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1)
유산(遺産)
- 여강 최재효
1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는 새빨간 거짓말로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피고는 처음부터 고(故) 이경희님의 재산이 탐이 나서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였으며, 이제는 이 경희님의 자녀들을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피고가 제시한 고인의 유언장(遺言狀)은 고인의 평상시 생각과 사상 그리고 생활
방식 등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고인이 정신적으로 정상적이지 않을 때 작성한 것
으로 판단되므로 효력을 정지시켜 마땅히 이경희님의 모든 자산을 회수하여 고인(故
人)의 두 자녀에게 돌려 줘야 합니다.
또한 피고는 고 이경희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전처(前妻)를 집에 불러들여 함께 살
고 있습니다. 너무 파렴치한 피고의 행동에 치 가 떨립니다. 재판장님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피고(被告) 동석의 뒷모습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법정 분위기는 이경희의 두 딸
들이 고용한 변호사의 변론을 대체적으로 수긍하는 분위기로 흐르며, 변호사를 선임
하지 않은 동석은 인륜(人倫)을 저버린 파렴치한으로 몰리고 있었다.
재판장은 동석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었지만 동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어도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 같아서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재판장은 자신을 변론하지 않고 대취(大醉)한 사람처럼 피고석에 앉아 멍하니 천정
을 바라보고 있는 동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달 후 2차 변론기일을 정하고 재판
을 마쳤다. 동석은 한 달 전 이승을 달리한 재혼한 처(妻) 이경희의 마지막 부탁을 회상 (回想)하고 있었다.
“경희, 나도 데리고 가지 않고 어찌 혼자 갔어? 당신 없는 세상을 나 홀로 어떻게 살
라고. 세상은 온통 나를 도둑놈 취급을 하고 있어. 경희 몸에서 나온 두 딸까지 나를 날 강도 취급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나는 이승에 머물고 싶지 않아. 나도 데리고 가
라고. 나의 전처인 S나 나와 상관없어 제 발로 기어들어와 나하고 살겠다고 억지를 부
리고 있을 뿐이야. 지금도 늦지 않았어. 경희, 나를 데리고 가라고, 제발......”
동석은 중얼거리며 갈지자걸음으로 법원을 나와 인근 카페로 들어갔다. 경황이 없어
점심 식사도 거른 동석은 아무 술이나 가져오라고 주문하였다. 카페 여주인이 스카치
위스키 한 병과 안주를 가져오자 동석은 빈속에 술부터 들이 부었다. 금방 양주(洋酒)
한 병이 텅 비었다.
방금 사슴피라도 마시다 나온 사람처럼 입술이 유난히 붉은 요염한 카페 여주인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동석을 바라보았다. “미안한데요, 여기 조니워커 한 병만 더 가져와요.” 동석의 눈동자가 약간 풀린 듯 했다. 요염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여주인이 양주 한 병을 금방 가져왔다. 값 떼이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여주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동석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우린 하늘이 맺어준 부부였어. 천생연분이었다고. 나나 당신이나 첫 번째 결혼에 실 패하고 만난, 말 그대로 원앙 같은 부부였어. 그런데, 그런데 부부의 금슬(琴瑟)이 너무 좋으니까, 하늘이 시기(猜忌)한거야. 난, 당신이 저승으로 떠났다고 믿고 싶지 않아. 지금도 당신이 내 곁에 앉아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지?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여도 난 떳떳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아. 경희, 사랑해. 당신이나 나나 다 같이 딸린 자식이 있지만 자식은 자식을 뿐이야. 아니지,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이지. 앞으로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당신이 먼저 떠나는 거야? 경희......’ 동석이 테이블에 엎드려 흐느끼자 여주인 놀라 달려왔다. 대낮부터 덩치 큰 사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모습을 보자 여주인은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남자로 판단하고 동석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서울 유명대학 공과대학을 나온 동석은 졸업도 하기 전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당당하게 입사하였다. 서울서 태어난 동석은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로 외동아들이었다. 식당을 크게 운영하는 부모 덕분에 동석은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동석은 그 기대(期待)에 부응하였고, 주변에 혼기가 찬 딸을 둔 부모들은 동석을 은근히 사윗감으로 점 찍어놓고 공작을 펼쳤다. 동석의 부모는 외동아들에게 심성이 곱고 착한 짝을 지어주고 싶어 했다. 동석은 Q여대를 졸업한 S와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었다. S는 미인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출중한 미모(美貌)를 자랑하고 있었다. S의 자유분방한 태도는 금방 두 집안의 골칫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S는 집에 친구들을 불러 들였다. 동석이 출근하고 나면 으레 동석의 보금자리는 S친구들이 점령하였다. 에 S 역시 자신을 연예인(演藝人)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술과 담배는 기본이었고 곁에는 늘 수려한 외모의 남자 모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한 경력은 동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동석이 출근하는 시간에도 S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회사일로 밤늦게 까지 야근(夜勤)하고 귀가하는 동석을 반기는 것은 늘 벽시계였다. 낮에는 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다 어둠이 내리면 S는 친구들과 압구정이나 이태원으 로 놀러 나가기 일쑤였다. 밤늦도록 놀다가 새벽 늦게 귀가하는 일이 S의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동석은 ‘아이가 생기면 가정에 충실하겠지’하는 생각에 S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S는 동석과 잠자리에 들면 동석에게 피임기구를 착용토록 강요하다 시피 하였다. 동석은 ‘S가 좀 더 신혼생활을 즐기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하고 이해하였다. 결혼하고 2년이 넘어가도 S는 여전히 동석에게 피임기구 착용을 요구하였다. 동석이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하거나 갑작스런 부부관계를 요구하면 S는 옆방으로 도망치다시 피 하였다. 아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동석은 마음에 상처(傷處)를 입으면서 두 사람 사이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결혼 3년차가 되던 해 S는 임신을 하였지만 S는 동석 몰래 유산을 시켜버렸다. 날이 갈수록 친정 부모와 시부모의 성화가 끊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S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였고, 주변의 축복을 받으며 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동석의 희망대로 S는 아이 키우는데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전보다 술과 담배를 줄이면서 육아(育兒)에 전념하는 듯 했다. 그런 딸이 걱정이 되 어 S의 어머니는 거의 매일 딸의 집에 와서 딸의 시녀(侍女) 노릇을 해야 했다. 딸이 예전의 자유분방한 태도에서 차차 현모양처로 변해가는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S의 친정 어머니는 안도(安堵)하였다. 아이가 태어나자 동석은 웬만한 회식(會食)자리나 모임은 사양하고 집으로 일찍 귀가하였다. 일찍 귀가하는 동석을 S는 시큰둥하게 맞았다. 무료한 결혼의 일상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동석은 의무감으로 자신을 맞아주는 아내 S에게서 타인(他人)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부 관계에서도 S는 목석같았다. 부부관계를 맺을 때마다 S는 마치 직업여성처럼 빨리 동석이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런 S를 보면서 동석은 첫 경험을 했던 서울 청량리 588번지의 홍등가(紅燈街)를 떠올리곤 했다. 아가씨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누워서 손님이 어서 빨리 일을 마치기를 바라는 간절한 그 느낌을 아내인 S에게서 발견하고 동석은 몸을 부르르 떨기도 하였다. S는 더 이상 아이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동석은 집 요(執拗)하게 둘째를 원하였지만 S는 신혼초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잠자리를 요구하는 동석에게 지나친 청결과 콘돔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혹시, 이 여자에게 남자가 있는 게 아닐까? 신혼 때부터 집요하게 피임(避妊)을 요구 하는 걸 보면 분명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해. 남편의 요구를 보기 좋게 묵살하거나 건강을 이유로 부자연스러운 부부관계를 지속시키려는 의도를 도대체 알 수가 없어. 그래, 내일부터 이 여자의 뒤를 감시하는 거야. 분명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예전의 그 습관이 되살아 난거야. 내가 낮에 수시로 집에 전화를 걸어도 거의 받는 날이 없었 어.’ 하얀 용암(鎔巖)을 분출하고 옆으로 벌렁 누운 동석은 급히 화장실로 향하는 S의 요염한 뒤태를 보며 이상한 상상을 하였다. 르고 달래서 어렵게 얻은 자식이었다. 막상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S는 모성본능(母性 本能)을 발휘하였다. 동석과 관계는 부부도 아니고 남남도 아닌 이상한 관계가 지속 되었다. S는 둘째 아이의 양육을 이유로 동석과 동침(同寢)을 거부하였다. 둘째 아이 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 동석은 거의 아내를 안아보지 못했다. 어쩌다 두 사람이 한방에서 잠을 자게 될 경우가 있어도 S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동석과의 관계를 거부하였다. ‘부부사이에 있어서 성(性) 즉, 섹스는 두 사람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어주는 핵심인데 우리는 그런 핵심이 없는 부부야. 이렇게 일 년이 가고 오년이 흘러 십년이 지난다면 부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서로를 위하여 각자 갈 길을 갈까? 그 러나 저 두 아이들은 부모를 잘못 만난 죄로 평생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살거나 불행 의 수렁에 빠질 수 있을 텐데. 이 일을 어쩌나......’ 동석은 아내와 성적트러블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아내 S는 안방을 사용하 였고 동석은 다른 방을 사용하였다. 가족 네 명이 각자 자신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동석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慾求)를 억누르고 수도에 정진하는 수도승(修道僧)이 아니었다. 점점 타인이 되어가는 아내를 바라만 봐야하는 동석은 하루하루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육체적 욕구불만의 누적은 다른 탈출구(脫出口)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거의 매일 이어지는 폭음으로 동석은 하숙생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점점 더 높은 자신만의 높은 장벽의 철옹성을 구축해 나갔다. S는 예전 생활로 돌아가 낮 이면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자신만의 은밀한 생활에 전념하고 있었다. 다. *경찬 - (주)대산엔터테인먼트 대표 서울 강남구 **동 휴대전화 010 - 9876 - ****. 처음 들어본 연예기획사 대표이사의 명함(名銜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든 동석은 명함에 적힌 이름과 연락처를 메모해 놓았다. 자신과 관계 를 거부하는 아내 S를 의심하고 있던 동석은 (주)대산엔터테인먼트에 대하여 알아보 기로 하였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제법 그럴듯한 기획사였다. 잘생긴 외모의 대표이 사 사진과 세련된 인사말, 현대적이고 심플한 인텔리전트 빌딩 전경(全景)이 홈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란 친구와 잘 아는 사인가? 아니야, 아닐 수도 있어. 이 남자와 아내가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 동석의 호기심(好奇心)은 의문에 꼬리를 물었다. 동석은 직접 그 회사를 찾아가 보 기로 하였다. 특별한 볼 일도 없으면서 남의 회사를 방문하기란 여간 거북한 일이 아니었다. 회사입구에서부터 수위에게 출입을 저지당했다. 동석은 건강관련 의약품 영업사원이라고 속인 뒤 간신히 회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빌딩 7층에 대표이사 방이 있었다. 동석이 대표이사 방에 들어서자 두 명의 비서 아가씨들이 상냥하게 웃으며 동석을 맞았다. “어떻게 오셨나요?” 동석은 즉석에서 입에서 나오는 말로 얼버무렸다. 비서 아가씨들은 동석이 들고 있는 불룩한 가방을 유심히 살폈다. 동석은 말문이 막혀 우물쭈물 하다가 화장실(化粧室)을 물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동석의 뒤통수에 아가씨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석이 억지로 비서실을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동석은 거울을 보며 아무런 준비 없이 무턱대고 들어 온 것을 후회하였다. 거울 속에 또 다른 동석이 거울 밖에 서서 씁쓸하게 웃는 동석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씻고 나오다가 동석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웃음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저 웃음소리는, 저 웃음소리는 분명 아내의 웃음소린데......’ 동석은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폈다. 인터넷에서 본 대표이사란 사내와 아내가 악수를 하고 있었다. 동석은 번개 맞은 사람처럼 온몸에 전율(戰慄)이 흐르는 것을 감지하면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내의 태도로 보아서 한두 번 만난 사이가 아닌 듯 했다. 사내는 두 손으로 S의 오른손을 꼭 쥐고 아쉬운 듯 인사말을 나누고 있었다. 동석은 10년 넘게 S와 살면서 아내가 저렇듯 세련되고 섹시미가 흐르는 여인인지 미처 몰랐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동석은 두 사람의 은밀한 만남을 훔쳐보면서 분노가 아 닌 희열(喜悅)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아내의 손을 잡고 있는 경찬이란 사내의 멱살을 잡고 싶었으나 마음뿐이었다. 5분 넘게 동석의 아내 S는 경찬이란 남자와 밀담(密談)을 나누었다. 남자의 말에 S는 좌우를 둘러보기도 하고 배꼽이 빠져라 웃기도 하였다. 동석은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기만 할 뿐이었다. S는 사내와 헤어지면서 사내의 뺨에 가볍게 키스 까지 하였다. ‘앗, 저놈에게, 저놈에게 내 마누라가 키스를 하다니? 난, 난 한 번도 마누라에게 저런 키스를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동석은 아내와 경찬이란 남자가 헤어지는 것을 보고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동석은 방금 본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하였다. 믿고 싶지 않은 광경에 동석은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背信感)과 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당장 달려 나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른 자신을 책망하면서 동석은 가슴을 쳤다. ‘아, 마누라가, 내 마누라가 내 눈앞에서 다른 사내 뺨에 키스를 하다니. 내가 방금 헛것을 본 게 틀림없어. 아내는 지금 친구들과 어울려 명동이나 압구정에가 있을 거야. 샤넬이나 루이뷔통 매장 아니면 스타벅스에 앉아서 입방아를 찧고 있을 거라고. 내가 분명히 다른 여인을 아내로 착각한 게 틀림없어.’ 정신이 나간 동석은 휴대전화를 꺼내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석은 다시 S에게 전화를 걸었다. 늘 그랬던 것 처럼 S는 동석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1분 간격으로 동석은 통화 버튼 을 눌러댔지만 S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석이 S에게 전화를 거는 방법은 ‘10분 후 전화하겠다’는 문자를 미리 보내 놓고 전화를 해야 S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곤 했다. 동석이 S에게 문자를 보냈다. 정확하게 10분이 흐르자 동석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내 S의 전화였다. 동석은 망설였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나서 동석은 전화 수신 버튼을 눌렀다. “전화했어요?” 송곳 같은 S의 목소리가 동석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동석은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억누르고 간신히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는 순간순간에도 동석의 분노(憤怒)는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S의 목소리는 무척 사무적이었다. “고마워요. 살다보니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도 있네요. 있다 집에서 봐요.” S의 차가운 목소리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이런 여자를 마누라라고 믿고 사는 내가 바보지.” 동석은 ‘당신 지금 어디야? 누구하고 있는 거야? 무엇을 하고 있어?’라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S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내와 간단한 전화 통화를 끝낸 동석은 가슴을 내리 쳤다. 아들, 가장(家長), 두 아이의 아빠, 타인(他人) 같은 여인의 지아비, K기업체 부장(部長), 잘나가는 직장인, 사회성원......, 어디를 봐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자 신의 처지에 동석은 울분을 삭혀야 했다. ‘마누라 뒷조사를 해보는 거야. 분명히 뭔가 있어. 가정주부가 왜 연예기획사에 들락 거리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로? 내일 모레면 마흔에 접어드는 나이에 연예인이 되려 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아내와 그 남자가 무슨 사이일까. 친구는 아닐 테고, 동창 도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두 사람이 애인사이가 분명해. 아니, 확실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어디 두고 보자.’ 동석은 비틀거리며 회사를 빠져 나갔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온 동석은 눈 을 의심하였다. “아니 당신이 웬일이에요? 이렇게 초저녁에 다 들어오시고. 정말로 내일부터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요?” S가 진한 화장으로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뛰어 나오며 웃고 있었다.
“사장님, 안주도 안 드시고 술만 드시면 어떻게 해요.”
‘겉으로 봐선 멀쩡한 사람인데. 어째 말이 좀 어눌해 보이네. 이거 첫손님한테 술
S는 결혼 전에 방송국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늘 가까이서 유명 연예인을 접한 덕분
동석은 큰 아이가 태어난 3년 후 둘째 아들을 얻었다. 부부관계를 거부하는 S를 어
어느 날 동석은 안방 화장대 위에 놓인 고급 종이로 인쇄된 핑크색 명함을 발견하였
‘그렇지, 아내가 나와 결혼하기 전에 방송국에 다녔었지. 그럼, 이 회사대표인 경찬이
“아예, 대표이사님 좀 만나려고 왔습니다. 건강에 좋은 약을 좀 가져왔거든요.”
“사장님은 지금 손님과 면담 중이세요? 사장님과 사전에 개인적으로 약속이 있으셨나요? 저희 비서실에는 사장님 면담이 잡혀있지 않은데요? 어떻게 7층까지 오셨는지 모르지만 잘못 오신 거 같은데요. 4층에 가시면 대외섭외부가 있으니 그리로 가보세요.”
“으응, 전화했었어.”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냐. 그냥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