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10. 1. 4. 17:06

 

 

 

 

 

 

                          

                           - 물에 잠기고 있는 누에섬과 탄도 사이 시멘트 길

               

 

 

 

 

 

 

 

       누에섬에 가다(3)

                                                                                        

                                                                                                                  - 여강 최재효

 

 


 “우리, 아까 누에섬에 들어 올 때 길 기억하시죠? 저기 봐봐요. 어렴풋하게 물

위로 도로 흔적이 나 있잖아요. 어서 바닷물이 더 들어오기 전에 나가야해요.”

 나는 혼이 나가 멍하니 앉아있는 K에게 바다 위를 가리켰다. 


 “어떻게 저 까마득한 탄도까지 바닷물 속을 걸어가요?”

 “그럼, 어떻게 해요? 방법이 없는 걸요.”


 “선생님, 안돼요. 잘못하다가 큰일 나요.”

 “나만 믿어요. 자, 어서 가요.”


 나는 카메라 가방 끈을 줄여서 가슴에 착 달라붙게 고정하고 K에게도 나처럼

하라고 했다. K는 나의 강권에 할 수 없이 나처럼 카메라 가방을 가슴에 바싹

매달았다.


 “자, 가요. 나를 따라오세요.”

 나는 앞장 서서 조심스럽게 바닷물에 잠긴 도로 위를 걷기 시작하였다. K는

주저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20여 미터를 가자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유

속(流速)도 강하여 자칫 잘못하여 발을 헛디딜 경우 급류에 휩쓸려 내려 갈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 너무 위험해요.”

 K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손 꼭 잡아요. 이까짓 물쯤이야......”

 나는 속으로 겁이 나면서도 입으로는 용감한 척 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정당하게 K의 옥수(玉手)를 잡아보는 행운을 안았다. 두려움에

떠는 K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잠시 강한 전류가 내 전신으로 퍼지

면서 묘한 감정에 정신이 몽롱했다. 생각 외로 K의 손은 보드라웠다. 나는 K의

손을 꼭 잡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50여 미터쯤 왔을 때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

다.

 

 “오늘 옷은 다 버린 거로 하세요. 중간 정도만 가면 괜찮을 거예요.”

 나는 겁에 질려 뒤따라오는 K를 안심시켰으나 K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다 되어

있었다.


 “선생님, 우리 돌아가요. 전 자신이 없어요. 저 까마득한 탄도까지 언제가요?

이러다가 정말로 큰일 나겠어요. 우리 다시 돌아가요. 네에?”


 ‘아, 안되겠는걸. 괜히 고집부리다 큰일 나겠어. 어쩌나? 남자가 금방 말을 바꿀

수도 없고......’

 내가 주저하자 K는 불안감에 휩싸여 부들부들 떨었다. 앞을 보아도 아득하고 뒤

를 돌아보아도 50여 미터가 까마득하게 보였다. 물이 들어오는 속도가 점점 세차

게 느껴졌다.

 

 “저기요. 우리 경찰을 불러요.”
 ‘경찰?’

 나는 경찰하면 알레르기 반응 같은 것이 있어서 경찰보다 119 소방대를 떠올

렸다. TV에서 위급한 상황을 신고 받고 달려오는 늠름한 119대원들의 그려졌

다.


 “경찰보다 119를 불러야지요.”

 “그래요. 선생님, 그럼, 우리 119를 불러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금같이 황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남자들이 여자 친구

를 꼬여 섬에 구경가서 마지막 배가 나오는 시간을 고의로 잊게 하여 소기의 목

적을 이루었다는 불량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았지만 지금의 경우는 그런 낭

만적인 이야기와 전혀 차원이 달랐다.

 

 서로 배우자가 있는 몸으로 상대의 이해 없이 하룻밤을 지새우고 집에 들어

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가. 순간 나는 여러 가지 예측 가능한 상황을

전개해 보았다. K의 말대로 가까운 119소방서에 전화를 걸어 누에섬에

두 사람이 갇혀 있다고 구조요청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신고 전화를 받고 과연 119소방대에서 보트를 띄워 누에섬까지

우리구조하러 올까? 아니야, 물이 빠질 때 까지 기다렸다가 나오라고 대답

할지도 몰라. 그리되면 우린 어떻게 하지?’


 “어서요. 신고하세요.”

 내가 멍청하게 서있자 K가 재촉하였다. 


 “아, 네 네. 우선 되돌아 나가요. 정말로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큰일 날 것

같네요.”


 나는 K의 손을 잡고 다시 되돌아 나갔다. 되돌아가는 길도 이미 물이 허벅지

위 까지 차서 매우 위험하였다. 내 키에 허벅지 위면 K에게는 이미 하체가

모두 염분에 노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슬쩍 K를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K의 청바지는 모두 물에 젖어 더욱 파랗게 보였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리 물때를 정확히 알아보지 못하고 안내한 것에 대하여 K는 

속으로 나를 원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안해요. 누에섬도 서해에 있다는 것을 망각했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인터넷

에서 물때를 알아보고 들어오는 건데......”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제가 오히려 더 미안한걸요? 제가 선생님을 가자고 유혹했으니 당연히 제가

누에섬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미리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해 미안해

요.”


 K는 오히려 자신의 불찰이라고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왔던 길을 천천

되돌아 나가면서 두 번째 대처 방안을 강구해보았다.

 

 ‘누에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 볼까? 그곳에는 사람이 24시간 거주하는

거 같은데. 아까 남자 직원 한 사람이 있었어. 그러나 우리 사정을 이해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게 해줄까? 아니야, 받아주지 않을지도 몰라. 뭍에 전화

하여 배를 부르거나,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면 괜히 바보 되는 거잖아.’


 “선생님, 어떻게 하죠?”

 누에섬으로 거의 다 되돌아 나왔을 때 K가 다시한번 나의

주의를 환기 시켰다.


 “글쎄요. 나도 뾰족한 대책이 안 서네요. 생각 좀 해보자고요.”

 K는 이제 안심이 되는지 몸을 떨지 않았다.


 ‘옳지, 낚시하는 사람들한테 혹시 보트가 있을지도 몰라. 그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는 거야. 그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수고비로 삼 사만원 정도 손에 쥐어

주면 될 거고. 그래, 그게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르지. 세상에 돈이면 안되는 게

없지.’

 나는 바지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만져 보았다.

 

 “선생님, 119에 전화 해봐요. 어서요.”
 “알았어요.”

 나는 점퍼 주머니를 뒤졌으나, 휴대전화는 없었다. 바지와 카메라 가방까지

뒤져보았으나 휴대전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선생님, 왜요?”

 “휴대폰을 차에 두고 왔나 봐요. 없네요.”


 나는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괜히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약 우리

가 처녀 총각이었더라면 나는 K에게 강한 의혹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몸이 성치 않은 나에게 그 같은 시선을 보낸다는 것은 K의 교

양문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제 전화를 쓰세요.”

  K가 나에게 앙증맞은 휴대전화기를 건넸다. K의 휴대전화기 빳데리 표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못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하늘 높이 날아오

르는 한 마리 독수리가 되고 있었다.

 

 한때 나는 일 년에 구두 서너 켤레도 모자랄 때가 있었다. 그때는 서울의 명동,

신촌, 영등포, 동대문, 종로, 충무로, 한남동, 이태원동 심지어 수원, 성남, 부천,

동인천 등지가 나의 주 활동 무대였다. 나는 수시로 둔갑술(遁甲術)을 써서 비둘

기로 혹은 참새로 때에 따라서는 매나 독수리로 화려하게 변신하곤 했었다.

 

 비둘기로 변신하여 상대 이성의 모성애를 충분히 자극한 다음 순식간에 송골

매나 독수리가 되어 소기의 목적을 쉽게 달성하였다. 아직도 그때의 화려한

내 청춘의 신화(神話)가 아련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몸도 시원찮은 상태에서 다시 독수리로 비상하다 폭풍우를 만나 낙상이라도

하는 날이면 아니함만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얼른 가슴속 깊이 묻혀있던

손톱과 발톱을 숨겼다.  

 

 “만약에 우리가 119에 신고할 경우 119대원들이 헬기나 보트를 타고 우리를

구조하러 올 거 아니에요? 우리를 탄도에 무사히 내려 주고 비용을 청구하면

어쩌죠? 헬기가 한번 뜰 경우 보통 수백만 원은 족히 될 거고, 보트를 띄워도

수십만 원은 달라고 할 텐데......”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나는 오늘 같은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어서 우리가 119에 구조를 요청할

경우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우리가 시내에서 집 열쇄

를 잃어버려 119에 신고하는 것과 지금의 경우는 너무나 차원이 다르기 때문

이었다. 

 

 “선생님, 119대원들은 가장 믿을 만한 분들이잖아요. 그리고 그분들은

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분들이고요. 또한 공무원들이잖아요. 국가의

녹을 먹는 분들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K의 커다란 눈이 바다에서 반사되는 희미한 빛을 받아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 눈빛이 너무 맑고 예뻐서 나는 그만 K의 눈망울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

은 엉뚱한 충동을 느꼈다.


 “전에 친구에게 들은 이야긴데요. 보통 장비가 움직이면 구조된 사람들의

인적 사항이나 기타 자세한 내용이 119에 기록으로 남는데요.”

 “기록으로요?”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들이 구조신고를 받고 우리를 구한 다음 그냥 돌아

가겠어요?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우리 두 사람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구조신고를 하게 되었는지.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상부에 보고할 텐데요.

 

 괜히 지방신문에 가십거리로 올라가면 정말로 곤란한 일이 벌어지겠죠?

요즘에는 별의별 신문이 다 있더라고요.”

 나는 K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능한 상황처럼 말해

주고 있었다.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제가 선생님과 누에섬에 일몰 장면을 촬영

하러 왔다가 이런 황당한 일로 119에 구조된 사실을 애 아빠가 알면 애 아빠는

나를 쥐 잡듯 닦달 거릴게 뻔해요. 점심 때 애 아빠에게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

생들 만나서 저녁 먹고 영화 한편 본 뒤에 집에 가겠다고 했거든요.

 

 보통 그 시간은 밤 11시 정도면 누구나 이해가 가는 시간이에요. 그러나 오늘 

처럼 이렇게 있다가는 새벽에 귀가해야 할 것 같네요. 애 아빠는 내가 여고를

졸업한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아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K는 119에 구조 요청하는 것을 체념한 듯 멍하니 불빛이 명멸하는 탄도 쪽을

응시하였다.

     
 기혼의 남녀가 예상치도 못한 일로 섬에 갇혀 있다가 구조되는 일도 찜찜한

일이거니와 하물며 신상에 대한 내용이 관청에 기록으로 남는 다는 것은 나나

K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은 밤 7시가 훨씬 넘은 상태였다. 배가

고파왔다. 나는 오후에 K를 만난다는 것이 마냥 즐거워 점심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충 토스트 한 개 구워 우유 한 컵으로 해결하고 지금까지 그 것을 에너지원

으로 활용하고 있으니 이미 동력공급원은 고갈되어 새로운 동력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뻔했다. 부정기적으로 내연기관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쓴물이 올라

오기도 하였다.

 

 “선생님, 그럼 우리 저 도로에 물이 빠질 때 까지 꼼짝없이 누에섬에 갇혀있어야

하는 거예요?”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오자 K는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청바지에 K

는 하체의 온기를 모두 빼앗긴 듯 했다.  


 “우선, 누에섬 어딘가 우리가 물이 빠질 때 까지 머물 장소가 있을 거예요.

찾아보도록 해요.”


 나는 덜덜 떨고 있는 K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옥수(玉手)에는 온기가 달

아나고 한기만 남아 있었다. 나의 온기가 K에게 서서히 전해졌다. 나의 커다란

손아귀에 앙증맞은 K의 손이 안겼다.

 

 바닷바람이 차차 세차게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대로 서있다가는 두 사람

모두 금방 얼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K의 손을 잡고 누에섬 전망대 쪽으로 올라

갔다. 입구는 이미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바다 낚시하러 온 사람들이 있는 텐트로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에섬 산책로를 따라 제부도 쪽으로 걷자 K가 물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시게요?”
 “우리 아까 사진 찍을 때 바다 낚시하는 사람들 보셨잖아요? 그 사람들한테

가면 혹시 라면이라도 얻어먹고 물에 젖은 바지라도 말릴 수 있을까 해서요.”

  “가지마세요.”

 K는 작은 손에 힘은 주어 손바닥에 거부 의사를 전해왔다. 처음으로 접하는

거부 반응이었다.

 

 “왜요?”
 “선생님, 우리가 아까 사진 찍으려고 텐트 앞을 지나갔었잖아요?”


 “그랬어요. 지나갔었지요.”
 “그때 저는 그 사람들이 저와 선생님을 쳐다보는 날카로운 시선에서 그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어요.”


 “보통사람이 아니라?”

 “그래요. 마치 무슨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사회 불만

세력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가지마세요.”

 K의 느낌은 나와 같았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비슷한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 같았어요.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안 갈게요.

그럼 어디로 가서 바람을 피하죠?”


 나는 누에섬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등대 전망대는 철문으로 굳게 잠긴 정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저히 갈 수 없었다. 하늘이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만약 비가 온다면 어디서 비를 피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우리 그럼,  이섬 얼굴 격인 탄도와 마주보고 있는 곳으로 가요. 아까 보니까

그곳에는 바람을 피할 곳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럼, 얼른 가요. 선생님, 저 추워죽겠어요.”

  K는 사시나무 떨 듯 했다. 내가 점퍼를 벗어주자 괜찮다고 한사코 거절하였다. 

몸이 성치 않은 환자의 점퍼를 빌려 입는 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듯 했다. 내

가 괜찮다고 하여도 K는 덜덜 떨면서도 막무가내였다.

 

 우리는 탄도가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서서히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마음이 급해졌다. 다행이 누에섬 정상 쪽으로 움푹 파진 곳이

보였다. 바닥은 하얀 조개껍데기로 뒤덮여있는데 마치 석기시대 패총 같았다.

굴은 깊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두 사람이 비바람을 피하는 데는 충분해 보였다.

 

 나는 얼른 K를 안쪽으로 앉게 하고 내 몸으로 바람을 막았다. 비는 뿌리지

않았지만 서해 용왕님이 노했는지 번개와 천둥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각자의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K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 알 수 없었으나 분명히 두 눈을

감고 합장한 채 무엇인가 속으로 속삭이는 것으로 보아 신의 힘을 빌려 이

악몽 같은 상황이 어서 끝나기를 기원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절대자를 찾았다. 지금의 이 상황이 어서 끝나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기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람은 더욱 세차게 휘몰아치면서

뇌성벽력도 점차 강해졌다. 높은 산 속의 경우 날씨가 급변하지만 바다 날씨도

변덕이 심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나의 불찰을 탓했다. K로부터 아래위

치아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용왕님이 노하신 게 틀림없어 보였다.

 

 “선생님, 추워요. 얼어 죽을 것 같아요.”

 

  K가 흐느꼈다.  온실 안에서 찬바람을 모르고 컸을 K에게는 보통 일이 아

닐 것이다. 나는 K에게 바싹 다가갔다. 그러나 바람만 막을 뿐 특별한 대책이

되지 못했다.


 '어찌하나? 이러다 K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혼절이라도 하는 날이면 정말

큰일인데......'


 “미안해요. 내가, 내가 욕심을 덜 부리고 빨리 누에섬에서 나갔어야 하는

데......”


나는 K를 내 품에 살며시 안아 주었다. K의 추위에 전율하는 상태가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나는 점퍼 앞 지퍼를 열고 K를 점퍼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꼭

안았다. K의 육감적인 젖가슴 볼륨이 잠자고 있던 나의 욕망을 자극하였다.

 

 숨이 점점 가빠왔다. 혀를 깨물고 간신히 뿌리부터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욕망을 제어하면서 이년전 스의스에 갔을 때 보았던 잔잔한 호수를 떠 올렸다.

그러나 한번 일기 시작한 욕망은 쉽게 통제되지 않았다. K의 머리칼에서 청포

냄새가 은은히 풍기면서 나는 몽롱한 상태가 되어갔다. 침묵속에서 20여분

정도 지나자 K는 안정을 찾은 듯 했다.

 

 “선생님,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이런 고생을 하시게 해서요.”
 “아닙니다. 제 탓인걸요. 미리 날씨와 물때를 알아보았더라면 이런 참담한

일은 없었을 텐데......”


 “저, 이렇게 선생님 품안에 안겨있어도 괜찮은 거죠?”

 K가 속삭였다.


 “그럼요. 나 역시 몹시 추웠지만 이렇게 있으니 좋은걸요. 훈기가 배가되는 것

같고요. 조물주는 역시 음양의 조화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안 그러

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겠죠? 내 추측으로는 물이 밤 열두시가 돼야 빠질 거예요.”


 “어머나, 그때 까지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하긴요? 그냥 이렇게 나의 넓고 아늑한 가슴에 안겨있으면 되는 거죠.’

내 입에서 금방 나오려고 하는 말을 억지로 참았다.


 “집에서 기다릴 텐데요?”
 “아니에요. 친구들하고 영화보고 간다고 했으니까 밤 열두시가 넘어도 될 거

에요. 친구들 만나는 날은 늘 그랬으니까요.”

 내 품안에서 K는 귀엽게 속삭였다.


 “다행이네요.”
 “선생님이야말로 어떻게 해요? 가족 분들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가족? 그렇지 나에게 하루 25시도 모자라는 무덤덤한 마누라가 있지. 아이들도

있고. 그러나 내가 아침에 집에 들어간다고 하여도 누가 신경이나 쓸까?’

 

 “아, 상관없어요. 지방에 잘 아는 문인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문상을

가게 되었는데 새벽 늦게 도착할거라고 전화하면 되죠.” 


 “남자들은 좋겠어요. 그런 핑계도 쉽게 둘러댈 수 있으니.”
 “집에서 믿어주겠어요? 그냥 믿어주는 척 하는 거겠지요.”


 “어머나? 선생님같이 고결하신 분을......”
 ‘고결? 그래,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고 단아하며 마치 신선처럼 살지. 곤륜산

요지경에 사는 신선처럼......’
 “너무 고결해서 탈이지요.”


 “선생님, 이상해요. 선생님 품은 용광로 같아요.”

 희미한 빛에서도 K의 붉게 물든 뺨이 보였다.


 “그, 그래요? 미안해요. 너무 세게 발전기를 돌렸나봐요."
 “선생님, 뭐가 미안하시다고요?”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 역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 사실이 들통 난 것처럼 금방 얼굴이 빨개졌다.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바람에 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비가 내리는 것 같았

다. 나는 속이 허한 것도 잊고 K를 점퍼 안에 감싸고 다시

양팔에 힘을 주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