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0. 11. 3. 18:23

 

 

 

 

 

 

 

 

 

 

          

 

 

 

 

 

 

 

            하얀 나비(3)

                                                            

 

                                                                                                                                                                              -  여강 최재효

              

 

 

 

                                                                                                        3

 

  

 “연지야, 나 미웠지?”
 “아니에요.” 연지는 듬직한 태주의 품을 파고들었다. 태주의 가슴은 넓고 따뜻

했다. 남편에게서 맛보지 못한 야릇함이 연지의 전신으로 서서히 퍼져 나갔다.

한물 간 듯 한 중년가수가 나와 나훈아의 ‘영영’을 불렀다. 나이트클럽 천정과

좌, 우측 벽에서 현란한 조명이 무대에서 조용히 몸을 움직이는 남녀를 향해 쏟

져 내렸다. 연지는 속마음과 달리 말하는 자신이 미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15년 전 선머슴 같던 태주는 간데없고 적당히 살이 오른 멋진 남자가 연지의

한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연지는 태주의 팔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호수 위에서 잔잔한 물결에 움직이는 작은 목선(木船) 처럼 움직이자 다시 전율

하기 시작했다. 태주의 심장 뛰는 소리가 연주의 감각을 통해 전해지고 태주의

리드미컬한 발놀림에 연주는 황홀감에 젖어들었다. 예전에 촌에서 보던 태주가

아니었다. 능수능란한 춤 솜씨가 보통 여인들을 금방 후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아아, 이것이 꿈은 아니겠지? 혹시 꿈이라면 어쩌지?’

 연지는 태주의 품에 안겨 무대 위를 빙빙 돌며 지금 순간이 제발 꿈이 아니기를

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태주의 품에

안겨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이 입에서 줄줄 쏟아질 것 같

았다. 억센 남자의 팔에 힘이 가해지는 느낌에 연지는 숨이 가빠지면서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무엇에 사로잡혀 있기를 연지는 은연중 바라고 있었다.

 

 블루스가 끝나고 태주가 연지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돌아오자 친구들은 열렬

한 박수로 두 사람의 해후를 축하해 주었다. 연지와 태주가 한때 연인 사이였다

사실을 몇몇 친구들은 알고 있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친구들의 건배 세례

태주와 연지를 향해 이어졌다. 마치 두 사람이 오늘 만날 것을 미리 알고 있

것처럼 분위기는 두 사람 위주로 흘러가고 있었다.

 

 태주도 고향을 떠나고 처음 동창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어렵게 총무를 보는

친구가 태주의 연락처를 알아내고 오늘 꼭 나오라고 신신당부 한 덕분이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태주는 계속 이어지는 술잔을 쉴 새 없이 마셔야 했다.

낮에 오지 못한 벌주였다. 연지는 곁에 앉아 태주와 남자 동창생들이 주고받

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태주는 자신 만만한 태도로 친구들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태주는 당당하면

서도 결코 교만하지 않았다. 태주가 술을 마실 때 마다 연지의 가슴을 타들어

갔다. 행여 15년 만에 만난 연인(戀人)이 술에 항복하여 진솔한 대화 한마디

나누지 못할까 초조했다. 친구들은 술이 어량하게 오르고 기분이 우쭐해지

자 우르르 무대로 몰려나가더니 몸을 흔들어 댔다.

 

 그 와중에 태주와 연지도 친구들 틈에 끼여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 댔다.

낮부터 마신 술로 연지는 서서히 술이 오르면서 정신이 차차 흐려지고 있었

다. 남자 동창들이 요상한 몸짓으로 연지 앞에서 묘기를 부리며 몸을 흔들었

다. 연지는 차마 대응하기 부끄러워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비트음악이

멈추고 환상적인 조명과 함께 은은한 음악이 연주되었다. 친구들은 누가 권

하기도 전에 쌍쌍이 되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사춘기 소년, 소녀가 아닌

성숙한 암수의 성스러운 행위처럼 보였다.

 

 태주는 연지를 꼭 끌어안고 꿈속 같은 무대 위를 빙빙 돌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지난 15년간의 서운함을 보상하려는 듯 태주의 뜨거운 입김이 연지

를 서서히 애타게 했다. 블루스에 이어 비트음악이 귀전을 때렸다. 무대위

는 다시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마에 땀이 번질거리는 남자와 속옷이 촉촉이 젖어 브래이져가 훤히 드러

나도 모르고 춤에 열중하는 여자, 꽉끼는 흰색 반바지를 입어 조명을 하체로

모두 흡수해 수컷들의 음욕을 자극하는 여자 등 그야말로 한 여름밤의 무대

는 후끈 달아올랐다.

 

 또 블루스 음악이 연주되면서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여인들

손을 잡았다. 선영이의 이상한 손짓에 의해 무슨 일인지 동창들은 모두 테

이블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친구들은 아름다운 한 쌍의 남녀

에게 촛점이 맞춰졌다. 태주와 연지가 춤추는 것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동창은 마른 침을 삼키기도 하고 어떤 동창은

숨을 크게 쉬면서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 했다.

 

 맥주잔이 부딪히면서 갈증을 해소시키는 소리로 클럽 안은 시끄러웠

다. 어느 정도 취가 오르는지 남자들은 소파에 앉아 조는 측도 있고, 여

자들은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선영이 기회라고 판단하고 친구들에게

‘태주와 연지의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 주자’고 제안하였다.

 

 선영의 의견에 따라 친구들은 나이트클럽을 빠져 나갔다. 일행 몇몇은

찬성하였으나 술이 덜 취한 남자들은 불만을 토로 하였다. 선영의 강력한

권유로 일행들은 일단 나이트클럽 인근의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큰

노래방 홀 두개로 분산되어 사람들이 들어갔다. 노래방은 금방 열광의 도

가니로 변했다. 판매 금지된 술이 들어오고 도우미 한명씩 두 방에 배정

되었다.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태주와 연지는 오늘 15년 만에 만난거야. 둘은

예전에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이였어.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게 해

주려고 내가 무리수를 둔거야. 정말로 미안해. 오늘 노래방은 내가 쏠게.

이해해 주는 거지? 내가 조금 있다가 태주를 이곳으로 오라고 할테니까 너

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마.”  

 

 선영의 말을 듣고 뚱해있던 친구들은 금방 얼굴이 펴졌다. 총무에게 혹시

태주나 연지에게 전화가 오면 받지 말라고 하였다. 선영은 속으로 태주와

연지가 어떤 모습으로 옛정을 이어갈지 몹시 궁금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야?”

 무대에서 땀을 흘리고 테이블로 돌아온 태주와 연지는 깜작 놀랐다. 마치 도

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태주씨, 친구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네요. 어떻게 해요? 우리가 무대에 나

가서 춤을 추고 있는 사이에요.”

 

  연지는 어쩔 줄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일행들을 찾아보았지만 아무

도 보이지 않았다. 태주는 친구들이 자신과 연지를 놀려주기 위하여 몰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판단하고 연지와 앉아 있으면 누군가 다시 올

거라고 판단했다.

 

 “연지야, 우린 술이나 마시자. 우릴 놀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뭐.”
 “만일 친구들이 모두 집에 갔으면 어쩌죠?”
 “뭘 어째? 그럼 우린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거지.”


 태주는 주변에 자신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개운한 기분이었다. 그러

나 연지는 사막 한가운데 두 사람만 남겨진 것 같아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했다.


 “연지야, 미안해. 오랜 세월 소식도 없다가 도깨비처럼 나타난 나를 용서해

줘. 이제부터 그간의 사정에 대하여 변명을 할게.”

 태주는 빈 잔에 맥주를 가득 채운 뒤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친구들에게 벌주

로 마신 술도 적은량은 아니었다.

 

 연지도 술이 오르고 있는 터라 두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술을 더 마시게

되면 두 사람 모두 인사불성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연지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말자고 하였으나 태주는 아직 취하지 않았다며 잔을 들었다.

 

 “나, 나는 한시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어. 술 마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이 순간에도 난 너를 사랑하고 있어. 믿어줘.”
 ‘뭐라고? 이 순간에도 나를 사랑한다고?’

 연지는 거짓말처럼 술술 나오는 태주의 말에 강한 반발심이 일었다.


 “태주씨, 취했어요. 오늘은 술을 그만 마셔요.”
 “연지야, 나, 안 취했어. 그리고 나, 정말로 너를 사랑하고 있어.”

 태주의 눈이 반짝거렸다.

 

 태주 아버지의 주벽(酒癖)은 날로 더 심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셔

대는 남편을 어찌할 수 없게 되자 부부사이에 갈등은 점차 심화되어 갔다.

농사일로 잔뼈가 굵은 태주 아버지는 J시에서 할 일이 없었다. 태주 어머니는

J시에서 먼 친척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다. 태주는 비록

3류 대학교지만 나름 열심히 공부하였다.

 

 학교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어머니가 보내주는 용돈으로 겨우 공부를 할

있었다. 두서너 달에 한번 집에 들를 때 마다 연지에게서 온 편지가 태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태주는 연지의 편지에 답장을 주지 않았다. 태주는 연지

와 자신의 주변 환경을 비교해 보았다.

 

 매일 술에 절어 사는 아버지, 식당에서 일하는 늘 피로해 보이는 어머니,

지방대학에 다니는 자신의 위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태주는 연지를 만나

도 별로 흥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만일 연지와 만나면 자격지심만 커져

결국 슬픈 이별을 하고 말거라 판단하였다. 또한 부모의 잦은 부부 싸움

태주를 암담한 상태로 몰아갔다.

 

 비록 시골 아낙이었지만 태주의 어머니는 얼굴이 반반한 편이었다. 식당

에 일하러 갈 때는 예전에 하지 않던 짙은 화장에 값이 꽤 나가는 옷으로

치장하는 태주 어머니의 행동에 태주 아버지는 차차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

했다. 태주 아버의 주벽은 더욱 심해졌고, 아내에 대한 의심은 날로 심화

되어 결국 태주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하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태주는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고 말았다.

 

 태주는 가출한 어머니가 곧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반년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태주는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하기로 마음먹고 폐인이 되다 시피한 아버지와 고모가 살고있는 부산

으로 내려갔다. 태주는 펜 대신에 삽자루와 곡괭이를 잡아야 했다. 근로 능

력이 없는 아버지 대신 돈을 벌어와야 했다. 고모도 경제적 형편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공사판에서 태주는 연지가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

었다. 연지가 생각날 때마다 태주는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성공하여 사

랑하는 연지를 찾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꼭 마음 먹은대로 되는

것은 아닌듯 했다. 이듬해 태주 아버지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졸지

에 고아가 된 태주는 잠시 방황하다가 군에 자원(自願)했다. 군대를 무사

히 제대하고 고모의 권유로 휴학했던 대학에 복학하였다.

 

 주경야독하며 겨우 대학을 졸업한 태주는 지방의 이름없는 건설사에 직

장을 잡았다. 직장을 잡자마자 회사는 아파트 건설 바람을 타면서 바빠졌

고 태주는 전국의 아파트 건설현장을 누비며 자신만의 꿈을 키웠다. 어렵

고 외로울 때마다 태주는 연지를 생각했다. 태주는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연지의 행방을 알아 낼 수 있었다. 태주는 서울로 출장오는 날이면

연지가 다니는 회사 앞에서 서성거렸다.

 

 먼 발치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이라도 볼수 있는 날이면 태주는 너무

기뻐하였다. 어떤 날은 연지의 회사 앞에서 연지가 퇴근하는 모습을 보고

뒤따라 가보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먼 발치에서

연지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행복해 하였다. 당장 '연지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 연지 앞에 자신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드시 성공하

여 연지 앞에 나타나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

하게 연지가 너무나 보고 싶어 연지의 회사 앞에서 서성거리다 연지를

만나 봐야겠다고 용기를 내었다. 이틀전 연지가 결혼하였다. 태주는 연지

가 신혼여행 중이라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 했다. 여러 날을 울며 불며 연지

에게 원망을 퍼부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방황하는 조카를 보다 못한 고모는 태주에게 참한 아가씨와 결혼할 것

을 강력하게 권했다. 태주는 서너번 고모의 제안을 거절하다가 부산 출

신의 아가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비롯 결혼은 하였지만 태주의 마음

속에는 늘 연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태주의 아내는 말수가 적고 얌전하

여 태주가 쉬는 날이면 아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조차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태주는 슬하에 남매(男妹)를 두었다. 아파트 건설 경기 붐을 타고 태주

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날로 사세(社勢)가 확장되어 갔다. 일년이면 거

의 열달 이상을 전국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풍찬노숙을 할 정도였다. 자

신을 믿고 가정을 지켜주는 아내와 무탈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볼 때마

다 태는 마음이 든든했다.  그래도 태주의 마음에는 늘 연지가 함께하고

있었다.

 

 10년 세월동안 전국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익힌 다양한 건축 기술과 다양

한 거래관계 그리고 넓은 인맥을 형성한 태주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퇴사 후 자그마한 건설회사를 차렸다. 처음에는 무척 어려웠지만 성실함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태주의 회사는 서서히 안정권에 들어설 수 있었다.

 

 태주의 사업은 그런대로 잘 되가고 있었지만 집안은 엉망이었다. 늘 공사

판을 전전하며 다닌 결과였다. 순진했던 아내가 남의 말에 혹하여 태주

몰래 주식에 거액을 투자하였다가 깡통을 차게 되자 아내는 가출하고

말았다. 태주는 처가에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집으로 얼른 돌아와 달라는

뜻을 전했다. 두달 만에 집에 들어 온 태주의 아내는 이미 다른 여인이 되

어 있었다.

 

 그 일로 태주와 아내는 서서히 신뢰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남매

때문에 차마 이혼을 하지 못하는 상태지만 태주의 마음은 이미 아내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아내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마음대로 였다. 아내는 다시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한달이면 일주일 정도 외박하기 일쑤였고,

나무라는 태주의 말에는 콧방귀만 꾸었다. 두 아이들은 그런대로 말썽부

리지 않고 학업에 정진하여 흔들리는 태주의 마음을 잡아 주는 든든한 버

팀목이 되고 있었다.

 

 계속되는 아내의  외박과 도박에 지친 태주는 아내에게 합의이혼을 제의

하자 태주의 아내는 적반하장격으로 태주에게 태주의 재산 절반을 요구하

였다. 고민에 빠진 태주는 근 일년동안 이혼문제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던

중이었다. 태주가 이혼을 결심하면서 자꾸만 연지가 생각났다. 결혼을 하

였지만 태주는 하니도 연지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현재 이혼을 앞두고 연지를 찾는다면 양심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 속의 여인으로 남겨 두려고 마음먹었다. 지도

어엿한 가정을 꾸미고 한참 자식을 건사할 중요한 시기라고 판단태주는

연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만 홀로 있는 시간이면 연지가 보싶어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고등학교 동창생에게 반창회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열렬하게 사랑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십 수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 처럼 눈앞에 나타나면 이전의 원망과 눈물은 언제 그랬

냐는 듯 눈 녹듯 사라지기 때문이다. 태주의 변명을 모두 듣고난 연주는

솓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바보, 우리 회사 앞까지 왔으면서 왜 나를 찾지 않았어?"

 "미안해. 나는, 나는 네가 그리 빨리 결혼할 줄 몰랐어."


 태주의 눈가에도 촉촉한 물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잔에 술

을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있었다. 친구들이 나

이트클럽을 빠져 나간 지 두 시간이 다 되어 갈때 선영이 나타났다. 양볼이 빨

갛게 익은 선영은 자리에 앉더니 친구들이 모두 헤어졌다고 하였다.

 

 "아니, 친구들이 모두 집에 갔다고? 아직 열두시 밖에 안 되었는데."

 "태주야, 여기는 서울하고 달라. 밤 11시만 넘어도 한 밤중이야. 각자 마

누라와 남편들에게 쫒겨나지 않으려면 일찍 들어가야지. 그리고 나는 우리

둘째 언니네 집에서 자고갈거야. 연지하고 서울로 가려고 했는데, 마침 네

가 연지 곁에 있으니 잘되었네."


 "서, 선영아......"

 연지는 낙담한 얼굴로 선영이를 쳐다 보았다. 선영은 이미 언니네 집에서 자

고 갈 결심을 굳힌 듯했다.

 

 "그럼, 우리 둘만 남은셈이네. 그럼, 어쩐다? 술을 마셨서 차를 운전할

없으니. 집에는 가야겠고. 연지도 집이 서울이라고 하는데......"

 태주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차를 가져왔으니까 서울까지 대리운전하면 되잖아."

 "대리운전?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태주는 두 여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태주는 이왕 늦었으니 술이나 더 마시자며 시바스리갈 한병과 과일 안주

를 주문하였다. 선영은 연지가 상당히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

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연지를 옛 연인이던 태주와 오래 이야기 꽃을 피

우게 해 주고 싶었다. 선영은 남편 몰래 애인을 두고 가끔 외도를 즐기는 중

이라 도덕관념이 상당히 해이해진 상태였다.

 

 세 사람이 나이트클럽을 나와 또 다른 주점에 들러 술을 진탕마시고 나온

시간은 새벽 2시가 훨씬 넘어서 였다. 태주는 연지를 차에 태우고 대리기사

를 불렀다. D시에서 서울까지 대리운전은 꽤 많은 돈을 요구했지만 태주는

연지를 생각해 서울로 향했다. 두 사람은 차 뒷좌석에 앉았지만 별로 말이

없었다. 연지는 태주의 말을 곱씹으며 차창가로 스치는 광경을 물끄러미 내

다보았다. 

 

 승용차는 새벽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였다. 태주는 연지의 손을 꼭 잡고 있

었다. 태주의 온기가 연지에게 전해지면서 연지는 몽롱한 상태로 마치 꿈속

을 날아가는 듯 착각에 빠져있었다. 차는 2시간만에 서울 태주의 집 앞에

도착하였다. 태주가 내려서 계산을 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태주씨, 우리 드라이브해요. 나 아직 술이 안 깼어요. 술이 깨야 집에

거에요."

 연지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태주의 손을 잡았다.

 "나, 술이 아직 안 깼는데. 어쩌지?"

 "드라이브는 꼭 자가용으로 해야하나요?"

 연지가 톡 쏘듯 말하자 태주는 얼른 말 뜻을 알아 듣고 차에서 내려 택시를

잡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