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을 뚫다
구멍을 뚫다
- 여강 최재효
칼 송곳 드릴 메스 끌 곡괭이 카메라
요즘 내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물건들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있으면 달려가
나는 무조건 구멍을 뚫는다
막힌 데를 뚫는데 의사처방전은 필요 없다
날이 선 칼이나 죽음을 연상케 하는 송곳을
들이대면 거짓말 같이 치유된다
노후 하수관, 막힌 혈관, 썩은 생각, 낡은 전통
수전노와 개나리의 남산만한 배, 막힌 항문
뚫어진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왜 제 정신이 아닌지 어째서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지 알 수 있다
밤낮으로 구멍 뚫는데 재미를 붙인 나는
거대한 시대적 사명감을 느낄 정도다
뚫을 곳이 너무 많은 세상, 미쳐야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나는 숨죽이며 살고 있다
어느 정도 구멍을 뚫고 나면 나는
수십 년간 체기에 시달리고 있는 불쌍한 나를
인정사정 두지 않고 뚫을 예정이다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시원한 바람을 넣으면
나는 백 살은 족히 살 수 있으리라
시작도 하기 전인데 벌써 신이 난다
- 창작일 : 2011.8.4. 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