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0. 10. 21. 22:06

 

 

 

 

 

 

 

 

 

              

 

 

 

 

 

 

 

 

 

                    하얀 나비(2)

 

 

 

 

                                                                                                                                                -  여강 최재효

 

 

 

                                            2

 

 

 선영이의 강력한 권유에 연지는 할 수 없이 선영의 손에 이끌려 반창회에

나가게 되었다. 강렬한 태양이 살갗을 뚫고 들어와서 함부로 에 나돌아

니기 힘든 한여름 오후였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매미들은 무슨 일이

는지 알 수는 없지만 피를 토하고 있었다.

 

 휴가철이라 오후의 D시는 텅 빈듯했다. 서울로 올라간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동창들은 연주의 친정이 있는 D시나 주변 소도시에 주로 거주하

었다. 공교롭게도 연지와 선영은 서울에 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직장인이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전화로 안부는 수시로

주고받았다. 선영이의 일방적인 전화로 시작하여 선영이의 일방적인 종결

늘 전화 통화는 이루어졌다. 선영이 남편은 건축토목기사로 국내,외 큰

공사장을 찾아다니는 철새 같았다.

 

 두 아이들 모두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선영은 담장 넘어 세상에 은밀히

선을 주고 있었다.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선영과 말보다 정중동(靜中動)

행태로 실천이 앞서는 연지는 묘한 게도 궁합이 잘 맞았다. 요즘에 새로 

애인을 둔 선영은 시간만 나면 연지에게 전화를 걸어 애인과 데이트한 내용

을 자랑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전학을 간 연지는 반창회에 갈 때부터 가슴이 두근

거렸다. 차마 선영이에게 말을 하지 못했지만 아련한 기대감이 솔솔 피어올

랐기 때문이었다. 연지는 어느덧 15년이라는 세월이 무상하게 흐른 사실을

깨닫고 새삼 인간의 짧은 수명을 생각하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선 천년 정도 살고 싶었다. 오랜 세월 살다보면 미움, 원망, 가슴

에 남은 상처 등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물고 새롭고 보기 좋은 일들이 일어

날 것 같았다. 30십대 중반이란 나이는 남녀 간에 경계를 하기에 충분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으로 동문수학한 벗들을 만나자 연지도 처음 서먹

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자신도 10대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남자 동

들의 강권에 못 이겨 텁텁한 탁주를 마시고 옛 이야기에 풍덩 빠져 즐거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서운함을 지울 수 없었다. 

 

 연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반창회에 참석한

30 여명의 동창생들은 묘하게도 남.녀 반반이었다. 남자들은 가든에 설치

족구 경기장에서 게임에 취해 있었고 여자 동창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수다

를 떠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족구 게임이 끝나고 회식자리에서 남자 동창들은 술에 얼큰하게 취하자

연지에게 슬슬 접근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연지가 소녀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며 연지의 건강관리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지는 같은 나이 또래 중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통통하고 뽀얀 피부가 어쩜 남자 동창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 동창들은 남자들이 모두 연지에게 아첨하자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지 웃으면서도 간간이 연지에게 눈을 흘기기도 하였다.

 

 그런 여자 동창들의 태도가 연지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30대 중반이면

젊음이 이미 한창 절정에 달했을 때 몸매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줌마

티가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연지는 아가씨처럼 보였다.


 ‘어찌된 일일까?' 연지는 점차 우울해지는 자신을 감지할 수 있었다. 동

생들이 건배를 하자고 하여도 연지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지와 동창생들이 가든에서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나이트클럽으로

자리를 옮기자 여자들은 더욱 신이 난 듯 했다.

 

 여자 동창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 동창들을 무대로 끌어내더니

풍만한 육덕을 선보이며 다양한 춤을 선보이기도 했다. 연지도 서너 차례

무대에 나가 어울렸지만 속이 편치 않았다.


 “너, 그애 때문에 그러지?”

 두 뺨이 잘 익은 능금처럼 발그레해진 선영이 소파 한쪽에 앉아 맥주를 홀

짝이는 연지에게 속삭였다.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연지의 양볼이 금방 

뜨거워졌다.


 “아, 아냐. 낮에 먹은 불고기가 소화가 안돼서 그래.”

 연지는 엉뚱한 답변을 하며 맥주 잔을 만지작 거렸다.


 “계집애, 조금만 기다려봐. 총무가 그러는데 그 애가 낮에는 바빠서 참석

할 수 없었대. 지금 서울서 내려오는 중이래.“

 선영은 연지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서울? 아니 태주씨가 서울에 살고 있었단 말이야? 세상에,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었으면서 모르고 있었다니. 참으로 내가 무심하였구나.’

 연주는 선영이 말에 가슴이 콩닥 거리면서 금방 기분이 우쭐해졌다.

 

 선영이는 그런 연지에게 자꾸만 술을 권했다. 평소 독한 브랜디를 즐겨

마시던 연지에게 맥주 두 세병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지는 소풍가기

전날 밤 흥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소녀처럼 기분이 붕 뜬 상태였다.


 “야, 이게 누구야. 그 잘나간다는 친구 태주가 아닌가? 잘네. 정말 잘

왔어. 다들 자네가 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네.”

 태주였다. 밤 10시가 약간 넘은 시간 태주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태, 태주씨......’

 15년 만에 대하는 연인, 태주였다. 연지의 눈에 금방 이슬이 맺혔다. 속이

울렁거리는지 연지는 배를 움켜 쥐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선영이 연지의 뒤를 따라 갔다.


 “연지야, 문 열어. 너, 토하니?”

 화장실로 들어간 연지는 문을 열지 았다.


 “자, 잠깐만 있다 갈게. 자리에 가있어.”
 “계집애. 너 태주가 와서 좋아서 그러는 거지?”


 “아냐. 속이 울렁거려서 그래. 금방 들어갈 테니 가있어.”
 “알았어. 빨리 들어와야 해. 알았지?”
 “......”

 선영이 나이트클럽 안으로 돌아갔지만 연지는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

고 앉아 있었다.


 사이키 조명 아래 남자 동창생들과 악수하는 장면을 어렴풋하게 비친 태주

의 모습은 옛날의 태주가 아니었다. 연지는 여고시절 연인었던 태주의 선

량한 모습을 그려 보았다.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연지에게는 가슴을 울렁

이게 했던 남자였다.

 

 그런데 15년이 흘러간 뒤 얼듯 본 태주의 모습은 옛 모습이 아니었다. 단정

한 신사복에 밝은 계열의 넥타이를 맨 태주는 대기업 오너 처럼 점잖고 듬직

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보고 싶었던 남자잖아. 내가 한때 죽자 사자

좋아했던 연이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을 조금만 마실걸. 소주, 맥주, 막걸

리를 친구들이 주는 대로 받아 마셨더니 정신을 못 차리겠어. 천정이 빙빙

도는 것 같고. 어쩌지, 술 취한 내 모습을 보면 태주씨가 실망할 텐데......’

 

 연지는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고 억지로 내용물들을 토해 냈다. 시큼한 토사

물들이 왈칵 쏟아졌다. 시원한 느낌이 들자 정신도 약간 맑아진 듯 했다. 핸

드백에서 콤팩트를 꺼냈다. 두 뺨이 빨갛게 익은 원숙한 여인이 대형 거울

안에서 요염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는 여인같아 보였다.


 ‘내가, 그 동안 아주 잊은 줄 알았던 태주씨를 가슴에 묻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야. 난 분명 태주씨를 잊었어.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태주씨가 나타나

다니. 아니지 갑자기가 아니지. 반창회에 올 때부터 나는 은연중 태주씨와 상

봉을 기대했었지. 그래, 만나보는 거야. 당당하게 나가서 태주씨, 내 옛 남자

태주씨를 봐야해.’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옛 남자 태주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화장실로

도망가 듯 달려 온 연지는 배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가슴이 떨

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라인과 아이샤도우 그리고

립스틱을 고치고 만족한 미소를 지어 보았다.

 

 연지는 아침부터 들뜬 기분으로 혹시나 반창회에 갔다가 태주를 만나게 되

면 어쩌나하는 하는 불안과 기대감에 한껏 멋을 냈다. 하늘거리는 보랏빛 물

실크 투피스가 약간 움직여도 마치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틀 전 유명 헤어샵에서 새로한 물결 웨이브 파머와 연지의 옷차림이 묘하

게 잘 어울렸다. 얼굴이 작고 동안(童顔)인 덕분에 마치 20대 아가씨처럼 보

였다.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 듯 연지는 씩 웃고 화장실을 나왔다. 조금전 일

행들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연지는 깜짝 놀랐다.

 

 연지와 태주 두 사람만의 은밀한 상봉을 위한 듯 동창생들은 모두 플로어에

나가 남녀 짝을 지어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직선상에

고정되었을 때 연주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석고상이 된 듯

서있어야 했다.


 “연지야, 나야. 나 태주야.”
 “......”

 연지는 대답 대신 눈가에 촉촉한 액체가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군

대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면회를 가려고 했지만 태주의 부모가 주소를 알려

주지 않아 오랜 시간 가슴앓이를 했던, 바로 그 애증의 사내가 꿈결처럼 연

지의 앞에 있었다.

 

 연지는 자신도 예상치 못한 눈물에 당황하고 있었다. 얼른 손수건을 꺼내

녹아서 흘러내리는 아이라인을 닦아야 했지만 연지는 체면에 걸린 사람처

럼 부동의 자세로 서서 꼼짝할 수 없었다.


 “바보, 울긴......”
 “......”

 연지의 두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태주는 손수건을 꺼내 말이 닦아

주었다. 눈물을 닦는 태주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연지는 자신이 왜

태주 앞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화장실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태주는 장승

처럼 멍하니 서있는 연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았다. 태주의 손닿을

때 연지는 백만 볼트 전기에 감전된 듯 전율하면서 정신이 몽해지는 것

을 감지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멀리 무대에서 강렬한 비트 음악과 사이키 조명에 도취된 듯 몸

을 흔들어 대며 무아지경에 빠져 든 듯 보였다. 도심의 한여름 밤의 열기가

나이트 클럽 안에 있는 남여의 육신을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에 들게 한 것

처럼 식을 줄 모르고 점점 더 높아가고 있었다. 연지는 반창회에서 만약 태

주를 만나게 되면 어떤 이야기 부터 할까 고민하였다.


 제일 먼저 왜 군대 가면서 자신에게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는지, 또 15년이

흐르도록 어째서 전화나 편지 한통 없었는지, 정말로 자신을 사랑했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 연

지는 마음속으로 태주에게 던질 질문들을 정리해 놓았다.

 

 하지만 막상 태주가 앞에 나타나자 연지의 입은 때를 잘못 판단하여 빙판

에 나온 개구리처럼 얼어붙었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아무리 속으로 끙끙 거리며 정리해 놓은 질문들을 꺼내보려고

하였지만 허사였다.


 연지는 울렁이는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맥주를 빈 잔에 콸콸 아 붇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입 안으로 쑤셔 넣는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았다. 태주는 갑자기 지가 연거푸 자작(自酌)

으로 술을 마시자 얼른 잔을 빼앗았다.

 

 만약 연지의 손에 술잔이 들려 있으면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술을 입 안으

로 쑤셔 넣을 것 같아 불안했다. 연지는 태주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며 무

언(無言)의 항의을 하고 있었다.


 ‘바보, 어디 갔다가 이제야 바람처럼 나타난 거야?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

지 알기나 하니? 수많은 밤을 네가 미워서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는 거야? 바보야, 너는 정말로 바보야. 한 여인의 마음을 훔쳐가 버리고

15년이 넘도록 아무런 말도 없이 돌려주지도 않다니.

 

 난, 난 이미 너를 내 심연(心淵)에서 지운지 오래야. 그런데, 그런데 이게

어찌된 거니? 왜 내가 15년 만에 나타난 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거니? 지금 이 순간 내가 너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어.‘ 

  
 “연지야, 미안해. 내가 너에게 죽을죄를 지었어. 용서해줘.”
 “태-주-씨, 아니, 아니에요. 내가 죄인인걸요. 나를 용서해 주세요.”
 “......”

 태주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동창들은 금속성 음악과 황홀한 불빛 그리고 아름다운 무희(舞姬)들의 미

끈한 육덕(肉德)에 홀려 무아지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서도 선영은 연지와 태주가 어찌하고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우리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해요. 오늘 밤은 고등학교 3학년생이 되는 거

예요. 나는 지난 십오 년 동안 잠시 악몽을 꾼 거예요. 지금 막 기억도 하기

싫은 그 꿈에서 깨어난 거예요. 태주씨도 나와 같은 꿈을 꾼 게 맞아요. 동

의하죠? 우린 지나간 악몽을 돌이켜 보지 않기예요.“

 

 연지는 속내와 다르게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의 입이 얄미웠다. 과도(果刀)가

옆에 있으면 입을 찌르고 싶었다. 연지의 잔에 술 대신 차가운 물이 채워

고 태주와 잔을 부딪쳤을 때 선영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어머나, 너희들 시방 뭐하는 시츄에이션이니? 견우와 직녀가 15년 만에

눈물의 상봉이라도 하고 있는 거니? 태주야, 뭐하니? 어서 연지 를 데리고

나가서 춤을 추지 않고?”
 “응? 그, 그래도 될까?”


 “어머나? 동창생 끼리 내외하니? 빨리 나가 곧 블루스 음악이 나올 거야.”

 선영은 강제로 태주와 연지를 무대로 내보냈다. 연지의 하얀 손을 꼭 잡고 나

가는 태주의 뒷모습이 마치 개선장군 처럼 보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