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2. 9. 27. 01:30

 

 

 

 

 

 

 

        본 소설은 덕수이씨 가문에서 태어나신 聖雄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상주방씨

      가문의 연꽃아씨를 만나 혼인하고 장인 方震(방진)의 권고로 文科에서 武科로 전향하

      여 과거에 합격하는 기간 동안의 행적을 소설화한 작품입니다. 많은 愛讀 바랍니다. 

      본 소설은 2012 鶴山文學 겨울호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방씨 부인전

 

 

 

                                                                                                                                                                                     - 저자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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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저녁부터 소쩍새가 피를 토하며 울어대자 마을은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저녁 무렵 한차례 비가 내린 뒤여서 늦봄의 산은 방금 연

둣빛 치마로 갈아입 은 새댁의 모습이었다. 청년은 답답한 느낌에 방문

을 반쯤 열었다. 하얀 반달이 중천에 떠서 천하를 밝히고 있었다. 멀리

금성산 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청년이 아무리 잠을 청해보아도 수마(睡魔) 도무지 찾아올 줄 몰랐다.

청년은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조금전까지도 서럽게

울던 소쩍새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정적에 빠진 마을은 마치 한 폭의 수

묵화 같았다. 청년은 동구 밖으로 나와 어둠속으로 길게 이어진 들길로

접어들었다. 



 귀신에 홀린 듯 청년은 자연스럽게 뱀골 가는 논길로 방향을 잡았다.

달빛에 젖은 밤이 마치 나뭇잎에 눈이 쌓인 듯 여기 저기 무더기로 피

어 있는데, 어찌나 자극적이고 묘한 냄새를 풍기는지 청년은 코를 틀어

막을 정도였다. 뒤를 돌아보니 저멀리 산기슭에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

초가지붕들이 은은한 달빛을 받아 검푸르게 보였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

와 개구리 울음 소리가 이따금 들려 올 뿐, 산골은 깊은 정적 속으로 

져들고 있었다.


 꿈결인 듯 꿈결이 아닌 듯 청년이 들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을 때 검푸른

어둠 속에희뿌옇게 빛을 발하는 뱀골의 초가와 기와지붕이 언뜻언뜻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초가들은 어깨를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데 마을 한가운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청년의 눈에 익은 집이 었다. 뱀골에서 뿐만 아니라 아산에서 제일가는

자로 소문난 집이었다. 집 주인은 전라도 보성군수를 지낸 명궁 방진

(方震)이었다. 청년은 꿈길을 걷듯 밤이슬이 발에 채여 바짓가랑이가 흥

건하게 젖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을을 향해 걸었다.


 산모퉁이를 돌자 사방으로 검푸른 들녘만 보일 뿐이었다. 그제야 청년

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달빛이 누렇게 변하면서 별똥별이 빈번히 길게

꼬리를 감추고 먼산을 향해 곤두박질 쳤다. 청년은 집에서 너무 멀리 온

것 같아 달이 서산 아래로 기울면 혹시 돌아가길을 잃어버리지나 않

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청년은 걸음을 멈칫 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갈까, 아니면 가던길을 게속

갈까를 고민하다가 이내 뱀골로 향했다. 청년은 대궐 같은 방진의 집에

시선을 집중하며 걸었다. 청년이 기와집에 가까워질 수록 이유도 없이

가슴이 뛰는 걸 느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청년이 마을에 들어서자 민가의 개가 인기척에 놀라 청년을 향해 짖기

시작하자 마을 개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목청을 높였다.

청년이 혀를 끌끌 차며 개를 구슬려 보려고 하자 개들은 더욱 사납게 짖

댔다. 청년은 얼른 마을로 들어서서 방진의 집 쪽으로 향하면서도 잠

시 몸을 숨길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방진의 집 뒤로 거의 다 쓰러져 가는 헛간 같은 곳이 나타나자, 청년은

그곳으로 을 숨기고 개들이 진정할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달이

서산에 가까이 기울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축시가 훨씬 지난 시각일 것

같았다. 청년은 헛간에 앉아 서애 유성룡의 말을 곰곰이 반추해보았다.

유성룡은 지난해 문과에 입격해 진사의 신분으로 곧 있을 별시를 준비

하고 있었다. 청년은 한양 마르내골(건천동)에서 죽마고우로 함께

년을 보낸 유성룡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상님들 뵐 면목

이 없었다.


 “여해(汝諧)가 갑주(甲冑)를 입고 외적을 막고, 내가 필묵으로 나라 살

림을 맡으면 조선 삼천리강토는 대대손손 평안할 걸세.”


 유성룡의 말에 청년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청년의 5대 선조(先祖)인

(李邊)은 세종 임금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성종 때 성균관 대제학을 거

정1품 영중추부사를 역임했으며, 고조부 이거(李琚)는 연산군이 세자시

스승이었고, 정3품 병조참의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부터 가세가 기운 것에 대해 늘 애통해

했다. 게다가 아지 이정(李貞)은 백수나 다름없어 현재의 상태로는 고

려시대부터 삼한갑족이덕수이씨 정정공파(貞靖公派) 계열의 가문을

번듯하게 일으키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각오해 오던 터였다. 같은 덕수이

씨이며 부원군파(府院君派)인 율곡 이이(李珥)가 지난해 식년문과에서

당당하게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며, 이름을 떨

치고 있는 사실에 청년은 문중 어른들로 부터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청년은 유성룡의 말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성룡은 마치 청년

에게 주문을 거는 듯 반복해서 조선을 위하여 문무를 나누어 경영하자고

하였으나, 청년은 유성룡의 말이 거북스럽기만 했다. 물론, 유성룡은 청

년과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하던 막역지우였지만, 자신이 먼저 조정에 출

사하여 벼슬을 하니 청년을 깔보는 말투로 들리기도 하였다.


 다음날, 청년은 한양 운종가(雲從街) 피맛골 주점에서 역시 죽마고우

선거이(宣居怡)와 홍연해(洪漣海)를 만났다. 세 사람은 2년 전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돌아온 절친한 사이였다. 


 “여해, 자네는 문과로 입신출세하는 것 보다 무예를 익혀 무과에 입격

해 무장(武將)이 될 팔자야. 그때, 자네 장래에 대해 예언했던 도사를 잊

었는가?”


 홍연해의 말에 청년은 2년 전 일을 떠올렸다. 세 청년이 심신을 단련

하고 고승대덕을 만나 인생 공부를 할 요량으로 금강산을 찾은 적이 있

었다. 청년이 한창 공부에 열중하던 중 머리를 식힐 겸 금강산 천선대

(天仙臺)에 올랐다. 갑자기 사방이 짙은 운무에 휩싸이더니 보랏빛 운

거(雲車)를 탄 한 선인(仙人)으로 보이는 노인이 청년 앞에 나타났다.


 “나는 진(秦)나라 노생(盧生)인데, 이곳 조선의 금강산이 산세가 수려


하고 청정하다는 말이 있어 옛 신라의 도인이며, 나의 벗인 술랑(述郎)

, 남랑(南郎), 안상(安詳), 영랑(永郞) 등과 노닐고자 왔노라. 그런데 그

대를 보니, 그대는  북두칠성의 두 번째 별인 하괴성(河魁星)의 정기를

받은 몸이 분명하다. 문보다 무예를 숭상하고 무인(武人)의 길을 걸어

야 한다. 장차 나라가 그대를 크게 쓸것이다.


 청년은 감히 선인(仙人)을 쳐다볼 수 없었다. 청년은 그 선인에게 예의

를 갖추고 절을 하였다. 절을 하고 일어나니 바람 소리와 함께 도인은 사

라지고 병법서가 놓여 있었다. 청년은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꿈이 아닌

생시의 일이었다. 청년은 선인이 나타난 이야기를 벗들에게 들려주었다.


 문반이 전통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조선에서 문과를 공부해 온

청년에게 문반에 비해 하대(下待)를 받고 있는 무반의 길은 퍽 내키는 출

세 길이 아니었다. 선조들처럼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아치가 되어

쓰러져 가는 가문을 일으키는 게 청년의 꿈이었다. 그러나 벗들은 청년

의 속을 모르고 자꾸만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청년이 금강산에서 비몽사몽간에 도인을 만나고 난 뒤부터 문반의 길

을 걷고자 했던 결심이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벼슬을 하지 못하고 백수(白

首)로 살아가는 일은 사람이 태생적으로 좀 모자라거나 일부러 글공부와

담을 쌓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청년이 한양 미르내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때 늘 병정놀이를 즐

기곤 했었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었다. 두 동무들의 권유는 청년

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세상은 칠흑으로 변했다. 세상을 희미게 밝혀주던 달이 서산 아래오 완

히 자취를 감추었다. 동네 개들도 잠이 들었는고요했다.


 청년은 헛간에서 나와 사방을 살폈으나 다행히 아무도 다니는 사람이 없

었다. 청년은 지난 설날에 우연히 뱀골에 놀러 왔다가 한 규수를 보고 첫

눈에 반하여 여러 날 가슴앓이를 하다 외사촌들 도움으로 그녀가 방진의

무남독녀 연꽃 아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년은 연꽃아씨의 고운 모습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거

대하고 시커먼 물체가 떡 버티고 있었다. 별빛이 촛불보다 흐리지만 산촌

의 모습을 대충은 알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지붕이 낮은 어느 초가에서 곤

한 잠에 떨어진 사내들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은 한양에서도 내

로라하는 가문의 미모가 빼어난 규수들을 자주 봐온 터라서 웬만한 미색

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청년은 방진의 집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 마다 청년은 마치 밤

손님이 된 것처럼 지은 죄도 없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대 대장부

로 태어나 호기심과 관심이 있으면 낮에 당당히 찾아가야 하지만 아직

은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방진의 집 육중한 대문

굳게 닫혀 있었다. 청년의 고향 미르내골에서도 보기 힘든 대저택이

었다. 


 캄캄한 밤이지만 행랑채 지붕의 기와는 밤이슬에 젖어 희미하면서 약

간은 검푸른 빛을 발산하였다. 청년은 잠시 대문을 바라보면서 미르내골

에 당당히 서있는 자신의 집 대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대손손 살아온

집은 고색창연한 빛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지만 증조부 때부터 집의

외관이 점점 퇴색하고 있었다. 방진의 집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대문이며, 기둥이 우람하고 옻칠이 잘 되어 있어 금물 속에서 건져 올

린 나무를 깎아 지은 집 같았다.


 청년은 혹시 집에서 자신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찾고 있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집을 한 바퀴 휘둘러보고 갈 요량으로 어

른 두 사람 키 보다 높은 담장을 넘어 안채 뒤꼍을 돌다가 청년은 발걸음

을 멈추었다. 느티나무로 보이는 큰 고목 아래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

다.


 다행히 나무 뒤편 담장이 낮아서 웬만한 어른이라면 고목 아래 광경을

엿볼 수 있을 정도였다. 청년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불빛이 발산되고 있는

나무 아래 광경이 궁금했다. 청년은 숨소리를 죽이고 발자국 소리가 나

지 않게 담장을 따라 살며시 다가갔다. 


 “앗, 저 낭자는 그때 봤던 그 연꽃아씨가 아닌가?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정화수를 떠 놓고 지성을 드리고 있다니.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나?”

 촛불을 켜놓고 합장한 채 연꽃아가씨는 정성을 다해 빌고 또 빌며 천지

신명을 찾고 있었다.


 첫눈에 청년의 마음을 빼앗아간 방씨댁 규수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바

로 앞에 있다는 사실에 청년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청년은 숨을 죽

이며, 연꽃아씨의 들릴 듯 말듯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으나,

소리가 너무 미미하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섞여 정확한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치성을 올리는 고운 목소리 중간 중간에 인연, 만남 혹은 연분 등 누군가

를 간절히 염원하는 소리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청년은 조금 전에 느꼈

던 호기심이 금방 식어버리면서 ‘괜히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연꽃아씨의

간절한 염원은 분명 어떤 사내를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갑자기 청년의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 발걸음을 내딪기 조차 힘이 들

어 휘청거렸다. 밤이 이슥하도록 지성을 드리는 연꽃아씨 모습이 가련하

면서도 그 대상이 되는 사내가 얄미웠다.


 점점 기울어 가는 가세에 청년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은 서

로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경제적 압박에 불편을 겪는 모습이 역력해 보

였다. 마르내골은 예로부터 조정에 나가 큰 벼슬을 하는 내로라하는 가문

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양천 허씨, 안동김씨, 한양조씨 등 당상관(堂上官) 이상 벼슬아치들을 많

이 배출한 가문들이 밀집된 부촌으로 한양에서 웬만한 가문은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청년의 안도 순천부사를 지낸 증조부 이거 이후로 거의 50년

동안 조정에 출사하지 않관계로 살림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높은 벼슬로 거들먹거리며 떵떵거리는 사대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는 아버지 이정의 힘이 너무 미약했다. 증조부가 모아 놓은 재물도 상당히

줄어들어 얼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이웃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외조부와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로 일가 일부가 외가인 아산

충청도 (牙山)으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청년이 벗들을 만나거나 공부를 하

는 공간은 여전히 한양 마르내골이었다. 


 백암(白岩)으로 돌아가는 청년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집으로 돌아

가는 내내 청년은 촛불에 선홍빛으로 물든 연꽃아씨의 화사한 모습을 떠올

렸다. 치성을 드리는 장면을 훔쳐 본 뒤로 청년의 속마음은 복잡해졌다. 아

산에서 제일가는 토호이며,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 휘하에 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무리들은 대개가 힘깨나 쓰는 무골들이어서 청년이 지향하는 바와

거리가 있었다. 


 청년은 늦은 새벽에  자신이 왜 뱀골까지 왔다 돌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

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머리속이 잡념들로 가득했다. 집을 나설 때 일

말의 아련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꽃아씨가 누군가를 위해 천지신

명에게 치성을 올리는 장면을 보고 청년의 기대는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청년이 백암리에 돌아왔을 때 동이 트고 있었다. 집에서 아무도 청년이 집

을 나간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아침 안개에 덮인 마을에 들어서자 잠이

없는 노인들이 논에서 잡초를 뽑는 모습이 청년의 시야에 들어왔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