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0. 12. 21. 00:00

 

 

 

 

 

 

 

               

 

 

 

 

 

 

 

           씨(4)

 

 


                                                                                                                                                                              - 여강 최재효

 

 

 

 단정한 검정색 정장 차림의 흑기사는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강한 어필을 해왔다. 속으로 웃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의 말에 동조하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자신은 결혼한 지 5년 만에 아이 문제로 부인과 합의이혼을

하였다고 했다. 아이 문제라는 그의 말에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아이가 어땠는데요?”
  나의 물음에 흑기사는 드디어 내가 자신의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호의를

보인다고 생각하였는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가슴 아팠던 결혼

생활에 대하여 털어 놓았다. 2대 독자인 흑기사는 결혼을 빨리 한편은 아니

지만 결혼 하자마자 어머니는 손자 타령을 하면서 며느리를 압박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회사일과 가사를 돌보아야 하는 처는 늘 피곤해 있었다.

임신 소식이 없자 시어머니의 질책이 이어졌고 갈등은 부부싸움으로 변질되어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흑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착각

에 빠졌다. 전국에 용하다는 산부인과를 다 다녀 보고 시험관아기까지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거금만 날리고 자포자기 상태에서 말로만 부부로서 살았는데,

어느 날 처가  먼저 이혼을 하자고 요구했다고 한다.


  ‘여자가 먼저?‘
  나는 속으로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이혼을 요구했던 흑기사 처에게 연민의 정

을 느꼈다. 불임을 겪고 있는 같은 여자로서 당연한 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혼을 하여야 한다면, 나 또한

흑기사 처와 같은 전철을 밟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지만 확실한 답변

을 얻을 수 없었다.


  “아이 문제 때문에 이혼하신 것인가요? 다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나의 질문에 흑기사는 자신들에게 불임 말고는 전혀 다른 문제는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동갑나기와 재혼한 전 처가 최근에 출산을 하였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는 것이다.


  “그럼, 흑기사님 부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었군요?”
  “저도 신체상으로는 전혀 이상이 없었어요.”


  흑기사는 전 처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언젠가

회사 여사원 휴게실에서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으면 빨리 이혼하고 각자 다른

배우자를 찾아 결혼하면 곧 바로 자식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 이야기를 웃어 넘겼지만 흑기사의 이야기를 듣고 그 것이 사실임

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혼을 하고 다른 배우자를 맞으면 임신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심성이 고운 남편과 합의이혼

하고 다른 남자 품에 안긴다는 것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옛날에는 씨받이, 씨내리를 들여 대(代)를 이어갔었지만 요즘은 그런 경우를 거

의 찾아볼 수 없다. 입양이라는 제도가 있어 필요한 경우 아이를 입양하면 된다.

마치 동물사육장에서 튼튼해 보이고 잘생긴 가축을 고르듯 말이다.


  “흑기사님은 왜 재혼을 안 하세요?”
  나의 질문에 흑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답변을 했다. 이혼하고 비슷한 처

지의 이혼녀나 노처녀들과 서너 번 선을 보았지만 모두 전처에 비해 외모나 성격

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특히 맞선 본 이혼녀의 경우 불임으로 아이가 없어 자신처럼 합의이혼 한 상태

였으며, 노처녀들의 경우는 아이를 원하지 않거나 자신의 경제력만을 꼬치꼬치

묻는 데에 정나미가 떨어져 더 이상 선을 안 본다고 했다.


  “그럼, 그냥 혼자 사시게요?”
  흑기사는 오늘처럼 사이버 카페나 클럽에 가입하여 정모나 번개모임에서 미지

의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했다. 굳이 복잡한 절차를 거쳐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혹시, 혈액형이 무슨 형이세요?”
  “A형인데요.”


  ‘A형?’  남편과 같은 형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O형과 A형의 ABO식에서 나올 수

있는 결과물에 대하여 얼른 계산해 보았다.


 남편이나 흑기사나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고 다만 DNA구조가 다를 뿐이다. 나는

불현듯 묘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흑기사는 소주잔을

건네며 속이 불편하냐고 물었다.


  “아니에요, 집에 두고 온 떡이 생각나서요.”
  갑자기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흑기사는 다른 테이블로 갈 마음이 없는 듯

했다. 다른 중년의 남성들은 철새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여성회원들에 대한

정보 탐색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시간 쯤 더 흐른 뒤 각 테이블을 보니 대강 짝짓기가 끝난 것 같았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짝짓기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 회사에서도 야유회를 가거나 시골

동창회를 가보면 내 곁에 과연 누가 앉을 것인가가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

되었다.


  10년 전부터 우리사회에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면서 끼리끼리의 은밀한 모임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다움이나 네이트, 네이버 등 한국을 대표하는 포털

사이트에 각종 모임이 만들어 지면서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친목 단체가 생겨나

고 매달 또는 년말연시 은밀한 모임이 활성화 되어 끼리끼리 문화가 극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인터넷을 할 줄 아는 사람치고 번개나 정모에 참석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면 원시인 소리를 듣는 게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네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모임에 가보면 기업체 사장님, 전무, 대리, 기사, 빵

가게 주인, 생선가게 아주머니, 백화점 종업원, 학교 선생님, 의사, 유치원 교사

등등 수많은 직업의 군상들이 모인다. 같은 나이 또래라고 판단되면 즉석에서

친구가 되는 장점이 있다. 물론 실명(實名)과 직업은 철저히 비밀로 지켜지는

것이 관례다.


  “2차는 근처 노래방으로 정했습니다. 파트너가 없는 분들은 빨리 만드세요.” 

오늘 모임을 개최한 운영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휑하게 뚫린 가슴을 채워주는

정모가 결국은 짝짓기로 귀결되는 것 같아 씁쓸하지만 재미도 있었다. 만약

남편이 오늘 모임에 참석하였다면 신기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2차 장소로 가기 위하여 일어나려고 하는데 흑기사가 내 팔을 잡아 주면서 호의

를 베풀었다. 2차 장소로 이동하는 쌍쌍을 보니 마치 대학교에 갓 들어가 미팅

에서 파트너를 만나 디스코 장으로 향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후후-.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내 옆에 바싹 붙어 걷던 흑기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

다가  이상한 눈빛으로 실없이 웃었다. 노래방은 운동장만큼이나 넓었다. 캔 맥

주와 안주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좀 전의 술좌석처럼 변했다. 남자들은 각자의

파트너에게 아부를 떠느라 체면도 잊은 듯 했다.


 흑기사 역시 나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며, 내 눈치 살피기에 급급했다. 나는

공주가 된 기분으로 흑기사를 홀대했지만 그는 오히려 좋다는 반응이다. 노래

방이 열광의 도가니로 변하자 흑기사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다른 장소

로 옮기자고 속삭였다.


  ‘괜히 따라갔다가 이상한 일 당하는 거 아녀?’
  나는 한참 동안 못 들은 체 했다. 그냥 여기서 다른 사람들과 헤어 질 때 까지

놀다가 집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흑기사의 유혹에 못 이기는 체 하고 따라 갈까

고민해 보았지만 얼른 결론을 내지 못했다.


  “나 먼저 입구에 나가있을 테니 곧 뒤 따라 나오세요.”
  흑기사는 일침을 가하듯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흑기사 뒤를 따라 나오면서 노래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해했다.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시커멓다. 먹자골목을 빠져 나와 대로변을 걸었다. 흑기사

는 아무 말 없이 앞서서 걸었다. 내가 살며시 다가가 흑기사에게 팔짱을 끼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팔에 힘을 주며 씩 웃었다.


  “고마워요. 내 뜻에 따라주어서요.”
  “어디 갈 건데요?”
  “글쎄요?”


  ‘이런 바보가 있나? 여자를 유혹해 놓고 어디 갈지 정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니......’

 생각 보다 쑥맥같아 보이는 흑기사의 태도에 나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나와 흑기사는 마치 화난 사람들처럼 말없이 걷기만 했다. 걸으면서 나는 지나

가는 차를 주시했다. 남편의 하얀색 승용차를 생각해내고 흰색승용차가 지나갈

 때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기사는 아직도 어디를 갈 것인지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저기 갈래요?”
  내가 노란바탕에 붉은색 글씨로 ‘비디오방’ 이라고 쓰인 간판을 가리켰다.
  “저기는 연인이나 부부들이 가는 곳 같은데......”  흑기사는 말끝을 흐리며 나

의 제안에 당황하는 빛이 역력해 보였다. 나는 오늘 밤 이상한 도발을 해보고 싶

었다.


 그가 주저주저 하자 나는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밀치듯 해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3층에 있는 비디오방은 칸칸이 한 평 정도의 밀실로 되어있어 약간 음침해 보였

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꾸며져 있었다.


  “우리 이거 봐요.”
  내가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아이즈 와이드 셧’을 고르자, 40중반

으로 보이는 비디오 방 주인 남자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내용은 대충 알고 있

었지만 아직 보지 못한 영화였다. 뭔가 색다르고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싶은 충

동이 일었다.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 흥청거리는 뉴욕의 크리스마스, 성공한 의사 빌

 하퍼드로 분장한 톰 크루즈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앨리스로 분장한 니콜 키드먼

은 빌의 환자 지글러가 마련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한다. 파티에서 빌과 앨리

스는 각자 다른 이성으로부터 강한 성적 유혹을 받는다. 앨리스는 은밀한 속삭임

으로 접근한 유럽 남자와 춤을 추고, 톰 크루즈는 늘씬한 모델로부터 적극적인

구애를 받는다.


  다음 날, 파티에서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 니콜 키드먼은 남편에게 숨겨왔던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한다. 그것은 지난 여름휴가 때 우연히 마주친 한 해군 장교의

매력에 반해 그에게 강한 충동을 느꼈고, 그와 하룻밤만 지낼 수 있다면 남편과

딸, 모두를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는 것이다.


 평소 앨리스를 그저 평범하고 정숙한 아내로 믿었던 빌은 그만 커다란 충격에 휩

싸이고 만다. 톰 크루즈는 아내, 앨리스가 실제로 장교와 정사를 벌이는 환상에 시

달린다. 계속해서 무언가에 홀린 듯 뉴욕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빌, 얼마 후 그는

대학 동창인 닉으로부터 상류층들의 비밀 섹스파티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톰 크루즈는 비밀 섹스를 벌이는 파티장소로 향한다.


 그 곳에 도착한 빌은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듯한 나체의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집단 섹스를 벌이는 충격적인 혼음파티를 목격한다. 그런데 빌이 위장 침입한 일

이 곧 밝혀지면서 그는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대충 줄거리는 이렇게

되지만 50인치 화면에 비치는 꿈속 같은 혼음 장면 속으로 나는 금방이라도 빨려

들것 만 같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