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타꽁쁠리(4)
페타꽁쁠리
- 여강 최재효
4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빗줄기는 더욱 세차지면서 횟집에 손
님들도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하였다. 이상하게도 우리 뒤 테이블
에 남자는 돌부처 처럼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 남자도 우리처럼 주식에 손을 댔다
패가망신을 했거나 혹은 운이 좋아 대박을 터트려 주변의 부럼을 사
는 슈퍼개미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홀로 바닷가에 여행 올 사람이라면 분명 곡절이 많은 사내가
분명하리라. 혜진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주식 이야기를 마치자 훌쩍
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시원한 맥주를 주문하여 혜진이 잔에 가득 채
워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으니 막혔던 기가 뚫렸는지
곧 생글거렸다. 개그우먼 성대모사를 하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
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대현은 잠시 목을 축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가자고 하였다. 나는 500
cc 생맥주잔 세 개와 병맥주 10병 소주 5병을 달라고 하여 소위 주당
들이 즐기는 폭탄주를 제조하였다. 생맥주잔에 소주잔으로 소주 2잔
을 붓고 맥주로 10부까지 꽉꽉채워 입구를 막고 좌우로 휘휘 돌려 내
려놓았다.
대현은 박수를 치며 좋아라 하였고 혜진도 처음 마셔보는 술이라며
즐거워하였다. 폭탄주를 안주도 들지않고 급히 세잔씩 마시고 나자
횟집 천정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돌아가는 것인지
횟집 천정이 정말로 돌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승에서 마지막 밤을 광란의 시간으로 마감하고 싶은 생각은 없
었지만 술이 뱃속으로 넘어가면서 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올랐다. 혜
진은 얼굴뿐만 아니라 가슴부위 가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현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히죽대며, 혜진과 나에게 자꾸만 건배를
권하느라 부산했다.
순식간에 우리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빈병들로 가득했다.
어느 정도 속이 찼는지 혜진이 나에게 나의 지난 인생 이야기를 들
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다시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추억을 토해냈
다. 맞벌이 부부들의 애환은 맞벌이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나의 큰 형님은 90년대 초반 전국적으로 주식 광풍이 불 때 집을
날렸다. 형님이 회사생활을 하는 틈틈이 주식에 손을 댄 것이 화근
이었다. 형수 몰래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상당한 금액을 빌려 주식
에 정성을 쏟았다. 주식에 재미를 볼 때는 형님은 나에게 많은 용
돈을 주며 넉넉한 우애를 자랑하기도 했다.
주식의 단맛을 본 형님은 겁도 없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은
행에서 거금을 대출을 받아 주식에 몰방하였다. 전국을 달아오르게
했던 주식의 광풍은 어느 한순간 거짓말 처럼 꺼져버리고 말았다.
형님은 매일 술로 연명하는 것 같았다. 부부싸움이 잦아지고 형수는
이혼하자고 형님을 협박하였다.
형님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시골의 문전옥답을 야금야금 팔아 올
리기 시작하였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아버지, 어머니는 큰 아들의
그럴듯한 말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않았다. 형님은 아파트를 경매당
하고 전세방으로 옮겨야 했다. 한번 무너진 부부간의 신뢰는 회복되
기 어려웠다.
형님은 거의 매일 술로 연명하는 듯 했다. 결국 형님은 20년간 다니
던 회사를 나와 개인 사업을 시작하였다. 고향 땅을 팔아 겨우 마련한
사업자금으로 자그마한 잡화점을 시작하였으나, 형님의 마음은 늘 증
권사 매장에 가 있었다. 잠시 조용하게 지내던 형님은 형수 모르게
제2 금융권과 사채시장에서 돈을 빌려 다시 주식에 손을 대고 있었다.
어느 날 형님 가게로 깡패들이 몰려오더니 당장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사채업자가 보낸 해결사들이었다. 결국 형님은 가게
를 처분하고 빌린 돈 일부를 갚고 잠적하고 말았다. 형수와 조카들
은 해결사들의 협박에 시달리며, 악몽 같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반년이 지나 형님은 형수와 이혼하고 아귀보다 더 무서운 채권추
심단의 눈을 피해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일년 만에 나타난 큰형님
은 예전의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이 누렇게 떠서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이었고, 배에는 복수가 차서 곧 출산을 앞둔 산모(産母) 같았
다.
나와 작은 형님은 큰형님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밀 진단을 받게
하였다. 결과는 간암 말기였고,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큰형님에게는 3개월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검진
결과를 이야기 해주었고 큰형님은 덤덤한 자세로 인생의 마지막
을 정리하고 있었다.
큰형님은 이승을 떠나면서 남긴 것은 대학병원에 해부용으로 기부
한 병든 육신이 전부였다. 한때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청춘을 불
태웠던 형님의 모습은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형님의 파멸은 주식
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냥 욕심내지 않고 회사에서 주는 봉급으로
마누라와 자식들 건사하며 평범하게 살면 되는 것을 빨리 출세해보
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천지신명이 주신 천수(天壽)를 반 밖에 누리
지 못했다.
나는 형님의 몰락을 보면서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주식은 마치 불
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꽃인
주식이 우리 가문에서는 배척의 대상이 되었으니, 아담 스미스나
워렌 버펫이 알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1990년대 전국적으로 불어 닥친 주식 광풍에 휩쓸려 개미들이
떼죽음을 당하거나 재기 불능의 상태로 떨어져 긴 세월 한숨 속
에서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이 부지기수였으리라. 지피지기(知
彼知己)면 백전불퇴(白戰不退)라는 말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알
고 살아가던 나는 뉴밀레니엄이 시작되는 해부터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보고 싶었다.
무미건조한 직장생활은 나의 황금 같은 인생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마누라와의 맹물 같은 부부생활도 나의 허전한 가슴을 채
워주지 못했다. 나는 대학을 두 분야에 다녔던 전력(前歷)을 가지
고 있다. 처음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한 분야가 경제(經濟)였다.
부모님 몰래 잘 다니고 있던 대학을 자퇴하고 다시 대학입학을 위
한 공부를 하였다. 문과대학은 나이 적성에 맞는 듯 했다. 그러나
나의 캠퍼스 생활은 제5공화국 출범 시기와 맞물려서 캠퍼스는
매일 뿌연 체루가스가 분분하고 수업은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했
다. 나는 대학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군대에 들어갔다.
졸업과 동시에 지금의 직장을 잡아 20년 넘게 다니고 있지만 늘
가슴 한켠이 허전했다. 등산도 다녀 보고 각종 잡기(雜技)에 전념
했지만 나의 적성에 맞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나는 무엇으로 나의 공
허한 인생을 채울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차에 직장 내에서 어
떤 사원이 주식으로 재미를 보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 재생산되면서 전 직원이 주식 열
풍에 휩싸였다. 어느 부서 누가 주식으로 상당한 재미를 보아 50
평대 아파트를 구입했다는 입소문은 전 사원들을 들뜨게 하였다.
나는 형님의 전철(前轍)을 밟고 싶지 않았다. 직원 사이에서 주식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엉뚱한 화재를
꺼내 이야기의 맥을 끊기도 하였다.
점점 거세지는 주식 열풍은 나의 잠재적인 욕망을 자꾸만 자극
하기 시작했다. 서점에 들려 주식관련 서적을 구입하면서 음전한
나는 밤새는 줄 모르고 탐독했다. 나의 행동에 아내는 고개를 갸우
뚱거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종자돈이 필요하여 나는 마누라
몰래 매달 일정 금액의 돈을 적립하였다.
2년 정도 적립한 종자돈이면 우선 주식의 맛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가까운 증권사를 찾아 계좌를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주식시장에 뛰
어 들었다. 모든 것이 아내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 물론 직
장동료들에게도 나의 주식관련 행위는 특급 비밀이었다. 제2의 워
렌 버핏을 꿈꾸고 있는 나에게 종종 형님의 음울하고 의뭉스러운
영상이 나타나곤 했지만 그때 마다 나는 외면하였다.
낮에는 직장생활에 매진하고 밤이면 주식 관련 서적을 탐독하느라
자연히 아내와 사이도 서서히 멀어져만 갔다. 밤늦게까지 주식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느라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주식관련 카페 30여 곳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소위 슈
퍼개미의 무용담이나 주식에서 재미를 보았다는 일부 개미들의 이
야기는 나에게 핑크빛 미래를 약속해 주는 담보물처럼 보였다. 나는
알량한 지식으로 나만의 전략을 세워보기도 하고, 잘나가는 애널리
스트들이 작성한 분석을 꼼꼼히 읽어보기도 하였다.
주식은 자본주의 꽃이면 동시에 민중의 피를 먹고 자라는 사악한
꽃이라는 일부 투기자들의 말을 나는 귓전으로 흘려버렸다. 내가
처음 매수한 주식은 IT관련 종목으로 단기매매를 통해 고수익을
보장해 줄것 같았다. 처음으로 투자한 주식에서 나는 약간의 이익
을 내고 의기양양했다. 이렇게 잘만하면 마누라 몰래 매달 내 봉급
만큼의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 세 번째 투자에서도 역시 이익을 얻었다. 나는 그동안
공부했던 정석 투자의 정도에 벗어나 묻지마 투자로 기울고 있었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술적 지표들은 머리만 아플 뿐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하였다. 주식은 매매 타이밍만
잘 잡으면 언제든지 수익을 낼 수 있는 현대판 도깨비 방망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여러 차트를 연구하여 기술적 분석을 해보기도 하였지만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과연 주식 투자에 대한 공부가 정말로
필요한지 의문이 일기도 했다. 수십 년간 내공을 쌓은 주식전문가
들도 주식투자에 실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말에 나는 별도
로 주식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때그때 동물적 감
각으로 주식의 매수시점을 포착하여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가 최
고점에 다다랐을 때 매도하면 된다고 본 것이다.
나는 매일 여러 종류의 경제 관련 신문을 탐독하였다. 일하면서
도 주식, 밥을 먹으면서도 주식, 잠을 자면서도 주식, 심지어 마누
라의 미끈한 엉덩이를 주무르면서도 내가 매수한 종목의 차트 상
에 이동평균선을 그리며 음봉과 양봉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낮에는 졸린 눈을 비비며 간신히 근무를 해야 했다. 나는 점심
시간만 되면 동료들에게 선약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미리 회사를
빠져나와 대충 점심식사를 해결하고 회사 근처 PC방으로 향했다.
컴퓨터에 내가 투자한 종목의 차트를 펼치고 있으면 안심이 되었
다.
일주일전 매입한 주가가 어느 정도 올랐으면 나는 즉시 매도를
하였고, 모멘텀이 없어 장기 전략으로 진입한 종목은 미련 없이
팔아서 테마주나 단기주식에 투입하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손
절매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주식으로 큰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 다양한 경제지표를 연
구하였고, 세계 정치뉴스를 보며,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분쟁 등
전세계의 정세(政勢), 국제적 사건, 선진국들의 새로운 생활 패턴,
국제적인 기후변화, 대체에너지 등 여러 분야에 신경을 곤두세웠
다.
특히 미국의 뉴욕증권거래소의 상황과 다우지수와 나스닥지수,
중국과 일본의 주식시황에 대하여도 큰 관심을 보이며 매일 인터
넷을 통해 체크했다. 처음에 나는 다분히 학문적 욕구 충족을 위하
여 증권이나 펀드에 대하여 접근하고자 하였으나, 주식을 공부하
면서 내가 직접투자를 하는 욕망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마누라 몰래 주식에 손을 대면서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의 경험을 하며 짜릿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두
세 번 이익을 내면 한번 정도는 손실을 입기도 했지만, 다행히 행운
의 여신은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주식은 가장 매력적인 재산증식의 수단이면서 한편으로는 위험부
담이 크기 때문에 강심장이 아닌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주식과 관련한 수많은 기술적 분석기법이 개발되었고 다양한 이론
이 있지만 인간이 신의 영역인 미래 주가지수의 정확한 수치는 알아
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조그만 이익에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거만해져 갔다.
나의 주식에 대한 도박은 나 자신도 통제하지 못했다. 증권사에서
자금을 대출받거나 동창들로부터 자금을 차입하면서 점점 주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주변의 충고처럼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는 10가
지 종목을 선정하여 포트폴리오를 구성한 뒤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관망하면서 투자에 임해야 하는데, 나는 빨리 큰수익을 올리고 싶
었다. 중장기 종목이 아닌 단타매매를 염두에 두고 테마주나 민감주
에 집중 투자 아닌 투기를 하고 있었다.
감이 좋은 날에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하루 종일 집에 들어 앉아
HTS를 켜놓고 내가 투자한 종목의 일간 차트를 보며 주가의 등락
에 한숨을 짓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나는 기술적 분석을 크게 의존
하는 경향이 아니지만 종종 단기적인 입장에서 추세순응전략(趨勢
順應戰略)과 역행매매전략(逆行賣買戰略)을 적절히 구사하며 수
익을 내기도 하였다.
추세순응전략은 주가가 상승할 때 매수(買收)하고 주가가 하락할
때 매도(賣渡)하는 지극히 단순한 전략이며, 역행매매전략은 주가가
상승하면 매도하고, 주가가 하락하면 매수하는 수법으로 약간은 상
호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매매의 묘미를 알면 꽤 재미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한번은 단타(短打)를 노리고 테마주에 거금을 몰방한 적이 있었
다. 나는 상당한 수익을 얻으면서 곧 갑부가 될 꿈을 꾸기도 하였
다. 나는 즉시 차를 바꿨다. 아내에게 자주는 아니지만 용돈을 쥐어
주면서 남편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기도 하였다. 세상 모든 것
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만간 직장을
그만두고 데이트레이더(DayTrader)로 전향할 생각까지 했다.
지금처럼 무료한 봉급쟁이 생활하면서 미래 또는 노후(老後) 생활
이 보장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차근차근 순이익금을 적립
해 나갔다. 물론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 나갔
다. 나는 그렇게 몇 년간 직장생활과 주식투기꾼으로 이중생활을
지속하였다. 어느 정도 자금이 확보되었다고 판단하였을 때 나는
과감히 직장에 사직서를 던지고 말았다. 물론 처음에는 아내에게
는 말하지 않았다.
다니던 직장 근처에 오피스텔 한칸을 임대하여 본격적인 데이트레
이더 생활을 시작하였다. 서너 평 남짓한 방에 HTS를 위한 큼직한
모니터 다섯 개를 항시 열어두고 밤낮으로 들여다보았다. 4년 전 그
러니까 지금처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이었다. 나는 사이버에
서 우연히 알게 된 J 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주식관련 카페 운
영자들이 종로에 있는 주점에서 수도권 개미들의 번개 모임을 주선한
것이었다.
J는 나에게 명함을 건네며 접근하였다. 그는 서울 강남에서 개인사
업을 하며 주식 투자로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고 자랑하였다. 나는 J가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대화를 할수록 사람이 믿음이 갔다.
훤칠한 풍신에 수려한 마스크는 여인들뿐만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호
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J는 나에게 시간이 나면 점심을 하자고 하였
다.
나는 그의 명함을 수시로 들여다보면서 J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뇌리에 입력하였다. J는 주식투자를 20년째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
런대로 재미를 보았지만 점점 겁이 난다며, 지금은 주식으로 번 돈으
로 가구점을 열어 그런대로 괜찮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이 호탕한 웃음소리와 남을 배려하는 매너에 매료되었다.
그의 말 한마디는 한마디는 현재의 우리나라 경제의 흐름을 대변해
주고 있었고, 정치와 역사, 인문, 철학에 대하여도 해박한 지식을 지니
고 있어서 어떠한 대화에서도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
다. J와의 첫 만남에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그가 진정한 투자자
였고 나는 추저분한 투기꾼에 불과했다.
나는 번개모임에서 들은 그의 이야기를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
해 보았다. 주식시장은 인격체와 마찬가지여서 주식과 절대 맞서지
말아야 하며, 늘 시장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겸손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시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장의 흐름에 조용히 몸을 맡
겨야 하며, 그것이 험한 주식시장 판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
고 하였다.
또한 장안에서 내로라하는 애널리스트들이 뿌려대는 기술적 분석은
이미 지나온 발자국을 살펴서 미래 주식가치를 살피는 일종의 주술
적 주문(呪文)같기 때문에 맹신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홈런을 날
리는 타자가 있는가 하면 높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병살타를 날리는 타자도 있다는 야구게임에 빗댄 그의 지론에 나는
속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일주일 후 그에게 받은 명함을 꺼내들고 그의 휴대전화번호를 눌렀
다. 나의 첫 전화에 그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날 저녁 나는 강남
에서 그를 만나 저녁을 먹게 되었다.
- 계속 -
x-text/html; charset=EUC-KR" hidden="true" style="border: 2px ridge skyblue; border-image: none;" omcontextmenu="return false" loop="-1" volume="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