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망초(1)
물망초(1)
- 여강 최재효
1
“엄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엄마 문자 받고 즉시
달려오는 길이야. 어제 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울 엄마 곧 훌훌 털고 일어
나시겠네? 기훈씨? 그렇게 보이죠?”
20초반의 아가씨는 병상에 누워있는 여인에게 달콤한 말을 늘어놓으며 함께 온
남자 친구에게 동의를 구하였다.
“응? 그, 그래. 먼젓번보다 많이 좋아 보이셔.”
“거봐, 엄마. 기훈씨도 엄마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하잖아. 그러니 얼른 일어
나우. 알았지?”
“그러니? 우리 큰딸이 그렇다고 하니 나도 기분이 좋은걸.”
주희는 어느새 성인(成人)이 되어 짝을 데리고 달려온 딸이 대견스러워 보였다.
‘마치 23년 전 나의 모습을 보는 듯 하구나. 아아, 언제 세월이 그리 무정하게
흘러버렸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게 세월이라는 옛 어른들
말씀이 딱 맞는구나. 내가 30대 까지만 하여도 세월의 무상함을 모르고 지냈는
데......’
주희는 딸과 딸애의 남자친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딸과 딸의 남자친구를 바라
보는 주희는 눈이 반짝거리더니 이내 침침해 졌다.
“엄마, 왜? 우리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아무리 봐도 우리 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생겼어. 그리고 기훈이
도 그렇고. 나는 너희 둘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부르단다.”
주희의 눈가에 소리 없이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갑자기 병실이 조용해 졌다. 다
행이 주희가 독실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남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지만 딸 앞에서
눈물을 보인 주희는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엄마, 왜 불러놓고 눈물을 흘리는 거야?”
“응? 미, 미안하구나. 내가 그만 못 보여줄 것을 보였구나. 지연아, 미안하다.”
지연이 손수건으로 주희의 양 볼 위로 흐르는 뜨거운 액체를 닦아주며 그동안
자세히 보지 못했던 주희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엄마, 그동안 우리 자매 키우느라 고생 많았지? 내가 나중에 성공하면 엄마
하고 다니면서 엄마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그리고 가고 싶은 곳에 얼마
든지 데려다 줄게. 그러니 어서 일어나. 엄마.”
딸의 응석에 주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내가 너를 빨리 이곳으로 오라고 한 것은 누굴 찾을 사람이 있어서 그래.
네가 마침 방학이고 그리 바쁘지 않은 거 같아서 엄마가 마지막으로 부탁 좀 하
려고. 엄마 부탁 들어줄 거지?”
“엄마, 무슨 소리야? 마지막 부탁이라니?”
지연이 두 눈이 휘둥그레 졌다.
“응? 내가 그랬니? 아니, 난 그저 네가 바쁜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
란다.”
날로 악화되어 가는 병세(病勢)에 주희는 자신도 모르게 삶의 끈을 포기하고 있
었다. 딸에게 하얀 봉투를 건네는 주희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엄마, 이게 뭔데?”
“지연아, 엄마도 너희들처럼 대학생이었을 때 사귀던 남학생이 있었어. 그 남
학생 이름은 이자, 천자, 호자란다. 천자는 하늘 천(天)자고, 호자는 호경 호(鎬)
자를 썼어. 나이는 엄마보다 한 살 위란다. 거기 적힌 주소는 내 기억을 더듬어
서 썼는데 아마 틀릴지도 몰라. 그 곳에 가면 그 사람 부모나 형제가 살고 있을
지도 몰라. 그 사람이 거기 살고 있을 수도 있고.
내가 그 사람하고 그 곳을 몇 번 가봤었거든. 내가 그 사람을 꼭, 꼭 만나야 한
단다. 엄마 부탁은 너희 둘만 알고 있어야해. 이 엄마하고 약속할 수 있지?”
주희는 숨을 가쁘게 쉬면서 말을 이었다. 주희가 팔이 움직일 때마다 진통제가
든 링거병이 흔들렸다.
“엄마, 이분하고 사랑했던 사이였어?”
지연이 주희의 표정을 천천히 살폈다.
“......”
주희가 딸의 얼굴을 슬픈 듯 바라보았다.
“아, 알았어. 미안해 엄마. 묻지 않을게.”
“그래, 네가 그 사람에 대하여 궁금한 게 많겠지. 엄마하고 그 사람은 장래까
지 약속했던 사이였지.”
“그런데, 왜 둘이 결혼하지 않았어?”
지연의 두 눈이 커지면서 묘한 표정을 지
었다.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엄마의 사랑 이야기에 상당히 호기심이
발동한 듯 했다.
“지연아, 그건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희의 핏기 없는 얼굴 근육이 잠시 일그러지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았어. 엄마, 더 이상 묻지 않을게. 그런데 이분이 사는 데가 경상도 아주 산골
지역 같은데? B군(郡)이면 산 높고 물 좋은 지역으로 유명하잖아?”
지연이 기훈을 처다 보았다.
“응, 경상도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지역이야. 이년 전, 그 지역에 있는 산을 등
반하느라고 가보았는데 엄청 산세가 험하고 깊은 산촌이었어.”
기훈이 오버액션 까지 취해가 B군에 대하여 아는 체를 했다.
“그럼 서울서 그곳에 갔다 오는데 삼, 사일은 걸리겠는 걸?”
지연이 난처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꺼져가는 생명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엄마,
주희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지연도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
었기 때문
에 더더욱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
“걱정하지마세요. 제가 차가 있으니까 지연이 태우고 이 분을 꼭 만나 볼게
요.”
기훈은 벌써 신이 나는지 소풍가는 아이처럼 들 떠있었다.
“그런데, 엄마 그 분만나면 어떻게 해? 이 봉투만 전해주면 되는거야?"
“그 안에 엄마가 그분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어. 그분을 만나거든 꼭 그 편지를
전해야 해. 알았지? 난, 너를 믿어. 착한 내 딸......”
주희는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또 눈물을 쏟았다. 지연과 기훈은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였다.
주희가 한참 흐느끼고 있을 때 주희의 남편, 영인이 들어왔다. 영인은 서울
번화가에서 대형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잘 나가는 교회의 장로(長老)를 맡고 있
었다. 주희의 아버지와 영인의 아버지는 같은 고향 사람으로 주희와 영인이 어
릴때 두 사람 사이에 묵시적 언약이 있었다.
서로 사돈이 되자고 한 그 언약에 주희는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눈물을 쏟아
야 했다. 아버지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영인은 특유의 사업수완을 발휘
하여 체인점 형식으로 세 곳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지역 유지 노릇을 하였
다. 밖에서는 엄하고 강직한 성격이지만 집에서는 아내 주희에게 최선을 다하
는 사내였다.
“아빠, 벌써 오신 거예요?”
지연이 주희가 건넨 봉투를 기훈에게 주면서 죄짓다 들킨 사람 처럼 얼굴이 빨개
졌다.
“응? 그, 그래. 그런데 너는 웬일이니? 학교에 안 갔어?”
“엄마가 보고 싶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말고 왔어요.”
“그래?”
큰 딸을 유난히 귀여워하는 영인은 지연의 곁에 서있던 기훈을 아래위로 훑어보
았다. 성년이 된 딸의 남자 친구는 백년지객(百年之客)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영
인은 기훈을 눈여겨보는 중이었다.
“자,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자. 기도하는 길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
한 길이야. 하늘에서 이 순간에도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
님 아버지, 여기 한 착한 양이 병마(病魔)와 싸우고 있나이다. 하루 빨리 그
병마를 퇴치하고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음습한 사망의 골
짜기를 걷기에는 너무나 이릅니다.
어린 양이 정신적으로 둔감하고 어리석어지는 것으로부터 지키소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정신적, 영적,
체력적인 특성을 지닐 수 있도록 이 어린 양을 도우소서. 육체적인 무기력함과
쇠잔함이 밀려 올 때라도 영적인 나태와 방관함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지난 시간 동안도 어린 양을 지켜
주시고 은혜 가운데 맡겨진 일들을 열심히 하게 하시고 다시금 아버지에게
기도 드림을 감사드립니다. 이 험악한 세상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악업을 아버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 하는데 방해하는 마음속의 악한 영들을 아버지의 이
름으로 물리칠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통해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넘쳐나며 이 어린 양에게 다시금 소녀 적 웃음과
활달함을 내려 주시어 저희 가정에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아멘.“
영인의 기도는 너무도 간절하여 아내 주희의 병이 금방 씻을 듯 낳을 것만
같았다. 영인의 바람과 같이 아내와 큰 딸 지연은 영인의 신앙생활에 호의
적이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 없이 하나님을 찾는 영인은 아내와 딸들이 자
신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의지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주희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영인은 주로 저녁때 와서 주희 곁에서 새우잠을
자며 병간호를 하였다. 주희는 그런 남편이 믿음직스럽기도 하면서 어느 때
는 불편하기도 했다. 차라리 딸들이 와서 병간호를 해주기 바랐지만 마음대
로 되지 않았다.
“아빠, 우리 이제 가볼게요.”
“학교로 가니?”
영인은 딸 곁에 서있는 기훈을 쏘아보았다.
“네에, 그리고 아빠, 저 내일 현장학습 있어요? 한 삼사일 정도 경상도 B
군에 갔다 올 거예요. 거기에 우리나라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교수님하고 같은 과 친구들 하고 가거든요.”
“그래? 혹시 너희 둘만 가는 거 아니겠지?”
영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한 번 기훈을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어머? 아빠는? 이 달을 못 믿는거예요?"
"응? 그, 그게 아니고......"
영인은 기훈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웠으나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바짝바짝 말라가는 아내를 보는 영인의 눈동자는 전혀 슬픔이
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가 아내를 살려 줄 것이란 믿음
이 너무 커서 감히 의사나 주변의 누구도 영인에게 아내 주희의 병세에 대하
여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주희와 두 딸들 그리고 친지들은 주희가 꺼져가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남편 영인만은 현실을 부인하고 있었
다.
“여보, 다 큰 애들이에요. 자신의 처신에 대하여 책임질 줄 아는 애들이라
고요.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지연이가 사학과(史學科) 대학생이니 유적지 답
사는 당연한 거예요. 현장에 다니면서 직접 보고 들어야 지식을 습득하지요.
학교 도서관에 앉아서 책만 본다고 되나요?”
주희는 조금 전 옛 연인 천호에게 전하는 편지를 딸에게 건넨 것을 혹시 남편
이 눈치나 채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기훈의 손에 들려있는 봉투를 응시하였다.
물론 똑똑하고 야무진 딸, 지연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편지를 꼭 천호에게 전해
줄 거라고 믿었다.
“알았어요. 저애 일은 그렇다 치고 당신이 빨리 일어나야지. 그까짓 병은 요
즘 의학이 발달해서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아무 일 없을 거야. 빨리 낳아서 예전처럼
교회도 나가고 신도들 모임에도 나가서 우리 교회를 부흥시켜야지. 하나님 아
버지께서 당신 양 어깨에 지워주신 일들이 많아. 그러니 얼른 일어나라고.”
영인은 주희의 앙상하고 파리한 손을 잡아주었다. 자신에게 시집와서 두
딸들을 낳고 지금까지 불평불만 한 마디 하지 않고 잘 참아준 아내였다. 그
런 아내가 병석에 누워있자 영인은 자주 아내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을
회상했다.
“당신, 그거 기억해? 우리가 약혼하고 당신이 가자고 해서 다녀왔던 경상
도 B군 말이야. 난 요즘 이상하게 그곳이 가고 싶어. 그곳 인심도 좋고 아기
자기한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늘어선 모습이 너무 멋지고 그 안에 있는 절
도 고즈넉하고 좋았는데. 당신이 병상에서 일어나면 내가 꼭 데리고 갈게.”
영인이 주희에게 뜬금없이 B군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자 주희는 조금 전
딸과 나눈 이야기를 엿들었나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그게 벌써 이십년은 넘었죠? 저애 임신하고 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주희가 어정쩡하게 서있는 지연과 기훈을 쳐다보았다. 가겠다고 하였지만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지연은 머뭇거렸다.
“그렇게 되었을 거야. 이십년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군.”
“아빠 그럼 우린 학교로 갈게요. 엄마하고 재미있는 시간 보내세요.”
지연이 남자친구와 병실을 나가자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