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처(최종회)
눈부처(최종회)
- 여강 최재효
선주와 경민은 졸업을 하기도 전에 취직을 하여 친구들과 같은과 동료들
에게 부러움을 샀다. 두 사람은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이삼일 간격으
로 만나 정을 쌓아갔다. 자주 만나 정을 쌓아가기는 하여도 선주는 선을 넘
는 모험을 경계하였다. 경민은 그런 선주를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경민도 선주가 완전히 자기 여자가 되기 전까지 선주의 뜻을 이해하고 존
중해 주었다.
고향을 먼 곳에 둔 선주는 졸업을 하고 사회인이 되면서 더욱 쓸쓸함을
느끼며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 졌다. 경민은 선주에게 정성을 들이며 천천
히 결혼의사를 비추었다. 경민은 자주 선주를 집으로 초대하여 부모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선주는 딸이 없는 경민 부
모에게 귀여움을 독차지 할 정도였다.
선주가 경민네 집을 방문하는 날이면 경민 아버지는 회사에서 일찍 퇴근
하여 집안을 청소하는 등 미래의 며느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경민 어머니는 선주가 좋아하는 음식 장만을 위하여 시장을 보며 아들이
참한 며느릿감을 얻었다며 즐거워하였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
주말이었다. 선주는 경민네 집을 방문하였다.
“아버님, 어머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래, 오느라 고생하였다. 선주가 우리 집에 오니까 집안이 다 환하
구나. 이왕 왔으니 맛있는 것도 많이 들고 재미있게 놀다 가거라.”
경민 아버지는 깔끔하고 예쁜 선주를 보고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어서 두 사람이 가정을 꾸몄으면 했다.
“아이, 어머님도, 아침부터 기다리시다니요? 제가 몸 둘바를 모르겠어요.” 집에 오느냐고 열 번도 더 물어봤어요.”
“아이고, 선주 아가씨 왔어요? 어서 오세요. 아침부터 기다렸어요.”
“아니에요. 우리 집 양반은 어제부터 선주 아가씨가 오늘 몇 시에 우리
“어머님, 이거 변변치 않지만 받아 주세요.”
“아이고, 그냥오지. 뭘 이런 걸 다 사가지고오누 그래? 다음에는 그냥와요.
선주씨 가 우리 집에 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분이 좋아요. 그러니 다음
에는 그냥와요. 알았죠?”
“어머님, 말씀 놓으셔요.”
선주는 경민 부모님으로부터 공주 대접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경민은 부모님이 선주를 마치 친 딸처럼 대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자연히 경민 부모님은 영민이에게 언제 결혼을 할 예정이냐고 자주 물었고,
경민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늦어도 내면 봄을 예정하고 있다고 하
였다.
“선주, 나 선주에게 청혼하고 싶어.”
“......”
“나의 청혼을 받아줘. 오래 생각하였어. 이젠 우리도 어엿한 직장이 있고 사
회인이 되었잖아. 결혼 적령기도 되었고. 나의 청혼을 받아주기 바래.”
“경민씨, 잠시 시간을 좀 주세요.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말씀을 드려야
하고 마음의 정리도 차분하게 한 뒤에 답변을 드릴게요.”
“선주, 고마워.”
경민은 선주를 미래의 반려자로 이미 결정하고 차근차근 결혼 준비를 하였다.
선주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경민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미래의 동반
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하자 선주의 아버지는 경민이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
다보더니 별로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선주의 어머니는 잘 생긴 경민이의 사진
을 보고 또 보며 딸이 사윗감 하나는 잘 골랐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아버지, 이 사람이 마음에 안 드세요? 다음에 이 사람을 집에 데리고 와 볼
까요? 사진하고 실물은 전혀 다를 수도 있거든요.”
선주는 경민을 별로 마음에 없어하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얘야, 이 사람하고 얼마나 사귀었니?”
선주 아버지는 다시 사진을 보며 딸에게 물었다.
“이년 정도요.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어요.”
“이 청년하고 어느 선까지 갔는지 모르지만, 바람기가 있을 듯 하구나. 남자
는 그저 수더분하게 생겼어도 한눈팔지 않고 제 여자 하나 잘 위해주면 되는데,
이 총각은 너무 잘 생겨 늘 여인들의 시선을 받아 네가 이 총각하고 결혼하면
마음고생이 심할 것 같아서 그래.”
“아버지, 안 그래요. 이 남자 저만 좋아하고, 제가 하는 말이나 요구는 무엇
이든지 다 들어주는 착한 남자에요. 아버지 그럼, 다음 달에 이 남자 집에 데리
고 와 볼게요. 그때 아버지가 자세히 살펴보세요. 그럼.”
선주는 낙엽이 지는 계절에 경민을 집에 데리고 왔다. 선주 어머니는 훤칠하
게 생긴 경민을 보고 한 눈에 반해 입이 양 귀에 걸릴 정도 였다. 선주 아버지는
경민을 천천히 뜯어보면서 여러 가지를 물었고, 경민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
하였다.
선주 아버지는 그런 경민이 차차 마음에 들면서 사진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
자신이 자칫 딸에게 큰 상처를 줄 뻔 하였다고 한발 물러났다. 경민이 선주 집
에 다녀가고 양가(兩家) 부모님이 만나 인사를 한 뒤, 경민과 선주 부모님들은
혼인 날짜를 잡고 결혼준비를 서둘렀다.
꽃피는 봄날 선주는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살림도 시댁에서 가까
운 곳에 마련하였다. 결혼식 날 Y읍에서 하객을 가득 태운 관광버스 2대가 아
침 일찍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선주 부모님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곳
에서 6년간 혼자 생활하며 터전을 잡고 멋진 사윗감을 안겨준 딸을 대견스
러워 했다.
경민 부모님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 놀기만 하던 아들이 간신히 대학에 들어
가 졸업도 하기 전에 직장을 잡고 예쁜 며느리를 집안에 들이자 아들이 자랑
스러웠다.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선주와 경민은 괌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선주, 사랑해.”
“경민씨, 고마워요. 부족한 저를 신부로 맞이해주셔서요. 앞으로 잘 할게요.
사랑해요. 오래 오래 경민씨를 곁에 둘거에요.”
“고마워. 우리가 어른들이 말하는 백년해로를 해야지. 나도 선주에게 정성을
다할게. 우리 오늘 첫날밤이니 한잔 해야지.”
다. 경민이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곧 웨이터가 와인과 간단한 안주를 객실로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들어 두 사람만의 행복한 시간을 가졌
가져왔다.
“선주, 우리의 첫날밤과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을 위하여 잔을 부딪쳐야지.”
“네에, 그래요.”
두 사람은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며 도란도란 앞으로의 결혼생활을 설계하
였다.
술을 좋아하는 경민이 와인 한 병을 더 주문하였다. 선주도 결혼 첫날밤이라
는 분위기에 휩쓸려 와인은 서너 잔 마셨다. 며칠 전부터 긴장한 탓인지 금방
취기가 올랐다. 밤이 깊어질수록 경민의 두 눈은 이상하게 빛났다. 곧 두 사람
의 사랑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선주, 사랑해.”
“저도요.”
경민의 뜨거운 몸짓이 선주를 금방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지게 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 박사로 통했던 경민의 몸짓은 능수능란했다. 경민의 몸
짓의 숫총각의 순수한 그것이 아니었다.
첫날부터 다양한 체위로 선주를 당황하게 하였다. 그러나 선주는 그런 경민
의 행위를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응해 주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경민이
단발음을 토하고 객실은 정적에 빠져 들었다.
선주는 이내 코를 골며 잠든 경민의 품을 빠져나와 마시다 남은 와인을 한잔
채워 창가에 기대어 섰다. 머리가 복잡했다. 창문을 살짝 열자 시원한 바닷바람
이 밀려들었다. 남국의 밤에는 이상하게 별들이 너무 영롱하면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선주는 동수와 처음 만나던 여름밤을 떠올렸다.
동수가 자신이 결혼한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다. 결혼 첫날밤
동수가 보고 싶었다. 자신의 처녀성을 가져간 동수가 몹시도 그리웠다. 이제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된 입장에서 옛 연인을 생각한다는 게 얼마나 예의 없는 일
인지 잘 알면서도 선주는 동수의 얼굴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코를 골고 있는 경민에게 미안해했다. 순결한 처녀로서 결혼 첫날밤
에 고이 간직해 온 처녀성을 경민에게 선물하지 못한 죄스러움이 선주를 가
슴 아프게 했다. 와인 한잔 을 더 채워 우울한 첫날밤의 불편한 심사를 달랬
다.
‘동수씨, 나 결혼 했어요. 당신을 나의 영원한 반려자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착각이었나봐요. 어쩌죠?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었는데, 이제 무의미하게
되었으니. 당신도 나 말고 착하고 순순한 여인을 만나 부디 좋은 가정 꾸려
가시길 빌게요. 오늘밤 나는 이경민이라는 남자의 여자가 되었답니다. 이제
그대에 대한 추억도 내 뇌리에서 영원히 지워야겠어요. 미안해요.’
선주가 늦은 밤 홀로 명상에 잠겼다 잠이 든 시간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잠을 자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을 때 경민이 선주의 몸 위로 올라
와 있었다. 그런데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신혼 첫날밤이어서 경민은 용
솟음치는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선주는 미소를 지으며 경민을 받아들였다. 길고 달콤한 입맞춤이 이어 경민
의 뜨거운 몸짓이 길에 이어졌다. 경민의 몸놀림은 너무 유연하고 능숙하여
선주는 경민의 전력(前歷)이 의심스러웠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선주와 이경민은 깨가 쏟아지는 신혼 재미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어머니는 이틀에 한번 꼴로 신혼집에 찾아와 반찬
이며, 간식 등을 사다 주었다. 시어머니는 선주가 너무 고마워 선주를 보면
손을 꼭 잡고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선주는 그런 시어머니가 마치 고향에 계신 친정어머니 같다고 느꼈다. 어떤
날은 시아버지가 갈비를 사가지고 찾아와 며느리를 보고 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선주는 임신을 하지 못했다. 결혼 5년이 넘어가도 임신 소식
이 없자 선주는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선주보다 친정 부모님이 더 애가 탔다.
시부모도 차마 선주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손자를 무척이나 기대하는 눈치
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선주는 임신을 하지 못하였다. 경민은 선주와
함께 부부 클리닉을 찾았다. 여러 번의 검진이 이루어 졌지만 경민에게는 이상
이 없었다. 차차 경민은 선주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경민은 선주 모르게 산
부인과 의사에게 선주의 진료 내용에 대하여 세세한 내용을 물어보았다. 의사
는 알듯 모를 듯 영민에게 선주의 불임 원인에 대하여 말하기는 했지만 경민은
도무지 뭔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내에게 내가 첫 남자가 아닌 게 틀림없어. 난, 난 신혼 첫날밤의 그 충격
을 죽어도 잊을 수 없어. 아내의 처녀성은 이미 어떤 놈이 훔쳐갔어. 난, 난
껍데기에 불과한 아내의 성을 차지하고 희희낙락하였고. 첫날밤 아내의 반
응은 전혀 처녀의 반응이 아니었어. 그래도 사랑 하나로 버텨내려고 하였으
나생각할 수록 화가나.’
경민의 귀가가 차차 늦어지기 시작하더니 새벽에 들어오는 날이 잦았다.
선주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니까 마음 붙일 데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고
남편의 행동을 이해해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점차 도가 지나쳐 외박을 하고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선주는 남편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참았지만, 경민은 별의별 핑계를 대고
한 달이면 서너 차례 외박을 하였다. 경민의 와이셔츠에서 립스틱 자국이 자
주 찍혀 있었고, 야릇한 향내가 났다.
두 사람의 사이가 냉랭하게 변해가자 시어머니가 자주 찾아와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하였다.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훈계를 하고 돌아가면
일주일은 별일 없이 넘어갔다. 그런 어느 날, 경민은 대취하여 새벽에 들어
와 잠자는 선주를 깨웠다.
“우리, 우리 이제 이혼해.”
“여보, 경민씨,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가 아니야. 나 몇 년을 두고 고민하였어. 우리 그만 헤어지자고. 이
집을 당신에게 위자료로 줄 테니까. 이제 이쯤에서 서로의 길을 가자고.”
“여보......”
“솔직하게 말해줘. 당신 누구에게 처녀성을 바쳤어?”
“여보......”
“난, 우리가 결혼한 첫날밤에 당신이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 도대체
겨울 공주 같던 당신의 처녀성을 어느 놈이 먼저 훔쳐갔는냐고?”
“......”
“말을 못하는 거 보니, 밝히고 싶지 않는 거로군. 그리고 나에게 처녀인양 행
동한 당신이 가증스러워. 난, 당신을 안을 때 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죽이
고 싶었어. 우리 더 상처 입기 전에 이쯤에서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좋겠어.”
선주는 경민의 느닷없는 이혼 이야기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회사에 출근
하여 점심 식사를 한 후에 상사에게 몸이 아프다고 조퇴하고 바로 부부 클리
닉으로 자주 찾았던 병원을 찾았다. 자신을 진료했던 의사를 만나보기 위해서
였다. 선주의 불임에 대하여 의사는 말을 극도로 아꼈다.
“여성의 불임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난자의
생성이나 배란에 문제가 있는 경우이며, 두 번째는 정자를 받아들여 수정하
는데 문제가 있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은 수정된 난자의 착상에 문제가 있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제 소견으로는 선주씨는 두 번째에 해당됩니다.”
“두 번째라면?”
선주는 의사의 입에서 명확한 진단이 나오길 기대하였다. 의사는 잠시 뜸
을 들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성숙한 여성의 난소에서 배출되어진 난자는 보통 나팔관으로 빨려 들어
가며, 대개는 이곳에서 정자를 만나 수정됩니다. 그러나 골반 염증성 질환과
선천적인 원인 등에 의해 난관이 유착된 경우나 혹이 생겨 통로가 폐쇄된
경우에는 난자가 난관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자와 만나지 못하
는 것이지요.
또한 여성의 자궁 경부에 문제가 발생된 경우도 수정에 방해가 됩니다.
정상적인 성숙한 여성의 자궁 경부에서 질을 보호하고 정자의 원활한 운동
을 돕기 위해 점액질이 분비됩니다. 그런데 이 점액의 농도가 너무 진하거
나 충분하지 않은 경우 정자의 활동을 방해하지요. 그리고 자궁 경부가 폐쇄
되어 정자가 유입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 선천적으로 질이 결여되거나 폐쇄 된 경우나 성교 시의 질의 경련
또는 질의 염증 등에 의해 정자가 자궁에 도착하는 데 방해를 받게 됩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선주씨의 경우는 자궁 경부가 거의 폐쇄된
것처럼 지나치게 협소합니다.
어려서 충격을 받았다거나 어떤 행위로 인하여 큰 상처를 입어 그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임신할 수 있는 방법은 수술 방법을 이용하거나
인공 수정을 시도합니다.“
병원을 나온 선주는 충격을 받았다.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로 다리가 휘청
댔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며 행인들이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선주는 번화가 한복판에 서서 주점을 찾아보았다. 2층 건물에 예쁜 카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올라왔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여기여. 양주 위스키 한 병하고 안주 적당할 걸로 좀 주세요. 켄트도 한 갑
주시고요.”
“남자 종업원은 불안한 듯 멍한 상태의 선주를 흘겨보았다.”
남자 종업원이 밸런타인 21년산 한 병과 안주를 가져왔다. 선주는 밸런타인
을 스트레이트로 연거푸 석잔을 입안에 털어 넣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맞아. 내가 불임이 된 것은 그날 밤 윤간을 당했기 때문이야. 내가 두 번째
로 동수씨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 찾아갔을 때 학사주점에서 동수씨가 어
떤 여학생하고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어딘지 모를 곳에서 폭음
(暴飮)을 하고 어떤 남자들에게 강간당했던 그 원인 때문에 내가 임신을 할
수 없게 된 거야. 그날 이후로 고모에게 말도 못하고 나 혼자서 산부인과 치
료도 받지 못하고 한 달 이상을 하혈(下血) 하였어.
아, 경민씨가 내가 처녀성을 잃은 것을 첫날밤에 알았고, 임신도 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 알았다면 난, 난, 무엇인가? 난, 경민씨에게 큰 짐이 되었
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으니 경민씨 말대로 내가 조용히 떠나는 게
현명한 처사겠지.
지난 7년간 말도 못하고 살아 온 세월이 경민씨에게는 악몽 같았을 거야.
내가 욕심이 많은 년이지. 나쁜 년이기도 하고. 순결한 처녀인 척하고 결혼
한 내가 못된 년이야. 못된 년 이라고......'
경민이 카페 종업원의 연락을 받고 선주가 있는 카페에 왔을 때 선주는
인사불성으로 대취한 상태였다. 선주는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경민과 이혼
하기로 합의 하였다. 경민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위자료로 선주에게 주었다.
합의 이혼한 선주는 다니던 회사도 사직서를 내고 서너 달을 두문불출했다.
뒤 늦게 딸의 이혼 소식을 듣고 Y읍에서 선주의 부모가 달려왔다. 선주 아
버지는 딸의 이혼 소식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협심증과 고혈압으로 고생
하던 선주 아버지는 곧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버지, 아버지, 이 못난 딸을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를 선산에 모신 뒤 선주는 고향 집에서 역시 두문불출하면서 지난
세월을 곱씹어 보았다. 이따금 영태와 늦은 밤까지 포장마차에 앉아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선주는 퇴직금과 아파트 정리한 돈으로 Y읍내에 학원을 차렸다. 그리고
7년을 고향에 묻혀 정신없이 아이들 가리키는데 열정을 쏟기도 하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다. 고향에서 재혼도 하지않고 세월을 보내고 있는
선주를 안타깝게 여기던 고모가 자주 Y읍에 내려와 선주에게 재혼할 것을
넌지시 권하기도 하였다.
선주도 결혼에 실패해 어머니 곁에서 살고 있는 것이 부담이 되긴 했지만
선뜻 재혼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과
주변 일가친척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점점 부담이 되었다.
“선주야, 한창 나이에 이거 뭐하는 거니? 내가 다니는 성당에 아주 참한 남
자가 있어, 그 남자도 한번 이혼한 경험이 있는데 아주 착하고 성실해. 혼자서
시장 통에서 여성속옷 매장을 운영하는 데 내가 보기에는 너하고 모든 면에서
잘 맞을 거 같아. 한번 만나보려무나. 선주야, 꽃 같은 네가 이렇게 혼자 허무
하게 세월을 보내는 게 이 고모가 보기에는 너무 안타까워서 구래. 꼭 한번만
만나봐. 이 고모의 부탁을 한번만 들어주렴.”
고모의 간절한 부탁에 선주는 선을 보았다. 남자는 중키에 좀 뚱뚱한 편이
기는 하나 성실하고 마음씨가 고와 보였다. 첫 선을 보고 남자 측에서 다시
한 번 더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선주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자를 만나러 갔다.
남자는 선주와 선주 어머니를 보자 넙죽 절을 올리고 반가운 표정으로 어린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저는 선주씨가 마음에 듭니다. 저는 5년 전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습
니다.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살다보니 마음이 편하면서도 한 구석에 늘 허전합
니다. 제가 선주씨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오로지 선주씨를 위하여 살겠습
니다. 어머님, 선주씨와 결혼하게 허락 해 주십시오. 윤씨 집안에 사위가 되면
잘 하겠습니다.”
“......”
“어머님, 선주씨......”
“알았네. 우리 진지하게 생각해보자고.”
선주 어머니는 남자가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어머님, 선주씨, 저는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이
편한 분이 있다면 그 상처를 하나하나 지우며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습니다. 선
주씨가 공부를 하시고 싶다면 공부를 하시고, 저를 도와 영업을 해보시겠다면
영업을 하셔도 좋고, 봉사활동을 하시고 싶다면 하셔도 됩니다.”
모녀는 비록 외모는 볼품없지만 마음 하나 착하고 성실하며 자신을 아껴주는
남자라면 다시 한 번 기대를 걸고 싶었다. 남자가 여섯 살 많지만 그리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다. 선주의 어머니는 웬만한 남자가 나타나면 얼른 선주를 재
혼시키고 싶어 했다.
“우리 계약 동거할래요?”
“네에? 그게 뭐죠?”
남자는 계약동거란 말에 놀라는 듯 했다.
“선주야, 그게 무슨 소리니? 어미 앞에서 못하는 소라가 없구나.”
“계약동거란 혼인 전의 남녀가 계약을 통해 서로 합의하여 주거 및 생활을 공유
하는 것을 말해요. 법적인 의무를 지지 않는 대신 권리도 가지지 못하지요. 혼전
동거의 한 형태로써 상호간에 지켜야할 사항을 미리 계약서나 말로서 합의하지
요. 이것이 계약동거의 가장 큰 특징이에요. 요즘처럼 결혼관이 혼란한 때 일정기
간 살아보고 마음에 들면 정식으로 혼인하는 거예요.”
선주는 고향에 학원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선주의 제안대로 남자는 선주
와 1년을 동거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동수가 선주가
운영하는 여성 속옷의류 매장에 우산을 사러 들어왔다.
선주는 남자와 동침(同寢)은 하였지만 합법적인 부부처럼 의무감은 느끼지 못했
다. 남자는 선주의 출. 퇴근 및 외출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았다. 간섭하지 않는 것
이 한 지붕에서 살을 맞대고 살고 있는 선주에게 오히려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선주, 그리된 거로군. 한때의 실수가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바꿔놓다니. 우리
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는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미래에 우리의 족쇄가 되
거나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당초 그리려고 마음먹었던 그림을 영 딴판으로 그리
게 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지. 나는 타인에게 일어 날 법한 그런 일들이 우리들
에게 일어났었다는 사실이 가슴이 아프고 서러워.”
동수는 위스키 잔을 비웠다. 졸린 듯 바텐더 아가씨가 눈을 비비고 동수에게
새로 위스키 콕 한잔을 내 밀었다. 바에는 한 사람 한 사람 자리를 뜨면서 금방
한산해 졌다. 새벽 3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동수는 목이 메어왔다. 자신으로
인하여 한 여자의 인생이 가시밭길 속에서 고난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줄 꿈에
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저 한때의 가슴 아픈 추억의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선
주가 너무나 안 돼 보였다.
“동수씨, 너무 가슴 아파 하지 말아요.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여름밤은 정말이지
너무나 멋진 밤이었어요. 지난 세월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해요.”
“선주, 미안해. 내가 그때 병원에 입원하지만 않았어도. 선주와 새벽까지 앉아서
이렇게 가슴아파할 일이 없었을 텐데......”
“아니에요. 이 모든 것이 나의 운명인걸요. 권동수라는 한 남자를 나 혼자 독차지
하는 것을 질투한 여신이 훼방을 놓은 게 분명해요.”
“여신이 정말 우리를 시기했던 것일까?”
“맞아요. 틀림없어요. 우리의 사랑에 여신이 재를 뿌린 거예요.”
선주는 상당히 취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선주가 켄트 한 개비를 입에 물자 동수
가 얼른 라이터를 켰다.
“선주, 오늘 비록 하루 종일 그대와 함께 하였지만, 이제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
에 깊이 각인돼 있는 형상을 지워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에게 죄를 짓는
거야. 더 이상의 범죄를 지어서는 안 돼. 그건 우리 서로에게도 또 새로운 인생의
출발선상에 선 그대에게도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어. 당장은 어렵겠지만 지난 20년
이상 간직했던 모습을 영원히 지워야 해. 그리고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면 단지 오
랜 고향 친구가 돼야해.”
두 사람이 호텔 바에서 나왔을 때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동수는 대리 운전을 하
여 선주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동수가 선주를 호텔에 재우고 다음 날 돌려
보낼 수도 있었지만, 하룻밤의 정사(情事)로 지난 세월의 가슴 아픈 역사를 대신
할 수 없었고 순간의 정욕이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수가 비오는 날이면 회사근처 시장을 찾아 길 건너편에 있는 아라비안나이
트를 바라보면서 탄식을 하는 버릇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어느 날 동수가 시장을 우연히 찾았을 때 아라비안나이트가 있던 자리에는 서점
이 들어서 있었다.
- 끝 -
_()_ 그 동안 애독(愛讀)해 주신님에게 두 손 모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잠시 후에 다른 작품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경인년 한해도 건
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형통하소서.
2010.1.31. 오후 5시30분
인천 소래포구에서 여강 최재효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