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마지막회)
동행(마지막회)
- 여강 최재효
지훈은 김승호에게 이전에 자신에게 요구했던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며, 이후로는 아내 지연이를 만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지훈 역시
승호의 아내 순지를 만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작성하여 건넸다. 이틀내로
각자 보관하고 있는 자료를 교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자료에는 기록물과 사진원본, 비디오 원본 필름 등이었다. 만약
약속을 어기고 사본을 넘겨준다던가 혹은 사본을 별도로 만들어 보관할
경우 어떠한 제재도 감수하겠다는 각서도 교환하였다.
“자, 이제 우리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겁니다. 만약 약속이 이행
되지 않을 경우 목숨을 보장 할 수 없을 거요. 이것은 사나이끼리의 신사
협정이오. 나는 김 차장을 믿을 것이오. 그러니 김 차장도 나를 믿으시오.
우린 서로 이 땅에서 도망가려고 해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 아니오?”
제가 지연씨를 두 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승호는 간절한 시선으로 지훈에게 사정하였다.
“교수님, 잘 알겠습니다. 교수님과의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한번이면 한번이지 두 번은 또 뭡니까?”
“한번으로는 그간에 쌓인 미운 정 고운 정을 다 털어 버리기 힘들 것
같아서 그럽니다. 부탁입니다. 딱, 두 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저도 교수
님께서 제 아내를 딱 두 번만 만나는 것을 묵인하겠습니다.”
“좋소. 우리 피차 서로의 마누라를 정부(情婦)로 두고 있으니 정리할 시간
이 필요하겠지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만나는 횟수를 정하지 말고 이달
내로 모든 것을 정리하도록 합시다. 삼월 말이면 아직 보름도 더 남았소.”
“교수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 각골난망입니다.”
승호는 지훈에게 고개를 조아 렸다.
“자 우리 건배나 합시다. 우린 참으로 묘한 인연이오. 안 그렇소 김 차장? ”
“네, 맞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인연입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정리가 되었
으니 정말로 다행입니다. 비극적인 결말을 보지 않아 저나 교수님에게
큰 복인 것 같습니다.”
코 맛 볼 수 없는 큰 복을 말이야.” 지훈은 승호를 마치 부하다루 듯 하대를 하기도 하다가 존대를 쓰기도 하 였다. 승호는 어쩔 수 없이 지훈과 건배를 하였지만 술 맛이 쓰기만 했다.
“복이라? 맞아. 김 차장 말대로 우린 둘 다 복을 누렸지. 평범한 사람은 결
두 사내들의 신사협정은 한쪽의 일방적인 의사로 기울어 체결되다
시피 했다. 지훈의 길고 지루한 일장연설에도 승호는 부동자세로 듣고 있
기만 했다. 지훈의 설교를 듣는 중에도 승호는 지연이를 생각하고 있었
다. 보름 밖에 남지 않은 기간에 그 동안 쌓은 정을 깨끗하게 정리한 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 같았다. 승호는 지연이를 유혹할 때가 생각났다.
자기의 아내와 바람피우는 사내가 누구인지 궁금해 지훈을 뒷조사를
하다가 지연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고, 빼어난 미모의 지연이 카페를
운영한다는 사실에 고무된 승호였다.
승호를 재벌 2세쯤으로 알고 있는 지연에게 승호는 손쉽게 지연의 심신
(心身)을 훔칠 수 있었다. 물론 지연이 뿐만 아니라 재벌이란 말만 들어도
오금을 못 피는 신데렐라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여인이라면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승호는 지훈이가 자신의 아내에게 흠집을 냈다고 똑같이
상대의 여자에게 흔적을 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지연이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이며, 또한 아내 순지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
나다고 판단하였다. 무엇보다 카페를 운영하는 여인이라는 점이 승호
에게 큰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승호의 카페로 향하는 발길이 잦아 질수록 승호와 지연은 마음으로
가까워지면서 이내 육신으로도 가깝게 되었다. 물론 비단결처럼 유려
하면서 미끈한 지연이의 육신에 승호의 지문이 남기까지 승호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연이 아무리 열혈 여장부라고 하나 누구도 믿지
못할 세상에 함부로 자신의 고갱이를 내보일 여인은 아니었다.
승호의 끈끈한 시선과 달콤한 입김이 지연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
고, 지연이 역시 수많은 파락호들을 대하면서 승호가 자신에게 진실 된
언행을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여인은 남자가 아무리 잘나고 못나고
또는 돈이 많고 적은 것을 떠나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남자라면 호감을 갖게 마련이다. 물론 거기다
남자의 외모와 경제력이 부차적으로 따라 온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여인의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뇌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뛰어난 소질이
있는 승호에게 지연은 그저 언제든지 낚을 수 있는 물고기 였다. 승호는
지연이와 술잔을 부딪치는 횟수가 늘면서 지훈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되
었다.
따지고 보면 지연이 승호 앞에서 스스럼없이 옷을 벗을 수 있게 된 것도
지훈이 유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지훈이 오로지 아내 지연이 만을
아끼고 사랑했더라면 지금처럼 복잡한 상황은 전개되지 않았을 것이
었다.
한번 드나들기 시작한 쥐구멍은 너무나 쉬운 것이어서 승호는 지훈이
바다 건너로 출장가고 나면 아무 때나 지연이를 불러냈다. 지훈이 지연
이의 감성을 개발했다면 승호는 더욱 확장시키고 화려하게 발전시킨
주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지훈과 승호는 며칠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서로의 연인에게 어떻게 무슨 핑계를 대고 정리할 것인지 묘안을 찾고
있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훈은 지연이에게 일주일
정도 연구차 일본 자매결연 대학교를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승호 역시 아내 순지에게 지훈과 비슷한 기간에 일주일 정도 유럽 현지
에 다녀 올 예정이라고 했다. 순지는 지훈과 괌으로 여행가기로 계획하
였고, 승호 역시 지연이와 제주도로 골프를 빙자한 이별여행을 떠나기
로 마음먹었다.
“안돼요, 전, 전 지훈씨 없이는 세상 살기 싫어요. 나는 당신을 필요해요.”
“순지, 남편이 있잖아. 언제까지 우리가 남의 시선을 피하면서 만나야
해? 이젠 원 상태로 돌아가야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하는 한 서로에게 점점 무거운 짐이 될 뿐이라고.
이젠 정리를 해야 해.”
지훈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국의 바닷가를 걸으며 순지를 설득하고 있었
지만 순지는 완강하게 지훈의 의사를 거부하였다.
“남편은 나에게 마음이 떠난 지 이미 오래에요. 저 또한 그 남자에게서
멀어진 지 오래 되었고요. 내가 당신에게 버림받으면 난 죽을 거예요.”
순지는 모래밭에 우두커니 서서 흐느꼈다.
“수, 순지. 죽다니? 죽긴 왜 죽어 바보같이. 아직 살날이 창창한데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다니......”
“싫어요. 내 마음을 다 가져가고 빈껍데기가 된 나는 누굴 바라보고 살라
고요? 난 차라리 죽을 거예요.”
지훈이 순지의 마음을 예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 러나 순지의 남편 승호와 맺은 신사협정을 이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아내 지연을 되돌려 받기 위하여 할 수 없었다. 호텔로 돌아 온 지훈과 순지는 바 를 찾았다. 지훈의 이별 통보에 충격을 받은 순지는 정신없이 술을 마셔댔 다.
“순지......”
“자기야, 지금 뭐라고 했어? 이제 헤어지자고? 자기 아내하고 이혼하고
나하고 살고 싶다며? 그럼, 그 말이 다 거짓말이었어? 나 못들은 걸로 할
거야. 싫어, 난 자기 없으면 못살아. 정말이야 나 남자 없으면 못 사는 거
자기가 더 잘 알잖아.”
“지연아, 이제 우리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야. 언제까지 남몰래 밀애를
즐길 거야? 떳떳하지 못한 행동은 이제 재고해 봐야 돼.”
“싫어, 난 아직 아니야. 벌써 나에게 단물을 다 빨아 먹은 거야?”
호텔 객실에서 술과 안주를 주문하여 마시던 중 승호가 이별에 대한 운을
떼자 지연이 펄펄 뛰었다. 지연이의 기세가 너무 등등하여 승호는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지연아, 내말 깊이 생각해봐.”
“싫다고. 난 남편보다 자기가 더 좋단 말이야. 정말이야 자기야.”
“지연아.”
승호는 멀거니 앉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지연이의 얼굴만 바라 보았다. “자기야, 처음에는 나도 잘 몰랐는데, 집에 들어가면 아내의 공허한
“승호씨, 우리 술이나 마시자. 응? 골 아픈 이야기하지 말고.”
눈빛과 두 아이들의 나를 마치 이방인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괴롭고
면목이 없어. 아내하고 헤어지만 그만이지만 두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
내가 만든 자식들이니 내가 책임을 져야 하잖아. 물론 나도 자기하고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만나
밀회를 즐기고 싶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자기와 만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나의 휑하니 뚫린 가슴에 점점 더 차가운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는 것 같아. 자기에게도 두 아이가 있잖아.
이제까지 우리 둘은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두 아이
들의 반짝거리는 눈망울이 있었어. 그 두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거나 슬픔
이 새겨지게 되면 안 돼. 그리되면 우리는 큰 죄인이 되는 거야.”
승호는 위스키 잔을 비우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연은 승호가 아이들 이야기를 꺼내자 늘 말없이 학교만 다니는 큰 아이
성호가 생각났다. 지금 남편이 아닌 사내와 며칠간 제주도로 여행을 온
것도 부도덕한 일이지만,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까지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지연은 괜히 가슴이 답답해지면
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고 싶었다.
“승호씨, 나 술 좀 줘. 오늘은 실컷 마시고 취하고 싶어. 이제부터 나는
술만 마실 거야. 그러니 이별이니 헤어지자니 하는 듣기 싫은 이야기는
하지 마. 나 취하고 싶을 뿐이야. 알았지? 술 만 마실 거라고.”
승호가 위스키를 한잔 가득 부어 지연이에게 건넸다. 더 이상 이별 이야기 를 할 경우 자칫 지연이 자해를 하거나 어떤 불미스러운 일을 벌일지 모른 다는 우려가 일었다.
“그래, 알았어. 자, 한잔 받아.”
“자기야, 우리 건배하자. 제주도까지 와서 나에게 이별을 통보하려고
했으니, 거창하게 이별주를 마셔야 하잖아. 자, 우리 건배하자, 응?”
“그, 그래.”
지연이 승호와 잔을 부딪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승호는 소리 없이 눈물
을 흘리고 있는 지연이를 보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한 년이지. 우리 술이나 마셔요.” 지연이 승호의 잔에도 독한 위스키를 가득 따랐다.
“지연아, 미안해. 나를 용서해 줘. 내가 나쁜 놈이야. 나를 용서해줘.”
“아니야, 처음부터 소유할 수 없는 금단의 열매를 따려고 한 내가 부도덕
‘지금 쯤, 아내도 지연의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 눈물을 짜거나 이별주를
마시고 있을 테지. 기가 막힌 세상이야. 서로의 아내들을 바꿔서 이별주
를 마시며 서로 어긋난 인생을 되돌리려 애를 쓰고 있으니, 만약 조물주
가 우리들의 이 같은 사연을 알면 어떤 벌을 내릴까? 나에게 배은망덕하
고 파렴치한 놈이라고 불벼락을 내리겠지.’
“자기야, 우리 여기서 아예 눌러 살자. 응? 나 서울 올라가고 싶지 않아.”
지연이 승호 곁으로 다가와 승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바보, 자기 남편과 자기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두 아이들은 어쩌고?
우리가 여기서 눌러 산다고 행복해 질까? 처음 한 달 아니 일주일은 그런
대로 달콤하겠지만, 그 다음은 아이들과 주변 가족들 소식에 안달이 나서
못 살걸?”
“그래요. 한 이삼일만 지나도 아이들 소식이 궁금해 못 견딜 거예요.
나 역시 여자이고 엄마이니 내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라고 어디 마음대로 도망갈 수 있는 게
아니야.”
“승호씨, 나 슬퍼요. 나 좀 꼭 안아줘요.”
“......”
지연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승호의 단단한 완
력이 서서히 지연의 상체를 조여가면서 객실은 금방 뜨거워졌다.
헉-.
지훈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순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순지는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전신으로 잔잔하게 퍼지면서 약해져 가는 쾌
락의 여운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운이 하얗게 삭아 버리자
순지는 땀과 지훈이 토해낸 욕망으로 번질거리는 육신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숨을 쉴 때마다 알코올이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순지는 샤워를 하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음욕에 찌든 웬 낯선 여인이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충혈 되어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순지는 비눗물을 손바닥에 묻혀 거울을 문질렀다. 그래도 흐릿한 거울 속
에 욕망의 늪에 빠져있는 여인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순지는 머리를 감싸고 쥐어 뜯어보기도 하고
두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도 하였다.
‘아아, 어찌해야 하나? 이대로 저 남자하고 헤어져야 하나? 헤어지고 난
뒤에 난, 난 누구를 의지 해야 하나? 남편에게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죽기
보다 싫어. 차라리 이곳 괌에서 죽어버릴까? 그리 되면 두 가정은 파멸에
이르겠지. 그러나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담? 다 부모들이 잘못해서 그리 된
것을.’
순지는 아무리 물로 미끈한 육신을 닦아내도 자신의 혈관 속을 흐르는 욕망
을 씻어 낼 수 없었다. 지훈이 뿜어낸 분비물이 몸속에 남아있는 것 같아
수십 번씩 세척을 하여도 여전히 찝찝했다.
지훈과 승호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여행을 마치고 동시에 같은 날
입국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일주일이 흘렀다. 신사협정은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이경진은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열심히 일벌들을
만나 꿀을 따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복락을 만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지훈은 순지와 연락을 하지 않았고, 승호 역시 지연에게 연락하지 않았
다. 네 사람은 차분하게 지난 부적절한 시간들을 되새김질 하면서 자기
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다. 그렇게 봄날은 속절없이 흐르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지연이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저, 성훈이 어머님 되시죠? 저는 성훈이 담임선생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다름이 아니고요. 성훈이가 학교에 오지 않아서 혹시 어디
가 아픈가 하고 전화 드렸어요.”
같이 나갔는데요?” 큰 아이가 학교에 안 왔다는 전화에 지연이는 눈앞이 캄캄했다. 고등학교 올라간 지 한 달 밖에 안 된 아이였다.
“네에? 서, 성훈이가 학교에 안 갔다고요? 그럴 리가요? 아침에 아빠하고
‘성훈이가 학교를 안 가고 어디로 갔단 말이야? 다른 데 갈 아이가 아닌데?
이상하다. 어디를 갔단 말인가?’
지연이는 전화를 끊고 나서 넋 나간 사람처럼 한참동안 소파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성훈이에게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말도 없이
차분하고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는 착한 아들이었다.
공부가 다른 아이들에게 좀 밀리기는 해도 별 탈 없이 자라는 아들이었다.
지연이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아들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특별히
이상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다. 책상과 서랍 그리도 옷장도 제법 깨끗하
게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다.
‘이상하다. 그 애가 학교를 안 가면 어디를 갔단 말인가?’
지연이 아들에게 다시 한 번 휴대전화를 걸어보았다. 아들의 책상 위 책장
사이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하였다.
지연이는 아들의 친구들에게 전화나 문자를 발송하려고 아들의 책상을 뒤 져보았으나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메모나 수첩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 얘가 전화기를 안 가지고 갔네?”
‘어쩌지? 누구한테 연락을 해보나? 우선 애 아빠한테 전화를 해봐야겠어.’
지훈은 아내의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 일 년 내내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이 각각 이별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서로
에 대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지연은 승호와 제주도로
이별여행을 다녀온 사실을 지훈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이 어쩐 일이야? 전활 다하고.”
“성훈이가, 성훈이가 학교에 안 왔대요? 방금 학교 담임한테 전화 왔었
어요. 당신 아침에 성훈이하고 함께 당신차로 함께 가지 않았어요?”
“그랬지, 그런데 그 녀석이 학교에 안 갔으면 어딜 갔나?”
“그러니까 당신한테 전화를 한 거죠? 당신이 아는 데 까지 알아봐요.
저도 알아 볼 테니까요.”
“알았어요. 내 갈만한 곳을 알아 볼 테니 당신도 찾아봐요.”
지훈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엄마 아빠 속을 썩이지 않은 아들에게 설마 무
슨 일이 있을까 싶어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지연이는 불현듯 최근에 자주 매스컴에 오르는 학생들의 동반자살,
투신자살, 가출, 본드흡입, 집단혼숙, 절도 등 불미스러운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뿐더러 감히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였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냐, 안 돼. 우리 성훈이는 그럴 아이가 아냐.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
야.’
지연이는 언젠가 목격한 10대 아이들의 처참한 사고 장면이 떠오르
면서 심장이 고동쳤다. 정신이 아득해 지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지연은 하루 종일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지훈이 경찰서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경찰서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경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신호위반이나 혹은 교통범칙금을 미납
하여 경찰서에서 다녀가라고 하는 줄 알았다. 지금은 바빠서 다음에 간다
고 하자 경찰관의 목소리는 다급하였지만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
무조건 빨리 경찰서로 오라고만 하였다.
“성훈 학생 아버님 되시죠?”
“네에, 그런데요? 우리 성훈이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요?”
지훈이 약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강력사건 담당 형사에게 물었다.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습니다. 시신은 지금 미국 병원에 있습니다. 저희하고 지금 가셔서 확인 좀 해 주시죠. 이거 아드님 가방에서 나온 겁 니다. 한번 읽어 보시고요.” 지훈은 경찰관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라지 마십시오. 오늘 오후 세 시경 아드님이 이 근처에 있는 천국
“혀, 형사님,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제 아들 성훈이가 뭘 어쨌다고
요?”
형사가 지훈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지훈은 손을 벌벌 떨면서 간신히
A4용지에 적힌 아들의 유서를 읽어 내려갔다.
아빠, 엄마 보세요
인사도 없이 먼저 가는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세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
했던 때는 10년 전 아빠 엄마 손잡고 서울대공원에 놀러갔던 때 였던 것 같
아요. 이제는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주일에 단 한번
이라도 아빠, 엄마 그리고 성미와 함께 다정하게 밥을 먹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것도 역시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늘 일에
치여 사시면서도 두 분이 자주 다투시는 모습에 저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습니
다. 집에 가나 또 학교에 가서도 마음을 붙일 데가 없었어요. 공부도 하기 싫었
고요.
저승에 가면 싸움도 볼 수 없고 공부도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아빠, 엄마 이제는 싸우지 마세요. 성미가 불쌍해 죽겠어요. 아빠, 죄송해요.
엄마, 용서해 주세요. 성미야, 못난 오빠를 용서해 다오. 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
나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며 사회에서 원하는 동량이 되고 싶었
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저승에 가면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빠, 엄마 사랑해요. 안녕히…….
“안 돼, 성훈아, 안 돼. 이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어디 있는 거니?
성훈아, 성훈아......”
지훈은 경찰서가 떠나가도록 울부짖었다. 병원에 도착한 지훈과 소식을 듣
고 바람같이 달려온 지연이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는 순간 지연이는 실시하였
고 지훈이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아들 성훈이의 시신은 너무 처참하여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두개
골이 완전히 파손되어 얼굴만으로는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옷과 체형으로
두 사람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빠, 오빠 -, 안돼 오빠-.”
성미는 목이 메어 오빠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울부짖었다. 소식을 듣고 지
연의 친정 식구들과 지훈의 부모형제들이 병원으로 들이 닥쳤다. 곧 빈소가
차려지고 성훈이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우리, 우리 손자가 뭐가 어찌되었다고? 지훈아, 우리손자 어디 있니?
응? 이 할미가 우리 손자를 봐야겠어, 어서 나를 성훈이에게 데려다 줘.
어서. 어서 이놈아, 우리 예쁜 손자에게 나를 데려다 달란 말이여. 어서 -.”
성훈이 할머니는 대성통곡하자 성훈이 학교에서 온 같은 학교 학생들도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성훈아, 성훈아, 내가 잘못했다. 이 엄마가 잘못했어.”
지연이는 피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였다. 빈소에 모여든 사람
들은 지연이의 애끓는 울음소리에 그만 콧날이 시큰 거렸다.
지훈이도 밤새도록 흐느꼈다. 자신들의 욕망에 희생된 아들의 주검 앞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성훈아, 이 아빠를 용서해다오.”
지연이 역시 밤새 통곡하다가 새벽나절 혼절하여 그만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 슬픈 밤이 지나고 아침 일찍 지훈과 지연이의 아들은 벽제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아침, 아들의 주검을 싣고 화장장을 향하는 지연은
차에서 뛰어내려 차라리 자신이 아들을 대신하고 싶었다.
아들의 관이 화장로(火葬爐) 안으로 들어갈 때 지연이는 다시 한 번 실신
하고 말았다. 화장장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한 줌 가루로 돌아 온 아들을
끌어안고 지연은 통곡하였고 지훈은 가슴을 쳤다.
평소에 성훈이 할머니가 자주 다니던 사찰에 아들의 영가를 안치하고
돌아온 지훈과 지연이는 가슴이 허전하였다. 거의 인사불성이 된 지연이
급히 앰블런스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병원에서 사흘간 입원해 있던 지연이 안정을 취한 후 집으로 돌아오자
지훈이 말문을 닫아버린 아내 지연이를 데리고 서울의 한 고급 호텔에
투숙했다. 지훈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아내에게 푹 쉬면서 심기일전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안 가겠다고 하는 아내를 억지로 데리고 온
지훈은 독한 술을 주문하였다.
“여보, 미안하구려. 못난 나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오. 날 용서해주구려.
이 못난 남편을 용서해주구려.”
지연이는 흐느끼는 지훈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지연이는 지훈이 흐느끼는 모습이 너무 처량하다고 생각하였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 품에 묻혀 소리쳐 우는 것처럼 지훈은 지연이 품에서
통곡하였다. 그 모습은 자신의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진실로 회개하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당신은 잘못이 없어요. 내 몸속에 꿈틀대는 욕망
탓이에요. 저를 탓하세요.”
두 사람은 꼭 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여보, 이제 우리는 우리 아들의 뜻을 지켜야하오.”
한참 울고 난 지훈이 가슴에 응어리진 고통을 모두 털어낸 듯 기분이 한
결 호전되어 있었다.
“성훈아빠, 용서해 주세요.”
지연은 지훈을 꼭 안고 뜨거운 입맞춤을 하였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치고 나서 지훈과 지연은 신혼시절로 돌아갔다.
지연이는 카페를 타인에게 넘기고 집안에 들어 앉아 오로지 남편과 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뒤늦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새롭게 단장하며 아내의
길, 어머니의 길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였다.
한편 아내가 다른 남자와 수시로 잠을 잤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김승호는 순지에게 일정한 위자료를 주고 법정 이혼하였으며,
여전히 여왕벌이 되어 수많은 일벌들의 시중을 받으며 인생을 만끽하던
이경진은 자궁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다. 박철민은 여전히 하이에나
처럼 서울의 밤거리를 배회하며 식탐(食貪)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훈과 지연이 포근한 잠에서 깨어 일어나면 창가로 찬란한 햇빛이 뿌옇
게 들어왔고 밤이면 달빛과 별빛이 창가에 소복이 쌓였다. 지연은 제2의
신혼을 꿈꾸며 그간 꿈결처럼 지나간 수 많은 요지경(瑤池鏡) 들을 하나씩
지우며 울기도 했다가 웃기도 하였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