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공간/단편 - 황새울

황새울(최종회)

여강 최재효 2009. 7. 15. 22:57

 

 

 

 

 

 

                      

 

 

 

 

 

 

 

 

 

       황새울(최종회)

 

                                                                                                                                                  - 여강 최재효

 

                                 

 

 

 “아, 어쩌나 버스를 놓쳤으니. 잘못하면 지각하겠는데......”

 보통 주막거리에서 아침 7시20분 버스를 타고 읍내로 통학하던 미선이는

하필이면 기말고사 보는 첫날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한 시간 뒤에 오는 버스를

탄다면 지각하는 것은 물론 교무실에 불려가 담임선생님에게 혼날 것을 생각하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때 마침 아침 안개를 뚫고 동신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릴 때부터 스스럼없이

지내던 동신이가 틀림없었다. 비록 미선이 생일이 빨라 학교에 일 년 일찍 들어갔지만

둘은 학년의 차이에 상관없이 오누이처럼 지내고 있었다. 미선이는 급한 김에 동신이

자전거를 얻어 타고 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동신아, 나 좀 태워줘.”

 예전에는 동신이가 태워 준다고 하여도 마다하던 미선이 스스로 자전거에 태워달라고

하니 동신이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버스를 놓친 모양이구나.”

 

 “응. 오늘부터 기말고사 보는데 그만 버스를 놓쳐 지각하게 생겼어.”

 “나는 오늘 당번이라 학교에 빨리 가는 거야. 빨리타. 내가 너희 학교까지 데려다줄게.”

 읍내까지 가는 신작로는 최근에 아스팔트를 깔아 자전거 타고 다니기가 예전보다 힘이

들지 않아 좋았으나 대신 차들이 고속으로 질주하는 바람에 무척 위험하였다.


 모둘기 고개를 넘어 아침 안개를 가르며 자전거는 미끄러지듯 달렸다. 초여름이라



길가 양 옆 논밭에는 아침 일찍 나온 농부들이 뙤약볕이 내리 쬐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밭을 매거나 논에 비료를 주는 등 부산했다. 자전거 뒤에 탄

채 미선이는 단발 머리칼을 날리며 동신이의 든든한 등을 바라보았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하여도 그냥 이웃집 남자 친구 정도로 생각하던 동신이가 이제는

어엿한 사내 티를 내고 있었다. 다른 남학생과 달리 키가 크고 외모 역시 뛰어나

또래의 동네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미선아, 대학 예비고사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 거야? 요즘 한창 모의고사도

보겠네. 예비고사 200점 정도면 본고사에서 삼 사십점 정도는 더 받을 수 있대. 모의고사

점수는 괜찬은거야?”

 “응, 그런대로.”

 

 “너는 공부 잘하니까. 충분히 일류대는 아니더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야.”

 “......”

 

 “나는 어려서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었어. 아폴로 11호 타고 달나라에 다녀온 

암스트롱이나 올드린처럼 내 발자국을 달 표면에 찍고 싶었어. 그러면 집에서도

달이 뜨는 날이면 망원경으로 달 표면에 찍힌 내 발자국을 볼 수 있잖아. 그런데

수학에 자신이 없어 문과(文科)를 가는 바람에 과학자가 되는 꿈을 버렸어.

 

 대신에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싶어. 나는 요즘에 매일같이 이백이나 두보의 시를

끼고 살어. 천사 백년 전에 살던 시성(詩聖)과 시선(詩仙)을 만나는 일은 나에게 있어

큰 즐거움이야. 그리고 셱스피어, 워즈워드, 바이런, 괴테, 릴케 같은 시인들은 이제

나의 친구야. 시간만 나면 셱스피어의 비극 소설을 읽고 있어. 암튼 너는 올해

꼭 대학에 들어가야해. 내 후년에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가면 너하고 만나서 낭만을

만끽하고 싶다고.”

 

 “호호호호......”

 “왜 웃니?”

 “얘, 서울 가면 너 말고도 얼마든지 남학생들이 많을 텐데......”

 “어어. 너 나를 무시하는 거야? 내가 어때서?”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늘 보아오던 남자를 서울 가서 또 본다는 것이

좀 어색할 것 같아서 그래.”

 

 “미선아, 우리 서울서 만나면 연애할까?”

 “어머머. 너 지금 연애라고 했니? 나에게 연애하자고 한 거야?”

 “왜, 이웃집 총각과 처녀가 연애하면 안 돼? 미성년자도 아니고 다큰 어른인데. 지금

하자는 게 아니고 내후년에 나 대학 들어가고 난 뒤에 말이야. 하하하하......”

 “너 나에게 엉큼한 생각 품고 있는 거 아니니? 그렇다면 난 다시는 너 안 볼 거야.”

 

 “남자가 예쁜 여자 보면 엉큼한 생각 품는 것은 당연한 거야. 오히려 예쁜 여자를

보고도 엉큼한 생각을 품지 못하는 남자가 이상한 거라고. 그 남자의 눈이 사팔뜨기

거나 아니면 목석(木石)이 분명할 거라고.”

 “어머, 점점 못하는 소리가 없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에 갈 생각은

안 하고 연애할 생각만 하다니?”

 

 “어릴 때 우리 신랑 각시놀이 많이 했지? 그 놀이가 2년 후에 진짜로 신랑 각시놀이로

연결되었으면 좋겠는데......”

 “얘, 시시한 이야기 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나 지각하면 담임선생님한테 벌

받는다고. 그러니 어서 힘차게 페달이나 밟아. 연애 타령은 나중에 하고.”

 

 “나중에 언제?”

 “......”

 “미선아, 너도 나 싫은 마음은 없는 거지? 난 네가 참으로 마음에 들어. 올해 꼭

대학에 들어가. 나도 곧 뒤 따라 갈 테니까.”

 

 두 사람이 탄 자전거는 금방 읍내에 도착하였고 자전거에서 내려달라는 미선이의

요청을 무시하고 동신이는 미선이 학교 정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통학 길에 같은 반

학생들이 지나가면 미선이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가 참으로 좋았어요.”

 “미선씨, 25년 전 그때가 나에게도 인생의 황금기였던 거 같아요.”

 “황금기라니요? 부인과 아기자기 알콩달콩 사는 지금이 동신씨 인생에 있어 황금기

아닌가요?”

 

 “맞아요. 황금기죠. 밤마다 고소한 깨를 볶아대니까요?” 

 내가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하자 인선이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나의 진심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동신씨.”

 “왜요?”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무슨 고민 있어요?”

 “......”

 “미선씨 남편은 뭐하는 분이에요. 그리고 아이들은 몇이나 두었어요?”

 “......”

 “왜요?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동신씨, 내일이 주말이죠?”

 “왜요? 내일 어디 가시게요?”

 “나 동신씨에게 빚진 거 오늘 밤에 갚고 싶거든요.”

 “빚? 빚이라뇨? 내가 언제 미선씨에게 돈 빌려 준적 있었나요?”

 

 “바보......”

 ‘아니, 이 여자가 시방 뭔소리를 하는 거여? 남편이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나보고 바보라니? 이건 또 무슨 버전이란 말인가?’

 “미선씨 너무 늦어서 어떻게 해요? 벌써 새벽인데......”

 “빚을 갚고 싶어요. 당신한테 진, 해 묶은 빚을......”

 

 ‘아니, 이 여자가 자꾸만 무슨 빚을 갚는다고 이러는 거야? 미치겠네. 그리고

갑자기 나보고 당신이라니? 부부 사이에 부르는 호칭을 왜 나에게 사용하지? 아아,

머리 아파.’

 “험-, 험. 미선씨가 나에게 진 빚이 뭔지 모르지만 그냥 술로 갚아요. 난 지금

돈보다 술이 더 좋으니까요.”

 

 “바보. 당신은 정말로 바보에요.”

 ‘이 여자가 정말 왜 자꾸 바보라는 거야?’

 “내 잔 비었어요. 난, 난 가슴이 뻥 뚫린 여자에요. 내 뱃속을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없을 거예요. 아니지, 오늘밤에 마신 건 술 뿐이니 술이 가득 차 있겠네요. 호호호호......”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네. 도대체 갑자기 나에게 치근덕대는 이유가 뭘까? 내가

먼저 술에 떨어질까 봐 겁을 냈는데, 미선이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면 곤란한데......’

 

  “미선씨, 우리 술 그만 마시고 일어나요. 너무 늦은 거 같아요. 집에서 기다리는

아저씨랑 아이들 생각해서 이제 들어가 봐야 하잖아요.”

 “집? 나보고 집에 가라고?”

 

 “너무 늦었어요.”

 “서울 천지가 내 집인데 나보고 집엘 가라니요?”

 ‘아니, 이 애가 정말로 취했나?’

 “우린 이야기도 다 못했는데 일어나면 어떻게 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미선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왜 새벽이 되어도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던힐 두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 한대씩 나누어 피웠다. 그녀의

촉촉이 젖은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눈물로 변했다. 그녀는 나에게 남편 K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야간 대학교 다니면 주경야독 하던 시절에 남편을 사내(社內)에서 만났다. 미선이

회사 들어 올 때부터  K는 미선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객지에서 직장에 다니던

미선이에게 K는 오빠 같으면서 친구 같은 남자였다. 아무도 모르게 미선이는 K와

연애를 하였고 미선이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둘은 한 집안 사람이 되었다.

 

 미선이 결혼한 그해 가을 미선이 어머니는 이승을 떠났고 얼마 안 있어 오빠마저

세상을 버렸다. 할 수 없이 동생들을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뒷바라지를 하였다.

남편은 미선이 동생들에게도 친 형님처럼 대해주어 미선이는 늘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누나와 매형덕분에 동생들은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남편은 회사 내 노동조합운동을 이끌면서 회사 간부진들과 갈등이 시작되었고

그 여파는 미선이에게 영향을 미쳤다. 결국 남편은 미선이와 회사간부로 있는 고향

선배의 권고로 회사를 그만 두고 회사 근처에 조그만 인쇄소를 차렸다. 처음에는

고전하였으나 그 동안에 회사에서 배운 기술을 십분 발휘하면서 인쇄소는 나날이

발전하였다.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당한 옛 동료들을 불러 모으면서 인쇄소는 평탄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무슨 힘의 작용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IMF가 오면서

남편의 인쇄소는 부도를 맞았고, 파산 후 남편은 어마어마한 빚을 감당하지 못해

채권추심자들의 사주를 받은 해결사들의 추적을 받게 되면서 미선이는 남편의

채무로 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남편과 합의 이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숨어 살면서 수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가보니 어느 행려자의 유품을 보여주며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남편은 서울

전국의 역전을 전전하면서 지내다가 병을 얻어 죽고 말았는데, 경찰이 보여준

사망 당시의 사진을 보고 인선이는 충격을 받았다.

 

 알콜 독(毒)에 그을린 시커먼 얼굴과 장작개비 처럼 마른 몸뚱이는 도망자의 말로를

보여주기 충분했다. 남편이 죽고 하나 있는 아들은 군대에 입대하였다. 지금은 이촌

동에서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동생네가 주말이면 놀러와 미선

이의 외로움을 달래주었으나 원초적 고독은 누구도 달래주지 못했다.

 

 “동신씨, 저기 강 건너가 우리 집이에요. 나는 저 강가에 공룡처럼 서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그냥 뛰어 내리고 싶어요. 그 옛날

낙화암에서 삼천 궁녀들이 뛰어 내린 것처럼 나도 뛰어내리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그럼, 아까 미선씨하고 함께 왔던 남자들은 누구에요?”

 

 “직장동료들이에요. 저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법률회사에 다녀요. 10년도 넘었

어요. 강남에 있는데 상당히 규모가 커요. 변호사도 20여명이 넘어요. 로펌인데 꽤

잘나가요. 혹시 동신씨도 소송관련 일이 있으면 나에게 오세요. 잘 해드릴게요.”

 

 다행히 비가 그쳤다. 나는 미선이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처음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갔다. 팔짱을 끼고 나가면서 나는 아내에게 문자를 띄웠다. 갑자기 부산

으로 출장을 오게 되었다고. 내일 오전에  KTX편으로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자주 있던 일이라 아내는 틀림없이 그리 알고 있을 것이며, 나는 내일이 주말

이라 오후에 느긋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면 되었다.

 

 도로 위로 나왔을 때 마침 택시가 우리 앞에 섰다. 나는 반사적으로 미선이를 택시

뒷좌석으로 안내하였고 우리는 택시 안에서도 팔짱을 풀지 않았다. 미선이는 나에게

'자기'라는 새로운 호칭을 붙였고, 나도 역시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택시 기사는

묘한 시선으로 빽미러를 통해 우리를 훔쳐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미선이는 차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를 가리켰다. 택시는 곧

남산에서 제일 전망이 좋고 크고 화려한 집 앞에 섰다. 빨간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어서 오라며 우리를 화려한 건물 안으로 안내하였다.

 

 “오늘 황새울에서 자기에게 진 해묵은 빚을 밤새도록 갚을 수 있어서 기뻐요.”

 나는 그녀를 부축하여 회전문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미선이 말하는 빚을 곰곰이 생각

하였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