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1)
쩐
- 여강 최재효
1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비하되거나 구차해 보이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반 된 상황에서는 감히 입에 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아무리 고매한 인품의 선남선녀라 할지라도 사흘 굶으면 도둑질
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 앞에 철학이 어떻고 예술이 저렇다고 말하는 자체가 우습게
보일 수도 있으리라.
1차 산업이 소득원의 주류를 이루던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감히
암탉이 새벽을 알리거나 홰를 치는 일은 금기시 되거나 최소한 돌
팔매질에 의한 극형을 받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세태의 변동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즈음에는 남의 나라 이야기에 속하고
있다.
K는 밤새 이웃들과 어울려 술타령을 하다가 아침 첫차를 타기 위
해 몰려드는 승객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곤 했다. 3년차
에 접어드는 부랑인(浮浪人) 생활에 어느 정도 이골이 그는 한때
잘 나가는 시절이 있었다. K는 좋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부
랑인들과 소주잔을 나누는 것이 이제 밤의 일과가 되어 버렸다.
처음 1년은 전혀 색다른 생활에 적응하기 몹시 힘들어 옆 사람과
잠자리를 두고 자주 타투기도 하였다. 3년차에 접어들자 역사(驛舍)
를 관리하는 사람들과도 안면이 트면서 눈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
가 되었다.
밤마다 벌어지는 술타령에도 어느 정도의 질서가 필요했다. 역
사를 돌아다니며, 어질러 놓거나 아무 곳에 서의 방뇨(放尿)나 방분
(放糞)은 역에서 기생(寄生)하는 동료 전체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런대로 역사 밖에서 잠을 잘 수
있지만 찬바람이 뼛속을 파고들기 시작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역사를 관리하는 사람들 심기를 건드릴 필
요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터였다. 덩치도 있고, 다른
행려자 보다 젊어 보이고 완력 또한 강해 보이는 K는 자의반 타의
반에 의해 질서 반장이 되어 역사를 관리하는 사람들과도 말이 통
하는 사이였다. 그는 성정이 대체로 거늑한 편이었고 어떤 경우에
는 강파르게 변하기도 하였다.
역사를 관리하는 직원들 지하도를 잠시 정비할 경우 그들은 K에
게 부탁하곤 하였다. K는 역사를 주 무대로 살아가는 백여 명의 동
료 행려자들에게 하룻밤쯤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이기도 했다.
“K반장님, 이리 오세요.”
초저녁부터 K와 뜻이 잘 맞는 김씨가 썰렁한 역사 한구석에 신
문지를 깔고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씨, 박씨, 차씨, 허씨 등,
가출한 지 2년 이상 된 자들끼리 모여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논하
며 침을 튀기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돈에 속고 돈 때
문에 보통사람들에게 지탄받으며, 돈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
이었다.
불과 몇년전 지금 쯤 성탄절 분위기에 젖어 회사 동료들과
회사 주변 대폿집에서 삼겹살을 구워가며, 오늘 회사에서 있
었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하거나 세상 이야기로 한창 소주잔
을 들때 였다.
구수하게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잘하는 차씨가 오늘은 웬일
인지 시무룩하게 앉아서 동료들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그는
한때 잘 나가던 중소 건설업체 사장님이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살거리가 투실한 그의 말로는 자신이 사십대 중반쯤 되었다고
하지만 머리가 귀와 뒷부분만 남겨두고 대머리인 것으로 보아
50대 중반은 훨씬 넘어 보였다.
술자리가 만련 되면 걸쭉한 입담으로 그는 노숙인들의 대변
자라도 되는 양 정부의 복지정책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어느 여
가수와 개그맨이 열애에 빠진 내용까지 그럴듯한 기사거리를
인용해가며, 동료 행려자들에게 웃음을 주는 감초 같은 존재였
다. K는 차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차씨 곁으로 다가
갔다.
“차씨, 어디 아프우?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아픈데
있으면 말 해봐요. 노숙인 생활도 몸이 단단해야 하는 거지. 빌빌
거리면 이 짓도 못한다고.”
K는 마치 차씨의 맏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씨의 등을 다독거
렸다. 오후부터 흩날리기 시작한 눈이 주먹만 한 함박눈으로 바
뀌면서 도심의 거리는 차차 은색의 세상으로 변하였고 성탄절
분위기에 휩쓸려 행인들도 달뜬 분위기 였다.
전철 승객들은 종종 걸음으로 역사 이리저리 뛰면서 귀가를 서
두르는 모습이었다. 명목상 반장인 K는 가족처럼 돌보고 있는
동료들이 걱정되었다. 근처에 시에서 마련한 행려자를 위한 시
설이 있었지만 동료들은 그 곳이 불편하다면 들어가면 곧 바로
뛰쳐나왔다. 시설에 들어가면 습관처럼 되어 버린 음주(飮酒)
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러명의 노숙자들이 알코올 중독 수
준 상태였다.
“아뇨, 그냥 세상 살기 싫어져서요.”
K가 관심을 보이자 그제야 차씨는 앞에 있던 소주잔을 반쯤 비우
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따, 차씨만 세상 살기 싫은 줄 아슈? 이 역사에 기생하는 사
람치고 살고 싶어 사는 목숨들이 어디 있우? 목숨이 붙어있으니
할 수 없이 숨 쉬고 있는 거지.”
술자리를 마련한 김씨가 음전하게 앉아있다가 차씨의 말을 듣
고 심사가 뒤틀린 듯 쏘아 붙였다. K가 차씨에게 자꾸 무슨 일이
있느냐고 채근하자 차씨는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이 내 생일이오. K반장님과 형씨들에게 가슴 속 응어리진
이야기를 해야 잠이 올 것 같소.”
차씨는 남아있던 소주를 마주 비웠다. 그는 차가운 소주가 마시고
나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징어를 찢어 입에 넣고 씹어대는 그의
모습이 세상에 화풀이라도 하고 싶은 심리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오늘 낮에 그 연놈들을 보았소. 서울서 일을 보고 내려가려고
기차를 타러 온 모양입디다. 쫓아가서 그년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차씨는 눈의 초점을 잃고 멍하니 천정을 응시하였다.
그는 P시 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사장이었다. P시에서 발주
하는 상하수도 관련 공사를 도맡다 시피 하였다. 공사를 수주하고
외부 인사를 대접하는 일은 전무가 맡았다. 전무는 P시 출신 전직
공무원인 관계로 P시에서의 차사장의 건설회사의 사세(社勢)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건설회사를 차리고 얼마 안 돼 늘 고생만
하던