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0. 1. 15. 22:10

 

 

 

 

                     

 

 

                     

           

 

 

 

 

 

 

 

 

                  동행(4)

 

 

                                                                                                                                                                                    - 여강 최재효

 

 


 

 “교수님, 이제 지연이는 제 여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쯤에서 깨끗하게 이혼

하시고 미련을 버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면 이십억을 내 놓으시던 지요.

계속 고집을 부리신다면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요. 세상에 여자들이 어디

지연이 하나 밖에 없습니까? 교수님이 내 마누라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놨으니,

교수님 아내를 나에게 넘겨주시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교수님 정도면 아직

새파란 것들 얼마든지 꿰찰 수 있잖아요?”


 김승호는 지연의 남편 지훈과 주점에 마주 앉았다. 승호는 느물거리며 지훈을

압박하면서도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애썼다. 김승호의 뒤에는 험악하게 생긴

사내들이 지훈을 노려보며 김승호를 지원하고 있었다.

 

 지훈이 반항을 한다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면 즉각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굳이 그 청년들이 아니더라도 지훈은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 지훈의 운명은 김승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승호씨,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곧 결론을 내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결정을 못했다는 겁니까? 나도 더

이상 이런 생활이 지겹다고요. 다음 달 말까지 마지막으로 시간을 드리겠습

니다. 사회지도층 인사께서 이래도 되는 겁니까?

 

 만약 그때까지 답이 없으면 나는 먼저 말씀드린 대로 교수님의 비리를 기자

회견을 열어 모두 공개할 겁니다. 명심하세요. 다음 달 말까지 입니다.”

 김승호는 술잔을 입에도 대지 않고 함께 온 어깨들과 휑하니 나가 버렸다.


 “선배님, 그놈 아직도 정신을 덜 차린 것 같은데요? 손 좀 더 봐줄 걸 그랬나

봅니다?”

 김승호는 어깨들 세계에서 제법 한가락 한다는 고향 후배 두 명을 고용하여

지훈을 만날 때 대동하고 나타났다. 일종의 물리적 압박용이었다.


 “그놈도 이제 지쳐가고 있을 거야. 내버려 둬. 제 놈이 대한민국에서 가야

어디를 가겠어. 바보 같은 놈 바람을 피우려면 확실히 피울 것이지. 어설프게

피우다가 개망신을 당하다니......”

 김승호는 지훈이 아내인 지연이의 미끈한 육신을 그리며 피식 웃었다. 


 ‘마누라는 지금 바짝 긴장하고 있겠지. 나도 잘 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남편이

있고 두 아이를 둔 여자가 바람을 피우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승호는 차를 타고 가면서 얼마전 부터 아내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

고 뒷조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전업 주부인 김승호의 아내, 순지는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남자

에게 충분히 호감을 줄 수 있는 청순한 이미지의 귀여운 여인이었다. 순지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와 볼륨 있는 몸매가 늘 뭇 사내들의 시선을 끌

었다. 김승호는 순지와 함께 외출할 때 늘 순지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한번은 대형 마트에 갔을 때 어떤 중년 남자가 순지의 매혹적인 뒷태에

눈독을 들이고 따라다니자 김승호는 그 남자와 시비를 벌여 경찰서 까지 간적

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하자 김승호는 아내와 함께 외출하는 것을

꺼려했다. 전업 주부인 순지는 두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어 틀별히 엄마

의 손길이 필요없어지자 집에서 빈둥대며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공부는 학교와 학원이 알아서 책임져 주었고 순지는 아이들 간식이나 학원비

등 소소한 일만 제 때에 챙겨주면 되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여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순지는 차차 집에서 나와 외부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순지는 집에서 가까운 골프연습장을 나가면서 생활의 활력을 찾았고 하루

하루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골프 치는 시간은 집안

에만 있던 순지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골프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때로 술 한 잔 곁들이면서 즐거움을

만끽 할 때면 순지는 지금까지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만 바라보고 살아온 세월

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순지가 다니는 골프 연습장은 제법 규모가 크고 고급

스러워 상류층 사람들이 많이 드나 들었다.


 어느 날 순지는 친구들과 어울려 골프를 치고 주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반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원래 소주 한두 잔만 마셔도 얼굴이

발갛게 물드는 순지였다. 순지가 식사를 하는 바로 옆에 네 명의 남자들이

들어오더니 자리를 잡았다. 남자들은 여인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자기네끼리

뭐라고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 중에 한 남자가 순지에게 다가왔다.


 “저기, 골프 연습장에서 많이 뵈었죠?”
 “......”
 “아, 저희들도 지금 막 연습마치고 오는 중입니다. 속이 출출해서요.”


 남자차분하면서도 교양 있는 목소리로 순지에게 말을 걸었다. 외모로 봐서

학자나 교사처럼 보였지만 순지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를 아세요?”

 순지가 남자를 보고 수줍게 웃었다.
 “그럼요. 다른 분은 몰라도 댁은 늘 저와 같은 시간에 골프연습을 하기 때문

줄곧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머나? 저를 지켜보셨다고요?”

 

 순지는 남자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처음 보는 남자가 그 동안 자신을 은밀히

지켜보았다는 것은 불쾌한 일일 수도 있지만, 아직 소녀의 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여인에게는 가슴 설레는 말일 수도 있었다. 순지는 그 말 한마디에

구름 위에 붕 뜬 기분이었다.


 그리고 서너 잔 마신 소주가 마치 두병 정도 마신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날 순지는 묘한 감정에 사로 잡혀 옆에 있는 남자들의 이야기 소리를 엿듣

기도 하고 자주 그 남자와 시선을 주고 받기도 하였다. 순지와 남자가 시선이

마주치면 남자부드럽게 미소로 응답하였다.


  다음 날, 순지는 점심 때 보름 전에 한 선약이 있어 한 시간 일찍 골프연습

장에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어제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 남자도 혼자

나와 골프연습을 하고 있었다. 남자가 먼저 순지에게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

였다. 순지는 반갑기도 하고 겸연쩍어서 남자에게 목례만 하고 연습에 열중

였다. 10분 쯤 후에 남자가 순지에게 따뜻한 음료를 뽑아와 건넸다.


 “오늘은 어째 혼자 오셨어요? 늘 같이 오시던 친구 분들 어디 두시고요?”
 “아네. 오늘 점심 때 어디를 가야해서 저 혼자 왔어요.”
 “그러셨군요. 저도 오늘 선약이 있어서 미리 왔습니다. 오늘 사모님이 혼자

나오시는 줄 알았다면 점심 약속을 미루는 건데.”

 남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

 순지는 남자의 말을 얼른 알아듣고 얼굴을 붉혔다.
 “어제는 제가 실례 했습니다. 제 명함입니다.”


 남자가 주변을 살피며 얼른 명함을 순지에게 건넸다. 혹시 다른 사람이 보

면 여자에게 수작을 건다고 이상한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옆

에서 타구 연습에 몰두해 있던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순지는

지훈의 명함을 들여다보며 연신 지훈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어머나? 유명 대학 교수님이시네요? 영광이에요. 이렇게 훌륭한 교수

님을  알게 돼서요. 저는 순지라고 해요. 이순지. 그런데 어떻게 하죠? 전, 명

함이 없는데......”

 순지는 자신이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가정 주부란 사실에 괜히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닙니다. 순지씨, 이름만 알아도 영광입니다. 언제 여유가 있으시면

저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순지씨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어서 낯설지가 않아요.”

 지훈은 부드러운 미소를 순지에게 보내며 순지를 평안하게 해 주었다. 


 “어머나? 저를요? 어디서 저를 보셨을까요? 저는 그냥 평범한 부엌데기 아줌

인데요. 
 “아, 맞아요. 꿈 속에서 본 듯해요.”
 “네에?”

 

 순지와 지훈은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교환하면서 둘만의 새로운 세상을

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지훈은 순지를 시내 S호텔 고급 레스

토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순지는 몇 번 지훈의 식사대접 제의를 거절

하였으나, 세 번 이상 거절할 특별한 명분이 없었다.

 

 또한 지훈이 유명 대학 교수이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만약 흔해 빠진

사장 부류들이나 부동산업자 또는 파락호로 보이는 사내가 식사를 제의 해

다면 순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을 것이다.


 순지는 점신도 제대로 먹자 못하고 들 뜬 마음을 진정 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직 지훈과 저녁 식사 약속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소풍가는

초등학교 학생처럼 순지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지 못했다. 우선

미용실에 달려가 머리매만지고 예쁘게 화장해 달라고 특별히 주인 마담

에게 부탁했다.


 “어머나? 사모님, 오늘 아저씨랑 데이트 있으신가 봐요?”
 ‘뭐야? 왜 하필이면 아저씨야?’

 순지는 아저씨란 말에 남편 승호를 떠 올렸다. 자신의 배경을 이용해 출세가

도를 달려보려고 하였으나, 순지의 작은 아버지가 뜻이 있어 조기 퇴직하는 바람

에 닭 쫓던 강아지 지붕만 쳐다보는 신세가 된 남편이었다.

 

 그때부터 끊임없는 부부 갈등은 급기야 각방 쓰기로 이어졌고, 서로 소가

닭쳐다 보듯 하는 묘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순지와 승호가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되어버린 현실이 야속하기만 했다.


 자신을 발판 삼아 출세해보려 했던 남편의 의도를 안 뒤부터 순지는 승호

불신하기 시작하였고, 거의 매일 술에 절어 새벽에 귀가하는 남편에게서

여자의 냄새를 맡았다. 순지는 모르는 체 하고 넘어 가려고 하였지만 승호의

귀가는 변동이 없었다.

 

 남편의 속옷, 휴대전화, 신용카드 내역 등을 세밀히 조사하면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였다. 그러나 승호는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확실한 물증도 없이 함부로 덤벼들다가 오히려 자신이 의부증 환자로 몰릴

수도 있었다.


 남편을 하숙생이라고 생각하자 순지의 마음은 편했다. 하루 종일 빈집에

집 지키는 강아지처럼 홀로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였고, 점점 우울증

세로 변질 될 것 같아 시작한 것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또래 여인들과

골프연습장에 VIP회원으로 등록하여 골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중간에 남편 이외의 외간 남자로 부터 처음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은

순지는 자신을 여자로 봐주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행여 남자와 선연이 아닌 악연으로 이어져

인생이 자칫 수렁으로 빠질 수 있었기 대문이었다. 순지는 주변에서 유부남

유부녀가 은밀한 만남을 이어오다 두 사람 모두 불행해진 사례를 자주 보았

왔다.


 “여사님, 보세요. 어때요? 요즘 유행하는 디지털 펌이에요. 사모님은 머리

숯이 많고 길어서 어느 스타일을 해도 거의 다 무난히 소화하는 데 디지털

펌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화사하면서 아가씨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

요.  총각들이 사모님 보고 커피 한잔 하자고 졸졸 따라 다니겠어요.

 마담은 자신의 작품에 스스로 감동하여 침이 마르도록 순지를 칭찬하며 수다

를 떨었다. 집에 돌아온 순지는 대형 거울 앞에 서 보았다.


 “정말로 총각들이 나에게 커피 마시자고 따라올까? 역시 여자의 변신은

무죄야.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거지? 내가 십대 소녀도 아니고, 선보러

가는 아가씨도 아닌 데......”

 

 순지는 속옷까지 갈아입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흰색 브라와 팬티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뒤를 돌아보면서 순지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거의 S라인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몸매에 순지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음-, 아직도 처녀 시절 몸매가 남아있어. 아빠의 체형을 닮아서 그런지

우리 형제들은 모두 날씬한 편이지.’ 볼륨 있는 히프가 순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순지는 마트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졸졸 따라다니다 남편과

시비를 벌인 사내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순지는 거들로 힙에

탄력을 주고 하얀색 블라우스에 빨간색 투피스를 입었다. 아무리 보아도

지신이 요염한 파므파탈이 분명했다.


 “어이쿠, 영화배우가 나오신 줄 알았어요. 아니,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헵번이 환생 한 줄 알았습니다.”

 순지가 레스토랑에 모습을 보이자 지훈이 벌떡 일어나 순지를 맞았다. 지훈은

순지의 화사한 모습에 가슴이 두근 거렸다.


 “어머? 놀리시면 저 갈래요.”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정말이에요. 다른 남자들에게 물어 볼까요? 정말

공주님처럼 아름다우십니다. 오드리헵번이 울고 갈 정도입니다.”

 지훈의 달콤한 찬사는 계속 이어지자 순지는 금방 기분이 붕 뜨고 말았다.


 “아이, 교수님도 정말. 그럼 교수님은 그레고리 펙이네요?”

 순지는 지훈에게 눈을 하얗게 흘겼다.


 “그런가요? 역시 순지씨는 사람보는 눈이 있어요. 저도 여자 보는 눈은 있

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 한층 고조된 순지는 정말로 자신이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지훈의

세치 혀는 순지를 생에 최고의 날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순지의 남편 김승호는 처녀 때 사내에서 만난 커플이었지만 연애 기간도

짧았고, 특별히 승호가 잘났다기 보다 자신에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박력과

작은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결혼하게 되었지만, 막상 결혼을 하자

승호의 태도는 달라졌다. 마치 순지를 자신의 부속물 처럼 취급하는 남편의

처사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본래 성격이 그러려니 하고 승호의 성격에 맞춰

살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현모양처가 대부분 그러하듯 순지 역시 첫 아이를

임신하면서 자연스럽게 전업 주부가 되었고, 그 이후 둘째 아이가 중학

생이 되기까지 순지는 외로운 성(城) 지기였다. 외부와 철저히 담을 쌓고

집안 살림에만 전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속에 순지의 청춘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시댁, 친정, 집 그리고 어쩌다 한번 가는 두 아이들의 학교가 순지가 공식

적으로 다닐 수 있는 외부(外部) 였다. 김승호는 그런 아내에게 안도(安堵)

하였고, 아내를 완전히 자신만 아는 여자로 만들어 놓은 후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순지씨,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자, 한 잔 받으세요. 오늘은 저와 함께 20년 전 쯤으로 돌아가는 거 에요.

처녀 총각 시절로 말입니다. 남편, 아이들, 가정, 친정, 시댁식구 뭐 그런

시시콜콜한 일은 모두 잊고 우리 둘만 있는 거 에요. 아셨죠?"

 순지는 소주 서너 잔이 전부였다. 그것도 같은 아파트 단지 내 친구

들과 골프연습장을 다니면서 배운 술이었다.


 “교수님, 저 술 잘 못해요. 그러나 교수님 호의를 생각해서 오늘은 딱

두 잔만 마실게요. 두잔 이상 주시면 안돼요. 아셨죠?” 
 “이건 레드 와인이에요. 술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고.

식사 중에 마시는 와인이니 그리 독하지 않아요.”

 

 순지는 지훈과 와인 그라스를 부딪치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순지의 양 볼에

깊게 패인 보조개가 지훈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

그리고 달콤한 찬가는 금방 순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순지씨, 제가 자주는 아니지만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오늘처럼 이런 자리를

만들면 나오실 수 있죠?”
 “......” 


 "왜요?"

 "한달에 한번은 좀 ......"

 순지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갛게 익어갔다.


 “저는 순지씨를 처음 봤을 때, 순지씨가 전혀 낯설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상

하게 자꾸만 순지씨에게 끌리면서 골프 연습하러 가는 시간이 하루 일과 중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었답니다. 물론 지금 이렇게 순지씨와 마주앉아

와인 잔을 기울이는 이 순간은 천국에 온 기분이랍니다.”

 순지는 지훈의 말은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고 지훈이 팥으로 쑨 메주를 콩으로

쑨 거라고 하여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달에 한번이 아니라 저는 매일이라도 나오라고 하면 나 올 수 있답니다.’

순지는 목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한 달에 한번 교수님과 데이트는 정말로 꿀맛 같을 거예요. 물론 지금도 이

순간에도 저는 꿀맛을 보고 있는 걸요.”

 순지는 얼굴을 붉혔다. 


 “순지씨, 고마워요.”

 순지는 비록 한 달에 한 번의 데이트를 승낙하였지만 그것은 한 달에 꼭 한 번

의 만남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크게

어긋난 것은 아닐 것이다.


 순지와 지훈은 식사를 마치고 시쁜 마음이 들어 지하에 있는 바(Bar)로 내려

갔다. 조용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시설이 순지의 기분을 들뜨게 하였다. 결혼

하고 외간 남자와 처음 와보는 바였다. 무의식중에 순지는 지훈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지훈은 헤네시 한 병을 주문하였고 순지에게는 화이트레이디를 시켜 주었다.

블루스풍의 음악 달콤한 술, 달콤한 남자, 아늑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 순지는

이미 도를 넘고 있었다. 오감이 정상적인 궤도를 이탈하면서 오로지 도심의

밤에 두 사람만 존재하고 있은 것으로 착각하였다.


 “순지씨, 오늘 정말로 고마워요. 오늘 같이 기분 좋고 아름다운 밤은 사내의

가슴을 뛰게 하죠. 전 순지씨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지훈이 순지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네에? 교수님, 제가 마음에 들면 안 돼요. 전 유부녀에요.”

 "오늘은 우리 두 사람 처녀 총각이라니까요."

 "그래도......" 

 

 순지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느라 화이트 레이디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바텐더가 다시 같은 것으로 한잔을 만들어 순지 앞에 놓았다. 중년의 남자

바텐더는 홍조 띤 순지의 보조개가 예쁜 볼을 훔쳐보면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순지씨, 제가 오늘 순지씨에게 연애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청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남자로서 여자를 느끼는 감정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저 역시 유부남이에요. 집에 아내가 있고 두 아이들이 있어요.” 


 “교수님, 저는 도덕군자(道德君子)이신 교수님이 아무 이유 없이 좋았어요.

저는 처녀 때 교수 부인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영부인도 싫고, 사장 부인도

싫고, 판검사 부인도 다 싫어요. 오로지 대학 교수 부인이 가장 마음에 들었

어요. 이젠 지나간 꿈이 되어버렸지만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네에? 늦지않았다니요?”

 

 순지는 지훈의 알쏭달쏭한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순지는 점점

달콤한 술을 속으로 쏟아 부면서 지금 자신이 어디에 누구하고 있는지 그

리고 왜 와서 술을 마시고 있는지 생각하기도 싫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

다. 오로지 감각만이 순지를 지배하였다.


 “자, 우리 다시 건배해요.”

 칵테일을 마시면서도 순지는 지훈의 말뜻을 곰곰이 새겨 보았다. 그러나

점점 미궁에 빠질 뿐이었다. 알코올의 강점은 아무리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

람도 시간 혹은 이성을 무디게 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훈이 순지를 부축해 바에서 나와 어디론지 간 시간은 새벽 3시가 좀 넘

어서였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