공기가 차가웠다. 얇은 비단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우왕
후는 낮에 온 비로 질척거리는 길을 걸었다. 궁인들을 시켜 말이나 마
차를 대령토록 할 수도 있었지만 왕궁 사방에 감시의 눈빛이 도사리고
있어 함부로 여러 사람을 부릴 수 없었다.
태왕이 얼마 전부터 시름시름 앓고 있다는 소문이 대신들 사이에 퍼
지면서 왕궁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열흘 넘게 태왕
남무는 정사政事를 볼 수 없었다. 태왕 자신이 건강에 이상 조짐을 감
지한 것은 지난 연말부터 였다.
태왕의 수라는 특정한 궁인들이 담당하였으며 수라간에는 왕후와 왕
의 근친近親만 드나들 수 있었다. 태왕의 건강이 곧 나라의 건강이기 때
문이었다. 점점 더 깊어만 가는 5부족 간의 갈등은 태왕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었다.
만약에 태왕을 시해하려는 세력이 수라간을 드나드는 궁인에게 사주
하여 태왕이 드는 음식에 독이라도 넣는 날이면 국가 비상사태가 일어날
수 있음은 물론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전개될 수 있었다. 우왕후는
태왕, 남무에게 시집간 뒤 얼마 안 되어 태왕이 한 말을 떠올렸다.
“왕후, 나는 이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오. 그
러니 지아비로서 소홀한 점이 있더라도 깊이 혜량해 주었으면 좋겠소.”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첫눈에 반할 만큼 우왕후는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한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관계
로 태왕은 자주 왕궁을 비웠다. 우왕후의 고뇌와 외로움은 날로 더 깊어만
갔다. 우왕후는 하는 일 없이 낮잠을 자거나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자
신이 싫었다.
왕후라는 위치는 극히 제한된 구역에서 일부의 특수한 계층의 사람만
만날 수 있었다. 멸문지화를 당하다시피한 연나부의 여인들이 타인의 시
선을 피해 왕궁에 들어 우왕후의 말벗이 되기도 하고 무료함을 달래주기
도 하였지만 우왕후의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태왕이 멀리 전장에 나가면 보통 서너 달은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하루
종일 꼼작하지 않고 방안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서 왕후가 된 자신을
경멸하기도 하고 시비侍婢를 시켜 술을 내오도록 하였다.
그런 우왕후의 외로움을 달래준 사람은 바로 왕의 이복동생인 네 번째
왕자 연우延優였다. 여자 못지않게 하얀 피부와 깨끗한 얼굴 늘 말쑥한
차림새의 연우 왕자는 많은 궁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말이 없고 우수에 찬 듯한 연우 왕자의 슬픈 눈동자를 우왕후는 좋아하
였다. 훤칠한 키와 이목구비가 뚜렷한 연우 왕자는 선대왕 후궁인 궁인
주씨의 소생이었다. 어머니가 후궁이라는 이유로 늘 정비 소생의 세 왕
자들에게 기가 죽어 있었다.
“형수님의 붉은 뺨과 단순호치丹脣皓齒에 저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
니다.”
“네에? 희망이라니요?”
우왕후는 연우 왕자를 자신의 처소로 초대하여 술을 대접하였다. 우왕
후는 건장하고 남성미가 철철 넘치는 지아비 남무 보다 여린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왕자 연우에게 끌렸다. 왕후는 연우를 남몰래 만나기 시작
하면서 남자를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10년 가뭄의 지독한 목마름이 한순
간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원정에서 돌아온 지아비 남무는 대신들은 만나고 국사를 논의하느라
눈코뜰새가 없었다. 내실에서 지아비를 기다리고 있는 우왕후의 존재를
잊은 것인지, 아니면 우왕후가 태왕의 눈에 차지 않은 것인지 아무도 태
왕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우왕후의 마음은 서서히 지아비 남무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연우
와 은밀한 만남은 우왕후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어쩌다 지아비인 태왕
남무가 요구해 오면 의무감으로 몸을 내주기는 하였지만 지아비의 애무
를 받으면서도 우왕후는 연우를 생각하였다.
10년이 넘도록 우왕후에게 태기胎氣가 없었다. 왕실과 연나부에서는
왕후의 자리를 걱정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갔다. 연나부에서는 조속히
태기를 바라는 뜻에서 온갖 보약을 지어 보냈으나 우왕후는 창고 한쪽
에 쌓아두었다. 왕후의 생일이 언제인지 태왕 남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우왕후의 친정 부모의 생일도 남무는 챙기지 않았다. 오로지
밤낮으로 나라 일에만 매달리는 지아비를 우왕후는 미워하였다.
“형수, 우리 사이를 타인들이 눈치 채면 안 됩니다. 나와 형수님 관계
를 형님이 알게 되면 저는 죽은목숨입니다.”
“죽는 게 그리 겁이 나나요?”
우왕후의 젖무덤 사이에 얼굴을 묻은 연우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절정
에서 모든 기운을 소진시킨 뒤라 연우의 몸은 흐물거렸다.
“걱정하지마세요. 아무려면 내가 그대를 소홀히 하겠어요? 우리가 이렇
게 운우의 정을 나누고 있는 사실은 우리 둘 밖에 몰라요.”
한번 맺은 정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우왕후는 지아비인 남무가 국가
일에 몰두하고 있는 대낮에도 연우를 밀실로 불러들였다. 지아비 남무는
부부로 살아온 지 10년이 넘었어도 낮에 부부의 정을 나눈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요즘들어서는 한나라와 분쟁지역을 수복하거나 천민이나 마찬가지였던
국상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백성들이 권문세가權門勢家나 계루부를
제외한 다른 부의 노예로 전락되는 것을 막는 일에 매진하는 등 자나 깨나
관심은 나라일이었다. 우왕후는 소리없이 시들어 가는 담장 아래 꽃같은
신세였다.
을파소가 국상이 되면서 연나부를 비롯한 각부의 사람들은 원성이 커져
갔다. 권문세력가들은 흉년이 들면 큰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세도가들
은 춘궁기春窮期에 배를 곯는 백성들에게 고리高利로 곡식을 대여해 주
고 가을에 거두어 들였는데 가난한 백성들은 추수를 하여도 이자를 갚고
나면 남는 소출은 별로 없었다.
고리의 곡식을 빌려가 갚지 못하는 백성들은 자연 권력이나 경제력이
탄탄한 권문權門의 노비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은 조
치가 바로 을파소가 시행한 진대법賑貸法이었다.
조정의 신하들과 왕실의 친척들은 이름도 없고 능력도 검증되지 않은
시골노인 을파소가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자 시기하였다. 이에 태왕
남무는 교서를 내려 ‘귀천을 막론하고 만약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친
족까지 멸하는 죄를 주겠노라’고 명령했다.
을파소가 사람들에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일상적인 도리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 대하시니
어찌 다시 옛날의 은거를 생각하겠느냐?’라고 말하고는 지성으로 태왕
을 받들었다.
“왕후님, 천천히 가세요. 너무 빨리 걷다가 넘어지실까 걱정되요.”
궁녀 미려는 아무 말도 없이 빠른 속도로 걷는 우왕후가 염려되었다.
낮에 내린 비로 길이 미끄러웠다. 비장 우술도 말은 하지 않았으나 우
왕후가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상태에서 발기 왕자 집을 향해가는 것이
불안하였다.
“응, 그래.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우왕후는 알았다고 하면서도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발기 왕자는 이 밤에 내가 찾아가면 깜짝 놀랄 테지. 밤에 발기 왕자
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었으니 무척 놀랄 거야. 그러나 오늘밤이 지나
면 세상이 달라 있을 것이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두고 무슨 말을 하던
나는 개의치 않을 거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누구도 내 길을 막을 수 없어.
지난 십칠 년 나는 허울뿐인 왕후였어. 내 속이 곪아터져도 누구도 내
속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었어. 이제는 그 보상을 받아야 해.
나의 장래와 우리 연나부의 미래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운명
이 결정될 것이야. 내 운명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거야. 누구도
내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아.’
우왕후는 속으로 옆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발기 왕자의 집에 도착한 우왕후는 곧바로 발기 왕자의 처소로 들어갔다.
우왕후가 왔다는 말에 발기 왕자의 집안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왕후, 이 밤에 어인일로 이 사람 집에를 다 오셨습니까? 미리 기별이
라도 넣지 않으시고요?”
“긴히 할 말이 있어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없어 본론만 말씀
드릴게요. 태왕에게는 슬하에 자식이 없습니다. 태왕에게 무슨 일이 있
으면 발기 왕자께서 다음 지존이 되시는 게 마땅합니다.”
왕후는 지아비인 태왕 남무가 방금 전 승하하였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내연의 관계에 있는 연우 왕자가 시킨 대로 발기 왕자를 찾아와 당
연한 말을 하였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하늘의 운수에 달린 일입니다. 형님이 두 눈 시
퍼렇게 뜨고있는 상황에서 경솔하게 논의 할 일이 아닙니다. 어서 돌아
가세요. 아무리 왕후라 하나 야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발기 왕자의 말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발기 왕자, 내 말 뜻은 그게 아닙니다.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형님이 죽으면 내가 태왕의 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왕후가
정신이 돌았나? 이 밤에 나에게 찾아와 당연한 말을 지껄이다니......’
발기 왕자는 불쾌한 듯 우왕후의 얼굴을 한번 뜷어지게 쳐다보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왕후의 말씀은 이 사람이 다 알아들었습니다. 어서 궁으로 돌아가세요.
누가 볼까 두렵습니다. 어험-.”
“나는 이 나라의 왕후입니다.”
“누가 형수님이 고구려의 왕후라는 사실을 모른답니까?”
우왕후는 발기 왕자에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한마디도 듣지 못하고 일
어나야 했다.
‘아, 역시 연우 왕자의 말이 맞았어. 이렇게 내가 직접 찾아와 넌지시 발기 왕
자의 의향을 물어보는 게 앞으로 나의 입지를 위해 잘한 일이야. 그러나 눈치
코치도 없는 발기 왕자의 오만함에 부아가 난다.
내가 거짓으로 이자를 찾아 왔지만 정말로 마주하고 앉아 국사를 논하기에
는 피곤한 상대야. 오늘 너의 그 말이 앞으로 네 인생에 족쇄가 될 것이야.
어디 두고 보자.’
우왕후는 무안함과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왕후는 간다는 인사도 없이 발기 왕자의 집
을 나섰다.
“연우 왕자댁으로 간다. 두 사람은 길을 인도하여라.”
“왕후, 습한 바람이 부는 걸로 보아 곧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궁으로 가
셨다가 내일 다시 나오시면 안 될까요?”
미려가 미간을 찌푸리며 우왕후에게 말하였으나 우왕후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가 세상사는 맛을 느끼게 해준 사람, 이제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 나 자신 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사람, 앞으로 내 인생과 우리 연나부
를 영원토록 책임져 줄 사람, 그래 이제 부터는 오로지 내 인생에 한 남자,
고연우를 찾아가는 거야.’
넷째 왕자 연우는 아직 미장가였다. 나이 스물네 살에 궁성 밖에서 혼자
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연우 왕자의 집에 드나들었다. 궁 밖에 살고 있는
왕자는 발기, 연우, 계수 등 세 명이나 있었지만 그중에 연우 왕자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태왕의 유고시 자연적으로 왕권의 장자승계長子承繼 원
칙에 따라 발기가 태왕의 자리에 앉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악한 성품과 이기적인 행동으로 원성을 사게 되어 일찌 감치 고
관들과 백성들의 눈 밖에 나 있었다. 후궁 소생이면서 잘생긴 외모와 부드
러운 말씨 그리고 예의범절이 몸에 배인 연우 왕자는 국내성 백성들 뿐만
아니라 5부에서 조차 속으로 탐내고 있는 인물이었다.
일부 궁인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우왕후와 연우 왕자가 연인 사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만약 세간에 우왕후와 연우 왕자가 보통 사이가 아니
라는 풍문이 돌거나 이상한 이야기가 은밀하게 퍼지는 날이면 두 사람의
목숨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
우왕후를 따라 연우 왕자 집으로 향하는 우술 비장과 미려 조차도 우왕
후가 왜 연우 집으로 향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발기 왕자의 집에
서 가까운 연우 왕자의 집에 금방 도착한 우왕후 일행은 사방을 두리번거
렸다. 행여나 발기 왕자가 사람을 시켜 우왕후의 뒤를 밟게 할 수도 있었
다. 우술이 대문을 두드리자 종자從者가 뛰어나와 문을 열었다.
“왕후님께서 납시셨으니 어서 왕자님께 알리 거라.”
종자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연우 왕자가 달려 나왔다.
“황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이 열자나 빠졌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
시지요.”
“고마워요.”
지아비가 유명을 달리하였는데도 우왕후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우 왕자
를 보자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연우 왕자는 연인 우왕후를 위하여
진수성찬을 준비하였다. 우왕후는 연우의 손을 꼭 잡고 내실로 들어섰다.
“어머나, 오늘 무슨 잔치하는 날이에요?”
“형수님을 위해 마련하였습니다. 형님 때문에 제대로 한끼 식사도 못하셨
을 테니 많이 드시라고 마련했습니다.”
“형님은 조금 전에 승천하셨습니다.”
우왕후는 웃는 낯으로 연우 왕자를 바라보았다. 지아비를 잃은 슬픈 미망인
未亡人의 모습이 아니라 새장에서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 오른 한 마리 새였
다.
“발기 형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왕자께서 어제 나에게 말한 대로 똑같았습니다.”
“형수,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해놔야 후환이 없습니다. 아마도 날이 밝으
면 땅을 칠 테지요.”
“어리석은 자는 어쩔 수 없어요. 구제불능인 걸요.”
“자, 우선 술 한 잔 받으세요. 이 술은 불함산不咸山에서 캔 백년 된 산삼으
로 담근 명주랍니다. 한잔 드시고 기운을 내셔야지요. 이제는 형수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니지요. 그대의 세상이 온 겁니다.”
“우리 오늘 코가 삐뚤어질 때 까지 마셔보자고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담장 밖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 술은 다 마시고 우리 왕궁으로 함께 가야해요. 어의와 궁을 경비하
는 근위대장 그리고 궁인들에게 내가 돌아올 때 까지 형님의 붕어 사실을
절대로 알리지 못하게 했어요.”
“형수, 참으로 잘하시었습니다. 이 술을 마시고 어서 궁으로 들자고요.”
술잔이 서너 번 부딪쳤다. 우왕후는 연인이 곁에 있으니 긴장되었던 마음
이 눈 녹듯 풀어졌다. 연우 왕자의 눈에 붉게 빛나는 형수 우왕후의 입술은
잘 익은 앵두 같았다. 자신 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은 우왕후는 만지면 금방
이라도 터질 듯 팽팽한 육덕肉德을 자랑하였다.
비록 나이는 연우 왕자보다 많았지만 시집가지 않은 처녀나 마찬가지였
다. 지아비인 태왕 남무와 어쩌다 치르는 방사房事는 고통만 안겨 줄 뿐이
었다. 우왕후가 연우 왕자를 만나기 전까지 십여 년 넘게 방사다운 방사를
제대로 치른 적이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뜨거웠다. 연우 왕자는 형수이면서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연인 우왕후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달콤한 술 향기
가 우왕후의 입에서 은은하게 풍겼다. 연우 왕자에게 형 남무가 죽은 일과
형수와 사랑의 밀어를 주고받는 일은 상관이 없었다.
연우 왕자의 뜨거운 입김이 우왕후의 물줄기를 타고 서서히 온몸으로 퍼
졌다. 우왕후의 육신은 연우 왕자의 손길에 이미 잘 단련이 되어 있는 탓
에 금방 불덩이가 되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