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담배를 피워야...
호랑이가 담배를 피워야...
- 여강 최재효
승僧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호랑이와 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린 아이가
아니라면 호랑이와 곰은 각각 호랑이와 곰을 토템(Totem)으로 삼는 부족部族의 상징임을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처음 단군신화檀君神話를 접했을 때 너무 신기하고 경이
로워서 꿈에서 조차 호랑이와 곰을 만나곤 했었다. 어떻게 곰이 여인으로 변하여 인간과 사랑
을 할 수 있었는지. 그 당시 강렬하게 각인된 동화童話같으면서 신화적 느낌의 충격이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한편으로 어린 소년은 백수百獸의 제왕인 호랑이가 아닌 미련한 곰이 여인으로 환생하여 환웅
桓雄과 혼인하는 행운을 누리게 된데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우리민족의 옛날이야기나 민화民
畵를 보면 곰 보다 호랑이가 더 자주 등장한다. 단군신화 이외에 곰이 등장하는 전설이나 신화
는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의 이야기와 ‘어떤 사람이 곰을 만나 죽은 척 하다가 살았다’는 이야
기 정도가 고작이다. 호랑이가 사람이 되지 못한데 대한 미안함을 상쇄시키기 위하여 우리 조
상들이 호랑이를 이야기에 자주 등장 시킨 게 아닌가 싶다.
소년은 생전 처음 동물원에 갈 때 호랑이가 느긋한 자세로 긴 곰방대를 물고 있는 모습을 상
상하였다. 그러나 소년이 아무리 기다려도 호랑이는 으르렁대며 사육사들이 던져주는 고깃덩
이를 두고 동료와 사투死鬪를 벌일 뿐 담배는 피우지 않았다. 소년의 기대를 저버린 호랑이들
은 소년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고 소년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로 운을 떼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흥미를 잃게 되었다. 소년은 담배를 피우면서 자주 호랑이를 떠올리곤 했
지만 이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유년과 청년기를 보낸 소년의 머리 빛은 희끗희끗하게
변해 갔다.
중년이 된 소년은 건강을 생각하여 수도권에서 쉽게 오를 수 있는 도봉산이나 북한산을 자주
찾는다. 독실한 불자佛者는 아니지만 산 중턱에 산재한 사찰이나 암자에 발길이 이어지면 중
년의 소년은 산신각山神閣을 유심히 살펴본다. 산신령님 곁에는 꼭 백호白虎가 있기 때문이
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백호 역시 곰방대를 물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를 가야 담배 피우
는 호랑이를 만날 수 있을까? 늙은 소년의 담배 피우는 호랑이를 찾아 방황하는 기간이 훨씬
더 길어질 듯 하다. 물론 수원의 팔달사 외에 몇몇 사찰 벽화에 해학적諧謔的으로 호랑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긴 하다.
콜럼버스 보다 이천년 전 쯤 동양문화권東洋文化圈의 어떤 사람이 신대륙에 발자국을 찍었
더라면 중국이나 한국 또는 일본의 각종 풍속이나 문학 장르에 담배와 관련한 내용이 풍성
했으리라. 그랬다면 극동極東의 고금古今에 지어진 시가詩歌나 소설에도 술(酒)과 대등한
지위를 누리며 담배가 다양하게 묘사되었으련만, 담배가 커피와 더불어 서세동점西勢東點
의 대표 주자가 된 역사적 사건에 무척 아쉬움이 남는다. 중국을 대표하는 이태백, 두보, 백
거이, 왕유, 소동파의 작품 어디에도 담배가 소재로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치원, 을지문덕, 이규보, 정지상, 황진이, 허난설헌의 시가에도 역시 담배를 찾아볼 수 없
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에도 담배가 등장하지 않으니 다행이다. 담배가 정말로 수천
년 전에 한반도에 전해졌더라면 담배 관련한 이야기와 역사적인 에피소드가 풍부하였겠지
만 그만큼 담배로 인한 폐해도 컸으리라. 청나라 말기에 아편으로 인하여 전쟁이 발발하고
상당수 국민들이 아편에 중독된 일례를 보면 우리나라에 담배가 17세기에 유입된 일은 천
만다행이다 싶다. 비록 담배가 유럽에서 이양선異樣船을 타고 극동極東에 전래되었지만 콜
럼버스는 죽을 때 까지 아메리카가 남아시아에 위치한 인도印度인 줄 알았다니 그리 서운
해 할 일도 아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다시 아시아의 열도로 건너와 조선에 담배가 전해지는
시기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끝나고 얼마 안 돼서 왜인倭人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남
쪽에서 왔다고 하여 타바코(Tobacco)가 남초南草라 불리었다. 이외에도 연주煙酒, 상사
초想思草, 반혼초反魂草, 영초靈草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불리다가 인조仁祖 때 대신
大臣이며 효종孝宗의 장인인 장유張維가 담배(痰排- ‘목구멍에 끈끈한 점액을 제거해 준
다’라는 뜻)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담배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담배가 여염閭閻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즈음(1610년 경)이 되는
데 조선에 억류되어 13년을 감금생활하다 자신의 나라 네덜란드로 도망한 하멜(H. Ha
mel)은 자신의 조선생활을 기록한 하멜 표류기, 일명 난주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
記에 '조선 사람들은 담배를 좋아하며 아이들도 4, 5세만 되면 담배를 피우며 남녀노소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하멜은 민간요법으로 담배가루나 연기로
병을 치유하는 모습을 보고 오해했던 듯 싶다. 가래와 담을 없애주는 약으로 소문이 나
면서 담배는 조선 백성들에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영약靈藥이었을 법도 하다.
조선 후기 이후에 창작된 각종 회화繪畵나 시가詩歌에 담배가 등장한다. 김홍도, 신윤
복, 김득신 등의 민속화民俗畵에 곰방대를 들고 있는 늙은 기생이나 노인을 볼 수 있다.
과거시험장을 묘사한 김홍도金弘道의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를 보면 커다란 우산 아래
여섯 명의 선비가 시험을 앞두고 긴장된 모습을 사실감 있게 그렸는데 한 선비가 태연
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이채롭기도 하다.
또한 김득신金得臣의 파적도破寂圖를 보면 노인이 긴 곰방대 들고 병아리를 물고 달아
나는 고양이를 뒤 쫓는 긴박한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또한 혜원蕙園 신윤복申
潤福의 주유청강舟遊淸江을 보면 술 취한 사내가 기생의 어깨를 감싸 안고 기생에게 곰
방대를 권하는 농염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바야흐로 조선에 담배의 전성시대가 도래
하였다.
담배 씨앗이 콜럼버스 손에 들어오고 120여년 만에 조선에서 일대 담배 혁명이 있어난다.
그 당시 담배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민족에게 외래에서 수입된 물건이 이 처
럼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진 사례가 또 있었을까? 오죽 담배가 백성들 사이에 횡행橫行하였
으면 호랑이도 담배를 피웠을까? 조선 후기만하여도 전국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사람
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그에 파생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
날이야기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기도 하였다.
따지고 보면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은 겨우 400년 밖에 안 된다. 아마도 사
람들은 ‘호랑이가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를 동화童話나 전설傳說에 가미함으로써 사람
과 호랑이가 다정하게 앉아 담배를 주고받았다는 상상을 하게 하여 이야기가 아주 오래되
었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아주 오랜 옛날에는 호랑이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개처럼 사람과 허물없이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사람과 친근하게 지내던 호랑이가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자신을 인간으로 착각한
호랑이가 흉내를 냈을 수도 있을 법도 하다. 이야기꾼들에 의해 아주 오랜 옛날이야기에 담
배가 가미되면서 시간의 장구長久함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즉, 불가능한 일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화자話者나 청자聽者 모두에게 흥미를 유발시키려 했던
시도가 참으로 기발하다.
인간은 극도의 두려운 존재나 보이지 않는 대상을 미화美化하거나 희화戱化하는 내재된
버릇이 있다. 우리나라 어린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를 물으면(특히, 구한말
舊韓末 이전) 십중팔구는 무의식중에 호랑이를 꼽는다. 그 만큼 옛날 소년들에게 호랑이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었고 소년이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후손들에게 호랑
이의 두려움을 동화로 포장하여 전해 주었다.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존재를 우리 조상님들은 민화에 익살스럽게 묘사하여 두려움을 해
학적 반전으로 친근감을 가지게 한 기지奇智가 놀랍다. 호환虎患을 두려워하면서도 실제로
호랑이를 만나 혼이 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인터넷이나 카메라 덕분에 호랑이의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백 년 전 사람들은 그저 상상 속에서 호랑이를 두려워하였다.
우리민족에게 영물靈物 같은 존재가 삼천리금수강산에서 사라지고 없다. 단지 몇 마리의
호랑이가 수입되어 동물원에서 사육사가 던져주는 고깃덩이를 받아먹으며 무기력한 존재
로 전락하여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다.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일어나 사육사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백수의 제왕을 보면 측은하다 못해 콧등이 시큰해 진다. 그 옛날 사
람과 마주앉아 다정하게 담배 피우던 호랑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요즘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무섭냐?’고 물으면 아마도 대답은 ‘사람’이라
고 할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티브이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 그 뉴스 기사의
상당부분이 사람이 사람을 해쳤다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무서운 사람들 이야기로
전개된다. 반백년을 살아온 나는 아직 까지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었다’라는 이야기나
뉴스를 접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BBC나 KBS 등 방송사에 의해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화
면에서 시베리아 호랑이나 벵골 호랑이가 멸종에 임박한 이야기만 들어 보았을 뿐이다.
조만간 호랑이 역시 인간 세상에서 사라져 기록으로만 남아 정말로 옛날이야기가 될 듯
하다.
나는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호랑이가 담배를 피운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그 소식
이 전파를 타고 뉴욕, 런던, 요하네스버그, 상파울루, 시드니, 뉴델리, 모스크바에 전해져
세상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러 한국으로 몰려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호랑이가 죽어
서 가죽을 남기는 일 보다 사람들과 어울려 교감을 갖는다면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험악
한 사회에 청량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비좁고 답답한 동물원에서 나와 사람들과 마주 앉아 정답게 곰방대를 물고 있는 호랑이
가 정말로 보고 싶다.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호랑이들이 곰에게 기회를 빼앗겼던 옛날
조상들의 한을 풀기위해 돌연변이突然變異하여 정말로 사람으로 화化하여 신세계를 연
다면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몹시 궁금하다. 그렇게 된다면 호랑이도 죽어서 이름을
남기게 될 텐데...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